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3 - 기괴환상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용서해주오. 용서해줘. 난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워. 살려둘 수 없을 만치 사랑하는 거야."

(<벌레> 중에서)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보통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은 보통 기괴(奇怪)나 음울(陰鬱)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기이하고, 괴상하고, 음침하며, 우울하죠. 물론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이 본격 추리소설과 변격소설(환상, 괴이)로 나뉘기는 하지만(굳이 나누자면), 사실 본격 추리소설도 대부분 기괴하고 음울했던 것 같아요. 물론 위의 표현은 조금 고급스럽다면 고급스러워서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사이코나 변태의 기운이 느껴지는 소설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사실 누구나 다 변태이고, 사이코이지 않을까요. 겉으로 표현만 하지 않을 뿐, 누구나 다 마음속에는 음침하고 기이하며 미친 생각을 품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마음속으로 몇 십 년을 사랑하는 여자는 자신을 무시합니다. 친구 녀석은 그런 그녀와 자랑스럽게 희희덕거리며 즐깁니다. 그녀의 유혹에 순간 넘어가고 무시를 당합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일부러 그런 "척"을 했던 거죠. 놀리기 위해서 말이죠. 수치심과 굴욕감. 그래서 "허허"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그녀를 영원히 소유하고 싶은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생체가 아닌 사체로라도 말이죠. 결코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실에서 실행으로 옮기면 문제가 있겠지만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에도가와 란포는 인간의 마음속에 깊숙이 숨어 있는 변태적인 감성을 교묘하게 건드리고, 끄집어내는 것 같아요. 외면할수록 더욱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지는 듯한 느낌. '나는 아니야', '절대 아니야'라고 부인하고 싶지만, 미친놈처럼 낄낄 거리고 있습니다. 아니 즐기고 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은 이미 동서문화사에서 <음울한 짐승>과 <외딴섬 악마>가 출간되었죠(저작권 계약 없이 말이죠). 이번에 출간된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3: 기괴환상>은 <음울한 짐승>에 포함된 '인간의자', '빨강 방(붉은 방)', '거울지옥', '배추벌레(두드림에서는 '고구마벌레'라는 제목으로 표기)' 4편의 단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4편 모두 에도가와 란포의 대표작이죠. 그만큼 재미있는 작품이고요. 그렇다면 이번 작품에 실린 나머지 작품들은?(참고로 22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확실히 (앞서 언급한) 대표작을 뛰어넘는 작품은 조금 부족합니다. 그러나 의외의 발견인 작품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그의 대표작 말고 다른 작품들도 꼭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작품들도 있거든요. 반면 아쉬운 작품들도 있고요. 몇 작품만 간략하게 소개할게요. 정말 기발하고 독특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공기사나이>와 <악령>이라는 작품은 미완성작입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아쉽습니다. <붉은 방>이나 <악령>과도 조금 통하는 면이 있는데, 바로 사는 게 지겨운 인간들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돈 많은 인간들은 사는 게 심심하죠. <공기사나이>는 그런 돈 많은 두 인간이 지겹지 않은 일들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내용인데, 추리소설 평론가나 독자들에 대한 비판도 살짝 엿보입니다. 이름을 서로 바꾸어서 작품을 발표하고, 아이디어도 서로 공유를 하거든요(그러니 독자나 평론가는 괜한 삽질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런 돈 많은 두 젊은이의 일탈을 그린 소설인 줄 알았는데, 글쎄 친구 한 명이 건망증인 것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건망증에 걸린 또 다른 친구의 집에 유령이 나타납니다. 죽은 아내의 유령(아내 죽음의 원인은 남편의 외도입니다. 그러니 유령이라는 존재가 그에게는 끔찍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진짜 유령일까요?). 암튼 이야기가 재밌어지려는 찰나에 끝나버리더군요. 개인적으로 에도가와 란포도 이 이야기의 끝을 맺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요. <악령>에도 조금 할 일 없어 보이는 심령학회 인간들이 나옵니다. 밀실살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범인이 떨어뜨린 암호 메시지(휠체어를 연상시키는 그림), 살인예고(영매가 다음 살인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범인은 이 안에 있다'는 고전적인 미스터리까지 암튼 흥미 있는 요소가 무척 많은데 역시나 미완성입니다. 편지 형식인데, 세 번째 편지가 없더군요. 에도가와 란포의 악취미. 이런 편지나 거짓말(<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형식의 소설이 많다는 점. 빠져나갈 구멍을 교묘하게 마련해 놓는 것 같아요. 능글맞다고 할까요? 오히려 이런 성격이 에도가와 란포에게는 무척 잘 어울리지 않나 생각해요. 암튼 재미있는 작가에요.

<독풀>, <손가락>, <화성의 운하>, <백일몽>은 초단편입니다. <화성의 운하>와 <백일몽>은 묘사 중심의 소설이고(그다지 가슴에 확 와 닿지는 않더군요), <독풀>과 <손가락>은 마지막 반전(?)이 의미심장한 소설입니다. 사실 <독풀>과 <손가락>은 지금 시점에서는 조금 촌스러운 작품이지 않나 생각해요. 낙태에 좋은 독풀 뜯어먹는 임신한 여자들이나 잘려나간 손가락이 움직인다는 설정은 이제는 여기저기서 너무 많이 나와서 확실히 식상한 면이 있죠. 그 당시에는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초단편 소설들은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번 작품집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알아보면, 우선 기발한 재치가 돋보이는 작품으로는 (보통은 반전이라고 하죠)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방공호> 정도를 꼽을 수 있겠네요.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를 읽었을 때 바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떠오르더군요. 물론 내용이 비슷하다는 얘기는 아니고, 악취미라고 할까요? 두 거장의 작품 분위기도 몹시 비슷하고, 암튼 김기영 감독과 에도가와 란포 정말 비슷합니다(잡설을 잠깐 지껄였습니다). <방공호>는 결말이 끔찍하더군요. 역시나 이 소설도 에도가와 란포의 악취미가 살짝 엿보이더군요. B29의 공습 현장에서 벌어지는 섹스의 향연. 폭탄 불꽃놀이. 낭만적인 것일까요?

"천지는 광란하고 있었네. 나라가 멸망하려는 중이었지. 아마 우리 두 사람도 미치고 있었던 걸세. 우리는 몸에 거린 모든 것을 남김없이 벗어버리고 이 세상에 오로지 둘만 남은 인간처럼 몸부림치고, 광란하고, 울고, 신음했네. 애욕의 극치의 취해 몸을 떨었어."

(<방공호> 중에서)

<붉은 방>, <인간의자>, <고구마벌레>, <거울지옥>에 대한 느낌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작품들이죠.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사실 이번 작품의 부제는 '기괴환상'입니다. 따라서 추리소설적인 재미는 없습니다. 환상, 공포, 기괴, 음울, 변태(?) 암튼 요런 감성이 물씬 풍기는 작품들입니다. (이거 또 개인적인 취향이 나오는데) 변태적인 취향의 작품 중에서 재미있는 작품으로는 <오세이의 등장>, <메라 박사>, <사람이 아닌 슬픔>, <벌레>라는 작품이 괜찮습니다. <누름 꽃과 여행하는 남자> 이 작품도 괜찮기는 한데(완성도 면에서는) 변태적인 느낌이 별로 없어서 개인적 취향은 살짝 아니더군요.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할까요? 뭐 암튼 그렇습니다.

<오세이의 등장>은 악녀가 등장하는 폐쇄공포를 다룬 소설입니다. 장난이 현실이 되고, 끔찍한 악몽이 되는 상황 변화에 대한 묘사가 정말 실감나게 그려졌더군요. 장난으로라도 궤짝에는 들어가면 안 되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의 두려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이런 기회를 결코 놓쳐버리지 않는 아내.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자.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니까. 완전범죄죠. 스스로 원해서 궤짝에 들어갔으니까요. 일석사조죠. 남편은 죽고, 내연의 남자와의 관계도 계속 가질 수 있고, 유산도 물려받고, 게다가 완전범죄. 굉장히 아이러니하더군요. 재미있으면서 곰곰이 되씹으면 무척 소름 돋는 내용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아이러니함 무척 좋아합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메라 박사>는 연쇄자살을 소재로 한 소설인데, 본격 추리소설과 기괴소설 중간쯤에 위치하는 소설입니다. 우선 빌딩의 5층 방에서 연쇄적으로 자살하는 이유를 밝혀야 하고, 그 밝혀지는 이유는 역시나 기괴합니다. 에도가와 란포 하면 떠오르는 딱 그런 이미지의 소설이 아닐까 싶어요. 메라 박사의 사악한 웃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네요. <사람이 아닌 슬픔>은 소재 자체가 무척 마음에 들더군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은 사랑하는 자기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새신랑의 기이하면서도 슬픈 로맨스입니다. 그러나, 변태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런 로맨스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드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벌레>.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단편소설이지 않을까 싶어요. <고구마벌레>라는 작품에서의 벌레가 인간벌레인 반면 <벌레>라는 작품에서는 미생물 벌레입니다. 죽은 시체를 빨리 썩게 하는 미생물이죠. 그러니까 이 소설은 사랑하는 여자를 납치해서 죽이고, 영원히 사랑을 나누기 위한 시체의 부식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미친 짓을 서슴없이 하는 인간혐오증에 걸린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마사키 아이조오는 그렇게 벌어진 후요우의 배 안에 얼굴을 박고 엎드린 상태로 죽어 있었는데, 처참하게도 그의 추악하게 일그러진 단말마의 손끝이 썩어버린 연인의 뱃속을 깊고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벌레> 중에서)

죽으면서까지 손가락을 죽은 (연인의) 뱃속에 깊고 집요하게 집어넣는 세심한 배려, 악취미 이러한 디테일한 묘사가 에도가와 란포의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한 여자에게 미쳐버린 한 인간의 집요한 광기가 확 느껴지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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