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키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오근영 옮김 / 창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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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번에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라는 SF적인 소재와 내용으로 가족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작품으로 돌아왔네요.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는 가족애(부성애, 모성애, 자식애 등등)가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미스터리적인 이야기 구조에 그런 감성을 듬뿍 담아서 독자들이 머리로는 이야기 구조를 따라가게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그런 감성적인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아요. 물론 그러한 감성 자체가 고루하고, 식상하고, 조금은 촌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나쁘지는 않죠. 본격 추리소설도 사회파 미스터리소설도 확실히 이런 감성을 자극하는 추리소설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장점을 발휘하는 것 같아요. <비밀>, <아내를 사랑한 여자>, <용의자 X의 헌신>, <변신> 등 그의 대표작인 대부분 이런 부류이지 않나 싶어요.

17살의 도키오가 죽는 순간 23살의 철없는 아버지를 만나러 과거로 옵니다. 물론 도키오가 아닌 그의 아버지가 원해서 미래에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한 것이지만요. 사실 시간여행을 다룬 소설은 많죠. 그런데 부성애와 자식애를 시간여행의 소재로 이용해서 신파로 자극하는 그런 SF소설은 조금 드물지 않나 생각해요. 사실 시간여행과 자식애(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는 조금 언발란스 하기도 하잖아요. 시간여행이라는 정말 무궁무진한 소재를 이제는 정말 진부하다 못해 식상하기도 한(그만큼 보편적인 주제이기도 하지만) 가족애라니.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 열광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그의 뻔뻔함에는 정말 열광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앞서 언급한 그의 대표작들도 사실 조금 뻔하잖아요. 그런 뻔한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 생각을 할까? 그런데 그게 뻔하고 식상함에도 재미가 있어요. 알고 속으면서도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게끔 만드는 재주(비록 미스터리 소설로서의 기발함이나 참신성은 없더라도), 그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계속 읽게끔 만드는 것 같아요.

SF적인 설정, 그리고 자식과 부모의 애증, 그리고 연인에 대한 질투와 연민. 무엇보다 과거의 철없는 아버지가 미래의 아들을 만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 변화와 성장. 이러한 소설의 대략적인 내용을 보고 읽어보고 싶습니까? 사실 저는 아니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식상하잖아요. 진부하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읽고 싶습니다. 걸작은 아니더라도 우선 그의 소설은 재미가 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미스터리소설은 아니지만 미스터리적인 요소는 많습니다. 그의 모든 소설에서는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있지 않나 싶어요. 바로 궁금증. 진부하다면 진부한 이야기임에도 그런 미스터적인 요소 때문에 다음 장을 읽어보고 싶은 게 아닌가 싶어요. 우선 도키오의 아버지 다쿠미의 이제는 헤어진 여자 친구 치즈루의 얽힌 내막이 계속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그녀를 쫒는 인간들은 누구이며, 왜 그녀는 그(아버지)를 버렸을까? 그리고 도키오의 아버지의 부모님들은 왜 그(아버지)를 버린 것일까? 무슨 사연이 있어서? 암튼 요런 소소한 궁금증, 예측은 가능하지만, 반전이 아닌 인간의 내면에 얽혀 있는 사연이라 아무래도 궁금해지더군요. 그리고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이 맞물리면서 연결되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런 이야기 구조도 나름대로 괜찮더군요. 식상한 감동일 수도 있지만, 잘 읽히고, 나름대로 미스터리적인 요소도 있어 긴장감도 유지되면서 재미도 있습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 그리고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애틋함, 그리움), 이런 가을에 한번 쯤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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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사랑을 담아 아토다 다카시 총서 1
아토다 다카시 지음, 유은경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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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국 공포라는 것은 상상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공포의 연구> p.431)

마지막에 실려 있는 단편소설 <공포의 연구>는 바로 위의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아토다 다카시가 추구하는 문학이 바로 저 짧은 문장에 가장 잘 드러난 것 같아요. 일상적이고 평온한 상황에서 시작되던 이야기는 마지막의 반전으로 서늘하고 오싹한 공포를 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둔갑을 해 버립니다. 둔갑이라고 하면 조금 오버일까요? 1970년대 후반에 발표된 소설임에도 아토다 다카시의 이야기는 현대에도 유효합니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무서울 수는 있다는 것은 진리 아닌 진리이잖아요. 옆집에 살고 있는 친근한 아저씨가 어느 날 추운데 고생한다면서 따뜻한 커피에 독을 타서 줄 수도 있잖아요? 또는 옆집 할머니가 바쁜 주부를 위해 아기를 봐준다고 하면서 죽일 수도 있고요. 현대사회의 공포는 바로 선한 얼굴 뒤에 숨은 악의가 아닐까 싶어요. 선과 악은 하나다. 그런 뫼비우스의 띠 같은 잔잔한 이야기와 충격적인 반전이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암튼 일본의 많은 단편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의 한 문장을 통해 서늘하고 오싹한 공포감을 안겨주는 단편소설 작가로는 최고이지 않나 생각해요. 정말 그 짧은 소설에 이런 반전을 숨길 수가 있는 건지. 물론 현대사회의 공포를 담고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하나, 마지막의 반전이 신선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네요. 여기저기서 조금 들어본 이야기일 수도 있고,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예측이 가능하기도 하거든요. 그 당시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요즘처럼 반전소설이 넘쳐나는 시대에는 조금 촌스럽기는 합니다. 사실 반전도 나름대로 재미있지만, 이 소설은 반전보다는 그 반전에 숨겨진 서늘한 공포를 즐기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네요.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는 표제작입니다. 사실 표지와 제목만 보면 사랑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분홍빛 냉장고에 있는 작은 물건을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정말 사랑 이야기로 속겠더군요. 암튼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는 (반전이 있는 소설이라 뭐라 말하기가 힘든데) 마지막이 정말 소름 돋더군요. 사업에 실패하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런 자신의 무능력으로 아내를 의심하는 한 초라한 남성의 어긋나버린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작품인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현실감에서 오는 서늘한 공포가 아주 잘 녹아들어 간 작품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행복통신>은 조금 따뜻한 이야기인데, 그러한 결말에 다다르기 까지 작가가 깔아놓은 복선이 아주 재미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사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초자연적인 공포를 다룬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조금 우연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과관계가 뚜렷한 이야기이네요. <취미를 가진 여자> 이 작품도 아주 걸작입니다. 누구나 쉽게 생각하는 예상을 뒤집는다고 할까요? <기묘한 나무>는 오히려 요즘 현대사회와 더 잘 어울리는 소설이 아닐까 싶어요. <최후의 배달인>은 어디선가 보거나 들은 이야기 같아서 신선함은 조금 떨어졌습니다(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나거든요). <나는 먹는 사람>은 결말이 예상 가능한 작품이지만, 결말 그 자체보다는 인간의 기이한 욕망이 주는 서늘한 공포가 무척 소름 돋게 다가 온 작품입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인 인간을 기이한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결말 자체가 저는 참으로 불쾌하고 기분이 나쁘더군요. 사실 그건 소설 속의 그가 아닌 제 자신일 수도 있거든요.

아토다 다카시의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에는 총 18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일이 언급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네요. 반전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고 해서 느낌 자체를 말하는 것도 역시나 그렇고요. 제목과 표지에 속지 마세요. 말랑말랑한 소설은 절대 아니거든요. 블랙유머라고 해야 할까요? 암튼 서늘한 공포와 웃음이 함께 떠오르는 작품입니다. 18편의 단편 하나하나 재미있습니다.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을뿐더러 마지막의 반전과 그리고 그 반전에 숨겨져 있는 서늘한 공포, 그리고 독자 스스로 그 결말을 상상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또 다른 공포. 상상하는 것의 즐거움을 주는 단편소설들이지 않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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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감옥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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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야시>, <천둥의 계절>의 쓰네카와 고타로의 신작입니다. 그리고 장편이 아닌 단편소설로 찾아왔습니다. 타임 슬립(시간 이동)을 다룬 '가을의 감옥'을 시작으로 공간의 이동(초가집의 이동)을 다룬 '신가(神家) 몰락', 마지막으로 환술(환상을 현실로 보이게끔 하는 능력)을 다룬 '환상은 밤에 자란다'까지 초지일관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를 끊임없이 배회하는 그런 작품들로 찾아왔습니다. 쓰네카와 고타로는 지금의 현실을 좋아하지 않는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다룬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하네요. 노스탤지어와 판타지가 만나면 이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그 판타지의 세계는 두려운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보고 싶은, 또한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기 싫은 묘한 매력이 있는 세계이기도 해요.

‘가을의 감옥’은 11월 7일의 수요일을 계속 반복해야 하는 리플레이어들의 일상을 다룬 소설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삶이란 어떤 느낌일까?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할까? 몸을 다치거나 죽어도 하루 자고 나면(다시 11월 7일이 반복되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갑니다.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도 다음날 물건은 사라지고 돈은 지갑 속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매일, 돈을 써도 다시 지갑 속에 채워지는 매일,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는 친구. 그러나 내일은 없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고, 불륜의 아내는 매일 지켜봐야 합니다. 분노에 죽였던 아내를 매일매일 죽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일은 알 수 없습니다. 행복함 뒤에는 이런 두려움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기타카제 백작이 그러합니다).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리 나쁜 하루는 아니었다." 불안하고 두려운 미래라도 꼭 나쁘지만은 않을거에요.

‘신가(神家) 몰락’은 일정한 주기로 세상을 이동하는 오키나 가면의 집(초가집)에 우연히 갇힌 한 남자의 후회, 분노, 안타까움, 깨달음 등 심리의 변화를 다룬 판타지소설입니다. '가을의 감옥'과 형식이나 주제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갇혀서 지내기는 하지만 주기적으로 세상을 여행할 수 있고, 동안 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맛있는 망고감자 과일,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움, 물론 사람을 죽이기도 쉬워요. 과연 신가(오키나 가면의 집) 안에서 갇혀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일까? 아니면 신가 밖에서의 현실적인 삶이 행복한 것일까? 신의 집이라 불리는 곳에 갇혀 있다 탈출하고, 결국 재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한 남자의 현실도피, 무릉도원의 삶에 대한 좌절과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외롭고 슬프지만 그런 곳을 동경해야만 하는 현대인의 우울한 일상을 들여다 본 것 같아 씁쓸한 여운이 남네요.

‘환상은 밤에 자란다’라는 작품은 이번 작품집에서는 조금 독특한 위치에 있는 작품입니다. 앞의 작품들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 위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인간들의 내면을 따라가는 이야기였다면, 이 작품은 환술(환상)이라는 것이 가혹한 현실에 의해서 무참하게 깨져나가는 과정을 어린 소녀(?)의 시점으로 그린 소설입니다. 모두에게 숨겨야만 하는 환술, 그러한 환술이 친구들에게는 괴물로 인식되고, 종교 집단에게는 돈 벌이 수단으로 전락 해 버립니다. 환술은 내면에 숨기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으나 억제되어 있던 환술은 점점 커져버려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억눌림과 무시, 차별, 이용당하고 버림받음으로써 그러한 환상(환술)은 현실에서 끔찍한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이번 작품집에서 가장 우울하고 씁쓸한 이야기였습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정신이 파괴된다. 그리고 뇌는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육체에 죽음을 명한다. 나는 격렬한 환희에 몸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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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서평단 알림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問 라이브러리 2
도정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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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나무 <문라이브러리> 시리즈의 두 번째 책입니다. 영문학자 도정일 씨가 바라본 시장전체주의의 위험성과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신랄하게 평한 비평서입니다. 새롭게 발표된 원고보다는 기존(특히 밀레니엄을 앞둔 1990년대 후반에 발표된) 원고가 많아요. 그렇다고 해서 유효기간이 지난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시장전체주의는 판을 치고 있고, 사교육은 위험 수위까지 가 있으며(우리나라를 떠난다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죠. 국민을 버리는 국가, 이게 정말 국가 맞습니까?), 인문학의 가치는 땅바닥에 떨어지다 못해 내 팽개쳐져 있죠. 분명 나라는 위기인데, 사람들은 태평하게 살아가고 있고, 아무도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한 기능을 해 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인데, 대학에서조차 인문학은 '돈 안 되는 학문'으로 낙인찍힌 채 거리로 내 몰리고 있죠.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은 크게 6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밀레니엄, 오 밀레니엄!', '문화 영역의 세계화 또는 아큐 현상', '문명의 야만성과 세계화 비전', '경쟁력, 수월성, 창의성의 비극: 배반의 교육과 교육의 배반', '시장전체주의와 한국 인문학', '시장전체주의와 인문 가치' 이렇게 6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밀레니엄, 오 밀레니엄!'의 장이 원래 내용이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읽은 인문서(몇 년 만의 처음이라는)라 저의 이해력이 딸려서 어려운 건지 암튼 잘은 모르겠지만, 진도가 잘 안 나가더군요. 스스로 자학을 했습니다. 이렇게 무식해서야, 한글도 이해를 못하다니. 암튼 초반에는 긴장도 해고 그래서인지 어렵더군요. 그런데 '문화 영역의 세계화 또는 아큐 현상'부터는 머리에 쏙쏙 들어오고, 이해도 잘 되더군요. 또한 이런 사회, 국민, 국가에 대해서 심도 있게 비판하는 글도 정말 오랜만에 읽은 것 같고요.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서 그 동안 너무 무심한 게 아니었나 하는 반성도 들었고요. 암튼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국민이라면 한번 쯤 읽어두면 좋을 듯싶네요.

개인적으로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글과 김영삼-김대중의 문민정부시기를 잇는 세계화에 대한 비판의 글이 좋더군요.  허울뿐인 세계화가 어떻게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 모는지, 정말 가슴 깊숙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위해 암기식으로 무조건 외우고, 대학도 세계화와 시장경쟁체제에 발맞춰 회사에 바로 투입 가능한 인간으로 길러내고, 그렇지 못한 대학은 죽여 버리고, 그렇지 못한 학문 역시 죽여 버리고, 적응하지 못한 인간들 역시 죽여 버리고. 과연 무엇을, 누구를 위한 세계화인지. 도정일 씨는 세계화와 시장전체주의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오로지 세계화와 시장전체주의만을 위해서 무조건 죽이고, 싸움터에서 살아남는 것을 강요하는 교육을 정부에서 권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죠. 경쟁력과 수월성, 창의성을 위한 교육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건가요? 1990년대에 발표한 그의 글을 이제 평가해 봅시다. 그렇게 경쟁력과 수월성, 창의성을 부르짖었던 교육이 성공하고 있나요? 인성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나요? 인성교육은 필요하다고 그렇게 강조하면서 대학에서의 인문학은 왜 자꾸 죽이려고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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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죽지못한 파랑
오츠이치 지음, 김선영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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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처럼 울부짖으며 선생님의 머리를 노려 벽돌로 내리쳤다.

양은 조용히 잡아먹히는 먹이가 된다.

하지만 그래서는 끝장이다. 왜냐하면 그보다 분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벽돌을 쳐들었다.

초등학교에 갓 부임한 젊은 남자선생. 캠프를 좋아하고 축구를 좋아하는 어디에서나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그런 건장한 젊은 선생입니다. 선생은 교육자라는 사고방식은 선생들(또는 그들에게 전염된 부모들)이 강제로 주입한 의식일 뿐 그들은 그냥 돈과 진급에 목마른 월급쟁이일 뿐입니다(물론 아닌 선생들도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츠이치의 이번 작품 <미처 죽지 못한 파랑>은 그런 선생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를 드러냅니다(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벽돌로 내리치고 싶을 정도면 말 다했죠). 또한 추한 동정심도 살짝 보입니다. 갓 부임한 젊은 선생 하네다는 마사오라는 어린 소년을 왜 그렇게 괴롭혔을까요? 가사실에 끌고 가서 싸대기를 때리고, 욕실에 감금시켜 놓고 구타를 하며, 심지어 수면제를 먹이고 죽이려고까지. 이거 선생 맞습니까?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나 '한국교총' 뭐 암튼 이런 곳에서 또 비도덕적이다, 반윤리적이다라는 이유로 또 19금 금서를 때리지는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네요. 사실 소설은 허구입니다(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기는 하지만). 스스로 당당하다면 이런 소설 가볍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심하게 때리는 선생도 많이 봤고, 부모들에게 돈 받아 처먹으면서 그런 부모의 자식들에게 특혜를 주는 선생도 많이 봤고, 승진을 위해 교장과 교감에게 아부를 위해 학생들을 희생양 삼은 선생들도 많이 봤고, 기타 등등 정말 인간 이하의 선생을 많이 봤습니다.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국가(회사로 치면 사장)로부터 돈을 받고 일을 하는 노동자고요. 그렇더라도 학생들에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도 스스로는 교육자이며 인격자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죠. 암튼 좋은 선생도 많습니다. 선생에 대한 비판은 그만하죠. 암튼 <미처 죽지 못한 파랑>에서 선생은 참으로 악랄하게 그려집니다. 그 점은 집고 넘어가고 싶네요.

그렇다면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하네다 선생은 왜 마사오라는 어린 소년을 그렇게 괴롭혔을까요?

"……왜 저만 혼내셨던 거에요?"

"누구라도 상관없었어……."

"하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이었잖아요?"

"무서웠거든……."

교장이나 교감에게 인정받고 싶고, 학부모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싶고, 학생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싶은 그런 선생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교사, 학부모, 학생은 어쩔 수 없이 의견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죠. 하네다라는 선생이 택한 방법은 바로 왕따 소년을 한 명 만들어서 선생의 불만과 욕구, 그리고 학생들의 불만과 욕구를 해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미사오라는 소년은 학교로부터, 선생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학교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오츠이치의 소설 중에서는 아이들이 나오는 소설이 많은 것 같아요. 단편집 <ZOO>나 <GOTH>에서도 그렇고, <여름과 불꽃과 나의 시체>도 역시나 아이들이 나오죠. 아이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해맑은 웃음이 그의 (아이들이 주인공인) 소설에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우울해 합니다. 그런데도 아이 답지 않게 정신연령은 높습니다(사실 소설의 주인공은 아이인데, 생각하는 것은 어른이에요. 조금 언발란스하죠. 저거 애 맞아? 싶을 정도로 언어 구사력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가끔은 이게 아이들이 주인공인 소설인지 헷갈리기도 해요. 이건 뭐 그냥 넘어가죠). 오츠이치의 장편소설의 제목 <암흑동화>가 떠오르더군요. 어린 아이가 등장하지만 무척 우울한 동화. 이번 느낌이 딱 그랬습니다.

사실 내용 자체는 조금 식상하기도 해요. 교사와 학생의 대립은 항상 있어 왔고, 또한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환상) 이겨낸다는 것도 익숙한 이야기이고요. 극단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아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선생에게 똑같은 폭력으로 대항함으로써 한 뼘 정도 성장합니다. 이런 식의 성장소설은 뭐랄까? 조금 악취미 같기도 해요. 그러한 점이 오츠이치의 매력이기도 하고요. 아동성장소설도 오츠이치가 그리면 이렇게 어두워지는 것 같아요. 암튼 재미있는 작가 같아요. 개인적으로 <GOTH>나 <암흑동화>, <ZOO>를 무척 좋아합니다. 위의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부분 부분의 느낌은 비슷하기도 합니다. 단편소설에서는 반전의 묘미가 조금 많이 보이는데, 그런 반전은 없습니다. 그래도 역시나 아이가 선생을 벽돌로 내리치는 장면은 반전보다도 충격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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