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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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크라이나 대기근(우크라이나 대학살)은 1932년-1933년에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인위적 기근으로 5백만에서 1천만 사이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1932-33년의 대기근은 고의적인 정치적·행정상의 결정으로 비롯되었고, 기차를 통해 기아를 탈출하려던 수많은 어린이들이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고아원에 보내지거나 농촌으로 되돌려져 곧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위키 백과 참고


소설은 1933년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시작합니다. 어느 겨울 날 굶주림에 시달리던 형제는 우연히 고양이를 발견하고 고양이를 잡기 위해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 소설이 정확하게 어떤 내용인지 몰랐습니다. 구소련이 배경인 줄은 몰랐네요. 그냥 요즘에는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회는 SF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사회인지라 그냥 가상 세계를 다룬 스릴러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었고요. 그리고 MGB(국가보안부, 주인공이 MGB 요원입니다), 소련 민병대, 법체계 등도 모두 가상인 줄 알았는데, 모두 실재하는 역사에 토대를 두었네요. 영미권, 일본권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들은 많이 읽어봤지만, 스탈린 치하의 구소련을 배경으로 하는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은 처음이네요. 우선 무척 새롭습니다. 구소련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게는 마치 디스토피아 SF소설을 읽는 것만큼 새롭고 끔찍하며 흥미롭기까지 했습니다.

서방 세계의 스파이를 조심해야 하는 나라, 국가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는 사전에 차단해야 하는 나라, 따라서 살인사건의 존재를 절대 인정해서는 안 되는 나라. 과연 살인사건이 없는 나라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살인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는 살인사건을 평범한 사고로 위장하고, 죄 없는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야 합니다. 불온사상 유포, 명령 불복종 등등(마치 70-80년대의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네요.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그래야 국가가 존재할 수 있고, 유지가 되니까요. 절대 국민들이 의심을 품지 않도록 철저하게 비밀리에 사건을 은폐, 조작해야 합니다. 주인공 레오는 MGB의 우수 요원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의 영웅이자, 총경의 오른팔이기도 합니다. 가족은 화목하고, 경제적으로 풍족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찻길에서 살해 된 한 소년의 사건을 맡게 됩니다. 절대 살인은 인정되지 않는 사회, 레오는 이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합니다. 그냥 단순사고로 말이죠.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아내가 스파이라는 보고가 들어옵니다. 과연 자신의 아내는 정말 스파이일까? 암튼 이때부터 주인공 레오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합니다. 스파이 혐의로 모스크바에서 다른 도시로 강등(민병대)되고, 그 지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조사하다 자신을 제거하고 싶은 인간에게 들키기까지 합니다. 레오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제목에서 조금은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아이들이 연속적으로 살해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배경은 살인사건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구소련이고요. 요즘에는 흔히 동기를 알 수 없는 살인범에게 사이코패스라는 진단을 많이 내리죠. 그 당시에는 그런 진단도 없었습니다. 동기 없는, 그것도 아이들을 연속적으로 살해하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범죄죠. 이제는 모든 권력을 빼앗긴 MGB 출신의 우리의 주인공 레오는 이런 사건을 자신을 음해하려는 인간에 맞서 수사해야 합니다. 도대체 이 미친 살인마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그 살인자는 이렇게 아이들을 연쇄적으로 살해하는 것일까? 우선 연쇄 살인마의 정체, 그리고 범행 동기를 밝혀야 합니다. 미스터리소설 특유의 재미를 줍니다. 그리고 주인공 레오가 처한 현실. 수사를 계속하면 죽을 위험에 처하면서도 비밀리에 사건을 수사 하는데서 오는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영미권, 일본권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공산주의 국가가 배경인데서 오는 낯선 새로움. 뭐든 것이 통제된 국가에서는 과연 살인사건을 어떻게 해결할까? 그리고 감동적이면서 탄탄한 구성도 무척 매력적이고요. 사건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더 끔찍하고 두려워지는 CHILD 44의 숨겨진 비밀은? 2008년 CWA 이언 플레밍 스틸 대거 상이라는 이름에 빛나는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소설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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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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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LA 뒷골목의 범죄자들, 그리고 그들을 변호하며 수임료를 챙기는 형사법 변호사 미키 할러. 변호사가 정의를 부르짖는 족속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들에게 빌붙어서 돈을 뜯어먹는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니 무척 새롭네요. 암튼 미키 할러는 절대 ‘정의’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선과 악의 기준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오로지 ‘돈’에 의해서 움직이는 현실적인 인간일 뿐.

형사법 변호사 미키 할러에게 어느 날 거물급 의뢰인이 찾아옵니다. 창녀 강간 및 폭행 협의로 기소된 의뢰인, 그러나 스스로는 무고하다고 주장하는, 돈 많은 부동산업자입니다.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게다가 돈도 많습니다. 당연하게도 미키 할러는 변론을 맡습니다. 의뢰인의 죄가 너무나 무고해서 오히려 돈이 되지 않을까봐 걱정하는 그에게 위기가 닥쳐옵니다. 서서히 의뢰인에 대한 믿음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죠. 그리고 사건을 함께 해결했던 동료의 죽음, 게다가 살인 누명까지 쓰게 됩니다. 진퇴양난.

마이클 코넬리는 보통 2년에 한 작품을 쓸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러나 이 작품은 구성에서 완성까지 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작가는 기자 출신이죠. 그리고 미국은 주마다 법체계가 모두 다르고요. 따라서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조사를 했을지 상상이 되네요.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법정 장면입니다. 검사와의 숨 막히는 법정 공방전 정말 압권입니다. 악랄한 의뢰인의 변호도 하면서, 살인 누명도 벗어야 합니다. 법조인으로서 양심도 지키고 싶습니다. 동네 양아치가 아닌 진짜 악마를 상대로 법조인으로서의 양심도 지키고 싶어 합니다. 진짜 악을 변론해야 할 정도로 타락한 변호사는 아니거든요. 사실성과 구성력, 오락성, 게다가 반전의 반전까지, 마이클 코넬리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결코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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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야 가의 전설 - 기담 수집가의 환상 노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5
츠하라 야스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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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일본 기담이 서서히 국내에 소개되는 것 같네요.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을 제외하고는 거의 접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죠. 《아시야 가의 전설 - 기담 수집가의 환상 노트》는 환상, 기담, 공포라는 세 단어로 요약이 가능할 듯싶네요. 정말 기이하고 소름끼치며 환상적인 이야기들입니다. 이들을 콤비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지만 서른이 넘도록 특정한 직업이 없는 사루와타리(실질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와 괴기소설가 백작(실제 이름은 모릅니다)이 겪는 여덟 가지의 기이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반곡 터널>을 시작으로 <아시야가의 몰락>, <송장벌레>, <물소 떼>까지 정말 이야기들은 모두 환상적이고 기이합니다. 그러면서도 공포의 여운도 남고요. 미스터리, 충격, 반전 이런 것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조금 밋밋할 수도 있는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펼쳐집니다. 사실 무섭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무척 흥미로워서 크게 무섭지 않아도 재미있게는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무엇보다 이 작가 필력이 좋더군요(번역본을 읽어보고 이런 말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요). 문장 묘사가 상당히 좋았습니다. 그리고 사루와타리와 백작의 환상적인 콤비플레이도 너무 우중충할 수 있는 이야기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요(연작 소설집 형태입니다). 단, 매 이야기마다 개인 프로필을 설명하는 것은 다소 지루하더군요. 이야기는 잘 기억에 남지 않아도 사루와타리와 백작의 개인 프로필은 선명하게 뇌리에 박히더군요. 이들의 공통적인 취미는 식도락입니다. 특히 두부 요리를 무척 좋아하는데, 음식 이야기도 참 많이 나오더군요.

소년탐정 김전일이 가는 곳에 살인사건이 있다면, 사루와타리가 가는 곳에는 기이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암튼 이 남자 알면 알수록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이들의 이야기가 조금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피카르디의 장미》에서 또 다시 활약을 한다고 하네요. 추리소설은 아닙니다. 환상, 공포, 기담의 취향이 아니신 분들은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기담을 다룬 이야기라 그런지 일본적인 색채와 정서가 조금 강하네요. 개인적으로는 <고양이 등 여자>, <카르키노스>, <송장벌레> 등이 재미있었습니다.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묘사 뒤에 숨은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인간의 어두운 모습을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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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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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라고 부르기에는 늙었고, 중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이른 얼굴. 모두가 등을 돌리는 순간에 잊어버릴 것 같은 너무나도 평범한 얼굴. 그 남자는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다리 위에 누워 있다. (p.515)


온다 리쿠의 문학 세계를 집대성한 책

"내 문학세계를 집대성한 책." - 온다 리쿠

2005년에 <밤의 피크닉>이 국내에 출간된 이후 국내에 엄청나게 소개되고 있는 온다 리쿠가 스스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집대성한 책이라고 밝힌 작품, 바로 <어제의 세계>. 저 역시 온다 리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즐기면서 읽은 책입니다. 사실 국내에 소개가 된 온다 리쿠의 작품 중에서 실망스러운 작품들도 많죠. 이 작품은 온다 리쿠의 소설 중에서 재미있는 책들만 모와서 좀 더 거대한 세계를 구축한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소소한 풍경과 배경, 그리고 소품들 이면에 숨어 웅크리고 있는 세계는 기존의 온다 리쿠 세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의미가 풍부합니다. 보통 이러한 것을 반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SF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고요.

당신은 M마을에서 세 개의 탑을 발견하다

도쿄에서 회사 잘 다니고 있는 30대 후반의 남자, 이치가와 고로가 실종됩니다. 그리고 전혀 연고도 없는 M마을에서 어슬렁거리며 무언가를 조사합니다. 이 마을은 이상하게도 탑과 수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다리 위에서 살해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사건에 의문을 품고 이 마을에 찾아옵니다. 소설은 재미있게도 '당신'이라는 주어로 독자를 소설 속으로 초대합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여기서 당신이란 누구일까? 지금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말하는 것일까? 다음 장으로 넘어갑니다. 이제는 이치가와 고로의 회사 동료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죽어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치가와 고로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하고요. 공간과 시점을 자유자재로 넘나듭니다. 그럴수록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 사실 이런 소설이 이미 있었죠.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이 대표적이죠. 그러나 복잡함은 덜하고, 미스터리는 좀 더 강화된 느낌입니다. 이 M마을에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정교해진 구성과 다양한 복선으로 이루어진 미스터리 세계

이치가와 고로는 한 번 눈으로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초능력을 가진 사내입니다. 말도 안 되는 판타지소설 아니야?, 또는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들처럼 열린 구조의 결말 아닐까? 미리 의심부터 하면서 피하려는 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기억력이 정말 좋다는 사람이 있다더군요. 그리고 그 초능력 부분의 비현실성을 감안하더라도 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암시와 복선 뒤에 드러나는 사건의 결말은 무척 충격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열린 결말의 구조도 아닙니다. 모든 사건이 해결됩니다. 소설 속에 숨어 있던 소소한 장치들이 그 기능을 드러낼 때 오는 쾌감도 확실히 있고요. SF와 판타지, 그리고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탄탄한 구성의 결말이 허무하지 않은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어제의 세계, 진실과 거짓, 안과 밖

온다 리쿠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분위기죠.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그리고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는 작가가 바로 온다 리쿠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SF 판타지적인 느낌이 많이 나는 것 같아요. 현지인과 외부인의 관계 역전, 이런 내용과 구조도 몹시 흥미롭고요.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 거짓이라면? 내가 사는 현실 세계가 거짓 세계라면? 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곳으로의 떠나는 여행, 온다 리쿠 소설의 빠질 수 없는 매력이죠. M마을은 충분히 매력적인 곳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분명히, 휴가를 내서 이치가와 고로의 실종 및 살인사건의 비밀을 밝히려고 M마을로 향할 것입니다. 그 마을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서요. 마지막으로 온다 리쿠를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라고 부르죠. 그리움과 애틋함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느낌보다는 미스터리한 색채가 짙어졌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온다 리쿠의 걸작이자 대표작이라 생각합니다. 온다 리쿠 입문자나 싫어하시는 분들은 이 작품으로 시작하시면 좋을 듯싶네요.

오늘이라는 새로운 하루, 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지금 막 시작되어 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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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충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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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부터 내리기 시작해서 내내 이렇게 퍼붓다시피 하는데, 정말이지 겨울비란 놈, 굵으나 가느나 사람 마음을 씁쓸하게 만드네요. 세상 모든 것이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잔설의 날> 중에서)

개인적으로 저런 문구를 무척 좋아합니다.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은 근원적으로 씁쓸한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새빨간 사랑》, 《도시전설 세피아》의 슈카와 미나토가 좀 더 우울한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인간 내면의 악의 본능을 냉정하게 응시하는 것 같고요. 이번 작품은 기존 작품에 비해 확실히 더 우울하고 악의가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그 여자는 죽음을 즐길 뿐입니다. 달콤한 크림을 핥아 먹듯이.'(<잔설의 날>) 사실 노골적으로 악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번 작품에서는 이런 묘사가 많네요. 인간 영혼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가상의 벌레 '수은충'이 전하는 매력적인 일곱 편의 단편을 만나보세요.

<고엽의 날>에서는 살인자의 황폐한 내면세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비단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타인에게 고통(돌이킬 수 없는)을 준 사람이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를 보여 준 작품입니다. 죽은 사람이 용서해 줄 때까지 고엽(마른 잎)처럼 살라는 작가의 말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냥 죽은 듯이 살라는 이야기죠. 수은충은 그런 인간들의 몸을 찾아 기생하며 그렇게 살라고 계속 속삭입니다. 죽은 자에게 어떻게 자신의 죄를 용서할까요? 죽으면 해결이 될까요? <겨울비의 날>은 조금 (이제는) 식상한 소재의 이야기입니다. 오누이의 금지된 사랑, 그리고 불행을 다룬 이야기거든요. 오누이에게 태어난 기형적인 아기, 타인에게는 밝은 웃음으로 대하지만 내면은 씁쓸한 연인, 그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무게도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잔설의 날>은 개인적으로 이번 단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입니다. 인간의 악의와 슬픔까지 이용해 먹으려는 사악함,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죄를 의식하지 못하는 마음이 텅 빈 사람들의 내면을 엿보는 것 같아 심히 불편하고, 두렵고 소름이 끼쳤습니다. 누나의 자살로 인해 한 가정이 점점 파괴되어 가는 가정, 그리고 그 가정(어머니)의 슬픔을 이용하여 스스럼없이 죄를 저지르는 누나의 친구. 겨울 내내 쌓인 눈이 녹으면서 드러나는 갈색 얼룩들, 그런 뭔가 불쾌한 느낌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대울타리의 날>은 어린 손자의 죽음 이후 벌어지는 일상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서 돌아오지 않죠. 역시나 죽음은 평범한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버리는 마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과연 미쳤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이 선택한 행동, 이미 사라졌지만 그래도 계속 지키고 싶은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일탈적인 사랑을 그린 작품입니다. 사랑과 죽음은 참으로도 멀고도 가까운 것 같아요.

<박빙의 날>이란 작품은 <잔설의 날>과 함께 역시나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여성의 황폐한 내면세계나 악의를 드러내는 작품들을 좋아하거든요(《백야행》이나 《그로테스크》 같은 작품 정말 좋아하거든요. 완전히는 아니지만 느낌이 비슷해서 이 두 단편을 무척 좋아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여고생 두 명이 한 학생에게 왕따와 폭력을 행한 후 어떻게 절망적인 삶으로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행복으로 가득한 크리스마스이브 날 찾아오는 악몽 같은 하루. 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파멸시키고도 결코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인간, 아니 자신의 죄조차 모르는 인간, 그런 인간에게 작가는 끔찍하고 충격적인 결말을 선사합니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저버린 인간에게 용서는 필요가 없는 거겠죠. <미열의 날>은 산에서 신야와 가즈마라는 두 초등학생의 폭력의 잔학성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비록 어떤 약에 의해 저지른 짓이기는 하지만, 자신들과는 다르면서 약한 생명체에 가하는 지속적이고 강도 높은 폭력의 행사는 무섭습니다. 이제는 어린 아이들도 그런 폭력중독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은 것 같아요. 마지막 작품 <병묘의 날>은 "이 사랑이 죽는 날은 언제냐고. 그것은 새로운 생각이 싹트는 날. 새로운 열기가 묵은 생각을 태어버린다."라는 문구처럼 사랑에 대한 작품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의 지겨움과 끔찍함, 그리고 새롭게 시작되는 사랑 이야기, 스토커와 우울증, 반전으로 이어지는 결말. 무조건 희생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겠죠? 이런 생각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제 몸에도 이상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감촉이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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