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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청년이라고 부르기에는 늙었고, 중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이른 얼굴. 모두가 등을 돌리는 순간에 잊어버릴 것 같은 너무나도 평범한 얼굴. 그 남자는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다리 위에 누워 있다. (p.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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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문학 세계를 집대성한 책
"내 문학세계를 집대성한 책." - 온다 리쿠
2005년에 <밤의 피크닉>이 국내에 출간된 이후 국내에 엄청나게 소개되고 있는 온다 리쿠가 스스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집대성한 책이라고 밝힌 작품, 바로 <어제의 세계>. 저 역시 온다 리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즐기면서 읽은 책입니다. 사실 국내에 소개가 된 온다 리쿠의 작품 중에서 실망스러운 작품들도 많죠. 이 작품은 온다 리쿠의 소설 중에서 재미있는 책들만 모와서 좀 더 거대한 세계를 구축한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소소한 풍경과 배경, 그리고 소품들 이면에 숨어 웅크리고 있는 세계는 기존의 온다 리쿠 세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의미가 풍부합니다. 보통 이러한 것을 반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SF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고요.
당신은 M마을에서 세 개의 탑을 발견하다
도쿄에서 회사 잘 다니고 있는 30대 후반의 남자, 이치가와 고로가 실종됩니다. 그리고 전혀 연고도 없는 M마을에서 어슬렁거리며 무언가를 조사합니다. 이 마을은 이상하게도 탑과 수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다리 위에서 살해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사건에 의문을 품고 이 마을에 찾아옵니다. 소설은 재미있게도 '당신'이라는 주어로 독자를 소설 속으로 초대합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여기서 당신이란 누구일까? 지금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말하는 것일까? 다음 장으로 넘어갑니다. 이제는 이치가와 고로의 회사 동료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죽어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치가와 고로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하고요. 공간과 시점을 자유자재로 넘나듭니다. 그럴수록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 사실 이런 소설이 이미 있었죠.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이 대표적이죠. 그러나 복잡함은 덜하고, 미스터리는 좀 더 강화된 느낌입니다. 이 M마을에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정교해진 구성과 다양한 복선으로 이루어진 미스터리 세계
이치가와 고로는 한 번 눈으로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초능력을 가진 사내입니다. 말도 안 되는 판타지소설 아니야?, 또는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들처럼 열린 구조의 결말 아닐까? 미리 의심부터 하면서 피하려는 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기억력이 정말 좋다는 사람이 있다더군요. 그리고 그 초능력 부분의 비현실성을 감안하더라도 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암시와 복선 뒤에 드러나는 사건의 결말은 무척 충격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열린 결말의 구조도 아닙니다. 모든 사건이 해결됩니다. 소설 속에 숨어 있던 소소한 장치들이 그 기능을 드러낼 때 오는 쾌감도 확실히 있고요. SF와 판타지, 그리고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탄탄한 구성의 결말이 허무하지 않은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어제의 세계, 진실과 거짓, 안과 밖
온다 리쿠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분위기죠.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그리고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는 작가가 바로 온다 리쿠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SF 판타지적인 느낌이 많이 나는 것 같아요. 현지인과 외부인의 관계 역전, 이런 내용과 구조도 몹시 흥미롭고요.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 거짓이라면? 내가 사는 현실 세계가 거짓 세계라면? 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곳으로의 떠나는 여행, 온다 리쿠 소설의 빠질 수 없는 매력이죠. M마을은 충분히 매력적인 곳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분명히, 휴가를 내서 이치가와 고로의 실종 및 살인사건의 비밀을 밝히려고 M마을로 향할 것입니다. 그 마을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서요. 마지막으로 온다 리쿠를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라고 부르죠. 그리움과 애틋함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느낌보다는 미스터리한 색채가 짙어졌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온다 리쿠의 걸작이자 대표작이라 생각합니다. 온다 리쿠 입문자나 싫어하시는 분들은 이 작품으로 시작하시면 좋을 듯싶네요.
오늘이라는 새로운 하루, 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지금 막 시작되어 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