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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김종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2002년 용산의 한 냉동 창고에서 냉동새우를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냉동박스를 운반하는 지게차에 발을 밟혀서 엄지발톱이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냉동 창고 안에서는 고통을 느낄 수 없었죠. 점심시간, 따뜻한 고기집에서 밥을 먹으려고 방으로 올라서면 양말을 벗었는데, 발톱이 없더군요. 따뜻한 곳에 오니 아무런 감각이 없던 발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발톱이 빠졌음에도 무척 아팠습니다. 그런데 만약 손톱이나 발톱이 누군가에 의해서 서서히 뽑힐 경우 그 고통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손톱, 뽑히는 거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연작소설집 <몸>, 한국공포문학단편선에 실린 단편 '일방통행', '벽'에 이은 신작 장편소설 <손톱>을 읽었습니다. 한번 빠져들면 책을 놓을 수 없더군요. 논스톱으로 읽었습니다. 기존 작품을 읽은 지가 오래돼서 정확한 느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기존 김종일 씨의 소설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더군요. 김종일 씨의 공포소설에는 '불쾌함'이 있습니다(소설이 불쾌하다는 내용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짜증이라고 할까요? '일방통행'에서도 그런 점이 잘 드러나 있죠. 불쾌하고, 짜증나고, 마주치기 싫고, 걸리적거리고, 그런데도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하고, 그것에서 오는 분노, 분출할 수도 없고, 참아야 하고, 암튼 그런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저의 표현력의 부족함) 그런 불쾌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소설 <손톱>에는 그런 인간에 대한 불쾌함보다는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살인사건이라는 소재 뒤에 숨겨져 있고, 깊게 파고들지도 않습니다.) 인간에 대한 죄악을 미스터리한 사건들과 악몽 속에서 벌어지는 살인이라는 좀 더 읽기 쉽고, 빠져들기 쉽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오락적인 요소에 치중한 느낌이 들더군요. 영화화가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서 구구절절 말했듯이 정말 오락적인 공포소설입니다. 정말 괜찮은 감독이 영화로 만든다면 정말 죽여주는 공포영화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그만큼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인간에 대한 죄의식이나 구원에 대해 깊게 파고드는 예술영화의 느낌보다는 재미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작품성도 있는 웰메이드 영화의 느낌이라고 할까요?
어느 날 갑자기 악몽을 꾸는 '홍지인'.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지겨워질 쯤 6살 된 아이를 사고로 잃습니다. 그 충격으로 고통에 빠져 방황하던 그녀는 어느 날 마트에서 '세준'이라는 남자를 만나 과거의 아픔을 잊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행복도 잠시, 그녀는 끔찍한 악몽을 꾸기 시작합니다.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악몽. 악몽이 마치 현실처럼 너무 생생합니다. 그리고 악몽 뒤에 빠지는 손톱. 악몽을 꿀 때마다 손톱은 한 개씩 빠집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죠? 우연히 행려병자에게서 듣게 된 '라만고(마다가스카르섬의 베스틸레로족은 왕족의 손톱과 발톱을 라만고라는 직책의 사람으로 하여금 먹어 없애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음)', 그녀는 그녀의 남자친구 '세준'과 여자친구 '민경'과 이러한 미스터리한 비현실적인 사건을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점점 사건에 깊게 빠져들수록 점점 더 사건은 알 수 없게 되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진실에 그녀는 큰 혼란과 충격에 빠져들게 됩니다. 인간의 죄의식은 구원받을 수 있다. 암튼 저는 이 소설의 주제를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선의 끝은 악이요, 악의 끝은 선이다."라는 라로슈코프의 말이 책장을 덮는 순간 이해가 되더군요. 그런 인간의 죄의식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라만고'라는 주술적인 소재와 이상의 <거울>이라는 시, 악몽 속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 등으로 잘 버무려서 표현한 것 같네요. 암튼 이런저런 말 필요 없이 이 소설, 재미있습니다. 작품성이 있네, 없네를 떠나서 재미 하나는 확실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