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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릴러문학 단편선 ㅣ Miracle 1
강지영 외 지음, 김봉석 엮음 / 시작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황금가지의 <한국공포문학 단편선>에 이어 시작에서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는 시리즈가 나왔습니다. <한국스릴러문학 단편선>라고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무척 재미있네요. 총 8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데, SF, 하드보일드, 공포, 추리, 스릴러 등 작품 하나하나가 특색이 있더군요. 기본 바탕은 역시나 제목처럼 스릴러입니다. 스멀스멀 다가오는 긴장감이 아주 제대로 살아있네요. 암튼 시작의 <한국스릴러문학 단편선> 기대하셔도 좋을 듯싶습니다. 무척 만족스러웠습니다. 재미 하나는 보장합니다.
일상적인 공포와 비일상적인 공포를 다룬 작품이 두루 실려 있습니다. 물론 일상과 비일상의 공포를 함께 다룬 작품도 있고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더군요. 인간을 먹는 놈들, 반란을 꿈꾸는 왼손, 인간 사냥꾼, 액귀, 일확천금이 걸린 생존 게임 등 비현실적이면서도 무척 현실적인 이야기들이죠. 무조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들. 그리고 한국적인 공포를 스릴러라는 장르에 녹여냈다는 점도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권총, 마약은 서양에서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소재잖아요. 무엇보다 친숙해서 좋더군요. 마지막으로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 조금 센 스릴러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실력>, <사냥꾼은 밤에 눈뜬다> 등은 꽤 잔인합니다. 특히 <사냥꾼은 밤에 눈뜬다>는 인간 사냥꾼들의 살육 파티를 그린 소설인데, 개인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는지라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최민호의 <인간실격>은 장르의 잡종(^^)입니다. SF, 공포,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스릴러 등 온갖 장르가 뒤섞여 있네요. 인간을 먹어치우는 '놈'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한 인간의 폭주하는 분노를 드러낸 작품입니다. 개인인적으로 이런 SF 설정의 공포소설을 무척 좋아합니다. 영화는 더욱더 좋아하고요. 영화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소설이었습니다. 인간보다 더욱 인간 같은 놈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점점 상실해가는 인간(나), 쫒는 자와 쫒기는 자의 숨 막히는 긴장감, 마지막의 허무한 반전. 시작부터 느낌이 무척 좋았습니다.
강지영의 <나의 왼손>은 <한국추리스릴러 단편선>에 실린 <거짓말> 이후 두 번째로 접하는 작품인데, 역시나 이번 작품도 인간 내면의 잠재되어 있는 심리적 공포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직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고, 저 역시 이분의 많은 작품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공포가 아닌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이런 공포를 끄집어내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것 같아요. 제목처럼 <나의 왼손>은 왼손의 자신의 주인에 대한 반란을 다루고 있습니다. 무척 일상적인 것이 한순간 낯선 것으로 변하는데서 오는 공포감이 무척 신선하고 좋았습니다. 무척 짧은 단편이지만 그만큼 인상이 강렬하게 남는 작품입니다. 반전과 깔끔한 결말. 그리고 익숙한 것에 오는 낯선 공포감, 이런 식의 공포가 정말 무섭지 않나 생각합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를 소재로 한 세현의 <피해의 방정식>은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두 가지 익숙한 소재가 등장합니다. 다소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어서 생략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척 흔한 소재입니다. 그런데 의문의 연쇄 투신자살 사건, 그리고 자살 현장에서는 눈을 뜬 채 깨어나는 박준희, 의문투성이 흥신소사장과 정신과 의사. 그러니까 익숙한 설정이라도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힙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정보를 하나씩 주면서 알게 되는 진실들은 극도의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웰메이드 장르영화를 한편 본 느낌입니다.
김상환의 <질주>는 게임 같은 소설입니다. 바로 죽음의 게임. 게임을 클리어하면 1억이라는 돈을 얻고 실패하면 죽는 잔인하면서 한번쯤은 해보고 싶은 그런 게임입니다. 자본주의의 노예와 희생자. 돈을 얻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납치하고 죽이는 인간들. 거금의 돈을 놓고 인간들의 잔인한 게임이 시작됩니다. 엔딩은 있냐고요? 과연 이 게임에 엔딩이 있을 수 있을까요? 돈이라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한 게임은 계속됩니다. 지금 현실이 소설 속 죽음의 게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끔찍하면서 씁쓸하더군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여라! 큰돈을 얻기 위해서는 역시나 사람을 죽여라! 동기는 없다. 원한도 역시 없다. 돈이 최고다!!
김미리의 <주말여행>은 이번 작품집에서 가장 현실적인 공포를 다룬 소설이 아닐까 싶네요. 평소에 안 좋은 감정을 회복하고자 부부가 주말여행을 떠납니다. 평소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남편이 웬일로 이것저것 준비도 다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이제 사람구실 좀 하는 것일까요? 외딴 산장에서 벌어지는 피 튀기는 생존기. <인간실격>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살육전쟁에는 더 큰 음모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부부싸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들의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드러나지 않고 숨어서 세상을 조종하고 이익을 챙기는 놈들.
권정은의 <액귀>는 귀신소설입니다. 귀신영화나 소설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강지영의 <나의 왼손>과 함께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심리적인 공포를 다룬 소설입니다. 숙취에서 깨어난 한 남자가 낯선 곳에서 무언의 존재로부터 시달림을 당합니다. 보이는 듯 하면서 보이지 는 그 무엇. 치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이었습니다. 주인공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제 팔에도 닭살이 돋는 그런 체험을 하게 되더군요. 우리나라에 귀신소설이 무척 드문데 정말 반가운 작품이었습니다.
전건우의 <사냥꾼은 밤에 눈뜬다>는 거침없이 폭주하는 공포 스릴러입니다. 무통증 사내와 인간사냥꾼들의 한판 대결. 속고 속이는 인간들. 피가 바다를 이루는 아비규환 저택. 서로 죽고 죽이는 인간들. 인간성이란 존재 자체를 상실해버린 인간들의 짐승 같은 혈투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 같은 소설입니다(물론 국내에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고어영화^^). 순수한 공포의 쾌락을 보여주는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이상민의 <세상에 쉬운 돈벌이가 없다>는 경호원 출신의 해결사와 악질 스토커의 한판 대결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작품집에는 대결 구도가 상당히 많네요. 광주민주화운동의 가해자와 피해자, 귀신과 인간, 남편과 아내, 돈을 갖고 있는 자와 돈을 뺏는 자, 놈들과 인간 등등. 예전에 온라인게임에서 결혼이 인기가 있었던 적이 있죠. 정확하게 무슨 게임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지인이 결혼했다고 좋아하더군요. 무슨 결혼? 게임 결혼. 밥도 섹스도 폭력도 이제는 결혼까지 할 수 있는 게임. 그런 게임이 우리사회에 악질 스토커를 양산해 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히키모코리 게임 중독자. 작은 관심에 무척 기뻐하고 타인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 무척 많잖아요. 굉장히 몰입하면서 읽은 소설입니다. 스토커와 해결사, 경비원, 위층 사내까지 개입된 어마어마한 스토커 사건의 실체는 무척 우습습니다. 가상공간에 대한 맹목적인 맹신 때문이겠죠. 웃기더군요. 씁쓸하지만 웃겨요. 이야기 배치, 아기자기한 미스터리, 유쾌한 풍자와 신랄한 조소, 스토커와의 대결에서 오는 긴장감 등 쉽고 재미있게 읽힐만한 요소들이 잘 어우러진 소설입니다. "나쁜 놈, 부러진 코를 때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