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대지 않은 커피가 그녀 앞에서 흰 김을 피우며 착실하게 식어갔다. - P23
손바닥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손금에 변화가 없었는지 점검 하는 것처럼. - P25
거리로 따지면 우린 애초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뭔가를 삼키는 것과 뭔가에 삼켜지는 건 동전의 양면이지. 앞면과 뒷면, 빌려주는 쪽과 빌리는 쪽. 그게 세계의 실상이야. 안이 있으면 밖이 있어. 밖이 있으면 안이 있고. - P27
그는 아주 얇은 미소를 머금고서 섬세한 느낌의 가늘고 긴 손가락 하나하나를 자못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심해 생물이 제 몸의 미묘한 촉수를 점검하는 것처럼. - P28
누구든 그곳에서는 더이상 슬프지 않기를 바라며ㆍㆍㆍ미처 못다 한 말이 봉해진 편지를 - P143
한달간의 생이 존재한다면, 나는 누구를 가장 먼저 기억하고, 누구를 가장 마지막으로 떠올릴지. - P125
빛 아래 우리는 두점 그림자 같았다. - P129
잘 지냈니, 잘 지냈으면 좋겠다, 미안해 같은 평범하고도 어려운 말들. 이제 와 전송하기에는 늦어 버린, 무용한 말 말들. - P131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 P132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았다. 푸른 기운을 띄던 숲이 자줏빛으로 서서히 물 들고 있었다. - P38
고여 있던 것을 흘려보내듯 잠잠히. 어떤 울음이 안에 있던 것을 죄다 게워내고 쏟아낸다면, 어떤 울음은 그저 희석일 뿐이라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농도를 묽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요. - P74
우리가 버티지 못하고 놓아버린 것들, 가중한 책임을 이기지 못해 도망쳐버린 것들은 다 지워지고, 그 자리에 꿈결같이 묘연한 한여름의 오후만이 남습니다.이편에서 왔다가 저편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것들.어딘가 숨어 있다 불현듯 나타나 기어이 마음을 헤집어놓는 것들. - P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