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 - 이주영 선생님의 ㅣ 행복한 독서교육 1
이주영 지음, 장경혜 그림 / 행복한아침독서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그동안 독서 관련 책은 많이 읽었다고 생각해왔다. 우리학교 책날개 모델학교 멘토이신 여희숙 선생님께서 쓰신 ‘책 읽는 교실’을 위시하여 개인적으로 크라센의 ‘읽기 혁명’,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 등을 비롯한 책을 읽어왔고, 우리학교 독서모임에서도 ‘수업 중 15분, 행복한 책읽기’, ‘하루 15분 책 읽어주기의 힘’, ‘하루 30분 혼자 읽기의 힘’ 등 다양한 책을 읽어왔으니 그럴만하다.

그런데 이번에 이주영 선생님의 ‘책으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직도 읽어야 할 책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의 책 중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 를 제외하고 나머지 책은 이론적인 성격이 강하고 학생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진 책들이다. 이렇게 해서 학생이 이렇게 변했으며 이 방법은 우수한 다양한 증거가 있다.. 라는 전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 책에는 교사의 고민이나 실패를 통한 성찰보다는 일종의 솔루션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이번에 읽은 ‘책으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는 저자 스스로는 너무 자기 잘한 이야기만 쓴 거 아닌가 걱정하는 말이 있지만, 나는 이 책이 매우 솔직하고 다른 책에 비하여 실패를 통한 성찰이 잘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교사로서 고민이 잘 나와 있고 저자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고 생각했는지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느낀 점도 많고 읽기도 수월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인데 과거의 학교 상황은 꽤 암울했던 듯싶다. 문집을 내는 게 지탄받고 종이를 절약하겠다고 공책 아래 위 빈칸까지 쓰도록 지시가 내려와 장학지도까지 있었다는 이야기는 지금 사람이 보기에는 공산주의식 유머에 가까울 정도로 실소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그 당시에도 교권은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던 셈이다.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위에서 지시하는 데로 하는 것 밖에 없는데 거기서 무슨 교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거기에 과거에는 학급운영비도 없었다니 그 당시 분들은 어떻게 교사생활을 해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교육환경이 좋아졌다. 교육과정 자체에서 교사에게 자율권을 부여하고 있고, 단위학교에서 위의 지시에 거부도 할 수 있다. 물론 아이들이 예전보다 드세지고 교사의 사회적 권위도 약해져 교권이 위협받는다는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자신의 교육관에 따라 교육하기는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암울했던 시기에서도 저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교육활동을 펼쳐왔다. 학급문고 마련, 돌려있기, 동시 읽기, 책 읽어주기, 연극하기, 책 만들기, 책 지도 만들기 등등 다양한 교육활동은 그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볼 때 경이로운 일이 아닌가 싶다. 아니, 어쩌면 그런 시기이기에 그런 활동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역경 속에서 나온 활동들이 지금 교육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은 꽤 역설적이다.

저자를 뒷받침하는 것은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이오덕 선생님의 책들과 글쓰기 교육연구회에서 배운 내용들이다. 저자는 이오덕 선생님과 직접 만나서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는 데, 그래서인지 이 책의 제목은 ‘책으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 지만 글쓰기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라고 이름을 붙여도 좋을 정도로 글쓰기 이야기가 많다. 또 책의 후반부에는 저자의 학급운영에 대한 노하우가 자세히 있어 독서교육을 넘어서 교사로서 배우고 실천해볼만한 내용이 꽤 있었다. 특히 교사가 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깊은 공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지난번에 읽은 ‘나무에게 배운다’ 의 도제교육과도 연관이 있는 이 주장은 깊이 기억해두고 생각해봐야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일반적으로 교육은 말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를 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말로만 이루어지는 교육은 그 한계에 갇히게 된다. 또 교사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아이스크림과 같은 매체의 답을 베껴 적는 아이들을 보면 갑갑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쩌면 나 스스로도 말로 이루어지는 교육에 갑갑함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교사는 아이들에게 말뿐이 아니라 모범과 본이 되어야 한다. 독서교육에서도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을 넘어서 본인이 훌륭한 독서가로서 하나의 체험 대상이 될 필요가 있다. 청소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말만 따라 교사랍시고 아이들한테 노동을 강요하고, 노동을 천시하게 하고, 아이들 사이에 계급을 만들어 주는 것이 청소지도라는 교육활동의 모습이다. 이게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특히 이오덕 선생님의 “반장이 감독하나 담임이 감독하나 청소 감독은 똑같은 거지요. 말이 지도지 그건 힘센 선생이 힘없는 아이들한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강제로 시키는 거잖아요. 그게 무슨 민주주의 정신을 길러주는 교육이 됩니까?” 라는 말은 이 청소지도의 부조리함을 날카롭게 짚어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청소활동에서 교사가 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독자가 되어버린 것은 청소라는 활동이 중요한 일과활동이라기 보다는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딱히 할 말이 없다. 집안 청소도 게을리 하는 형편이라 교실청소를 아이들의 귀중한 일과활동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수업 후 잠시라도 쉬고 싶다는 마음에 같이 청소를 하기 보다는 이래라 저래라 설명, 지시에 그쳤다. 이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청소를 벌이 아니라 상으로 생각하게끔 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청소를 귀찮은 일로 여기지 않도록 스스로 본을 보여야겠다.

또한 아무리 좋은 활동이라고 아이들이 즐겁게 참여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거나 다른 활동으로 대체한 이야기는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흔히 황금률이라고 ‘내가 대접받고 싶은 데로 다른 사람에게 대접하라’ 라는 말이 있다. 성경에서 비롯된 이 말은 격언 중 하나로 우리가 기억하고 따를 만하다. 그러나 조심해야할 점도 있다. 일반적으로 나한테 좋은 것은 다른 사람한테도 좋은 경우가 많지만 간혹 나한테 좋은 것이 다른 사람한테도 싫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의가 폭력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사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좋은 교육활동이라 하더라도 이를 강제로 밀어 붙이면 폭력이 될 수 있다. 마땅히 가르쳐야만 하는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아이들의 즐거움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책 재판놀이라는 활동도 굉장히 특이하면서 재밌는 활동이다. 교과서는 하나의 참고자료라지만 교과서가 없으면 수업이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참고자료만 가지고 하루가 아닌 1년 동안 교육을 하는 것도 굉장히 불안한 일이기 때문에 교과서가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교과서가 금과옥조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발휘하게 두어서도 안 된다. 수업의 주인공이 교과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비판할 수 있는 능력 역시 학교에서 길러줘야 할 중요한 역량이기 때문에 ‘책에 있는 내용은 무조건 맞다. 책은 옳다’라는 편견과 우상을 깨기 위한 이러한 교육활동은 해볼 만한 활동이 아닌가 싶다.

그 외에도 다양하면서도 귀중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실려 있다. 나의 경우 1부 독서활동, 2부 글쓰기 이야기보다 3부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온 이야기가 더 좋았다. 학부모와의 연대를 위한 실천도 어렵지 않으면서도 기발했고, 교실일기 이야기도 실천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책에서 저자의 모습이 어떤 비범하고 특별한 교사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들처럼 평범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치열한 고민 속에서 성장해온 과정이 잘 들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특히 폭력교사를 벗어나기 위해 글쓰기 활동을 선택한 저자의 모습에서 학교폭력 문제는 결국 교사와 학생의 소통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80명까지는 아니지만 26명의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힘들긴 매한가지다. 글쓰기를 통한 소통 방법도 연구해볼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이야기 중 공감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책 210~211쪽을 보면 공교육이 담임 선택제로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 교육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동시에 우리나라 담임교사는 학생과 학부모가 협의해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나라 초·중등학교에서 학생이 교사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저자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는 이해가 간다. 교육의 3주체라고는 해도 학생, 학부모는 학교 교육활동에 거의 관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고민해볼만한 토론거리기는 하다. 그러나 담임 선택제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교권을 심히 훼손하고 공교육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일이다.

일단 공교육은 그 자체가 개인의 자유권을 일정 부분 침해함으로서 성립된다. 이는 인권이 자유권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공익과 개인의 교육권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교육은 다양성 이전에 보편성과 공공성을 근본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막대한 국가예산이 투입되는 것이다. 지금도 이렇듯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공교육에서 공공의식이 부족한 학생들이 배출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인데 담임 선택제는 이러한 경향을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교사가 사회의 공적 대변인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담임 선택제는 필연적으로 공교육의 보편성과 교권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선택제가 될 경우 학부모와 학생의 생각에 따라 교사가 휘둘릴 수밖에 없으며 교사는 선택할 수 있는 소비재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사설 학원과 뭐가 다를까? 만약 학부모가 시험을 잘 보게 해주는 교사를 선택한다면 이를 따라줘야 하나? 현 한국의 입시상황에서 이러한 제도는 교육의 본질을 손상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일제고사와 교원평가에서 경험해본 일 아닌가? 때문에 학부모의 참여가 미비하다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담임 선택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방향이 잘못된 주장이다. 이는 경제논리와도 유사하다. 소비자는 무조건 옳다라는 주장을 그대로 끌고 온 것이다. 저자가 그런 의도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다.

담임 선택제 하에서 학부모들의 참여라는 것도 의문이다. 대다수의 학부모의 목적은 자기 자식 출세하는 것이다. 뭐, 조금 특이한 학부모는 자기 삶을 나름대로 꾸려갈 수 있도록 기르는 것이 목적이다. 학부모의 수요 자체가 그다지 다양하지 않고 사회경제논리에 지배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학부모의 참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안학교 이야기도 있는데 그 대안학교가 귀족학교로 변질되는 곳이 많으며, 무엇보다 그곳 교사들도 나름의 교육적 신념에 의해 공교육에는 한계를 느껴 그에 벗어난 곳에서 교육을 하는 곳이지 선택을 받는 다고 생각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대안학교의 목적이 공교육에서 벗어난 제대로 된 교육을 해보자는 것 아닌가? 학부모 입장에서는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이라면 사설학원도 선택제라고 볼 수 있으니 일종의 대안학교인 셈인가? 무엇보다 각 대안학교가 옳다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공교육 내에서 교사가 가르치는 과목은 국가에서 다 지정한 것들이다. 교사가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교수가 자기 이름을 걸고 과목을 개설하는 대학교라면 모를까 학교에서 담임 선택제를 하라는 것은 권리는 주지 않은 채 의무만 강요하는 모양새다. 대학교에서도 학점 잘 주고 편하게 해주는 교수가 인기가 있는 현실인데 학교에서 이런 제도가 실시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선하지 않은가? 학생들이 잘 가르친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 교수를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다. 학문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어떤 과목을 청강하는 것은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서 이루어진다.

지금도 사립대학을 중심으로 인기 없는 과는 없애고 있다. 인기가 없는 이유는 취직에 도움이 안 되고 당장 현실에서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장자의 말처럼 이는 국가의 교육체계가 무너지는 일이다. 담임을 선택하라고 할 때 사람들이 어떤 담임을 선택하는 지는 사회문화와 구조에 달려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교육의 본질에 부합하는지부터 따져 물을 일이며, 학부모 참여는 학급보다 학교 차원에서 선행되어야 할 일이라는 점에서 담임 선택제는 아직 나올 이야기가 아니고 동의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기본전제인 담임 선택제로는 학부모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다는 주장부터 그 근거가 희박하다. 우리가 사람을 고용할 때 그 사람과 같이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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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03-29 0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책에서 얻은 아름다운 빛과 이야기로
아름다운 손길을 나누시겠지요?

마치 제가 이 책을 읽은 듯이
느낌글 잘 읽었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널리 헤아리면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가
한 분 두 분 꾸준히 늘어나
어디에서나 즐거운 배움과 가르침이
퍼지리라 믿어요.
 

3학년 첫 번째 독서모임은 김산 선생님의 그림책 읽기로 시작되었습니다. ‘나무는 좋아’라는 책을 읽어주셨는데 이번 독서모임 책의 주제와 잘 어울리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용은 좀 밋밋한 감이 있지만 장마다 흑백과 컬러가 교차되는 특이한 구성, 나무를 심자 라는 교훈은 꽤 의미심장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림책 읽기 후 본격적인 밑줄 독서 나눔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기존에 이미 독서모임을 해본 사람들부터 나눈 후 새로 오신 분들의 나눔이 있었습니다.

많은 나눔이 있었지만 여기에는 몇 개만 간추려봅니다. 먼저 장인에 대한 이야기인데, 과거와 달리 사회가 분업화 되면서 ‘장인’이라고 불릴만한 존재가 사라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장인이라는 존재가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과정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사라짐으로 인하여 아이들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배울 기회가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사들 중에도 아이들 주변의 삶에서 접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어떻게 탄생하고 사라져 가는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고명재 선생님 말씀 따라 교사는 깊이는 아니어도 전반적인 내용을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치 ‘대목장’처럼 말입니다.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교사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삶과 유리된 우리네 교과서, 교육과정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 교육이야기도 등장하는데 이 책의 교육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학교교육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른바 도제교육인데 이는 과거 르네상스 시절 유럽 길드에서 등장한 것으로 어떤 특수한 기술은 여전히 이런 교육이 실시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제교육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지 않습니다. 그저 함께 생활할 뿐이고 제자가 스스로 학습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스승의 입장에서 굉장한 조바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조바심을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이 바로 스승에게 요구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도제교육의 이야기는 오늘날 학교와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학교교육이 배워야 할 점도 분명히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교사는 전반적인 내용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교사는 이를 앎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사들은 강의식 수업에 너무 익숙해져 말로 전달하는 것으로 교육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물론 말로 전달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고 아이들이 마땅히 잘 전달받아야 옳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보여줘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사실입니다. 교과서의 글들은 교과서답게 잘 정련된 것이지만 추상적·개념적인 것들이 대다수입니다. 아무래도 언어로 표현된 것이라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말고 실질적으로 본이 될 수 있도록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학교의 의무 중 하나는 사회화입니다.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무는 아이들의 원만한 사회 생활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아이들의 개성, 책에서는 성깔이라고 표현되는데 이러한 다양성을 목재를 합판 만들 듯이 죽여버린다면 이는 사회의 진보를 꺾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자가 말했듯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생각해얍니다. 학교 내에서 지금 사회 내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재능이 미래에는 다른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 쓸모라는 것도 사회의 인식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가지치기는 필요하지만 아예 죽여버리는 것은 지양해야할 바입니다.

책의 모든 내용이 다 일맥상통합니다.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신 모든 나눔들이 다르지만 하나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저자의 나무에 대한 태도는 우리가 배워야 할 바가 아닌가 싶습니다. 동시에 사람을 다룬다는 점에서 더 강한 인내심과 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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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03-29 0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서는 어버이가
학교에서는 교사가
서로 아름다운 어른으로서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즐겁게 잘 클 테지요.

시골에서 살며 날마다 느끼는데
나무는 우리가 심거나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드리로 크게 뻗어요.
따사로운 손길이 아니라면
나무한테 도움이 되는 일이 없더군요.

깊은 숲에서 수천 해를 살아온 나무는
사람 손길을 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우람하게 자라는구나 싶어요.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는
우람하게 나무가 뻗기가
참 힘들거든요...
 
나무에게 배운다 - 비틀린 문명과 삶, 교육을 비추는 니시오카 쓰네카즈의 깊은 지혜와 성찰 ㅣ 나무에게 배운다 1
니시오카 쓰네카즈 구술, 시오노 요네마쓰 엮음, 최성현 옮김 / 상추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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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학교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공교육은 근대의 산물이다. 그 이전에는 사교육이 있을 뿐 공교육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근대 국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국가와 민족의 기치 아래 사람들을 재탄생 시켜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공교육, 바로 학교다.

 

   이러한 역사성이 기반이기 때문에 학교는 국가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다. 돈을 지급하는 주체이니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교육이란 활동이 하나의 국가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간섭을 교사가 어디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일지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여하튼 학교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획일화된 ‘인력’으로 만드는 일종의 공장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역할은 다양성과 창의성, 개성이 강조되는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다.

 

   물론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기본 교양과 일정 수준의 지적 능력은 모든 사람이 필요한 것이기에 보편성을 갖는다. 따라서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내용과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학교와 교사의 입장에서 필요한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공교육이 지탄을 받고는 있어도 기여한 점은 분명히 있다. 문맹률이 이렇게 낮은 국가는 전 세계를 둘러봐도 드문 편이다. 이는 분명 학교가 자랑으로 삼을만한 자랑거리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처럼 모든 학생이 하나의 진로를 향해 미친 듯이 순위 경쟁을 펼치는 것은 문제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지금도 이범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문제제기만 있을 뿐 뾰족한 해결책이 그다지 없다는 데 있다.

 

   푸코는 학교가 ‘감옥’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가끔 교사로서 하는 일이 교도관, 경찰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아무래도 다인수 학급에서 교사가 수업과 학급운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통제와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정 수 이상의 사람이 모이면 제도적 관리와 통제는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 특별히 잘못하고 있다거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교육이란 활동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고 관리와 통제를 하다보면 내가 무엇을 위해 앞에서 떠들어대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내가 수업을 하는 것인지 조용히 시키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정신이 멍해지는 때가 요즘 들어 많아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나무에게 배운다’ 란 이 책을 읽은 것은 나름 시의적절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과거 대목장이었던 ‘니시오카 스네카즈’ 씨가 구술한 것을 정리한 것으로 그의 경험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일본인이 쓴 책이라 잘 모르는 부분도 있지만 대목장으로서 그의 나무에 대한 태도와 목수로서 대목장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저자는 나무도 성깔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니 나무 역시 인간처럼 개성이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은 아니다. 다만 나무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이 없다보니 잘 느끼지 못했다.

 

   성깔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이는 사용하는 방법에 달린 문제다. 성깔이 있는 나무를 쓰자면 번거롭지만 잘 사용하면 그쪽이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 성깔이 있는 나무는 생명력 또한 강하다. 우리가 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보면 나름 다 한 성깔 한 사람 아닌가? 성깔을 살려 나무를 사용해야 비로소 천년을 버틸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편리한 도구들이 등장했고 굳이 나무를 제련할 때 그 성격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 나무의 성격이 아예 나오지 않도록 합판으로 바꿔버리고 다루기 쉬운 나무를 찾는데 노력을 기울인다. 마치 말 잘 듣는 학생을 찾고 학생들의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획일화된 교육내용을 전달하는데 급급한 내 모습과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어떤 유행에 따라 획일화된 방법론을 적용하는데 급급한 학교의 모습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방법의 획일화는 다양한 목재의 성질을 제거하여 합판으로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무를 대하는 것과 학생들을 대하는 것을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나무가 개성이 있다 하더라도 목수와 나무의 관계는 주체과 객체가 명확한 편이다. 반면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는 비록 학교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제약을 바고 있긴 하지만 주체와 객체가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 때로는 교사가 학생에게 배울 때도 있고 학생 역시 교사를 능동적으로 대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을 넘어선 교육철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대목장으로서 저자의 경험 역시 많은 생각과 과제를 던져준다. 대목장은 다른 목수들보다 우월한 능력을 지녀야함은 물론이고 다른 목수, 미장이, 석수장이들을 조화시켜 건물을 완성시켜야 한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떠올리게 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교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떻게 보면 이상적인 교사는 이 대목장의 모습 아니겠는가? 다양한 학생들의 개성을 조화시켜 하나의 학급을 꾸려나가고 그들을 길러내는 것은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다. 거기에 학생들이 갖추어야할 보편적 교양 역시 가르쳐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애정과 사명감이 없다면 걸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대목장과 같은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저자는 주로 절 건축물을 상대로 솜씨를 발휘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에 불교 경전을 읽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의 수업을 잘 하기 위해서는 자료를 찾고 멋진 수업기법을 연구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 명의 수업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개성을 길러주고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이러한 노력에 다양한 독서와 경험이 덧붙여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다.

 

   교컴지기 함영기 선생님은 새학기를 맞이하여 어떤 연수를 듣는 다던가 특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을 가다듬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스킬도 필요하긴 하지만 그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가다듬는 것, 이른바 ‘수신’이 교사의 전문성을 기르는 데 꼭 필요한 것 아닐까? 우리학교가 독서모임을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기술적 측면만 보면 책 읽고 독서모임 했다 해서 수업이 변하지는 않는다. 특히 이번에 읽은 이 책은 목수의 삶과 자세 이야기기 때문에 당장 적용할만한 뭔가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모임을 하는 것은 바로 ‘수신’을 위해서 아닌가 싶다.

 

   자유주의자로서 나는 아무래도 애들의 의견에 좀 휘둘리는 경향이 있다. 굳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허용해야지 하는 생각이라 그렇다. 그게 내 문제점인 것 같다. 아직 아이들은 독립된 개인이 아니다. 민주시민으로서 준비된 존재도 아니다. 그 과정에 있는 아직은 보살핌과 교육을 받아야하는 존재다. 아이들의 개성을 잘 길러주면서도 가르쳐야 할 것을 잘 구분하여 반드시 가르칠 수 있도록 자신을 다듬을 필요가 있겠다. 아이의 인권에는 자유권도 있지만 교육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육의 의미에 대해 더 고민하고 노력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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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03-29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쓰신 느낌글을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읽혀 보아도
여러모로 서로 좋은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으리라 느껴요.

바바라 쿠니 그림책 <바구니 달>을 보면,
이 그림책에서도 '숲(나무)이 들려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비로소 숲에서 무언가를 얻고 살아갈 수 있다는 대목이 있어요.

교사는 아이들 목소리를 듣고,
아이들은 교사 목소리를 들으며,
서로 마음으로 사귈 때에
교육이 이루어지겠구나 싶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
마커스 J. 보그 지음, 김태현 옮김 / 비아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거 뭐.. 밑에 분은 책에 대해서 평점을 내리는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 신앙 점수를 매기는 것인지...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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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 - 십대들의 창조적인 인생 밑천 만들기 프로젝트
김종휘 지음 / 양철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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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달리 사회의 발달속도가 빨라지면서 세대차이가 빠르게 그리고 넓게 생기는 것 같다.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나는 50대 분들의 정서를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공감도 이해도 할 수 있다. 그분들과 공유하고 있는 몇몇 부분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아이들, 대한민국 10대 초반 아이들은 도통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내 머리로는 이해도 공감도 되지 않는다.

 

물론 30대라도 다 같은 30대가 아닌 만큼 나만의 문제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터넷 댓글들을 봐도 10대 아이들에 대해 감정적 대응 또는 피상적 인식만 있는 것으로 봐서는 최소한 현 대한민국 10대는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신인류인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닌 듯싶다.

 

10대, 흔히 사춘기라고 부르고, 교과서에서는 질풍노도의 시기, 과도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예전에 보았던 뇌과학 서적에 따르면 호르몬 분비가 불안정해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시기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이 사회의 기득권인 어른들은 그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그들을 마냥 어린아이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어정쩡한 잣대로 그들을 대하게 된다.

 

과거에는 ‘학생’이라는 명확한 정체성과 기준이 있었다. 때문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도 않았고 10대 역시 극히 일부가 탈선을 할 뿐 대개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체성과 기준이 무너졌다. 학생? 어쨌다는 것인가? 주변의 학생들을 볼 때 과연 그들이 같은 학생이라고 할 만한 어떤 기준이 분명하게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같은 학생 사이에서 파벌이 생기고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지금 시점에서 학생이라는 말로 그들을 가두는 것은 무리다. ‘청소년’이란 단어는 어울릴 수 있지만 ‘청소년’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 사회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 못하다.

 

무엇보다 학교가 더 이상 폐쇄적일 수 없다는 것이 과거 학생이라는 정체성이 무너진 중요한 이유다. 물론 지금도 학교는 다른 기관에 비해 폐쇄적이고 보수적이긴 하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과 정보혁명의 시작으로 이미 학교 내에 바깥의 문화가 들어온 지 오래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학교의 체제에 순응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일 따름이다.

 

10대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저자는 다양한 프레임을 사용하여 10대에 대해 설명한다. 산업혁명 세력을 핫세대, 386 민주화 세력을 쿨세대, 지금 10대를 웜세대로 부르는 데 전적으로 동의가 되지는 않지만 제법 그럴듯하다.

 

저자는 10대와 파트너십을 형성하라고 요구한다. 지금 10대는 부모세대의 과보호를 받아 자기결정력을 상실한 세대다. 그들은 모든 결정을 부모에게 미루고 부모의 명령에 순응한다. 그러다보니 20대가 되어 사회에 나서야할 시기에도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한다. 이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역경을 극복해나가는 경험의 축척이다. 그러기 위해서 어른들이 그들의 멘토 역할을 해줘야 한다.

 

프랑스에는 은퇴한 노인들과 불량 청소년이 짝을 이루어 여행을 가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 프로그램을 끝내고 나면 불량 청소년은 변하게 된다. 자신보다 많은 인생을 겪은 노인들과 같이 부딪히고 어울리며 그들은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극복하고 정복해나가는 경험을 쌓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이 쌓이고 쌓인 결과 성장하게 된다. 제대로 된 어른이 된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10대는 과거와 다르다. 정보의 홍수로 이미 알 것은 다 아는 나이고, 어른들의 부조리함도 명확히 알고 있다. 지금 정권의 횡포에 맞서는 고등학생도 존재하며 정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들을 미성숙한 인간으로 취급하며 저쪽에 가서 공부나 하라고 하는 것은 어른들의 편견, 오만일 따름이다. 오히려 10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할 필요가 있는 쪽은 바로 그 어른들이다.

 

저자는 사회적 기업가 정신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10대와 파트너십을 구축할 때 그들의 잠재력이 폭발하고 창의성이 발휘되며 사회적 기업들이 성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은 아직 근거가 부족하긴 하지만 몇몇 성공적인 사례를 보면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시킨들 학력인플레만 초래할 뿐이고 소수의 승리자를 위한 들러리로 전락시킬 따름이다. 오히려 그들이 이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아니 어울려야 한다.

 

제목만 보면 놀이에 대해 설명하는 책 같지만 이 책은 10대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그들의 자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하는 책이다. 물론 제목에 어울리게 10대의 특성 중 놀이정신이 나온다. 그들은 일과 놀이, 학습을 구분하는 존재가 아니다. 어른과 달리 이 셋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일이 놀이고, 학습이 될 수 있다. 지금처럼 학교 교실에서 교사의 수업을 받는 것만이 교육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 어른들의 고정관념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문득 뇌리에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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