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학교에 비고츠키를 연구하시는 박동섭 교수님께서 오셔서 강의를 해주셨다. 비고츠키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알 뿐 잘 모르기 때문에 새로운 이론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들었다. 반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의 재탕일지도 모른다는 작은 우려도 들었다.

 

학교가 인사업무와 성과급 관련 회의로 분주한 까닭에 강의의 시작은 약간 늦어졌다. 특히 학교 컴퓨터가 자동으로 리부트 되는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노트북으로 교체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약간 늦어졌지만 강의는 정상적으로 시작되었다. 교수님은 초반부라 그런지 바로 비고츠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보다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상식이라 불리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셨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본론인 비고츠키의 사상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강의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박동섭 교수님게서 말씀하신 비고츠키는 데카르트로 대변되는 서구 본질주의의 영향을 받은 주류 심리학에 의문을 품고 반기를 든 학자다. 그는 마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존재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확실히 사회적, 문화적 관습은 우리의 눈에 색안경을 끼우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가 백인과 흑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심리적 이미지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백인 문화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는 나에게 있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본질주의에 의문을 제기한 주장은 이미 니체나 비트겐슈타인 등을 통해 접한 바 있고 이는 현대 서구철학의 주류 흐름이기도 하다. 비록 깊게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철학과 관련된 책은 제법 읽었던 터라 그다지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양한 사례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박동섭 교수의 강의는 들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특히 강의의 백미는 닥터 진 영화에서 비고츠키의 사상을 찾는 것이었다. 이 영화의 에피소드 말미에서 주인공이 남긴 메시지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이 잘난 줄 알았지만 에도시대에 떨어져보니 내가 잘난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연구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고백을 남긴다. 그 고백을 들으면서 박동섭 교수가 발견하고 알리고 싶어하는 비고츠키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우리가 말하는 본질이란 과거의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노력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본질이란 것은 어쩌면 거대한 대양 위에 떠도는 빙산 한 조각일 뿐이다.

 

박동섭 교수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고 세상을 분리된 것으로 보는 현대 사회에 귀중한 이야기다. 그런데 한편으로 불편함도 느껴졌다. 문화와 관계에 좌지우지 되는 것이 인간이라면 는 무엇일까? 양승현이라는 이름을 지닌 나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나에게 있어 이것은 정체성과 자유의지의 문제다.

 

특별한 근거는 없지만 나는 인간이 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인생이 너무 덧없지 않은가?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서도 유지되는 가치는 존재한다. 오늘날 인권이라 불리는 이것은 문화의 가치와 수준을 논할 수 있는 근거이자 본질이다.

 

우리는 모든 문화를 인정할 수 없다. 식인 풍습을 아무리 문화상대주의 관점을 고수하더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바람직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도 가장 근본적인 본질은 존재해야 한다. 본질이 없다면 바람직한 문화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며 인류가 어떻게 진보할 수 있단 말인가?

 

비고츠키에 대해 교육학으로만 접한 사람들은 박동섭 교수의 강의에 상당한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교육학이라는 좁은 영역에서 피상적으로 비고츠키를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비고츠키에 대해 많은 의문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요즘 혁신학교 패러다임에서 비고츠키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기 때문이다. 박동섭 교수와 같은 열정적이면서 탐구적인 학자들이비고츠키의 진면목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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