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내공 - 인생의 품격을 높이는 읽기.쓰기.생각하기
박민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요즘 나오는 책들을 보면 인문도서가 꽤 많은 것 같다. 이제는 꽤 오래된 일이지만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바 있다. 주로 참고서, 문제집, 실용서같은 책을 주로 읽는 한국 사람들이 이 정의론이라는 골치아프면서도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책에 열광했다는 것은 참 특기할만한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도 꽤 높아졌다. 경제실용서들만 보더라도 논어, 맹자, 중용, 장자, 묵자, 노자와 같은 과거 위대한 선인들이 쓴 책 이름이 항상 붙어있다. 

  왜 한국사람들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아진 것일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계경제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무의식 중에 현 사회체제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일까? 이유야 어찌되었든 인문학이라고 하면 현재와 관련없는 신선놀음이라고 보는 시선에서 벗어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는 없다.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나오는 책들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대다수의 책이 잘 보면 경제실용서, 자기계발서기 때문이다. 생활과 밀접한 경제실용서와 자기계발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둘하고 인문학은 어울리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지 어떤 사익추구를 위한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민영 작가가 지은 이 <인문내공>이라는 책은 특별하다. 이 책의 표지에는 '경력도, 스펙도 인문적 사고를 이길 수 없다'라는 도발적 문구가 실려있다. 상식을 뒤엎는 주장을 바탕으로 하는 이 책은 인문학이 무엇이며 그리고 왜 필요하지, 인문내공을 키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방법론까지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아마 이 책을 보는 것 만으로도 읽고, 쓰는 능력이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 확신한다.

  저자는 얼핏보기에는 인문학이 중요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인문학이 고사되고 있다고 말한다. 중요시되고 있는 인문학은 기업경영이나 자기계발에 필요한 '기업인문학'일 뿐,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세계를 관조하는 인문학은 여전히 찬밥신세라는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인문학이 중요시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긴 하지만 인문학조차도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자본의 논리는 과거 상아탑이라고 불리는 대학을 이미 점령한 상태다. 과거 대학생들이 '지성인'으로 대접받았고 독재에 저항하기 위하여 공부했던 반면 현재의 대학생들은 '지성인'은 커녕 학점이 걸려 있지 않다면 최대한 공부를 피하려고 하고 있다. 경제적 필요에 의해서만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시절이 시절인만큼 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대학생'이라는 호칭이 가지고 있던 무게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모습은 슬픈 일이다.



1.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들


  인문학은 얼핏보면 별 필요가 없어보인다. 그저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먹고 사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학문처럼 보인다. 당연한 말을 그냥 어려운 말로 할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분명 인문학은 제테크서나 자기계발서에 비교하면 개인의 사적이익을 추구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좀 더 시공간을 넓게 본다면 그렇지만도 않다. 이를 미국의 언론인이자 사회비평가인 '얼 쇼리스'가 클레멘트 코스라는 노숙인을 포함한 사회 하층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를 마련하여 입증한 바 있다.

  '클레멘트 코스'는 매우 특이하다. 일단 그 대상이 마약중독자, 노숙자, 전과자, 매춘부, 실업자다. 좀 어이없지 않은가?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게 인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 돈이나 지원하라고 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과정은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서른한 명을 대상으로 1년 동안 대화와 토론을 통해 철학과 문학, 역사, 예술, 논리학을 가르친 강좌에서 열일곱 명이 수료증을 받았고, 그 중 열네명은 뉴욕 바드대 심사를 거쳐 학점을 취득했다. 이 중 두 명은 나중에 치과의사가 되었고, 한 명은 간호사가 되었다. 

  경이롭지 않은가? 만약 이들에게 돈 한푼 더 지원하고 직업교육을 시킨다면 이 정도의 성과를 서둘 수 있을까? 우리나라 현실을 돌이켜보면 감히 없다고 단언지어도 좋을 것 같다. 인문학의 힘이라는게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 자기계발서도 자신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대다수의 자기계발서 구입자가 3년 후에 비슷한 책을 또 구입한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이다.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기에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사회의 하층계급은 자신의 존엄에 대해 확신이 없다. 오히려 부정한다. 어떻게 보면 인문학이 정말 필요한 계급은 먹고사는데 걱정이 없는 상층계급이 아니라 이들 하층계급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화는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책에 나오는[25쪽]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도그마에 빠진 사람들을 옹호하는데 악용될 수 있다. 자기 신념에 따라 다른 사람을 요리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때문에 부르제의 말이 명언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가다듬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노력의 원동력이 인문적 사유능력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인문학은 개인에게 있어 유용하다. 당장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그 광대한 사유의 흐름에 빠지게 되면 자기계발서 이상으로 자신을 계발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인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개인의 유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인문학이 요구되는 것은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이 심화되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환경위기, 양극화 등 자본주의라는 걸출한 경제사상이 가지는 모순이 집약되어 이제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다. 그동안 사람들은 이 위기를 외면했지만 이제는 외면할 수가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천시했던 인문학을 다시 불러오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처한 위기는 총체적인 것이다. 때문이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분야가 아니라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러한 사람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요하다. 

  위기의 극복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어떻게든 위기를 극복해왔다. 문제는 이게 임시방편 땜질처방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기본 속성상 경제위기와 환경위기, 양극화 현상은 이번에 어떻게 잘 해결하더라도 재발될 가능성이 여전히 잠재되어 있다.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계속 이야기되고 있는 자본주의 4.0과 같은 새로운 자본주의일 수도 있고, 사회주의거나 스웨덴의 비프로그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인문적 사유능력이다.



2. 거리를 두고 세상 바라보기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거리를 두고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거리란 물리적인 용어가 아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받아들여도 저자의 생각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코끼리와 소경의 비유'를 보자. 여기서 소경은 코끼리의 일부를 가지고 코끼리가 기둥같다거나 항아리 같다고 주장하고 서로 다투었다. 분명 소경들은 자기 주장에 확신과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 말이 아예 다 틀린 것도 아니다. 분명 코끼리 다리는 기둥 같으니까 맞긴 하다. 그러나 이 경우처럼 일부로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가 될 수 있다. 코끼리 다리는 기둥 같지만 코끼리가 기둥이라고 하면 헛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거리를 두고 코끼리의 온전한 모습을 보면 된다.

  흔히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고 한다. 미네르바의 올빼지는 지혜의 상징이다. 그런데 왜 하필 황혼녘에 날개를 펼까?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황혼녘이야말로 자신의 하루를 되돌아보기에 적합한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혼녘은 하루를 마무리 짓고 하루에 있었던 일은 차분하게 되돌아보기에 충분히 거리를 둔 시간이다. 따라서 하루를 되돌아보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보통 이 말은 헤겔의 <법철학>에서 나온 것으로 지혜나 학문이 현실의 사건이나 문제에 개입하여 해결책을 주지 못하고 모든 일들이 끝난 뒤에야 명료하게 정리되는 '학문이 현실에 뒤쳐지는' 한계를 꼬집은 말이라고 하지만 저자의 견해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은 우리가 거리를 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다채로운 이미지와 스펙타클한 영상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거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잠시라도 가만히 휴식할 줄을 모르고 우리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영상을 보고자 TV를 켠다. 

  TV가 바보상자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TV를 보는 동안 우리의 의식은 강렬한 영상 속에 잠기게 된다. 또한 TV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들은 맥락이 일정하지 않다. 특히 예능의 경우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전혀 생뚱맞은 전개도 이어지고 이러한 전개가 칭찬을 받는다. 이러한 전개과정은 우리의 의식이 TV의 영상에 더욱 집중하게 하여 거리를 두고 생각할 수가 없게 한다. TV를 보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TV를 켜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말할 정도가 된다면 이것은 중독이다. 

  우리의 생각을 잡아 당기는 것은 TV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국가를 제외하고도 몇가지 집단에 소속되어 있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집단에 소속되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문제는 집단의 논리와 자신의 생각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집단의 논리는 집단을 위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개인에게도 이득이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개인의 사익을 추구하는게 아니라는 점에서 도덕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집단의 논리는 때때로 개인에게 폭력으로 다가가기도 한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포장하면서 집단의 생존을 위해서 개인을 쉽게 내팽겨치는 것은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많은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분명 숭고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을 공동체가 강요하게 된다면 문제가 된다. 실제로 그러한 희생의 강요는 그 공동체의 권력자들에 의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전쟁을 벌인 당사자들은 죽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집단의 논리가 더 크게 보면 비도덕적인 경우가 다반사다. 가장 큰 사건이 아마 나치의 유대인 학살일 것이다. 독일 공동체의 논리에 의해 유대인들은 열등한 종족으로서 힘없이 죽어나갔다. 아마 그 누구도 이를 도덕적이라고 보진 않을 것이다. 이 사건은 집단의 논리가 도덕적이라는 말은 그 집단 내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거리를 두고 사고하는 것이 바로 인문적 사유능력이다.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 나와있지만 우리가 희대의 살인자로 알고 있는 아이히만은 건전한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고 특별히 살인마로서 특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상부의 명령에 아무런 생각없이 응했고 그 결과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그 재판이 정당한지 여부는 제외].

  우리가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생각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생각하지 않으면 대중매체를 통해 전해진 사회통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것은 대개 옳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러한 상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또한 아이히만처럼 잘못된 관념을 옳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이 있다. 공리주의의 최대강령인데 얼핏보면 당연한 말인 것처럼 보이지만 최대다수에 해당되지 않은 소수의 경우 그 다수가 누리는 행복만큼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최소수의 최소고통을 주장한다. 나 역시 저자에 생각에 동의하며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문적 능력이 필요함을 재확인한다. 



3.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

  오늘날 사회는 과거와는 달리 대량생산을 중점으로 하고 있고 사회현상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면서 전문화와 분업화가 심화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각 분야별로 '전문가'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고 우리는 그 '전문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참조하여 자신의 행동방향을 결정한다.

  '전문가'는 자신의 전공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우월한 능력을 보이는 '스페셜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전공분야를 강조하기 마련이며 자신의 전공 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대학교수들도 같은 역사학이라 하더라도 전공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취약한 면모를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 전문가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우리가 배워야할 내용이 폭증했고 생산구조가 분업화된 시점에서 과거 다양한 분야에 능했던 '르네상스형 인간'은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회의 분업화, 전문화를 방치해도 좋은 것일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코끼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분업화와 전문화는 생산의 능률과 전문지식의 심화에 기여했지만 대신 사회와 자연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혹자는 전체적으로 보는 능력이 실무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의 판세를 가늠하지 못하고 자신의 영역만 보는 사람의 생각이고 배를 움직이는데 선장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과 다를바가 없다. 

  특히 사회의 지도자와 회사의 최고 경영자의 경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 더더욱 필요하다. 국가와 회사를 앞으로 전진시키기 위해서는 각 조직체가 전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국가와 회사가 속해 있는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계속해서 변하고 있는데 지도자가 자기 전문분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신의 전문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거기에만 집중하는 게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위대한 발견이나 예술작품, 철학사상은 외부 분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자신의 분야에만 집중하는 것은 도리어 독이 될 수 있다. 전문분야에서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은 필요하다.

  요즘 떠오르는 '통합''통섭''융합''이라는 용어도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가 모든 분야에 능수능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전문분야 외의 영역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 전체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스페셜리스트가 되기 이전에 '제너널리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대학에서 교양 과목을 배우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 아니겠는가?



4. 인문내공을 기르기 위한 교육이 필요성

  오늘날 공교육이라고 불리는 국가주도의 제도교육은 독일[프로이센]에서 시작된 것으로 군대에 충성하는 군인, 사용자에 순종하는 노동자,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진 시민을 양성하기 위하여 시행되었다고 한다[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시대상 그럴 법 하다]. 제도교육은 기존의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 교육 형태를 강제로 소멸시켰으며, 국가가 교육을 독점하게 되었다. 공교육의 시작은 애초부터 지성인의 양성과 같은 고매한 목표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저자의 주장과 다르게 오늘날 공교육은 그 목적이 과거보다 많이 업그레이드 되었다. 지금은 '창의인성'을 키워드로 아이들을 창의적이고 인성을 갖춘 인재로 키워내겠다고 한다. 물론 국가교육과정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과정을 보면 저자의 주장처럼 과거와 별로 다를바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최소한 공교육의 방향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방향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학교교육은 과거 독일에서 이뤄진 교육과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진도 나가기도 버거운 교육과정의 요구, 강제적인 학교행사와 애국조회, 30명에 육박하는 학생들도 북적북적한 교실 등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은 목표로 하는 이상과 매우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교육은 학생들을 훌륭한 지성인으로 키워내기 보다는 단순 사실을 잘 기억하고 시험문제를 잘 푸는 학생으로 만들어나간다. 학교교육과 대학입시라는 조합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없애고, 기득권을 향한 개인의 노력을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이것은 꽤 유감스러운 결론으로 이어진다. 바로 학교라는 존재가 지성과 인성을 키우는 곳이 아니라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고 기존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요소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비판의식에서 '독학'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이라는 용어가 문득 떠오른다. 분명 학교교육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설명식 수업보다는 독학이 더 학생의 지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독학이 과연 정답인지는 의문이 든다. 독학이라는 것도 어느정도 기본 지식이 갖추어져야 가능하다. 기본 지식 없이 책을 읽으면 저자가 기대하는 것처럼 독립적인 사고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비판적으로 책의 내용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엉뚱한 방향으로 자신의 생각을 확장시켜나갈 수도 있다.

  공교육에 복무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독학보다는 학교교육이 여전히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책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교사라고 하는 먼저 앞서 인생을 살아간 존재에게 학생들은 더 많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의 지적처럼 참고서, 문제집 위주의 교육은 탈피해야한다. 많은 교사들이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아직 부족한 점도 많지만 지성과 창의성이라는 것도 기본 지식이 바탕이 될 때 가능한 것이다. 학생들이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하고 독학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라도 학교라는 존재는 필요하며 대신 교사들도 부단히 자기연찬해야 할 것이다.



  인문이란 사람의 무늬라고 한다. 사람에 대해 공부하는 학문이 인문학이며 사람에 대해 공부한다는 것은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학문, 사상을 탐구한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탐구를 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게 되고 사회 전체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중매체에서 전달하는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또한 전문가라는 존재에게 자신의 생각을 위탁하고 그들의 말에 따라 살아가기도 한다. 이런 현실에서 사람들은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공동체 의식, 주인의식을 상실해가고 있다.

  <인문내공>이란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글에서는 언급하지 못했지만 저자의 독서에 대한 견해와 글쓰기 방법도 읽을만 하다. 아니, 많은 도움이 된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저자가 자신의 관점으로 현대사회를 바라본 내용이 실려있다. 앞 장에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어떻게 실천할지 보여주는 듯 하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책과 저자를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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