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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
전민식 지음 / 북폴리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책 <13월>은 소설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2012년 제8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전민식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고아로 자라 일찍이 비행과 범죄에 노출되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꿈꾸던 명문대 학생이 된 재황. 하지만 그에게는 결코 평탄한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 필연적인 가난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험한 유혹에 휩쓸리고 급기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마수에 빠져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 비밀 정부 기관 ‘목장연구소’에 소속되어 재황의 뒤를 쫓으며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여자, 수인이 바로 그다. 그녀는 ‘인류를 위한 숭고한 프로젝트’라는 연구소 측의 설명을 믿으며 누구보다 성실히 일을 수행하지만,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재황의 운명을 지켜보며 저도 모르게 그에게 깊이 빠져든다. 우성 인자를 연구하여 인종을 개량 하려는 비밀 정부 기관의 음모에 따라 실험 대상으로 키워진 남자와 점점 그의 그림자가 되어 가는 여자.
이 소설은 수인과 재황의 자신의 입장에서 쓴 이야기들이 교차하며 펼쳐진다. 특히 소설 <13월>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수인이 관찰대상으로 바라보는 재황의 모습에 깊이 빠져들었다. 수인은 그녀가 즐겨 보던 애니메이션의 제목인 '스폰지밥'을 생각하며 자신의 관찰대상인 재황을 '밥'이라는 애칭으로 정한다. 수인의 관찰대상인 재황은 그녀의 밥줄이기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을 고스란히 관찰한다. 수인은 밥의 전관찰자로부터 관찰자로서의 수인은 밥이 어떤 선택을 하던 대산의 변화에 심리적으로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충고를 받는다. 하지만 밥이 자신이 관찰하던 지난 1년과 달리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며 수인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더러운 연못에서 피어난 수련같았던 밥은 변화하기 시작했고 수인은 밥을 관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다.
"수인도 밥이 주문한 것과 같은 음식을 시켰다. 밥의 뒤를 쫓다 보면 기이하게도 금방 허기가 찾아왔다. 그런데 그 허기는 그가 먹는 걸 먹어야 채워졌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수인도 늘 같은 메뉴를 골랐다. 그가 학생식당에서 백반을 먹으면 그녀도 백반을 먹고, 카레라이스를 먹으면 카레라이스를 먹었으며, 청국장을 먹으면 청국장을 먹었다."
수인에게 밥의 전관찰자는 그림자가 색깔을 갖는 것을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대사가 눈길을 끈다. 수인은 밥을 관찰하면서 그림자가 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심해, 우린 그림자야. 그림자가 색깔을 갖기 시작하면 그건 우리가 대상을 닮아가고 있다는 뜻이야. 색깔이 생기는 걸 어떻게 하냐고? 저절로 알게 돼. 그럼 우리 일은 끝난다고 보면 돼. 해고당하는 거지."
수인이 비밀 정부 기관인 목장연구소에 취직한데는 그녀의 관음증과 강박증이 도움이 되었다는 면접관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약간의 강박증은 물론 조울증도 갖고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우리 일은 모든 일에 있어 완벽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누군가를 꼼꼼하게 훔쳐볼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지요."
"책임감과 일종의 숭고한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런 정서들은 외부 환경의 영향으로 쉽게 변색되곤 하지요. 그래서 관찰자를 선발할 때 편집증이라고 할 만큼 집요한 성향을 가진 인물들을 찾는 겁니다. 그 끈기와 집요함이 바탕이 되면, 희생정신도 그만큼 굳고 단단해지거든요. 1년을 채 버티지 못했던 관찰자들도 대상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런 책임감과 숭고한 의지입니다. 그렇다고 대상에 지나치게 몰입해 버려서는 안 돼요. 간혹 이 실험과 인간적 연민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연민이 인류 전체의 진보를 막는 족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살아간다는 걸 명심하세요. 그 선택이 선하든 악하든 우리에겐 그걸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일이에요. 아시겠지요. 이 일을 하는 사람 중 많은 수가 1년을 고비로 갈등을 경험합니다. 부디 중심을 잃지 않는 관찰자가 되어 주십시오. 우리의 실험이 윤리나 도덕보다는 인류 전체의 생존과 번영에 우선순위를 둔다는 점 역시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노력이 인류 발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 있다는 점, 부디 잊지 말아주세요."
수인은 도영이라는 연하의 남자가 있었다. 수인은 제멋대로 바람도 피고 제멋대로 스스로 명을 끊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할 남자, 잠들기 전 시린 등을 안아 줄 남자, 식당에서 홀로 밥 먹을 때 마주 앉아 같이 먹어줄 남자, 영화 볼 때 혼자라는 사실이 쑥스럽지 않게 곁에 앉아 있어줄 그런 남자를 필요로 했던 것인지로 몰랐다. 그래서 도영을 꽉 붙잡지도 그렇다고 느슨하게 풀어주지도 못한 채 관계를 질질 끌어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수인에게 이재황은 수인과 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보육원 출신인 재황은 명문대 학생이 되었지만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광모로 인해서 삶이 뒤바뀐다. 재황에게 광모는 그립지만 그렇다고 딱히 만나고 싶지는 않은 가조거럼, 미우면서도 밉지 않고 측은하면서도 측은하지 않은 존재였다. 광모는 외부로부터는 방패가 되어 주고, 그 대가로 자신의 말을 곧 진리로 여기도록 강요했다. 끊으며 해야 끊을 수 없는 가족의 의무, 부채의식 같은 것이 보육원 아이들이 광모에게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이유였다. 광모에게 찾아간 재황은 광모의 제안을 뿌리치기가 힘들었고, 결국 마수에 빠져든다. 또한, 재황은 자신이 다가가기 힘든 존재라고 생각했던 후배인 승희로 인해서 그는 소설을 짜집기해서 문학상을 수상하지만, 표절로 밝혀진다.
"어쩌면 승희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책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그녀의 신분에에 어울릴 만한 사람, 그런 사람이 된다면. 하지만 그 길을 찾아준 건 근래에 읽은 책이 아니라 손때에 절어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잭 런던의 '마틴 에덴'이었다. 잭 런던은 재황에게 길을 일러주었다. 천박한 존재가 밑바닥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작가가 되는 것뿐임을. 승희에게 걸맞은 존재가 되는 유일한 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자신의 과거는 물론 욕망도 이해받을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재황이 지옥의 강만큼이나 넓은 세상의 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방법은 작가가 되는 것뿐이다."
재황과 광모는 사람 찾는 일을 하는 '포에버'에서 근무한다. 어쩌면 부모의 근원을 알고 싶었던 재황이 그곳을 들어간 이유일지도 모른다.
책 <13월>은 우리 사회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는 감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이교덕 박사가 '인류애를 놓고 보면 악이지만 인류 전체의 진보와 존속이라는 가치를 우선에 두고 보면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한 부분을 읽고 인간 존재론적 위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삶은 미로이고, 미로의 끝을 발견한 재황이 있었다.
"인간은 늘 적격자를 생산하기 위해 오랜 세월 고뇌를 거듭했네. 과학자로서 부적격자를 방치는 것 그 자체가 곧 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렇다고 부적격자를 모두 걸러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인류를 구제할 길은 인간 종의 개량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사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데. 그러려면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이 곧 인간 행동과 감정에 대한 감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지.
예를 들어 한동안 밥이 광모라는 인간에게 끌려 다녔지. 사실 밥은 보다 일찍 그와의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자질이 있었어. 그게 때론 폭력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필요한 부분이지. 인류가 발전하려면 폭력과 억압은 사실 필요악이거든. 그런데 변수가 생기지 않았는가. 그 변수가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원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인간에게 무분별하고 불필요한 애정과 자비를 품는 건 사실은 인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들이야."
끝으로 작가의 말에서 문명의 발달이 인간을 어제보다 편하게 만들어 준 건 분명하지만, 그만큼 인간의 삶을 감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실감했다는 글귀에 공감갔다. 소설 <13월>은 감시라는 소재와 인간의 존재론적 위기에 대해 생각해본 책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현재 내가 있는 곳을 단 몇 초 만에 알아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문득 소름이 돋았습니다. 문명의 이기를 버리지 않는 한, 사람은 현대 문명의 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새삼 뼈져리게 깨달았습니다. 그 후에도 종종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가 편의의 이름으로 노출하는 정보들이 결국 우리를 감시하는 도구가 되어 있다는 것을요. 전화번호, 신용카드 내역, 교통 카드 사용 내역, 적립 카드 사용 내역, 스마트폰 사용 내역 등등. 일상적인 일이니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로 한 인간이 가진 취향이나 이동 경로, 성향, 심지어 철학이나 친구 관계까지도 파악할 수 있는 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