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 깨달음의 실천 편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주역 공부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김승호 지음 / 다산북스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 깨달음의 실천>은 주역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책의 저자인 김승호는 지난 50년 동안 '과학으로서의 주역'을 연구해 '주역과학' '주역풍수'라는 새로운 개념과 체게를 정립한 인물이다. 이 책은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 기초 원리 편>에서 좀 더 단계를 높인 것으로, 저자의 50년 공부 내공이 담긴 책이다. 이 책은 주역의 이면에 깔린 원리를 상세하게 추적하며 쉽게 이해하며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인생의 넓은 섭리와 만물의 변화 원리를 깨달을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한다.


"원래 사물의 이해란 생각하는 방법부터 합리적이어야 한다. 이 책은 비록 난해하다는 주역을 다루고 있지만 합리적 이해를 추구했기 때문에 무리 없이 주역의 핵심에 접근해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주역의 군주괘(君主卦)를 소상히 다루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군주괘 안에 괘상을 이해하는 근원적 원리가 다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것부터 파헤친다면 주역을 단숨에 이해할 수 있다."
(/ p.6)


이 책은 1장 주역의 문을 열다, 2장 깊은 주역 공부를 위한 기초, 3장 64괘의 시작 군주괘, 4장 군주괘의 의미와 구조라는 4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인생도 시작점이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태어나기 전에서 지금으로 초기화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전생이다. 하지만 이런 것까지 여기서 논의할 필요는 없다. 단지 만물은 시작점이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끝나고 나면 또 다른 시작점이 발생한 다. 이를 두고 ‘태엽을 감았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우리 인생 역시 계속 늙어갈 뿐 태엽을 감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인생에서 각각의 사건은 얼마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새로 시작하는 그 무엇을 주역에서는 지천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 p.43)


"물질이 음이다. 음은 무게가 있고, 만질 수 있고, 부피가 있고, 서로 잡아당기고, 딱딱하고, 땅을 이루고 있는 존재다. 우리의 몸은 어떤가? 이것도 물질, 즉 음이다.

우리의 영혼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물질이 아니다. 즉 음이 아니다. 음이 아니면 무엇일까? 양이다. 음이 아니고 양이고, 양이 아니면 음이다. 세상은 복잡하지 않다.(...)"


양이 깊숙이 있고 음이 높게 가 있으면 삶이고, 음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양이 위로 날아가고 잇으면 죽음이다. 삶과 죽음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물에 삶과 죽음이 있다.


저자는 영혼의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영혼의 힘을 계속 키워 나가다보면 마침내 하늘과 관통하게 되는데, 이때에 이르면 인새엥 있어 그 성취하는 바도 끝이 없을 것이다. 양의 기운을 아래쪽에 가둬놓는 것이 바로 양의 기운을 기르는 것이다. 양의 기운은 가둬놓으면 스스로 성장한다. 진득한 사람은 기운이 쌓여나가고 촐랑대는 사람은 기운이 소진되는 법이다. 저자는 인내심, 겸손, 침묵, 평화, 안정, 용서, 양보, 절제, 예의, 긍정 등은 양의 기운을 가워놓는 성질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양이란 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존재니 열심히 영혼의 기운을 길러나가야 할 뿐이다.

"문제는 영혼의 기운을 어떻게 키우느냐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2가지 방법이 있다. 두 방법은 상호 보완적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모두 알아두어야 한다. 첫 번째는 양을 기르는 것이다. 하지만 양이란 저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일 뿐이지 다른 원인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양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공자도 주역의 괘상을 설명하면서 자강(自强)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것, 이것은 유일하게 양을 기르는 방법이다. 그저 힘을 내라. 이유 없이 명랑해야 하며, 무서워도 용기를 내야 한다. 무서운 밤길도 혼자 걸어보고, 귀신 나오는 무덤가에 누워도 봐야 한다. 부끄러워도 나서봐야 하고, 쉬고 싶어도 일부러 일어나야 하며, 귀찮아도 앞장서야 하고, 미운 놈도 사랑해줘야 한다. 양이란 선행(先行)하는 것이지 이유를 기다리지 않는 법이다. 스스로 애써 행하다 보면 영혼이 활발해지며 급기야는 우주의 근원과 관통하게 된다. 좋아하는 것만 하는 사람은 점점 양의 기운이 약해질 것이다. 누가 방해하지도 않는데 어째서 스스로 못 일어나는가. 자기 자신이 원수일 뿐이다. 내 자신이 나를 막아서고 있으니 어찌 원수가 아니겠는가. 인생에서 재미있는 것만 재미있어 하면 마침내 재미는 사라질 것이다. 점점 우울해지며 영혼은 시들해진다. 이래서는 살아가는 보람도 없는 것이니 죽을힘을 다해 일어서라. 아니 그냥 일어서면 된다. 안 된다는 이유를 달지 말고 하면 다 되게 되어 있는 법이다."
(/ pp.61~62)


저자는 모든 것은 양과 음의 개념을 잘 활용하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이란 양이고 죽음은 음이다. 높은 것은 양이고 낮은 것은 음이다. 과거는 음이고 미래는 양이다. 양의 대표적인 성질은 활력이다. 무한히 살아서 움직이는 것, 이것이 활력이다. 음은 활력을 가급적 억제하려는 힘이다. 음은 어째서 양을 방해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양이 있으니 음이 있을 뿐이다. 그래야 평등하기 때문이다. 중용이란 바로 음양의 상호보완, 즉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세상에 음양이 없다면 우주 대자연 자체가 없어을 것이다. 양이 없으면 우주가 창조되지 못했을 것이고 음이 없으면 창조된 우주는 정착되지 못했을 것이다. 창조와 정착, 이는 음양의 중요한 예에 해당된다.


"음약은 서로 반대이면서도 서로 약점을 보완해준다. 남녀도 바로 그렇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민과 정부는 적당히 대립하면서 서로 보완해주고 있다. 사회도 한 가지 의견이 지나치면 파탄이 온다. 경제도 성장만 좋아해서는 안 된다. 안정도 필요하다. 지나친 성장은 위험한 것이다. 사람도 지나치게 흥분하면 안되지만 지나치게 침체되어 있어도 안 된다. 세상은 음양이 대립하고 또한 보완하면서 발전해왓던 것이다."


"무의 성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없음마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새롭다고 볼 수 있다. 없음에 또 없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라는 것은 있음의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을 만들어내는 힘, 이것은 바로 양이다. 화가들은 종이의 여백에 그림이란 것을 만들어낸다. 작곡가들은 소리 없음에서 음악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우주도 애당초 없었던것이 생겼다. 즉 무에서 온 것이다.

없음이란 것은 있음이란 것을 창조하기 위해 계속 기다린다. 양의 속성이 바로 이것이다. 없는 상태에서 있는 상태로 가려는 것. 이것은 모든 있는 것의 원동력이다. 사물은 있고 나면 변해가는데 이것도 변화 없음에서 변화 있음으로 가는 것이다. 무가 유를 낳은 것이고, 또한 양이 음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음은 수동적인데, 유라는 것이 원래 수동적인 사물이다. 양이 존재하면 음이 변해간다. 세상은 변하게 하는 것과 변해가는 것이 있는 셈이다. 변하게 하는 것은 양인데, 그것은 무의 속성과 완전히 맞아 떨어진다. 없는 것은 없는 것마저 없애고자 하기 때문에 결국 유를 만들어낸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하이데거는 무의 생동력을 실존이라 불렀는데, 이는 양에 다름 아니다. 양이란 가만 있지 못하는 존재다. 반면 음이란 가만있는 존재다. 둘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변화! 이것이 바로 자연의 모습이다. 원인은 양이고 결과는 음이 받아들인다. 양이란 항상 여기에서 저기로 가고자 한다. 저기에 가서도 또 다른 곳으로 가기를 원한다. 양이란 도달점이 없고 오로지 출발점만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시간으로, 시간은 가만있지 못하는 양의 성질 때문에 생긴다. 그 성질에 의해 변해가는 것이 바로 공간인데, 어떤 공간의 시간이고 어떤 시간의 공간인 것이다. 소위 시공이다. 사물은 시공의 일부로, 그 속에는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양이란 변화의 원인으로 사물을 이끌어간다. 음은 뒤에 처져 이끌리는 존재다. 음은 가급적 머물고자 하고 양은 가급적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하는데 이 둘이 절충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그러나 현재는 계속 변화게 되어 잇다. 양과 음은 서로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조화도 깨지는 법이다.

양은 음을 살리고 음은 양을 죽인다. 그로써 조화를 이루고 작용은 끝없이 전개된다.(...) 양이 있으면 음이 있다. 또한 음이 있으면 양이 있다. 둘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이런 까닭에 세상은 영원한 것이다."


저자는 인간은 태어나서 어딘가 순환할 축을 찾아 헤매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든 저 우주든 순환으로 가득차 있다. 사물이 순환하는 것은 존재 방식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은 안정을 취할 수 있다.

"순환을 놓친 사물은 쉽게 사라진다는 것, 이것이 주역이 보여주는 자연의 모습이다. 삶이란 순환을 유지해야만 지탱할 수 있는 법이다. 삶의 리듬은 바로 순환을 일컫는 것이다. 인생이 발전하려면 더욱 좋은 순환의 고리를 발견해야 한다. 순환 속에서 모든 것은 발전한다. 순환하고 있어야 더 좋은 순환으로 갈아탈 수 있다. 물론 좋은 순환이라고 해도 그 성질은 사상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 지금 주의해 봐야 할 것은 사상의 섭리 그 자체다. 이것을 응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래도 우리 자신이 현재 어떤 순환의 고리에 속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이다."
(/ p.124)


저자는 괘상을 볼 때는 2가지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괘상이 다른 어떤 괘상들과 비교되는지이고, 둘째는 괘상 자체가 갖는 뜻이다. 이는 괘상 자체의 뜻보다 비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역의 괘사을 이해하는 데는 그 자체의 뜻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 비료를 통해 점차적으로 이해하면 자신의 의미가 흔들릴 수가 없다.


사자는 기운을 감추고 있건만 숨어 지내기를 좋아한다. 무술의 고수도 바로 이런 자세를 취한다. 고수는 무서울 것이 없는 존재다. 그런데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피한다.

"실력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 원래 이렇다. 아는 것이 적은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몹시 부산스럽다. 시끄러운 사람은 실은 내면 세계가 부실한 사람이다. 사자나 무술의 고수, 그리고 학문이 깊은 사람은 자신을 감추기를 좋아한다.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도사린다는 말은 때가 아닐 경우 자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힘이 있다고 아무 때나 불쑥 나서면 흉한 일을 당할 수가 있다. 세상이 얼마나 다양하고 무서운 곳인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마찬가지다. 사자는 동물의 왕으로서 그에 걸맞은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택림 괘상은 도인들이 수행을 할 때 가장 기본으로 삼는 자세다. 힘이 있으되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낭비되지 않고 그 힘은 점점 더 쌓이는 법이다. 사람이 집에서 쉬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직 힘이 남아 있건만 집 속에서 휴식함으로써 그 힘을 더욱 키우고자 함이다. 이것이 바로 지택림의 가르침인 것이다."
(/ p.163)


지나간 것을 역사라고 말하듯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운명이라고 말해야 한다. 과거가 있듯이 미래가 있다. 미래가 있으면 바로 운명이 있는 것이다. 미래가 전개되는 방식은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이유인 '뜻에 의해서'이다. 뜻을 안다는 것은 그것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니 바로 미래를 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주역이란 만물의 뜻을 규명하고 그것의 변화를 통해 미래를 살피는 학문이다. 저자는 미래란 궁금함의 대상은 되지만 믿음의 대상은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래가 오면 그냥 그대로 '그렇구나'로 끝나야 하며, 다른 유감을 가지면 안 된다. 미래란 '아니면 말고'라는 식이 되어야 한다. 저자는 운명이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대해야 하는 것으로 감정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의미다. 순응이란 굴복이 아니며, 오히려 힘을 비축하는 행위다. 순응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세다.


"미래란 오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실망의 대상이 아니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미래를 미리 정해놓고 살면 안 된다는 뜻이다. 미래가 내 생각대로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의 몸이나 정신을 비롯해 우리 주변의 모든 현상들은 주역의 섭리 안에 있다.

다만 우리의 지성은 너무 급히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연을 바라보는 눈이 지나치게 분석적으로 변했다. 그 결과 나무는 봐도 숲을 보지 못하고 숲을 봐도 산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주역은 우리 인간이 잃어버린 지혜의 원천이다. 이른바 '원시지혜'라고 하는 이것은 발달된 지혜보다 훨씬 강력한 힘이다. 미래의 징조는 분명히 있고 우리 주변에 흔히 널려 있다. 인간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주역은 그것을 밝혀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징조다."


저자는 자연현상이든 사회현상이든 잠복한 기운이 발생했을 때 우리 인간이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주역에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괘상이다. 우리는 괘상을 통해 현상을 유추해내거나 혹은 현상에서 괘상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사물의 뜻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해진다. 사물의 뜻을 분명히 깨달은 후에는 그것을 처세에 적용하든 인격수양에 사용하든 전쟁에 사용하든 질병 치료에 사용하든 그 사용처가 자유롭게 열려 있다. 이른바 ‘알고 행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삶의 작용은 더욱 위대해지는 것이다."
(/ p.206)


저자는 경험도 못 해보고 생각도 못 해본 세계가 무수히 많은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말한다. 단지 다른 일을 할 방법을 모르고 또한 불안하기 때문에 현재를 선택했을 뿐이다. 무작정 새로운 일에 뛰어들라는 것이 아니고 가능성을 열어두고 연구를 쉬지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인생은 언제나 못해본 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 선택해보지 못한 세계는 무한히 다양하여 그곳은 우리의 영원한 꿈으로 남아 있다. 우리의 꿈이 항상 남아 있는 곳, 못 다한 곳, 그곳을 주역의 괘상으로 천지부라고 말한다. 이 괘상은 무한히 넓고 자유롭다는 뜻이다."
(/ p.221)


저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정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며, 그저 음과 양이 싸우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음은 양을 끌어내리려고 할 뿐이다. 사람을 계몽한다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고 세월이 필요하다. 저자는 땅 위에 굳건히 서 있는 산, 이것이 리더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한다.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을 깍아내리는 것,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흉보는 것,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를 원망하는 것, 제자가 스승을 비웃는 것, 직원이 사장에게 대항하는 것, 벌레가 멀쩡한 나무를 갉아먹는 것 등은 온 세상의 일반적 현상이다.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는 자연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주역은 만물의 뜻을 규명하는 학문인데, 뜻을 알기 위해서는 괘상을 살피고 사물을 살피고 세심히 연구해야 한다. 관찰력이 강해질수록 아는 것도 급격히 늘어난다. 저자는 주역을 깨닫기 위해 괘상 그 자체를 계속 관찰하라고 권한다. 괘상은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고, 그것을 한없이 바라보면 깨달음은 저절로 얻어지게 되어 있다. 주역도 처음엔 뜻을 알려고 하지 말고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관찰은 괘상으로 풍지관(風地觀)이다. 이 괘상은 바람이 땅 위로 스쳐가는 모양인데, 땅은 감추어진 사물이고 바람은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공자는 이 괘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땅 위에 바람이 불어가는 것이 관으로,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멀리 순행하여 살피고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베푼다(風行地上,觀;先王以省方,觀民設敎).” 이는 관찰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관찰한 것을 백성도 알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집 앞을 몇 년, 몇십 년 다니면서 계단의 개수도 모른 채 살아간다. 그런데 어떻게 만물의 뜻을 알겠는가? 매일 관찰하는 데 애써야 할 것이다."
(/ pp.233~234)


주역 공부는 머리로만 쉽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수도하는 자세로 필사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 이 책을 통해서 괘상 공부를 통해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겠다.


"여기서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주역을 공부함에 있어 괘상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역의 괘상은 알고 나서 실행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실행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지택림 괘상을 보고 땅 속에 깊게 자리 잡은 연못처럼 밖으로 넘치지 않고 고요히 안정하는 법을 실행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괘상을 더욱 깊게 깨닫게 될 뿐 아니라 인격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주역 공부란 원래 괘상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괘상을 실행하고 또한 괘상의 교훈을 처세에 활용해야 한다. 공자가 그렇게 했다. 괘상을 외우고 단순히 이해만 한다면 깊이가 없어 주역을 크게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주역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그리고 또한 지혜를 넘어서 실행해야 할 적극적인 교훈이다."
(/ pp.27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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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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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오베라는 남자>라는 소설로 전 세계 33개국에 판권이 팔리고 2백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한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이 책은 작가 프레트릭 배크만 특유의 해학과 삶의 통찰이 엿보이는 작품으로 인상적이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주인공 일곱 살 엘사는 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한데 되바라지기까지 해서 학교에서는 왕따요, 선생님들에게는 눈엣가시며, 주변 어른들에게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존재다. 그러니 당연히 친구도 없고 말상대라고 해봐야 엄마도 아니라 한 세대 건너뛴 할머니뿐이다. 손녀의 단짝인 할머니는 통속적이지 않은, 오히려 기존 관념의 틀을 깨는 독특한 캐릭터다. 볼일을 볼 땐 늘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성차별적인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학교 교장에게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전도를 목적으로 집집마다 방문하는 종교인들에게는 페인트 총을 쏘아대는 등 할머니의 기이한 행동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는 손녀를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라게 하는 양분 역할을 한다. 남들과 다른 엘사에게 "특이하다"거나 교장선생님이 "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할 때, 남들과 다른 건 특별한 거라고 가르쳐준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할머니가 편지 배달이라는 아주 중요하고 어려운 임무를 엘사에게 맡기면서부터 시작된다. 내일부터는 동화처럼 신기한 일들과 엄청난 모험이 펼쳐질 거라고, 그런 데 보냈다고 할머니를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집과 가족과 친구들을 지켜달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에 엘사는 미심쩍어하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할머니는 이메일이라고 못 들어봤"냐고 묻지만, 할머니가 맡긴 임무를 수행하겠노라 약속한다.


"세상의 모든 일곱 살짜리에겐 슈퍼 히어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정신과에서 검사를 받아봐야 한다."
(/ p.11)

"기본적으로 엄마는 질서 정연하고 할머니는 뒤죽박죽이다. 엘사는 예전에 ‘혼돈은 신의 이웃이다’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는데 엄마는 혼돈이 신의 근처로 이사 갔다면 그건 할머니네 옆집에 살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간 거라고 했다.
엄마는 모든 일을 파일로 정리하고 달력에 적어놓는 사람이라 누굴 만나기로 약속이 잡혀 있으면 15분 전에 휴대전화에서 종소리가 난다. 할머니는 기억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바로 벽에 적어놓는다. 집뿐 아니라 어디에 있건 벽에 적는다. 그걸 기억하려면 메모를 적어둔 그 벽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에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엘사가 이 점을 지적하자 할머니는 분개하며 “네 엄마가 그 코딱지만 한 전화기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더 크겠냐, 아니면 내가 부엌 벽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더 크겠냐!”라고 했다."
(/ p.35)

“할머니 병이 낫긴 나아요?” 엘사는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을 하는, 조금 있으면 여덟 살이 되는 아이답게 머뭇머뭇 묻는다.
“당연하지!” 할머니는 자신 있게 못을 박지만,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엘사도 알고 할머니도 안다.
“약속해요.” 엘사가 떼를 쓴다.
그러자 할머니는 몸을 앞으로 숙여서 엘사의 귀에 대고 암호로 속삭인다.
“약속할게,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기사야. 좋아질 거라고 약속할게. 전부 다 괜찮아질 거라고 약속할게.”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한다. 좋아질 거라고. 전부 다 괜찮아질 거라고.
(/ p.73)

"할머니가 있다는 건 아군이 있는 것과 같다. 그게 손주들의 궁극적인 특권이다. 자초지종이 어떻든 항상 내 편이 있다는 것. 내가 틀렸더라도. 사실은 내가 틀렸을 때 특히.
할머니는 검이자 방패다. 학교에서 그게 무슨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엘사더러 “특이하다”고 할 때, 엘사가 멍이 든 몸으로 집에 돌아올 때, 교장선생님이 “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할 때. 그럴 때 할머니는 지원군이 되어 엘사가 사과하지 못하게끔 한다. 자기 탓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너를 놀리는 게 재미없어질 테니’ 애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말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그냥 자리를 피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할머니는 그렇게 지각없는 사람이 아니다."
(/ p.75)


엘사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글을 남긴 편지를 전하러 다닌다. 할머니가 남긴 사과 편지를 전하는 일이 엘사가 만들어나갈 이야기였다.


"중요한 임무가 생겼으니까 이제 장난은 그만 쳐. 이 편지를 배달해야 하니까. 할머니가 사과하고 싶은 사람이 또 있나봐. 편지는 이게 다가 아니야. 할머니의 사과 편지를 한 통씩 배달하는 거. 그게 우리가 만들어나갈 이야기해."


엘사가 "'죽음의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엘사는 "슬픔과 상실감은 변함이 없는데, 그걸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면 어느 누가 버틸 수 있을까. 슬픔으로 마비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결국 슬픔을 가방에 넣어서 두고 올 만한 장소를 찾아 다닌다."라고 이야기한다.


"'죽음의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거야.' 엘사는 이런 생각을 하는데, 어디에서 들은 말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보면 깰락말락나라에서 나온 말인가 싶지만, 할머니가 죽음을 어떻게 대했는지 감안해볼 때 그건 아닌 것 같다. 죽음은 할머니의 숙적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죽음을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외과의사가 된 이유도 죽음을 최대한 도발하기 위해서였다."


이 책에서 할머니가 손녀 엘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들이 인상적이다.


" '싫다고 말할 줄 알았던 소녀'는 엘사가 맨 처음으로 들은 깰락말락나라의 이야기 중 한 편이었다. 여섯 개 왕국에 속하는 미아우다카스 왕국의 여왕에 얽힌 이야기였다. 처음에 여왕은 만인의 사랑을 받는 용감하고 정의로운 공주였는데 안타깝게도 어른들이 그렇듯 나이가 들면서 겁이 많아졌다. 그래서 어른들이 그렇듯 효율성을 사랑하고 갈등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에는 미아우다카스 안에서 모든 갈등을 금지시켜버렸다. 모두들 언제나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했다. 거의 모든 갈등이 누군가가 내뱉은 '싫다'는 말에서 비롯되기에 여왕은 이 단어마저 법으로 금지시켰다. 누구든 이 법을 어기면 당장 거대한 '반대론자들의 감옥'으로 끌려갔고, '찬성론자'라고 불리는 검은 갑옷을 입은 수백 명의 병사들이 수시로 순찰하며 어디에서도 싸움이 벌어지지 않도록 단속했다. 하지만 여왕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싫다'뿐 아니라 '아니다' '아마' '어떠면'까지 이내 추방했다. 이런 단어들을 쓴 사람은 당장 감옥에 갇혀서 평생 두 번 다시 빛을 볼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나자 '혹시'와 '만에 하나'와 '두고 보다'도 금지어가 되었다. 결국엔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여왕은 말하는 것 자체를 금지시키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거의 모든 갈등이 누군가가 내뱉은 말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그 뒤로 몇 년 동안 미아우다카스 왕국은 정적으로 뒤덮였다."


"그림자들이 미모바스 왕국에 몰래 들이닥쳐 선택된 자를 납치하려고 했을 때 그를 살린 건 구름 동물들이었다. 미아마스가 환상으로 이루어진 왕국이라면 미모바스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왕국이다. 사랑이 없으면 음악이 있을 수 없고 음악이 없으면 미모바스가 있을 수 없는데 선택된 자로 말할 것 같으면 온 왕국을 통틀어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선택된 자가 그림자들에게 납치되면 결국에는 깰락말락나라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미모바스가 무너지면 미레바스가 무너지고, 미레바스가 무너지면 미아마스가 무너지며, 미아마스가 무어지면 미아우다카스가 무너지고, 미아우다카스가 무너지면 미플로리스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음악이 없으면 꿈이 생길 수 없고, 꿈이 없으면 동화가 생길 수 없으며, 동화가 없으면 용기가 생길 수 없고, 용기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슬픔을 감당할 수 없으며, 음악과 꿈과 동화와 용기와 슬픔이 없으면 깰락말락나라에 남는 왕국은 단 하나, 미바탈로스뿐이다. 하지만 미바탈로스는 홀로 서기가 불가능하다. 싸워서 지켜야 하는 다른 왕국이 없으면 그곳의 전사들도 무용지물이 될테니 말이다."


할머니가 엘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엘사의 엄마였다.


"너희 할머니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은 아마 나였을 거야. 소녀도 나였고 여왕도 나였고, 결국 나는 어디에서 상상이 끝나고 현실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 너희 할머니도 가끔은 그랬을 꺼야."


브릿마리가 엘사에게 이야기하는 글이 인상적이다. 브릿마리는 "내가 존재하는 걸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내가 여기서 살았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라고 이야기한다. 브릿마리가 인간은 관심을 쏟을 대상이 필요하고,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으며, 그냥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사랑해주길 바란다.'. 브릿마리가 읊는다. "그게 안 되면 존경해주길. 그게 안 되면 두려워해주길. 그게 안 되면 미워하고 경멸해주길.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들에게 어떤 감정이라도 불러일으키길 원한다. 우리의 영혼은 진공상태를 혐오한다. 무엇에라도 접촉하길 갈망한다."

“나도 내가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는 거 알아.”
엘사는 엄마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댄다.
“뭐든 다 완벽할 필요는 없어요, 엄마.”
둘이 하도 몸을 딱 붙이고 있어서 엄마의 눈물이 엘사의 코끝에 떨어진다.
“나는 일을 너무 많이 해. 절대로 집에 있을 줄 몰랐던 너희 할머니한테 그렇게 화가 났었는데 지금은 내가 똑같이 하고 있네…….”
엘사는 그리핀도르 목도리로 두 사람의 코를 닦는다.
“세상에 완벽한 슈퍼 히어로는 없어요, 엄마. 괜찮아요.”
(/ p.509)

"사랑한다.
우라지게 사랑한다."
(/ p.541)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부모와 자식간의 오해를 치유하는 힘을 동화와 함께 표현하여 흥미롭다. 이 책은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따뜻한 치유의 이야기와 뭉클한 감동, 해학적인 웃음을 선사하는 작품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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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파산 - 장수의 악몽
NHK 스페셜 제작팀 지음, 김정환 옮김 / 다산북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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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인 '노후파산'은 고령자의 생활을 지탱하는 '돈'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NHK의 이타가키 프로듀서가 생각해낸 조어다. 홀로 사는 고령자가 600만 명에 육박하는 가운데 연수입이 생활 보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대략 절반에 이른다. 약 200만 명이 넘는 홀로 사는 고령자가 생활보호를 받지 못한 채 연금만으로 근근이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데, 만약 병에 걸리거나 돌봄 서비스가 필요해지기라도 하면 생활은 파탄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바로 '노후파산'이라 할 수 있다. 책 <노후파산>은 2014년 9월 28일에 방송된 NHK 스페셜 <노인표류사회-'노후파산'의 현실>을 바탕으로 방송 시간상 소개하지 못한 고령자의 현실까지 포함해 새로 쓴 르포르타주다.


이 책은 1장 무엇이 도시 노인들을 파산으로 내모는가?, 2장 희망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이 시대의 노후, 3장 왜 노후파산에 처하는가?, 4장 지방의 노후는 생존을 건 싸움이다, 5장 당신도 노후파산의 예외는 아니다라는 5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초고령 사회를 맞이한 일본에서는 지금 '노후파산'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연금으로 생활하던 고령자가 병이나 부상 등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상생활의 작은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수입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게되어 파산하는 사례가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거의 20년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세대당 수입 감소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일하는 세대의 수입이 계속 줄어들고 있음은 물론이고, 고령자의 1인당 연금 수입고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게다가 독신화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홀로 사는 고령자가 600만 명을 넘을 기세로 급증하고 있다.


"연금으로 100여만 원을 받고 자신의 집도 가지고 있으며 어느 정도 예금까지 있었던 사람조차 조금씩 궁지에 몰리다 노후파산에 처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이런 노후가 찾아오리라고는 예상도 못했지."
우리가 취재한 많은 고령자는 자신이 노후파산에 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다. 회사원, 농가, 자영업자 등 저마다 나름대로 노후를 준비해왔던 사람들이 "설마 내가 노후파산의 대상이 되리라고는......"이라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가며' 중에서 / pp.16~17)

"우리는 절약을 위해 전기도 쓰지 않고 식비도 최대한 아껴 보지만 그럼에도 파산 직전의 상황에 몰린 고령자들이 지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가운데 꾹 참고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노후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하루 벼랑 끝으로 쫓기는 생활' 중에서 / p.34)


저자는 노후파산의 확대를 멈추지 못한다면 사회의 윤리성조차 붕괴될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일해서 수입을 얻기가 어려운 고령자에게 예금은 최후의 보루다. 그 예금을 전부 다 써버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그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수없이 들어왔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며 사회의 토대를 지탱해온 고령자에게 얼마 안 되는 예금을 포기하라고 압박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몰아붙이는 현실......."       
('독거 고령자의 실태를 파악하다' 중에서 / p.50)


이 책에서 다시로씨는 돈이 없는 것,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것보다 괴로운 일은 친구와 지인을 잃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난이 괴로운 이유는 주위에서 친구들이 전부 없어진다는 것이다. 돈이 없으니까 친구와의 만남을 거절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괴로운 일은 사람 또는 사회와의 유대를 잃고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노후파산이라는 현실이 도화선이 되어 유대가 끊기고 삶의 보람이나 마음의 안식처를 잃어버리면 고령자들은 살아갈 기력조차 잃어간다.

" "솔직히 말하면, 빨리 죽고 싶습니다. 죽어버리면 돈 걱정을 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누굴 위해서 살고 있는 건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이제 정말 지쳤습니다. 그러니까 미련 따윈 없습니다. 그저 빨리 죽고 싶을 뿐입니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죽고 싶다"는 말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다시로 씨의 말을 듣고 노후파산의 무서움을 새삼 깨달았다."                          
('가난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중에서 / p.70)


일본이 고도 경제 성장을 계속하던 당시는 성실하게 일하면 보답을 받는 사회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고령자들은 성실하게 일하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노후를 손에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초고령 사회가 도래하고 핵가족화가 진행되자 일본 사회는 격변기에 돌입했다. 독거 고령자가 수백만 명 단위로 급증하자 가족이 버팀목이 되어줄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사회 보장 제도는 기능 부전을 일으켰다. 그런 가운데 노후파산이라고 할 수 있는 현실이 확산되었다.

"노후파산의 무서움은 아주 서서히 다가온다는 데 있다. 우리가 취재한 많은 고령자는 단번에 파산 상태에 처한 것이 아니었다. 생활고에 빠져 집을 팔거나 예금을 조금씩 헐어서 쓴 끝에 최종적으로 노후파산에 처하고 말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압박을 받기 때문에 불안감이나 공포가 장기간 계속된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정말 재산이 다 떨어지면 생활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생활보호를 받으면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자리하고 있다."       
('서서히 다가오는 노후파산의 공포' 중에서 / p.153)


도움을 청하려 하지 않는 고령자 본인의 책임으로 치부하지 말로 지원하는 쪽지 먼저 그런 고령자를 찾아내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고령자가 되었을 때 우리 자신을 지켜줄 제도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연금 수입이 어느 정도 있는 경우는 병 등이 계기가 되어 서서히 노후파산에 몰리고 있음에도 주위 사람들이 지원의 필요성을 깨닫기가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사회보장 제도의 틈새에서 간과되고 있는 문제점이 아닐까? 홀로 사는 고령자의 경우 특히 '조기 발견.조기 지원'의 필요성이 지적되고 있다. 치매나 병 등이 악화되기 전에 지원하면 고독사 같은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지 서비스로 '연결'시킬 수 있다면, 이를 계기로 지역 사회 등에서 유대를 재구축하면서 활기찬 독거 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절약이 초래하는 모순' 중에서 / pp.181~182)

"정부도 연금 수입이 충분하지 않은 저소득 독거 고령자가 급증하고 있는 현실에 입각해 특별 양호 노인 복지 시설을 증설하고 있다. 그러나 시설 증설이 독거 고령자 증가세를 따라잡지 못해 대기 희망자가 50만 명이 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시설을 수용할 공간이 심각하게 부족한 도시부의 자치 단체에서는 비교적 저렴한 돌봄 시설(저비용 노인 복지 시설, 케어 하우스 등)을 늘리고 있지만, 그래도 대기 희망자가 넘쳐나는 것이 현실이다."    
('도대체 어디에서 살라는 말인가' 중에서 / pp.190~191)


오늘날은 병이나 부상 등을 계기로 노후파산에 처하면 내일 머물 곳을 찾아서 표류해야 하는 시대다.

"풍요로워진 오늘날에도 뉴스 등을 통해 사람이 굶어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듣는다. 다케다 씨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목숨을 건진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뉴스에서나 보고 들을 수 있는 남의 일이 아니다. 다케다 씨는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이었으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노후파산의 위기에 몰려 있다."
('병원에서 시설로 이어지는 노인표류' 중에서 / pp.218~219)


흔히 노후파산을 도시 지역의 독거 고령자들 사이에서만 확산되고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지방에서도 도시와 마찬가지로 독거 고령자가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지방은 1인당 연금 수입액이 도시보다 크게 적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시 못지않게 노후파산의 확산이 심각하다.

" 농가의 대부분은 밭이나 집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언뜻 어렵게 살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청취 조사에서는 "미래가 없다"며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식량난을 극복하고 "온 국민을 배불리 먹이고 싶다"며 자부심을 갖고 쌀농사를 계속해온 농가 사람들. 그 농촌에서 어떻게든 자력으로 살아가려 하는 농가 사람들이 노후에 불안을 느끼고 "미래가 없다"라고 호소하는 시대. 노후파산의 현실은 도시 지역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확산되고 있었다."
('풍요로운 농촌생활은 존재하는가' 중에서 / p.228)

"노후파산이 확산되는 가운데, 재택 돌봄 서비스나 재택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최전선에서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노후파산 직전에 몰린 고령자들을 도우려 할 때 특히 어려운 문제는 친족이 서비스를 거부하는 경우라고 한다. 언뜻 친족이 있으면 안심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오히려 친족이 있기 때문에 노후파산을 발견하기 어려운 사례가 줄을 잇고 있다는 것이다."
('발견하기 어려운 사각지대의 고령자들' 중에서 / p.255)


고령자를 지탱해야 할 일하는 세대에서도 장래에 노후파산으로 이어질이 모르는 심각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노후파산 예비군이다. 일하는 세대에 확산되고 있는 고용 문제와 저소득 문제를 방치하면 노후파산은 연쇄 반응을 일으켜 한층 더 확산될 우려가 있다.

"현재 '일하는 세대'가 40~50대가 되어 수입이 줄거나 일자리를 잃어버리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생활보호를 제외했을 때 부모의 연금밖에 없다. 물론 의지할 수 있는 부모가 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의 연금에 기대어 살다가 부모가 큰 병에 걸리거나 하면 그 순간 생활이 막막해진다. 게다가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수입은 뚝 끊긴다.
이렇게 해서 노후파산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일하는 세대'가 자립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도 노후파산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닐까?"
('도미노처럼 연쇄 파급되는 노후파산' 중에서 / p.278)


일하는 세대의 생활력의 기반이 약해진 지금, 부모의 연금에 기대어 사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 부모도 홀로 살아 생활력의 기반이 약할 경우는 공멸할 우려가 있다. 게다가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살 경우 노후파산데 처해도 금방은 생활보호를 받기 어려울 때가 있다. 다만 함께 사는 부모 자식의 생활고가 심각하고 직업이 없는 자녀가 은둔하거나 스트레스로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 부모와 자식을 별거시켜 각각 생활보호 등을 지원하는 '세대 분리'라는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부모와 자식이 공멸하는 새로운 노후파산이 잇따르는 이유 중 하나는 '고용'이라는 사회를 지탱하는 토대가 흔들리면서 미래에 대비할 여력이 없는 노동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구조적인 요인이다. 또한 가족의 형태가 변하면서 서로를 지탱하는 힘(유대)이 약해지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다. 사회 보장 제도가 이런 초고령 사회의 실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이런 현상을 가속시키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고령자를 뒷받침해야 할 일하는 세대가 취약해진 것도 노후파산을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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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은 의사, 거짓말쟁이 할머니
바티스트 보리유 지음, 이승재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죽고 싶은 의사, 거짓말쟁이 할머니>는 프랑스 전문의읮자 작가인 바티스트 보리유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이다. 이 책의 작가인 바티스트 보리유는 프랑스 남부 오슈의 한 종합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던 2012년, 인턴들의 전국적 파업을 바라보는 대중의 차디찬 시선을 느껴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깊은 간극을 메울 상호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2013년 1월 '자, 보세요'라는 블로그를 개설했다. 이 블로그에 응급실 인턴으로서 몸소 겪은 경험, 또한 동료, 의료진, 환자 들이 그에게 들려준 종합병원의 생생한 일상을 진솔하게 재치 넘치는 글솜씨로 기록, 2개월 만에 5백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였다. 이 블로그로 프랑스 최고의 의학박사 논문에 수여되는 알렉상드르 바르네 대상을 수상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그의 블로그 내용을 출간한 <불새 여인이 죽기 전에 죽도록 웃겨줄 생각이야>는 프랑스 유수의 출판사들이 경합하여 2013년 책으로 출간되었고, 20개국 이상의 나라에 계약되었다. 그의 두 번째 책인 <죽고 싶은 의사, 거짓말쟁이 할머니>는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휴머니스트의 시선이 녹아 있는 소설이다. 


책 <죽고 싶은 의사, 거짓말쟁이 할머니>는 삶에 회의를 느껴 자살을 결심하는 의사 선생과 세상의 온갖 일에 참견하고 싶어 하는 이상한 택시 기사 사라의 일주일간의 동행을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아내와 사별한 후로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의사는 택시를 운전하는 노부인 사라를 만난다. 죽음만을 기다리던 의사에게 노부인 사라는 막무가내로 의사의 자살을 막을 일주일의 유예기간을 달라고 한다. 이 책은 장례식 일주일 전부터 하루 하루를 의사와 노부인 사라가 함께하는 시간들을 기록한다. 사라는 공동묘지에서 의사를 달리게 만들면서 흡연의 욕구를 일깨우고, 무덤 속 구덩이로 의사를 인도하고, 의사의 관을 주문하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소년의 장례식에서 의사의 자살 계획을 공개해 의사를 당황하게 만든다.  

" “자, 이유나 들어보자고. 도대체 왜 죽고 싶어?”
왜 죽고 싶냐고? 왜 소멸과 망각의 길을 가려느냐고? 불행하기 때문이다. 불행이라는 말의 뜻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살아가기에는 불행의 뜻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 '장례식 일주일 전' 중에서/ pp.23~24)


"계약 조건부터 확실히 해두자고. 다음 주 금요일 밤까지는 자살하지 않는다, 향후 일주일 동안은 무조건 나한테 협조한다, 내가 시키는 일은 군소리 없이 한다. 내가 지금 머릿속에 그리는 커다란 그림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무조건 따른다, 모든 건 다 이유가 있으니 말이야. 미리 말해두는데 내가 상상력이 남다르다는 거 알아둬."


이 책에서 사라가 의사를 공동묘지로 데려가서 뛰게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의사가 달리면서 살아 있는 사실을 오롯이 느끼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불행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열 바퀴를 돌고 났을 때 핫초콜릿 향을 떠올렸다. 머릿속으로 입안에 녹아내리는 초콜릿의 질감을 그려보았다. 달콤쌉싸름한 맛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졌다. 핫초콜릿 한 잔이면 완벽할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한 잔의 핫초콜릿이다. 죽음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데 배까지 몹시 고플 때 기대할 수 있는 그런 핫초콜릿.

바로 그 순간, 사건이 터졌다. 문득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은 것이다. 평소 관심조차 둔 적 없고 심지어 아내와 함께 행복한 한때를 보낼 때도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

바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위아래로 힘차게 오르내리는 갈비뼈, 팽팽하게 긴장한 피부, 발갛게 얼어붙은 귀까지 생생히 느껴졌다. 아픈 발, 고픈 배,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도. 불행하다는 생각도 들고 속이 뒤집어질 만큼 독한 술도 마시고 싶었다. 구역질이 나면서도 무엇보다, 정말 유난하게 흡연 욕구가 솟구쳤다.

내가 살아 있어!

그는 달리고 있는 살아 있는 남자였다.

아! 살아 있다는 사실, 불행을 고스란히 느껴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자신의 운명을 향해 원초적인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두려웠다. 공동묘지에서는 그렇게 고함을 지르지 않는 법이다. 비록 사람 하나 없는 한 겨울의 공동묘지라 해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절대로 습관처럼 굳어져선 안 된다고 말하려는 듯 그는 계속 달렸다."


"그의 시선은 표적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정말이지 사라의 계략은 그 사악함을 측정할 길이 없었다. 삶, 유년기, 기쁨, 추억, 슬픔, 포기, 호박 하나하나마다 검은 매직을 사용해 대문자로 큼지막하게 이름을 적어놓았던 것이다.

느닷없이, 철저히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한 발 밖으로 빠져나와, 마법에서 풀려난 어떤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의욕도, 빛도 없는 그런 곳에서. 그랬기 때문에 호박을 총으로 쏴서 터뜨리는 행위는 그의 내면에 묘한 감정의 변화를 일으켰다. 트별히 무언가를 느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호박에 적힌 그 단어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은 마법 같은 힘을 지니고 있어. 우리를 좋아해주고 반겨도 주지만 울게도 하지. 게다가 힘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바위도 둘로 쪼개놓는다고. 자, 이제 거기서 가만히 이 세상에게 말을 걸어봐."


"이렇게 살아 무엇할까. 그는 여름비를 맞으면서 아내를 찾아다닐 것이다. 뜨거운 지붕에 고여 있다 달빛을 받은 빗물 냄새를 맡으며, 봄에는 풀잎을 적시는 비를 맞으며. 찾고 또 찾아다닐 것이다. 아내를 찾으러 다니다 자신을 잃게 될 때까지.
그녀가 나타나준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고? 아니면 그렇게 떠나버려 죽도록 미워한다고?
그는 자신이 가진 게 무언지 생각해보았다. 그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정신 나간 노부인과 12월의 한겨울 밤, 얼음장같이 차가운 침대 하나. 그게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물건들을 다 태워버리고 저 멀리 먼지 속으로, 어둠 속으로 떠나버려야 하는 걸까? 하늘에서 내린 눈은 그의 시신을 덮어줄 것이다. 그러면 끝이다. 느릿느릿 휘날리는 눈발, 길 한가운데. 그의 시신을 덮어주는 눈.
새벽녘에 그는 집에서 불조차 피울 수 없다는 사실을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사라와 친구들이 모든 걸 가져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라이터까지."
( '장례식 나흘 전' 중에서/ p.163)


사라가 의사에게 공항 카페의 테라스에게 건네는 말이 눈길을 끌었다.


"슬퍼질까 봐 두려워하지 마. 슬픔은 아름다운 무언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분명한 흔적이거든."


"살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의지를 갖고 살면 아내에 대한 그리움, 속에 담아놓은 회한 같은 것들은 비나 바람 같은 존재가 될 거야. 난 자네의 기억들을 되살려놓은 거야. 그리고 자네를 이전의 사람으로 만들어놓을 거야."


소아외과 의사를 꿈꾸던 의사가 성형외과 의사가 되어야 했던 사연이 소개되어 인상적이다.


"젊은 의사는 자신의 인생에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였다. 소아외과 교육 이수에 필요한 서류를 제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앰뷸런스 안에서 아무 말도 못했다는 죄책감이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니고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바람대로 낮에는 기술자로 일하고 밤에는 아이들을 돌보는 외과 의사 선생님이 될 수 없었다. 그는 호박 케이크를 먹으며 만화영화를 보던 어린 시절의 꿈을 접는 길이 자신에게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벌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가슴속에 죽음을 묻고 방향을 돌렸다. 자신이 왜 소아외과 의사가 되려 했는지 서서히 잊어갔다. 그리고 아내가 자신의 팔에 안겨 죽었을 때, 그동안 돌봤던 환자들의 이름을 다 잊어버렸다. 그렇게 그는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일을 포기하고, 오지 않을 무언가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 책의 끝부분에 노부인이 의사에게 왜 거짓말을 해야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다. 의사의 아내는 죽기 전에 노부인과 서로 먼저 죽는 사람의 가족을 돌봐주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죽고 싶은 의사, 거짓말쟁이 할머니>는 자살을 결심할만큼 삶의 지친 사람들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소설이 아닐까.


"사라, 만약 사라도 저처럼 떠나야 할 시기가 오면 그 남자한테 꼭 이렇게 말해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치도록 사랑하고, 영원히 그렇게 사랑할 거라고요. 영원히 사랑해도 우리한테는 부족하다고요. 그리고 소설가의 생각이 틀렸다고도 말해주세요.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는 있어야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 남자한테 꼭 계속 살아달라고 말해주세요."


"이제 알겠지?

자네한테는 새롭게 맛볼 수 있는 게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소원을 빌 기회도 아주 많고 떠오르는 태양을 감상할 기회도 아주 많이 남아 있어. 이제 과거에서 벗어나서 지금의 자신을 파괴할 힘을 되찾으라고. 그래서 새사람이 되는 거야. 사랑이나 추억까지 전부 부수고 지우라는 건 아니야. 그건 언제나 당신과 함께할 테니까. 그냥 편하게 말하는 거야. 새롭게 태어나라고. 무언가를 다시 세우려면 기존에 있던 것들은 무너뜨려야 하는 법이지."


"나는 하늘을 향해 이마를 들어올린다. 내가 살고 잇는 내 삶을 향해, 내가 사랑하는 내 삶, 새로 발견하고, 전과는 달리 다시 시작한 새 삶을 향해서.

눈을 감는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커지는 느낌이 든다. 무한한 확신 덕에 바로 서 있을 수 있고 행복하기까지 하다.

어딘가에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기쁨, 그 길은 여기일 수도 있고, 저기일 수도 있다.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일 수도 있다.

원한다면 담배를 피우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노부인의 노란 택시를 타고 거대한 도로를 달릴 수도 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안에 든 것들을 모두 바닥에 쏟아낸 다음 다시 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재즈 선율에 맞춰 스텝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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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던 생각 - 대중을 사로잡은 크리에이터의 창작 비결
양유창 지음 / 더난출판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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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던 생각의>저자 양유창은 10인 10색의 크리에이터들을 찾아서 인터뷰했다. 10인은 만화가 윤태호, 싱어송라이터 차세정, 예능 PD 나영석, 애니메이션 감독 우경민, 뮤지컬 연출가 장유정, 나동현, 영화감독 김성훈, 건축가 김찬중, 광고인 박웅현, 닉네임 퍼엉이라고 불리우는 일러스트레이터 박다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인터뷰이는 경계를 두지 않고 섭외했지만 첫째, 그들이 만든 작품이 충분히 새로워야 할 것, 그들이 창작 과정이 다른 창작자들에게 서로 다른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라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열 명의 창작자들이 만든 결과물들은 서로 다르지만, 그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그들은 진지했다. 그들은 작업하기 위해 혼자 남는 것을 드려워하지 않았고 포기의 유혹에 부딪칠 때마다 다른 선택지를 지웠다. 또, 그들은 지금까지의 성과는 특별한 게 아니라 하루하루가 쌓여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누구나 창작할 수 있는 시대다. 우리는 각자 손에 창작의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다. 그 무기는 점점 더 편리해지고 있다. 카메라는 작아지고, 그림 그리는 툴은 편리해지고, 글은 어디서나 쓸 수 있고, 메모장은 모든 것을 기억해준다. 이렇게 우리를 둘러싼 물건들은 이미 우리에게 창작하라고 등 떠밀고 있다. 하루하루 소비되는 일상이 공허한 당신에게, 결과물을 만들고 싶지만 시작이 두려운 이들에게, 삶의 출발점에서 정작 자신이 소외되는 것 같아 답답한 청춘에게, 똑같은 보고서 작성하는 일에 지친 직장인에게, 인생 팔면 소설 몇 권이라고 말하는 시니어에게, 그러니까 창작하고 싶은데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열 명의 크리에이터들이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가 창작 의지에 불을 지르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지금 노트북을 꺼내고, 카메라 렌즈를 닦고, 날이 바짝 선 연필을 쥐고, 피아노 앞에 앉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 '인터뷰를 시작하며' 중에서/ pp.8~9)


만화가 윤태호의 창작 비결은 1) 집요하게 묻고 노트한다, 2) 한 번 앉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3) 한 분야만 집중한다, 4) 돌아갈 배를 불사른다, 5) 마감 다음 날 아침 꼭 지켜야 할 약속을 잡는다 이다. 윤태호는 취재를 나가면 묻고 또 묻는다. 설마 그것까지 물어볼까 싶은 것까지 묻는다. 그는 직장인에 대해 잘 몰랐고, 또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했기에 일일이 질문할 수 있었다. 윤태호의 집요함은 이처럼 스스로 겸손해지는 태도에서붕터 시작한다. 그는 어설프게 알던 것들을 버리고 처음부터 새롭게 질문했다. 집요하게 만들면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게 된다.

"취재 방식은 어떤가? [미생] 때는 9시간 인터뷰해 대사 두 줄 얻었다는 말도 있다.
잘 모르니까 계속 묻는다. 회사생활의 생생한 배경지식이 필요했다. LG 상사맨 한 분을 소개로 만나 소주 마시며 시시콜콜 캐물었는데 일일이 답변을 해주셨다. 남들이 묻지 않는 것, 아니 차마 물을 생각까지 하지 않았던 것을 물었다. 나는 전혀 경험이 없으니까 그렇게 한 거다. [미생]을 만들기 전엔 회사에서 과장이 높은지 부장이 높은지도 몰랐다. 난 계속 프리랜서 생활만 해왔기 때문에 기업의 직급 체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만화 잡지와 미팅할 땐 부장을 자주 만났기 때문에 부장이라는 직급이 흔한 줄 알았다. 반면 과장은 어디에서도 만나본 적이 없어서 더 높다고 생각했다.(웃음)"
(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_만화가 윤태호의 집요함' 중에서/ p.23)


가수 에피톤 프로젝트 '차세정'의 인터뷰는 '떠나온 곳을 재발견한다'라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차세정의 창작 비결은 1) 여행을 떠난다, 2) 머릿속을 비운다, 3)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4) 시작했으면 어떻게든 완성한다, 5) 다양한 음악을 듣는다이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여행지에서 찾은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그 눈을 그대로 안고 돌아올 때 여행은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길 것이다. 그 이야깃거리는 고스란히 창작의 소재가 된다. 차세정이 여행하는 장소는 여느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는 여행을 창작물로 남긴다. 여행지에서 느낀 감흥이 멜로디가 되고, 멜로디에 리듬과 가사가 얹혀 노래가 되고, 노래에 스토리가 담겨 하나의 음반으로 탄생한다. 차세정에게 여행과 음악 창작은 동전의 양면처럼 뗼 수 없는 것이다."

"계속 돌아다니는 게 창작에 도움이 되나?
걷다 보면 불현듯 멜로디가 떠오를 때가 있다. 혹은 나중에 작업실에 앉아 그 여행을 돌아볼 때 영감이 떠오르기도 한다. 꼭 외국이 아니더라도, 나는 홍대만 가도 신기하다. 저기 간판 또 바뀌었네 하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요즘은 간판을 작게 만들어서 더 궁금하게 하더라. 어떤 날은 남산에서 경복궁까지 걷기도 한다. 남대문 칼국수 골목 아주머니들 틈바구니에서 식사도 하고, 일부러 신문도 사본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주도행 티켓을 끊기도 하고, 여유가 생기면 여권을 챙기기도 한다. 걷다 보면 나라마다 전깃줄 모양이 다른 것도 알 수 있다. 그런 게 신기하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어떤 낱말,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들을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흔히 하는 말로 갑자기 '그분이 오신다'. (웃음) 그러면 얼른 스마트폰으로 녹음한다. 그래서 이거(스마트폰) 잃어버리면 큰일 난다. (웃음)"
( '떠나온 곳을 재발견한다_싱어송라이터 차세정의 여행' 중에서/ p.53)

 

나영석의 창작 비결은 1) 발견할 때까지 관찰한다, 2) 잔잔한 일상에 돌을 던진다, 3) 커피 마시며 시도 때도 없이 회의한다, 4) 주위에 더 잘하는 사람을 찾는다, 5) 천만 관객 영화는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감상을 들으며 상상한다, 6) 진심을 담아서 만든다 이다. 나영석이 독보적인 예능 프로그램을 만든 비결은 관찰력에 있다. 관찰은 주의하여 잘 살펴보는 행위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엉킨 실타래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타래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오래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창작 과정에서 관찰의 전제조건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찰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다른 사람과 사물을 관찰할 때 흔들이지 않을 수 있다. 나영석은 자신이 잘 알고 또 좋아하는 것을 예능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그런 인물을 불러놓고 돌발적인 상황을 자주 만든다.
리얼리티 쇼는 일상과는 다르니까 흔들어놓는 거다. 일상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반응을 이끌어내려면 충격을 줘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한 대 때린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쫄까, 반격할까, 욕을 할까, 혹은 신고할까. (웃음) 어쨌든 그 결과로 인해 그 사람의 성격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다. 리얼리티 쇼는 연못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가만히 두면 잔잔할 뿐이지만 돌을 던지면 그때서야 인물들의 성격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새로운 게스트를 투입하거나, 미션을 준다거나, 만들 수 없는 요리를 시킨다거나 하는 것은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그때 성공과 실패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과정 속에서 스토리가 나온다."
( '잘 모르겠다면 일단 오랫동안 관찰한다_예능PD 나영석의 관찰' 중에서/ p.84)


대도서관의 창작 비결은 1) 시청자와 수다 떤다, 2)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한다, 3) 꾸준하게 업데이트한다, 4) 새로운 영상을 본다, 5) 생활을 방송 콘텐츠로 만든다 이다. 수다는 넥타이를 풀고 하는 것이고, 똑같이 커피 한 잔씩만 들고 하는 것이다. 격식이 없기 때문에 직급에 따라 위축되지 않고, 위축되지 않기 때문에 생각나는 대로 말할 수 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다 보면 보석 같은 아이디어가 불현듯 튀어나온다. 세상에는 많은 말들이 있고 말에는 여러 기능이 있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기능은 교감하게 하는 기능이다. 교감한 말은 힘을 얻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 퍼져나간다. 수다는 교감하는 말의 출발점이다. 창작 에너지는 수다에서 나온다.

"시청자가 많아질수록 채팅창에는 여러 가지 말들이 섞일 거다. 때로는 분위기 깨는 훼방꾼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걸 어떻게 제어하나?
나는 방향을 정해놓고 방송하지는 않는다. 엔딩을 보기 위해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게임하는 과정을 즐기려고 방송을 한다. 그래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말을 들어준다. 하지만 욕을 하거나 인신공격을 하면 과감히 퇴장시킨다. 여기엔 관용이 없다. 어떤 사람은 '독재방송'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는데 1인 방송이니까 그럴 수 있는 거다. 나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방송을 만들어가는 것이 1인 방송 아닌가.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원칙을 지키면서 방송하는 게 중요하다. 내 원칙은 욕설, 네거티브나 선정적인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까지 다 볼 수 있는 방송을 지향한다. 나는 1인 방송을 오래 하고 싶다. 부정적인 이미지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 '내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든다_유튜버 대도서관의 수다' 중에서/ pp.167~169)


<끝까지 간다>를 연출한 김성훈 감독의 창작 비결은 1) 벼르면서 버틴다, 2) 내가 아는 이야기만 한다, 3) 동료들의 조언을 듣는다, 4) 운전하거나 샤워한다, 5) 지루한 영화를 보며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 생각한다, 6) 매일 같은 시간에 뉴스를 보며 세상의 소재들을 통해 캐릭터를 집어넣는다 이다.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과 <끝까지 간다> 사이의 간격은 꽤 넓다. 단지 성공과 실패라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나누지 않더라도 전자는 두 시간이 지루했고 후자는 두 시간이 황홀했다. 러닝타임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의지가 장면마다 드러나 관객 입장에서 최대한 집중하며 놓치지 않으려 했다. 감독이 무슨 생각으로 이 장면을 연출했는지 전자에선 볼 수 없었지만 후자에선 매순간 명확하게 보였다. 김성훈 감독은 여전히 아침에 한 시간씩 신문을 읽고, 하루 아홉 시간씩 사무실에서 글을 쓰고, 운전하면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밤엔 아내와 수다를 떨면서 지금 그가 쓰고 있는 이야기가 재미있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단순한 삶을 살고 있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그에게 영화를 만드는 일은 이제 성공과 실패의 기준으로 나눌 수 없는 인생 그 자체가 됐다. 그에게 창작은 두려움이자 숙명이다. 8년간 실패 극복 과정에서 그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단 하나다.


"영화를 만들 때 나만의 원칙이 있나?

내가 연출부에게 신신당부했던 두 가지가 있다. 촬영하다가 내가 이걸 어기면 나를 때려달라고까지 했다. 첫째,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여야 할 것. 나도 잘 모르면서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둘째, "이만하면 괜찮아. 대세에 지장 없어"라는 말을 쓰지 말 것. 우리 팀에게 이 말은 금기어였다. 항상 최대한을 끌어내려고 했다."


건축가 김찬중의 창작 비결은 1) 조화로운 시스템을 만든다, 2) 건물에 거주할 사람을 생각한다, 3) 느낌표를 던지는 건물을 짓는다, 4) 건축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영감을 얻는다, 5) 쇼핑몰에서 사람들의 동선을 관찰한다, 6) 일한 만큼 보상한다 이다. 창고 안에는 경계가 없다. 창고는 말 그대로 이것저것 평소에 쓰지 않는 것들을 쌓아두는 공간이다. 창고는 사무실이나 연구실처럼 무엇을 해야 한다는 목적이 정해진 곳이 아니기 때문에 사소한 것으로부터 아이디어가 점화할 수 있고 다른 곳에서라면 당연히 버려졌을 물건들이 무심코 테이블 위에 올라올 수 있다.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을 보다 보면 이것과 저것을 섞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마련인데 창의적 아이디어는 대개 경계에서 꽃핀다. 김창중은 공간의 힘을 믿는 건축가다.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 즉 자본가의 욕망과 예술가의 고집 사이에서 최적의 해답을 내놓기 위해 그는 더 많은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자재를 테스트한다.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우리가 만든 건축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창작에 필요한 공간을 찾아 나서야 한다.

 

"건축가로서 꼭 만들어보고 싶은 건물이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일탈이다. "저건 무슨 건물이지" 하며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건물을 계속 짓고 싶다. 그래서 내 후배들이 내가 지은 건물을 보고 나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시도를 했으면 한다. 그런 생각들이 파도처럼 처져나가면 한국의 건축은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을까? 무표정한 도시인들이 내가 지은 건물을 보고 잠깐이라도 즐거워했으면 좋겠다. 반려견을 보살펴주듯 쓰다듬어주고 가는 그런 건물을 짓고 싶다."


광고인 박웅현의 창작 비결은 1) 보고 듣고 느끼는 일상을 인풋으로 삼는다, 2) 삶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든다, 3) 과거와 미래는 잊고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조르바처럼 산다, 4) 모든 사생활은 공무에 우선한다, 5) 결정하면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다. 박웅형은 자본과 인간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치의 가운데에서 균형을 잡으며 광고를 만들어왓다.균형의 비결은 인문학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행복을 우선순위에 놓는다는 단 하나의 원칙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박웅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삶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처럼 '지금 여기'에 몰입하는 삶이다. 창작에 밑거름이 될 재료는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한 번 더 돌아볼 때 나온다.


"창의적 아이디어는 성실함을 기본으로 거기에 무의식의 힘이 더해져 탄생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그 과정은 오롯이 혼자의 힘만으로 이루어내는 것은 아니다. 옆에서 경쟁하는 사람들이 끌어올려주기도 한다. 나는 그들이 낸 결과를 보고 자극받아서 또 더 올라가려 노력한다. 그렇게 함께 비등점에 다가서는 거다. 최근 광고계에서도 이런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요즘 광고계는 침체기다. 예전처럼 TV광고만 해서는 먹고살 수 없다. 저마다 '콘텐츠 컨버전스'를 통해 대안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나도 대학생들이 참여하는 '망치'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모델을 발굴하려 하고 있다. 이런 시도들은 비등점 근처까지 가는 과정이다. 콘텐츠를 통해 어떻게 수익을 낼 수 있을지 아직 뚜렷한 답은 없지만 나는 비등점이 멀지 않았다고 믿는다. 여기서 누군가 조만간 유레카를 외칠 거다."
( '정신줄을 놓고 있을 때 아이디어가 떠오른다_광고인 박웅현의 일상' 중에서/ pp.244~245)


퍼엉의 창작 비결은 1) 나를 위해 그린다, 2) 사랑하는 사람과의 일상을 그린다, 3) 작은 일에 감동한다, 4) 건축 관련 책을 본다, 5) 항상 도구를 들고 다닌다 이다. 저자는 스물다섯 살의 박다미 작가에게서 주목한 것은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창작으로 이끌어낸 태도에 있다고 이야깋나다. 박다미 작가는 남들이 시켜서 그렸던 그림들에 지쳐 있을 때 자신이 어릴 때부터 가장 사랑해온 그림 그리기를 싫어하게 될까 두려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찾아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박다미 작가는 자신이 가장행복했던 순간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그가 상상한 완벽한 사랑의 공간 안에 집어넣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그림 속 사랑은 모두 밝고 예쁜 모습들뿐이다. 하지만 현실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의 다른 모습을 보여줄 생각은 없나?

물론 사랑이 늘 긍정적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사랑은 이 그림들처럼 일상 속에서 함께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힘들더라도 그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내게는 그게 사랑이다. 에전의 나는 지금보다 더 이기적이어싿. 그래서 사랑을 하면서도 받으려고만 했다. 그때라면 이런 사랑 연작을 절대 그리지 못했을 거다. 앞으로 내가 더 나이 들면 다른 방식의 사랑을 알게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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