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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평점 :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오베라는 남자>라는 소설로 전 세계 33개국에 판권이 팔리고 2백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한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이 책은 작가 프레트릭 배크만 특유의 해학과 삶의 통찰이 엿보이는 작품으로 인상적이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주인공 일곱 살 엘사는 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한데 되바라지기까지 해서 학교에서는 왕따요, 선생님들에게는 눈엣가시며, 주변 어른들에게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존재다. 그러니 당연히 친구도 없고 말상대라고 해봐야 엄마도 아니라 한 세대 건너뛴 할머니뿐이다. 손녀의 단짝인 할머니는 통속적이지 않은, 오히려 기존 관념의 틀을 깨는 독특한 캐릭터다. 볼일을 볼 땐 늘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성차별적인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학교 교장에게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전도를 목적으로 집집마다 방문하는 종교인들에게는 페인트 총을 쏘아대는 등 할머니의 기이한 행동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는 손녀를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라게 하는 양분 역할을 한다. 남들과 다른 엘사에게 "특이하다"거나 교장선생님이 "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할 때, 남들과 다른 건 특별한 거라고 가르쳐준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할머니가 편지 배달이라는 아주 중요하고 어려운 임무를 엘사에게 맡기면서부터 시작된다. 내일부터는 동화처럼 신기한 일들과 엄청난 모험이 펼쳐질 거라고, 그런 데 보냈다고 할머니를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집과 가족과 친구들을 지켜달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에 엘사는 미심쩍어하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할머니는 이메일이라고 못 들어봤"냐고 묻지만, 할머니가 맡긴 임무를 수행하겠노라 약속한다.
"세상의 모든 일곱 살짜리에겐 슈퍼 히어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정신과에서 검사를 받아봐야 한다."
(/ p.11)
"기본적으로 엄마는 질서 정연하고 할머니는 뒤죽박죽이다. 엘사는 예전에 ‘혼돈은 신의 이웃이다’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는데 엄마는 혼돈이 신의 근처로 이사 갔다면 그건 할머니네 옆집에 살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간 거라고 했다.
엄마는 모든 일을 파일로 정리하고 달력에 적어놓는 사람이라 누굴 만나기로 약속이 잡혀 있으면 15분 전에 휴대전화에서 종소리가 난다. 할머니는 기억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바로 벽에 적어놓는다. 집뿐 아니라 어디에 있건 벽에 적는다. 그걸 기억하려면 메모를 적어둔 그 벽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에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엘사가 이 점을 지적하자 할머니는 분개하며 “네 엄마가 그 코딱지만 한 전화기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더 크겠냐, 아니면 내가 부엌 벽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더 크겠냐!”라고 했다."
(/ p.35)
“할머니 병이 낫긴 나아요?” 엘사는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을 하는, 조금 있으면 여덟 살이 되는 아이답게 머뭇머뭇 묻는다.
“당연하지!” 할머니는 자신 있게 못을 박지만,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엘사도 알고 할머니도 안다.
“약속해요.” 엘사가 떼를 쓴다.
그러자 할머니는 몸을 앞으로 숙여서 엘사의 귀에 대고 암호로 속삭인다.
“약속할게,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기사야. 좋아질 거라고 약속할게. 전부 다 괜찮아질 거라고 약속할게.”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한다. 좋아질 거라고. 전부 다 괜찮아질 거라고.
(/ p.73)
"할머니가 있다는 건 아군이 있는 것과 같다. 그게 손주들의 궁극적인 특권이다. 자초지종이 어떻든 항상 내 편이 있다는 것. 내가 틀렸더라도. 사실은 내가 틀렸을 때 특히.
할머니는 검이자 방패다. 학교에서 그게 무슨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엘사더러 “특이하다”고 할 때, 엘사가 멍이 든 몸으로 집에 돌아올 때, 교장선생님이 “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할 때. 그럴 때 할머니는 지원군이 되어 엘사가 사과하지 못하게끔 한다. 자기 탓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너를 놀리는 게 재미없어질 테니’ 애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말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그냥 자리를 피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할머니는 그렇게 지각없는 사람이 아니다."
(/ p.75)
엘사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글을 남긴 편지를 전하러 다닌다. 할머니가 남긴 사과 편지를 전하는 일이 엘사가 만들어나갈 이야기였다.
"중요한 임무가 생겼으니까 이제 장난은 그만 쳐. 이 편지를 배달해야 하니까. 할머니가 사과하고 싶은 사람이 또 있나봐. 편지는 이게 다가 아니야. 할머니의 사과 편지를 한 통씩 배달하는 거. 그게 우리가 만들어나갈 이야기해."
엘사가 "'죽음의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엘사는 "슬픔과 상실감은 변함이 없는데, 그걸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면 어느 누가 버틸 수 있을까. 슬픔으로 마비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결국 슬픔을 가방에 넣어서 두고 올 만한 장소를 찾아 다닌다."라고 이야기한다.
"'죽음의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거야.' 엘사는 이런 생각을 하는데, 어디에서 들은 말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보면 깰락말락나라에서 나온 말인가 싶지만, 할머니가 죽음을 어떻게 대했는지 감안해볼 때 그건 아닌 것 같다. 죽음은 할머니의 숙적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죽음을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외과의사가 된 이유도 죽음을 최대한 도발하기 위해서였다."
이 책에서 할머니가 손녀 엘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들이 인상적이다.
" '싫다고 말할 줄 알았던 소녀'는 엘사가 맨 처음으로 들은 깰락말락나라의 이야기 중 한 편이었다. 여섯 개 왕국에 속하는 미아우다카스 왕국의 여왕에 얽힌 이야기였다. 처음에 여왕은 만인의 사랑을 받는 용감하고 정의로운 공주였는데 안타깝게도 어른들이 그렇듯 나이가 들면서 겁이 많아졌다. 그래서 어른들이 그렇듯 효율성을 사랑하고 갈등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에는 미아우다카스 안에서 모든 갈등을 금지시켜버렸다. 모두들 언제나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했다. 거의 모든 갈등이 누군가가 내뱉은 '싫다'는 말에서 비롯되기에 여왕은 이 단어마저 법으로 금지시켰다. 누구든 이 법을 어기면 당장 거대한 '반대론자들의 감옥'으로 끌려갔고, '찬성론자'라고 불리는 검은 갑옷을 입은 수백 명의 병사들이 수시로 순찰하며 어디에서도 싸움이 벌어지지 않도록 단속했다. 하지만 여왕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싫다'뿐 아니라 '아니다' '아마' '어떠면'까지 이내 추방했다. 이런 단어들을 쓴 사람은 당장 감옥에 갇혀서 평생 두 번 다시 빛을 볼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나자 '혹시'와 '만에 하나'와 '두고 보다'도 금지어가 되었다. 결국엔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여왕은 말하는 것 자체를 금지시키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거의 모든 갈등이 누군가가 내뱉은 말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그 뒤로 몇 년 동안 미아우다카스 왕국은 정적으로 뒤덮였다."
"그림자들이 미모바스 왕국에 몰래 들이닥쳐 선택된 자를 납치하려고 했을 때 그를 살린 건 구름 동물들이었다. 미아마스가 환상으로 이루어진 왕국이라면 미모바스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왕국이다. 사랑이 없으면 음악이 있을 수 없고 음악이 없으면 미모바스가 있을 수 없는데 선택된 자로 말할 것 같으면 온 왕국을 통틀어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선택된 자가 그림자들에게 납치되면 결국에는 깰락말락나라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미모바스가 무너지면 미레바스가 무너지고, 미레바스가 무너지면 미아마스가 무너지며, 미아마스가 무어지면 미아우다카스가 무너지고, 미아우다카스가 무너지면 미플로리스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음악이 없으면 꿈이 생길 수 없고, 꿈이 없으면 동화가 생길 수 없으며, 동화가 없으면 용기가 생길 수 없고, 용기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슬픔을 감당할 수 없으며, 음악과 꿈과 동화와 용기와 슬픔이 없으면 깰락말락나라에 남는 왕국은 단 하나, 미바탈로스뿐이다. 하지만 미바탈로스는 홀로 서기가 불가능하다. 싸워서 지켜야 하는 다른 왕국이 없으면 그곳의 전사들도 무용지물이 될테니 말이다."
할머니가 엘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엘사의 엄마였다.
"너희 할머니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은 아마 나였을 거야. 소녀도 나였고 여왕도 나였고, 결국 나는 어디에서 상상이 끝나고 현실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 너희 할머니도 가끔은 그랬을 꺼야."
브릿마리가 엘사에게 이야기하는 글이 인상적이다. 브릿마리는 "내가 존재하는 걸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내가 여기서 살았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라고 이야기한다. 브릿마리가 인간은 관심을 쏟을 대상이 필요하고,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으며, 그냥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사랑해주길 바란다.'. 브릿마리가 읊는다. "그게 안 되면 존경해주길. 그게 안 되면 두려워해주길. 그게 안 되면 미워하고 경멸해주길.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들에게 어떤 감정이라도 불러일으키길 원한다. 우리의 영혼은 진공상태를 혐오한다. 무엇에라도 접촉하길 갈망한다."
“나도 내가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는 거 알아.”
엘사는 엄마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댄다.
“뭐든 다 완벽할 필요는 없어요, 엄마.”
둘이 하도 몸을 딱 붙이고 있어서 엄마의 눈물이 엘사의 코끝에 떨어진다.
“나는 일을 너무 많이 해. 절대로 집에 있을 줄 몰랐던 너희 할머니한테 그렇게 화가 났었는데 지금은 내가 똑같이 하고 있네…….”
엘사는 그리핀도르 목도리로 두 사람의 코를 닦는다.
“세상에 완벽한 슈퍼 히어로는 없어요, 엄마. 괜찮아요.”
(/ p.509)
"사랑한다.
우라지게 사랑한다."
(/ p.541)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부모와 자식간의 오해를 치유하는 힘을 동화와 함께 표현하여 흥미롭다. 이 책은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따뜻한 치유의 이야기와 뭉클한 감동, 해학적인 웃음을 선사하는 작품으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