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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은 의사, 거짓말쟁이 할머니
바티스트 보리유 지음, 이승재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죽고 싶은 의사, 거짓말쟁이 할머니>는 프랑스 전문의읮자 작가인 바티스트 보리유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이다. 이 책의 작가인 바티스트 보리유는 프랑스 남부 오슈의 한 종합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던 2012년, 인턴들의 전국적 파업을 바라보는 대중의 차디찬 시선을 느껴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깊은 간극을 메울 상호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2013년 1월 '자, 보세요'라는 블로그를 개설했다. 이 블로그에 응급실 인턴으로서 몸소 겪은 경험, 또한 동료, 의료진, 환자 들이 그에게 들려준 종합병원의 생생한 일상을 진솔하게 재치 넘치는 글솜씨로 기록, 2개월 만에 5백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였다. 이 블로그로 프랑스 최고의 의학박사 논문에 수여되는 알렉상드르 바르네 대상을 수상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그의 블로그 내용을 출간한 <불새 여인이 죽기 전에 죽도록 웃겨줄 생각이야>는 프랑스 유수의 출판사들이 경합하여 2013년 책으로 출간되었고, 20개국 이상의 나라에 계약되었다. 그의 두 번째 책인 <죽고 싶은 의사, 거짓말쟁이 할머니>는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휴머니스트의 시선이 녹아 있는 소설이다.
책 <죽고 싶은 의사, 거짓말쟁이 할머니>는 삶에 회의를 느껴 자살을 결심하는 의사 선생과 세상의 온갖 일에 참견하고 싶어 하는 이상한 택시 기사 사라의 일주일간의 동행을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아내와 사별한 후로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의사는 택시를 운전하는 노부인 사라를 만난다. 죽음만을 기다리던 의사에게 노부인 사라는 막무가내로 의사의 자살을 막을 일주일의 유예기간을 달라고 한다. 이 책은 장례식 일주일 전부터 하루 하루를 의사와 노부인 사라가 함께하는 시간들을 기록한다. 사라는 공동묘지에서 의사를 달리게 만들면서 흡연의 욕구를 일깨우고, 무덤 속 구덩이로 의사를 인도하고, 의사의 관을 주문하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소년의 장례식에서 의사의 자살 계획을 공개해 의사를 당황하게 만든다.
" “자, 이유나 들어보자고. 도대체 왜 죽고 싶어?”
왜 죽고 싶냐고? 왜 소멸과 망각의 길을 가려느냐고? 불행하기 때문이다. 불행이라는 말의 뜻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살아가기에는 불행의 뜻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 '장례식 일주일 전' 중에서/ pp.23~24)
"계약 조건부터 확실히 해두자고. 다음 주 금요일 밤까지는 자살하지 않는다, 향후 일주일 동안은 무조건 나한테 협조한다, 내가 시키는 일은 군소리 없이 한다. 내가 지금 머릿속에 그리는 커다란 그림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무조건 따른다, 모든 건 다 이유가 있으니 말이야. 미리 말해두는데 내가 상상력이 남다르다는 거 알아둬."
이 책에서 사라가 의사를 공동묘지로 데려가서 뛰게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의사가 달리면서 살아 있는 사실을 오롯이 느끼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불행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열 바퀴를 돌고 났을 때 핫초콜릿 향을 떠올렸다. 머릿속으로 입안에 녹아내리는 초콜릿의 질감을 그려보았다. 달콤쌉싸름한 맛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졌다. 핫초콜릿 한 잔이면 완벽할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한 잔의 핫초콜릿이다. 죽음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데 배까지 몹시 고플 때 기대할 수 있는 그런 핫초콜릿.
바로 그 순간, 사건이 터졌다. 문득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은 것이다. 평소 관심조차 둔 적 없고 심지어 아내와 함께 행복한 한때를 보낼 때도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
바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위아래로 힘차게 오르내리는 갈비뼈, 팽팽하게 긴장한 피부, 발갛게 얼어붙은 귀까지 생생히 느껴졌다. 아픈 발, 고픈 배,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도. 불행하다는 생각도 들고 속이 뒤집어질 만큼 독한 술도 마시고 싶었다. 구역질이 나면서도 무엇보다, 정말 유난하게 흡연 욕구가 솟구쳤다.
내가 살아 있어!
그는 달리고 있는 살아 있는 남자였다.
아! 살아 있다는 사실, 불행을 고스란히 느껴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자신의 운명을 향해 원초적인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두려웠다. 공동묘지에서는 그렇게 고함을 지르지 않는 법이다. 비록 사람 하나 없는 한 겨울의 공동묘지라 해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절대로 습관처럼 굳어져선 안 된다고 말하려는 듯 그는 계속 달렸다."
"그의 시선은 표적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정말이지 사라의 계략은 그 사악함을 측정할 길이 없었다. 삶, 유년기, 기쁨, 추억, 슬픔, 포기, 호박 하나하나마다 검은 매직을 사용해 대문자로 큼지막하게 이름을 적어놓았던 것이다.
느닷없이, 철저히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한 발 밖으로 빠져나와, 마법에서 풀려난 어떤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의욕도, 빛도 없는 그런 곳에서. 그랬기 때문에 호박을 총으로 쏴서 터뜨리는 행위는 그의 내면에 묘한 감정의 변화를 일으켰다. 트별히 무언가를 느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호박에 적힌 그 단어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은 마법 같은 힘을 지니고 있어. 우리를 좋아해주고 반겨도 주지만 울게도 하지. 게다가 힘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바위도 둘로 쪼개놓는다고. 자, 이제 거기서 가만히 이 세상에게 말을 걸어봐."
"이렇게 살아 무엇할까. 그는 여름비를 맞으면서 아내를 찾아다닐 것이다. 뜨거운 지붕에 고여 있다 달빛을 받은 빗물 냄새를 맡으며, 봄에는 풀잎을 적시는 비를 맞으며. 찾고 또 찾아다닐 것이다. 아내를 찾으러 다니다 자신을 잃게 될 때까지.
그녀가 나타나준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고? 아니면 그렇게 떠나버려 죽도록 미워한다고?
그는 자신이 가진 게 무언지 생각해보았다. 그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정신 나간 노부인과 12월의 한겨울 밤, 얼음장같이 차가운 침대 하나. 그게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물건들을 다 태워버리고 저 멀리 먼지 속으로, 어둠 속으로 떠나버려야 하는 걸까? 하늘에서 내린 눈은 그의 시신을 덮어줄 것이다. 그러면 끝이다. 느릿느릿 휘날리는 눈발, 길 한가운데. 그의 시신을 덮어주는 눈.
새벽녘에 그는 집에서 불조차 피울 수 없다는 사실을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사라와 친구들이 모든 걸 가져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라이터까지."
( '장례식 나흘 전' 중에서/ p.163)
사라가 의사에게 공항 카페의 테라스에게 건네는 말이 눈길을 끌었다.
"슬퍼질까 봐 두려워하지 마. 슬픔은 아름다운 무언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분명한 흔적이거든."
"살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의지를 갖고 살면 아내에 대한 그리움, 속에 담아놓은 회한 같은 것들은 비나 바람 같은 존재가 될 거야. 난 자네의 기억들을 되살려놓은 거야. 그리고 자네를 이전의 사람으로 만들어놓을 거야."
소아외과 의사를 꿈꾸던 의사가 성형외과 의사가 되어야 했던 사연이 소개되어 인상적이다.
"젊은 의사는 자신의 인생에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였다. 소아외과 교육 이수에 필요한 서류를 제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앰뷸런스 안에서 아무 말도 못했다는 죄책감이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니고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바람대로 낮에는 기술자로 일하고 밤에는 아이들을 돌보는 외과 의사 선생님이 될 수 없었다. 그는 호박 케이크를 먹으며 만화영화를 보던 어린 시절의 꿈을 접는 길이 자신에게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벌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가슴속에 죽음을 묻고 방향을 돌렸다. 자신이 왜 소아외과 의사가 되려 했는지 서서히 잊어갔다. 그리고 아내가 자신의 팔에 안겨 죽었을 때, 그동안 돌봤던 환자들의 이름을 다 잊어버렸다. 그렇게 그는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일을 포기하고, 오지 않을 무언가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 책의 끝부분에 노부인이 의사에게 왜 거짓말을 해야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다. 의사의 아내는 죽기 전에 노부인과 서로 먼저 죽는 사람의 가족을 돌봐주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죽고 싶은 의사, 거짓말쟁이 할머니>는 자살을 결심할만큼 삶의 지친 사람들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소설이 아닐까.
"사라, 만약 사라도 저처럼 떠나야 할 시기가 오면 그 남자한테 꼭 이렇게 말해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치도록 사랑하고, 영원히 그렇게 사랑할 거라고요. 영원히 사랑해도 우리한테는 부족하다고요. 그리고 소설가의 생각이 틀렸다고도 말해주세요.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는 있어야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 남자한테 꼭 계속 살아달라고 말해주세요."
"이제 알겠지?
자네한테는 새롭게 맛볼 수 있는 게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소원을 빌 기회도 아주 많고 떠오르는 태양을 감상할 기회도 아주 많이 남아 있어. 이제 과거에서 벗어나서 지금의 자신을 파괴할 힘을 되찾으라고. 그래서 새사람이 되는 거야. 사랑이나 추억까지 전부 부수고 지우라는 건 아니야. 그건 언제나 당신과 함께할 테니까. 그냥 편하게 말하는 거야. 새롭게 태어나라고. 무언가를 다시 세우려면 기존에 있던 것들은 무너뜨려야 하는 법이지."
"나는 하늘을 향해 이마를 들어올린다. 내가 살고 잇는 내 삶을 향해, 내가 사랑하는 내 삶, 새로 발견하고, 전과는 달리 다시 시작한 새 삶을 향해서.
눈을 감는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커지는 느낌이 든다. 무한한 확신 덕에 바로 서 있을 수 있고 행복하기까지 하다.
어딘가에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기쁨, 그 길은 여기일 수도 있고, 저기일 수도 있다.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일 수도 있다.
원한다면 담배를 피우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노부인의 노란 택시를 타고 거대한 도로를 달릴 수도 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안에 든 것들을 모두 바닥에 쏟아낸 다음 다시 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재즈 선율에 맞춰 스텝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