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 2019.12
샘터 편집부 지음 / 샘터사(잡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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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12월호에는 '이 여자가 사는 법' 코너에 그림을 통해 자아를 찾는 가수 솔비로 알려진 '권지안'에 관한 글이 실려 인상적이다. 권지안은 전 세계의 현대미술가 30명만 초청하는 미술제인 '뉘블랑쉬 파리'에 한국 작가 중 유일하게 초청받았으며 2012년 화가로 데뷔한 이래 네 번의 개인전을 열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져왔다. 


"제가 펼치는 경계를 허무는 작업에 많은 분들이 큰 흥미를 가져주시는 것 같아 기뻐요. 나를 하나의 타이틀로만 정의내리지 말고 가수 솔비와 화가 권지안의 모습을 드러내자는 의도에서 셀프컬래버레이션이라는 저만의 작업 방식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거든요."


여성의 상처를 표현한 <레드>, <계급사회의 위선을 꼬집은 <블루>, 사랑에 대한 고찰을 담은 <바이올렛> 등 '컬러시리즈'라는 프로젝트명 아래 완성한 그녀의 작품들은 음악과 미술의 경계에서 탄생한  꽃들이었으며, 권지안은 기본적인 미술도구마저 생각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데 불필요한 요소라 여겨 팔레트와 붓을 사용하지 않고 손과 발, 옷에 물감을 묻혀 오로지 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파격적인 발상을 고안했다.


"붓을 들거나 팔레트에서 색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왜곡을 낳을 거라 생각했어요. 캔버스에서 물감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독특한 색을이 저의 색깔이고, 혼신을 다한 제 몸짓이 그대로 기록돼야 저만의 작품이 완성되죠. 진정성 있는 그림을 그리는 데 제가 갖고 있는 온도와 에너지만큼 이상적인 재료를 아직 찾지 못했어요."


권지안은 "그림을 공부하면서 생각해보니 자유, 고독, 사랑 등 작가들이 저마다 고민하는 삶의 키워드는 서로 비슷한데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더라고요.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죠. 그러고 나니까 저를 한 단어로 정의내릴 필요도, 누군가의 특정한 시선에 얽매일 필요도 없겠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자신을 사랑하게 됐어요."라고 말한다. 표현방식에 대해 깊이 고민할수록 독창적인 그림이 탄생하듯 저마다 삶의 방식을 폭넓게 탐구할 때 인생이란 예술품이 아름답게 완성되리라 믿는다는 권지안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샘터 12월호 '이달에 만난 사람' 코너에는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며 <여명의 눈동자>를 비롯하여 50여 편의 작품을 써온 작가 김성종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 김성종 작가는 국내 최초의 추리작가로 평가받는 김내성에 이어 50년 넘게 혈혈단신 한국 추리문학을 지켜오며 지금도 글 쓰는 일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다. 오직 쓰는 일이 삶의 전부인 작가 김성종, 글 쓰는 일로부터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는 그의 뜨거운 열정은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몰두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돌아보면 참 열심히 써오긴 했어요. 오십 년 넘게 써온 글이 원고지로 따지면 10만 장이 넘습니다. 서른다섯 살 때 일제강점기부터 8.15 독립, 한국전쟁을 관통하는 대하소설 <여명의 눈동자>의 연재를 시작하기 전까지 소설로 밥 먹고 살 수 있으리란 건 기대도 못했는데 추리소설 작가가 나뿐이라 연재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고요. 돌이켜 보면 남들은 다 외면하는 추리소설을 고집했던 게 참 다행이었다 싶어요."

"자지가 좋아하는 분야가 있다면 의심하지 말고 인생을 건 승부를 걸어야 두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신념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정에서 나옵니다. 주춤거리거나 회의가 느껴진다고 중간에 포기해버리면 그 다음 일엔 더 자신감이 없어지죠. 인생에는 신념으로 버텨내야 하는 일들이 있어요. 작가로 성공하려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틈날 때마다 써야 합니다. 삶이 또한 그런 겁니다. 지금은 외롭고 힘들겠지만 꿋꿋이 버티고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눈앞의 안개가 걷히는 날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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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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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8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대표작이자 저자의 세 번째 장편소설인 <태고의 시간들>은 20세기 폴란드의 역사를 관통하며 탄생부터 성장, 결혼, 출산, 노화, 죽음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인생 여정을 따라간다.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역사의 비극을 경험한 여성들이 가상의 마을 태고에서 벌어진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시간의 속박을 느끼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개, 죽음의 생이고, 부패의 생이며, 모든 죽은 것들의 생이자 시간을 느리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버섯균, 시간과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무의 시간을 통해 태고를 살아가는 인간의 시간과 다른 생을 살아가는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랄카라는 이름의 개는 단지 이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견딜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 속에 시간을 묶어 놓고 과거 때문에 고통받고, 그 고통을 미래로 끌고 가기도 하며 절망을 창조한다. 동물들은 그 어떤 생각도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보다 더 순수한 감정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드문 경우에만 신을 체감하는 인간과는 달리 동물인 랄카는 유한한 시간의 속박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인지하며 세상에 대한 믿음을 내면에 품고 있다." 


<태고의 시간들>에서 신이 창조한 천사는 게노베파의 딸 미시아의 탄생을 산파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인간은 세상으로부터, 사건으로부터 배움을 얻으며, 세상과 자기 자신에 관해 깨우치고, 사건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한계와 가능성을 가늠하고, 스스로에게 명분을 부여하지만 신이 창조한 천사는 오직 하나뿐민 감정인 연민을 가진채, 자기 자신을 통해서 세상과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깨우친다.   


"천사는 마치 흐르는 물을 바라보듯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켜보았다. 사건 자체에는 관심도 없었고, 흥미를 느끼지도 않았다. 어디서 비롯되었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시작과 끝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건들의 흐름을 보았다. 서로 유사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사건들, 시간상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사건들, 하나에서 또 하나로 이어지기도 하고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기도 한 사건들의 흐름 말이다. 그러나 이 또한 그에게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태고와 그 인근에 사는 냄새나고 더러운 사내들을 만난 크워스카는 태고 전체를, 이곳에 깃든 모든 고통과 희망을 제 것으로 소화해버린다. 하지만 크워스카는 자신이 낳은 아기가 생을 살아내지 못하는 광경을 목도하며 생명을 만들고 무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게노베파는 남편 미하우가 전쟁터에 나간 후에 유대인 청년 엘리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남편이 전쟁터에서 돌아오자 엘리가 미혼이며 유대인이자 예슈코틀레 출신이라는 이유로 엘리와의 관계에 선을 긋는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게노베파는 사랑했던 청년 엘리가 웅크린 채 죽어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날부터 다시는 걷지 못한다.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광기에 사로잡힌 노파 플로렌티카의 여성으로서의 비극적인 삶을 보여주며 광기는 어느날 느닷없이 쌓여온 비극들이 합해져 특별한 이유로부터 벗어나 인간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노파 플로렌티카는 거리를 두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는 고양이 개와 고양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법을 깨우친다. 특히, 이 책에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술 취한 남자들에게 몸을 팔다가 숲속에서 홀로 아이를 낳고 치유와 예언의 능력을 갖게 된 크워스카가 광기에 사로잡힌 노파 플로렌티카라는 사회로부터 소외받은 여성들의 연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광기란 어떤 대단하고 극적인 사건이나 감당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는다. 가령 실연을 당했다든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든지, 아니면 신의 얼굴을 보았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원인으로 인해 당사자가 미쳐가는 것이라 여긴다. 느닷없이 단번에, 어떤 특별한 이유로 인해 광기가 엄습하여 마치 올가미처럼 이성에 족쇄를 채우고 감정을 뒤흔들어놓는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블로렌틴카는 별다른 사유도 없이 광기에 사로잡혔고, 이유없이 미쳐버렸다. 한때 그녀에게도 광기의 원인이 될 만한 일들이 있었다. 술 취한 남편이 백강에서 익사했을 때, 아홉 자녀 중 일곱을 잃었을 때, 유산에 유산을 거듭했을 때, 유산하지 않은 아이를 지웠을 때, 두 번은 유산의 위헙으로부터 가까스로 아이를 지켰을 때, 헛간이 모조리 불탔을 때, 그녀에게 남은 두 아이가 그녀를 버리고 세상 어딘다고 사라졌을 때 말이다."


성에서 태어난 상속자 포피엘스키는 나는 어디에서 온 것이며, 뭔가를 안다는 건 무슨 의미이며, 인간은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세 가지 질문을 랍비에게 던지고 랍비는 마지막 질문인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걸까요? 시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라는 물음으로 답한다. 포피엘스키는 라틴어로 '이그니스 파투스. 한 명의 게이머를 위한 유익한 게임'이라는 제목이 적힌 오래되고 기이한 책자 한 권을 선물받는다. 올가 토카르추크 작가는 ''이그니스 파투스. 한 명의 게이머를 위한 유익한 게임'이라는 책자의 이야기를 8단계로 보여주며 신과 인간의 통찰을 담아낸다. 


"신에게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신은 자신이 세상 속에 가두어 놓고, 시간의 굴레에 얽매여놓은 인간들처럼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따금 인간의 영혼은 만물을 꿰뚫어 보는 신의 시야에서 감쪽같이 벗어나서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그럴 때면 신의 갈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자신 말고도 절대 불변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질서로 인해 변화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모형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을 신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조차 아우르는 그 질서 안에서 시간에 의해 흩어져버리는 순간적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시간의 너머에서 일제히,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기 시작한다."


풍요를 허락한 숲에서 벗어나 태고 마을을 동경한 크워스카의 딸 루타는 기형의 모습을 한 미시아의 아들 이지도르를 발견하고 교감을 나눈다. 루타는 이지도르에게 모든 게 끝나는 태고의 경계를 보여주며 가장 두려운 것은 태고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모든 게 그런 것처럼 보였을 뿐이야. 여행을 떠나 이 경계에 다다르는 순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거지. 그들은 아마도 계속 나아가고 있다고, 더 가면 키엘체나 러시아가 있을 거라는 꿈을 꾸고 있을 거야. 한번은 엄마가 화석처럼 굳어 있는 사람들을 내게 보여준 적도 있어. 그 사람들은 키엘체로 가는 길 위에 서 있었지. 눈을 뜬 채, 꿈쩍도 하지 않았어. 끔찍해 보였지. 다들 죽은 사람들 같았어.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깨어나서 꿈을 기억으로 받아들이고는 집으로 들어가는 거야. 전부 이런 식인 거지."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삶의 부조리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안내하여 흥미롭다. 신은 술 취한 남자들에게 몸을 팔다가 숲속에서 홀로 아이를 낳고 치유와 예언의 능력을 갖게 된 크워스카를 기적의 모유로 가득차게 하며 그 모유로 병을 고친 사람들을 전쟁에서 모두 죽게 만드는 삶의 역설을 전한다.


"시간을 초월한 신이 시간과 시간의 변형된 형태 속에 현존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땐, 변화하고 움직이고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고 흔들리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주시하면 된다. 예를 들어 넘실대는 수평선이나 태양의 광환, 지진, 대육의 융기, 해빙, 빙산의 이동, 바다로 흐르는 강물, 움트는 새싹, 산을 조각하는 바람, 엄마의 배 속에 있는 태아의 생장, 눈가의 주름, 무덤 속 시신의 부패, 포도주의 숙성, 비가 온 뒤에 돋아나는 버섯과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책에서 작가 올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노파 플로렌틴카를 향해 총을 쏜 독일군 쿠르트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과 함께 태고의 마을에 남고 싶었던 소원을 죽음으로 이루어준 신의 모습을 보여주어 눈길을 끈다.  


"집 안에서 낯익은 얼굴의 노파가 뛰어나와 살아 있는 개들을 도망치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쿠르트는 보았다. 노파는 상처 입은 개들을 끌어안고서 허겁지겁 과수원으로 옮겼다. 그녀의 회색빛 앞치마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노파는 쿠르트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소리를 질렀다. 지휘관으로서 그는 이 어이없는 총격을 멈추게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쿠르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세상의 종말을 목격하는 증인이며, 세상을 죄와 부패로부터 깨끗하게 만드는 사명을 수행하는 천사들 가운데 하나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뭔가를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도록 해야만 했다. 끔찍한 일이지만, 그래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지금 이 세상은 죽음을 선고받았다. 그러니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신은 보이지 않지만 하늘 아래 어딘가에 있다고 믿었던 이지도르는 러시아 장교 이반 무크타의 이야기를 통해 신이 없다고 상상한다. 이지도르는 인간은 고통과 절망을 경험할 뿐이며, 세상의 겉은 알록달록한 껍데기에 싸여 있지만, 모든 것을 몰락과 부패, 파멸 속으로 융합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상과 단절되어 신에게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수도원으로 향한 이지도르는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막상 찾아내려 하면 그 어디에도 없으며, 사랑과 기쁨이 넘쳤지만 때로는 잔인하고 위협적이기도 하며, 창조하고, 파괴하고, 아니면 창조한 대상이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만드는, 예측 불가능한 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네가 방금 말한 그곳, 그러니까 하늘 아래에 아예 신이 없다고 상상해보렴. 돌보고 지켜주는 그 누구도 없이 이 세상은 그저 하나의 거대한 혼돈 그 자체이거나, 아니면 좀 더 나쁘게 가정해서 그저 자극이나 충동으로 작동하는 기계, 그러니까 망가진 볏짚 절단기와 같은 거라고 생각해보는 거야......"


루타는 독일군과 러시아군의 경계선인 볼라로 가는 길에서 그들에게 강간을 당한 채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엄마인 크워스카에게 발견된다. 그 후 루타는 미시아의 아들 우클레야와 결혼하고, 남편의 폭력 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감정을 맛보기 위해 태고 마을의 경계선에 도착한다. 


"루타는 술 취한 사내의 육중한 몸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잠시 후 비고스가 든 냄비가 방문에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흘렀지만, 루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드레스를 입어보았다."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20세기 폴란드의 비극의 역사를 살아온 인물들의 죽음의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주어 인상적이다. 게노베파는 전쟁으로 죽은 이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그들을 응시하는, 흉터가 가득한, 검고 끔찍한 신의 얼굴을 보았고, 미시아는 뇌졸증으로 죽음을 맞기 전 한 달 동안 미시아는 줄곧 세상의 저편을 보았다. 미시아의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고비마다 모습을 드러냈던 수호천사가 거기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움직일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다는 뜻이다. 삶이란 결국 움직임이니까. 죽임을 당한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은 몸이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과 끝은 몸 안에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인생처럼 평범하지만, 그 속에는 어둠과 슬픔이 깃들어 있다고 가족들은 확신했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숨을 수 있는 껍데기를 찾아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다."


아버지 파베우의 뜻에 따라 양로원에 들어간 이지도르는 노년기가 되면 만물을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혜안이 트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그 누구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지도르는 망각의 힘으로 남은 삶을 견디며 서서히 죽어가다, 마침내 영원히 사라져버린다.


"이지도르는 잊어버리는 법을 터득했다. 망각은 그에게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그저 하루 동안 숲과 강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어머니를, 밤색으로 물든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며 기뻐하던 미시아를 떠올리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집을, 네 개의 창문이 있는 다락방을 하루 동안 잊어버리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이튿날이 되면, 영상들이 점점 흐릿해지고 서서히 바래져갔다."


미시아의 남편 파베우는 상속자 포피엘스키처럼 부를 쥔 채로 태어난 사람들을 열망하며, 자신이 가진 욕망이라는 위대한 힘을 멈추지 않는 인간이 되어 갔지만 결국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시간에 가까워진 파베우 앞에 너무 늦게 나타난 딸 아델카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고,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했다. 


<태고의 시간>을 읽으면서, 20세기라는 태고의 역사 속에서 허무와 삶의 부조리를 경험한 인간들의 죽음과 다시 그 죽음을 기다리며 현재를 살아가게 될 후손의 미래를 그려본다. 잡을 수 없고 끊임없이 변하는 시간의 흐름은 신을 닮았고 인간은 죽음으로 향하는 유한한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 하지만 올가 토카르추크 작가는 고통과 절망이 반복되는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신의 갈망조차 아우르는 시간의 너머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불변의 질서를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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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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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여가는 시간이 지나간 길 위의 발자국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삶의 얼굴들이 존재한다. 길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들과 뒤엉켜 그리움과 사랑, 후회와 상처의 기억들을 만나게 하는 장소이다. 어린 시절 상상했던 세계와 조우할 수 없지만, 걸어온 길 위의 시간이 쌓여서 우리는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마주하며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한지혜 작가가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 기록을 담은 에세이로 흥미롭다. 그녀는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버텨온 흔적과 기쁨이 남은 자리에 돌아보지 못한 다른 슬픔을 기억하며, 눈부신 태양처럼 찬란한 삶의 길이 아닌, 골목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 조용히 독자를 생생한 삶의 길목으로 안내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로 시작하는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라는 미당의 시 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해고대상자였던 과거에 한지혜 작가는 퍼붓는 눈 속에서 친구와 함께 길을 걸어간 시간을 기억해낸다. 함박눈이 떨어지는 폭설 위에서 그녀가 걸었던 길은 우울한 상흔을 남기는 대신 삶의 무게를 덜어낸 자의 희망을 보여준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라는 미당의 시 구절을 이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삶을 포용하는 태도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어렸을 때는 눈이 내리면 마냥 신나고 즐겁더니 나이를 먹으면서는 마음이 애틋해진다. 그게 "괜찮다" 소리를 듣고 난 이후부터 생긴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소리와 함께 내 서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누구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비로소 들으면서, 내 삶도 한결 깊어졌다. 춥고 흐린 날, 그게 창밖의 날씨든 내가 처한 인생이든 마음을 낮추면 세상 모든 만물은 그 안에 깃든 마음은 다 괜찮아질 수 있다. 나는 우선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한지혜 작가는 가난했지만 온 가족이 함께 살며 추억을 쌓았던, 지금은 사라져버린 어린 시절 좁은 골목길의 기억을 떠올린다.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복잡한 감정들이 뒤얽힌 일상, 옹기종기 모여있는 골목길에서 놀던 친구와의 추억,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하던 과거의 시간들이 깊은 그리움으로 몰려와 눈물이 날 것만 같다는 그녀의 글을 읽으며 지금의 나를 만든, 지나온 길의 시간들과 마주한다. 더 커다란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 작은 키로 나만의 우주 안에서 생의 기쁨과 고통을 일찍 알아버린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회상하며 그녀처럼 울어버렸다. 


"이제 그 길은 없다. 나는 여전히 그 길 위에 살고 있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길은 거미줄처럼 얽히고 꼬인 길을 툭 터서 하나로 만든 길이다. 한 사람도 지나가기 어려웠던 길을 이제는 자가용 두어 대가 나란히 달리기도 한다. 공중변소 앞에서 다리를 꼬고 줄을 설 필요도 없다. 칸칸이 늘어선 방들이 모두 층층이 올라가 아파트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 길 한 번 잃지 않고 살았던 나는 눈 한 번 휘두르는 끝이 보이는 넓은 길에서 오히려 막막하다. 꿈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 좁아 담벼락이 어깨를 스치는 바로 그 길이다. 걸을 때마다 길 위에서 길이 그리워 나는 더러 눈물이 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미래를 향하여 혹은 다른 삶을 향하여 한번 더 발걸음을 내딘 것, 그 의지가 바로 삶의 가장 긍정적인 순간이라는 한지혜 작가의 글에 공감했다. 그녀가 여성 작가로 글을 쓰며 살아가는 원동력은 성공하기 위한 욕망이 아닌, 주어진 생을 받아들이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모든 생을 멈추지 않았을때 행복은 우리의 주변을 향해 다가오며, 삶의 다양한 도전의 결과를 실패와 성공으로 가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행복이라는 선물을 움켜쥘 자격이 있다는 삶의 지혜를 전한다. 


"청춘 시절 내가 생각했던 성공의 단계는 겪어보니 그저 사회가 만들어놓은 욕망의 신기루였을 뿐이다. 갈 곳 없고 바라볼 곳 없는 시간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글을 썼다. 그리고 그 글로 작가가 되었다. 여전히 변두리의 시간을 살지만 태풍의 한 가운데 같던 그 폐허는 지나왔다. 생의 다음 순간,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 그건 참으로 소중한 것 같다. 그 장소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다음 문제다."


한지혜 작가가 삶의 지나온 시간 속에서 생생한 삶의 흔적 뿐만 아니라 죽음이라는 경험을 독자에게 이야기하여 눈길을 끈다. 그녀는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파리의 유명한 공원 묘역인 페르 라셰즈에서 길을 잃어버린 후 짐 모리슨의 무덤을 발견하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건낸다. 그녀는 길도 사람도 보이지 않던 방황의 시간에서 죽은 자로 가득한 무덤 앞에서 길고 짧은 생을 혼자서 돌아다니며 한참 동안 찾아 헤맨 문을 발견한다. 이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자가 애도하며 새로운 인생의 길을 시작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한지혜 작가는 여성 작가라는 삶의 길을 걸어오며 부딪혔던 다양한 사회적 시선들의 문제와 삶의 부조리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출산을 앞두고 강제적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던 일, 생리대 기본권과 관련된 저소득층 아이들의 자존에 대한 절실한 고민 등 그녀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이 담긴 글은 그녀가 살아온 삶의 길이 개인적인 서사를 넘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된다. 멀미 하던 어린 자신에게 손수건으로 부채를 부쳐주던 버스 안내양, 임산부라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 순간에 자신의 건강을 염려했던 음료를 배달해주던 아주머니의 편지, 아이의 유치원 재등록을 하지 않았을 때 서운함 가득한 표정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오던 유치원 버스 기사님을 보며 기득권이 중심인 세상에서 자신과 무관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은 순간들을 전하는 한지혜 작가의 글은 갑이 아닌 을의 연대가 버티며 살아갈 힘을 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음은 중앙으로 향하고, 욕망은 상단에서 춤을 추다 곤두박질치면 위로는 늘 내가 돌아보지 않던 자리에서 찾아온다. 일상에서 나랑 무관하다고 지나쳤던 사람들에게, 내게 그 자리를 떠날 때 내내 함께였다고 믿은 누구도 건네지 않는, 누구보다 따뜻한 인사를 받게 될 때마다 나는 부끄럽다. 그들을 보지 않았던 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들과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나도 모르게 부린 허세를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발자국을 지나온 자리마다 약하지만 꺼지지 않는 불빛이 있었기에, 길은 다양한 색채의 빛깔을 발휘한다. 한지혜 작가는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통해 하얀 눈이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기보다 눈 위에 발자국을 내딛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진실과 함께 나다운 삶의 얼굴로 살아가기 위한 각자의 답을 독자에게 질문한다.


"이제 이 글이 어디까지 어떻게 닿을지 모르겠다. 많은 곳에 닿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와 같았던 마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혹여 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러나 나는 언제나 실패에서 출발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시간의 힘을 믿는다. 생존이란, 삶이란 순간이 아니라 영속성을 가진 시간을 가리키는 거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당신들, 살아갈 당신들이 저마다의 힘으로 끝내 버티기를. 나는 가늘고 길게 쥔 펜으로 앞으로도 계속 당신들을 쓰고, 나를 쓰고, 이 삶을 기록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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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 인생을 위한 고전, 개정판 명역고전 시리즈
공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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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번역의 대가 김원중 교수가 2년 동안 네이버 오디오클립의 ‘논어백독’으로 독자들과 함께 <논어>를 읽으면서 기존의 <논어>를 전면 개정하여 출간했다. 2년간 방송을 통해 독자들의 눈높이에 한 걸음 더 다가가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지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완했으며, 주희부터 정약용, 오규 소라이, 양보쥔, 리링, 성백효 등 <논어> 주석의 대가들을 두루 망라하여 200자 원고지 500매 이상의 상세한 주석과 해설을 더했다. 춘추전국시대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바탕으로 원전의 맥락을 살린 번역문과 그에 못지않은 풍부하고 상세한 주는 논어 읽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다.  ​


<논어>의 역자인 김원중 교수는 <논어>의 각 편 제목은 가장 먼저 나오는 두 글자를 딴 것으로, 특별한 내용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 듯 보이지만, 20편을 살펴보면 꽤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학, 정, 인 등 공자 사유의 핵심이 전반부에 주로 배치돼 있고, 공자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 제목에 들어간 장들은 후반부에 몰려 있다. <논어>의 역자인 김원중 교수는 아무리 계통이 없다 해도 가장 타당한 구절과 내용을 책의 앞부분에 배치했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기 때문에 <논어>를 순서대로 읽을 것을 권한다. 또 다른 이유는 <논어>가 크게 전반부 10편과 후반부 10편으로 나뉘는데, 전반부 10편을 먼저 읽어야만 후반부 10편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논어>의 역자인 김원중 교수는 한문 실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면, 원문을 같이 읽어야 <논어>의 더욱 깊은 맛을 알 수 있으며, 번역서에서는 이 점을 배려하여 원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김원중 교수는 <논어>를 천천히 읽으며 행간의 의미를 음미하면서 해석학적인 의미도 파악해보면 좋다고 말한다.​


"분명한 것은, 이 <논어>라는 책은 공자라는 프리즘으로 공자가 살아간 춘추시대와 당대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보고자 했다는 점이다. 공자는 냉엄한 잣대로 당대의 인물들을 재단하고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도 서릿발같이 질타했다. 때로는 감성적이고 순진한 말로 허심탄회하게 인간 자체를 감싸기도 했다. 자신의 삶이 그토록 치열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공자가 고민했던 바로 그 문제들이 오늘 이 시점에서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는 점을 되새겨본다면 <논어>가 얼마나 날타롭게 인간의 진면목을 꿰뚫는 책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성공한 사람들은 좀 더 겸허해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발분하여 통찰의 지혜를 터득해나가야 할 것이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공자가 제시한 인은 결국 그의 말처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대단히 원활하게 하는 기본 축이다. <논어>를 인재경영론 시작에서 읽더라도 반드시 이러한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논어>의 역자인 김원중 교수는 <논어> 제1편인 '학이' 편은 1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논어> 전체의 총서로서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인생론의 핵심이 오롯이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편은 배움과 인간관계에 대한 기본, 교우관계, 입신의 근본이 되는 효도와 우애, 세 번 반성할 일, 교언영색, 나라를 다스리는 법 등 복잡하고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삶의 즐거움 1.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남이 [나를] 알라주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


<논어>의 역자인 김원중 교수는 "군자의 기본적인 의미는 덕과 지위가 있다는 것이며 특히 '덕을 이룬 자의 이름'의 의미다. 소인이란 말과 대비되며 공자 이래로 군자라는 말은 사회적 지위보다는 도덕적 품성이 높아 존경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물론 후세에는 지위가 없더라도 덕이 있으면 군자라고 일컬었다.(정약용설). 소인은 이와 반대다. 한편, 청대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라고 말한다.


"앎의 기본 2.17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야,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줄까? 어떤 것을 알면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논어>의 역자인 김원중 교수는 "아는 것과 아는 척하는 것의 차이가 크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앎의 기본은 솔직함에서 나온다. 모르고도 안다고 하고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며 아는 척하는 것은 기본적인 인성이 잘못된 어리석은 짓이며, 앎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현명하다."라고 말한다.


<논어>의 역자인 김원중 교수는 <논어> 제9편 <자한> 편은 주로 공자의 덕행에 관한 내용이 많은데 <태백> 편과 연계되는 내용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김원중 교수는 공자가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 일로 내세운 구절도 음미해볼 만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 않은 네 가지 9.4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절대 하지 않으셨다. [근거 없는] 억측을 하지 않으셨고, 반드시 하겠다는 게 없으셨으며, 고집을 부리지 않으셨고, 나만이 옳다고 하지도 않으셨다."


<논어>의 역자인 김원중 교수는 <논어> 제12편인 <안연> 편은 모두 24장이며, 공자가 주로 제자들의 질문에 답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가르침을 청한 삶의 문제에 해답을 내놓기도 했다고 말한다. 김원중 교수는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에 관한 내용이 많고 정치적인 문제도 적지 않게 거론되는 것이 이 편의 특징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직한 사람을 천거하여 비뚤어진 사람 대신 앉혀라 12.22


번지가 인에 대해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번지가] 지혜로움에 대해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번지가 깨닫지 못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천거하여 비뚤어진 사람 위에 두어 비뚤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바르게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번지가 물어나와 자하를 만나자 말했다.

"아까 제가 선생님을 뵙고 앎에 대해 여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정직한 사람을 천거하여 비뚤어진 사람 자리에 두어 비뚤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바르게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던데, 무슨 뜻일까요?"

자하가 말했다.

"풍부하구나, 그 말씀이! 순임금이 천하를 차지하고 나서 여러 사람 중에서 뽑아 고요를 등용하니, 인하지 않은 자들이 멀어졌던 것이다. 탕임금이 천하를 차지하고 나서 여러 사람 중에 뽑아 이윤을 등용하니, 인하지 않은 자들이 멀어졌던 것이다."


"인에 가까운 네 가지 13.27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강인함, 의연함, 질박함, 어눌함은 인에 가깝다." "


<논어>의 역자인 김원중 교수는 <학이> 1.3에 나온 "교언영색"과는 상반되는 개념이며 공자가 생각하는 "인"의 개념에는 이처럼 굳셈과 소탈함이 있고 둔하고 어눌하며 투박한 면모가 있다고 말한다.


<논어>의 역자인 김원중 교수는 <논어> 제17편 <양화> 편은 <술이> 편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김원중 교수는 이 편의 내용 역시 정치적인 담화뿐 아니라 공자의 처세 방식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공·관·신·민·혜 17.6


자장이 공자께 인에 대해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를 천하에 실행할 수 있으면 인을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자장이] 그 내용을 청해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공손함, 너그러움, 믿음, 영민함, 은혜이다. 공손하면 모욕을 받지 않고, 너그러움을 베풀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으며, 믿으면 사람들이 신임하고, 영민하면 공을 세우게 되며, 은혜로우면 사람을 충분히 부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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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아시아 제54호 2019.가을 - 이 사람 An Asian Profile : 알레 알라 알레주
아시아 편집부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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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계간 아시아 54호>에서 "작가는 한 마리 '소'다"라는 제목의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류전원의 에세이가 인상적이다. 작가 류전원은 작가에게 '소시민'은 매우 매력적인 묘사의 대상이며 그들은 소규모의 수공업자, 상인, 자영업자, 별 볼 일 없는 사람 등으로, 류전원 작가는 많은 작품 속에서 이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묘사해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류전원 작가는 소시믄의 시각을 작품이나 작가의 시각으로 삼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소시민의 시각은 오직 눈앞의 사실에 한정되는 특징을 지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류전원 작가의 글이 눈길을 끈다. 류전원은 "작가라는 사람은 소시민에 대해 쓸 수 있다. 그러나 소시민의 시각에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나의 관점이다."라고 이야기한다.

"2013년에 나는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라는 소설을 출간했다. 주인공인 리쉐롄은 평범한 중국 농촌 여성으로 한 마디 말을 듣기 위해 법정투쟁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것은 "나는 행실이 나쁜 여자가 아니다"라는 한 마디였다. 그녀는 촌에서 현까지, 현에서 시까지, 마지막에는 또 베이징까지 가서 법적투쟁을 하며 20년이라는 시간을 소모했는데도 끝끝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실을 정정하는 법적 조치에 이를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중에 이 법정투쟁은 결국 사람들의 우스갯소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20년 동안, 그녀는 결국 자신의 비극을 코미디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작년 겨울, 이 책이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을 때, 나는 출판사의 프로모션 활동에 부응해 네덜란드로 갔다. 언젠가 서점에서 독자들과 교류를 가질 때, 어떤 네덜란드 여성이 이 책을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웃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자 오직 자기 집 안에 있는 소 한 마리 앞에서만 속에 든 말을 하게 되는 장면을 보다가 결국 목놓아 울었다고. 이어서 그녀는 말했다. 세상에서 오직 소 한 마리만이 그녀의 말을 들어줄 때, 사실은 또 다른 한 마리 소가 리쉐롄의 말을 듣고 있었던 거라고. 스 고는 바로 이 책의 작가 류전원이라고."

"지금 이 책은 20여 종의 분자로 변역-당연히 한글 번역본도 있다-되었다. 그리하여 보다 더 많은 경철자들은 그 삶 속에서 전혀 아무런 무게도 지니지 않았던 사람 곁에 쪼그려 앉아 그녀의 말을 들어주게 되었다. 이것은 내 능력 때문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힘, 문학이 지닌 상상과 시각의 힘이다. 문학의 힘은 삶 속에서는 태양이 비추지 않는 곳까지 빛을 끌어다 준다."



문학 잡지 <계간 아시아 54호>에서 '이 사람' 시리즈는 김현 시인의 <알레 알라 알레주>로,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필두로 하여 과거와 동시대의 다양한 예술가들을 픽션과 팩션으로 조율하여 조명한다. 김현 시인은 소설가 김승옥이 '사상계'에 <무진기행>을 발표하며 주목받기 시작하 즈음 '새문화'에 최금숙의 <안개>(1964)라는 문제적인 작품이 발표된다고 말한다.

"<무진기행>이 '한국 단편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보여준 작품'이라는 평가를 획득하며, 이른바 '남성'이라는 인간의 고독과 허무와 실존의 정전으로 자리 잡는 동안 최금숙의 <안개>는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채 잊혔다. 인물의 사소한 움직임까지도 섬세하게 담아내는 묘사 기법과 문체에 구현된 세련된 감각은 차치하더라도, 최금숙의 <안개>는 당시 대부분의 문학 작품에서 남성의 보조로서 또는 지극히 관념적으로만 그려지던 여성을 주체적으로, 구체적인 욕망을 가진 존재로 그려내었다는 점만으로도 논의해본직한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김현 시인은 소설가 조해진의 소설 <산책자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조해진의 소설 <산책자의 행복>은 철학 강사 미영의 삶과 그의 제자 메이린이 보낸 편지로 삶의 불안과 직접 연루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김현 시인은 어떤 소설은 우리 앞에 얼굴을 가져다 놓는다고, 더 정확히 말하면 얼굴이라는 산을 우리 앞으로 옮겨 온다고 말한다. 김현 시인은 그때 얼굴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응시해야만 하는 관념적인 능선임과 동시에 등반이라는 아주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비로서 짐작이 가능해지는 구체적인 이목구비라고 전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매일 견디며 산다. 먹고살고자 하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고 또한 아시아인의 얼굴을, 세계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소설적인 사건으로만 보이는 한 사람의 추락은 실은 현실 속 다수에게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질 일과 다름없다.

조해진은 미영이 큰 개에게 쫓기는 환시를 겪고 흐느끼며 "살고 싶어"라고 독백하는 장면을 통해 한 인간이 실존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연유에 관해 독자와 함께 생각해보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작가는 살고 싶어, 라는 문장을 쓰기 위해서 이 단편을 썼을 것이다."

"살고 싶어, 라는 문장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얼굴을 눈앞에 두고 오랫동안 침묵했다. 가혹한 현실에서도 삶을 선택하는 것. 인간의 품위를 끝까지 선택하려는 그 얼굴은 우리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얼굴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인 우리의 얼굴이었다."



<계간 아시아 54호>에는 지난 여름 제6회 심훈문학대상을 수상한 김중혁 작가의 수상 소감과 더불어, 국내 주요 문예지에 발표된 '한 해를 빚낸 소설 다섯 편'에 대한 소개와 각각에 대한 평론가, 소설가들의 지지발언이 함께 실렸다. 평론가 이경재는 김중혁의 <휴가 중인 시체>를, 소설가 전성태는 박형서의 <쓸모의 관하여>를, 평론가 소영현은 조남주의 <가출>을, 평론가 장은정은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빚으로도>를, 평론가 정은경은 황정은의 <파묘>를 지지하는 비평을 발표했다.

소영현 평론가는 소품에 가까운 <가출>의 문학적 의미에 대한 판정은 조남주의 전작 <82년생 김지영>이후로 달라졌다고 말한다. 소영현 평론가는 <82년생 김지영>의 의미를 독자가 먼저 발견했다고도 할 수 있으며, 조남주의 소설은 그간 문학의 진전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지우거나 외면했던 독자의 자리가 다시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소영현 평론가는 <평이 고수하던 평가틀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전면적인 성찰을 요청하며, <가출>의 문학적 의미는 이러한 성찰 이후에 마련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남주의 소설 <가출>은 아버지의 가출을 가부장의 부재라는 관점에서 다룬다. 가부장의 부재가 갖는 의미를 가족 내 개별 개인의 발견의 차원에서 되새긴다.

<가출>의 가족은 역설적으로 아버지의 가출 이후 다시 모이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가출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자식들을 불러 모으면서 엄마는 청국장을 끓이고 잡채를 만들며 고등어를 굽고 호박전을 부친다. 아버지의 기호에 맞춰, 온 가족이 좋아하는 청국장을 아버지가 부재하는 때에만 먹어야 했다. 아버지가 청년퇴직을 한 후에는 가족들이 청국장을 먹지 못했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그런 존재였다. 손자 손녀들에게는 이유 없이 숨죽여야 하는 두려운 존재이고, 아버지의 취향과 기호가 가족의 취향과 기호가 되어버리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아버지인 가부장 아래에서 가족은 전체이자 하나로서의 가족에 가까웠고, 개별 구성원의 차이는 희미하고 흐릿했다. 가부장의 부재란 조남주 작가에게 가족의 일원들에게 하나이자 전체라는 의식을 만들어내던 그 구심점이 사라진 상황을 의미한다.(...)

조남주는 조심스럽게 "미안하지만 아버지 없이도 남은 가족들은 잘 살고 있다. 아버지도 가족을 떠나 잘 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언젠가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 가부장의 부재가 갖는 의미를 전한다. 아버지의 가출이 가족 모두에게 다 좋은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책임감에 눌려 자신으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의무와 당위로서의 가족이었던 이들에게도 가부장의 자리를 비워두는 일이 더 좋은 게 아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소설은 가부장으로서의 아버지의 귀환 대신 딸이 비상용으로 준 신용카드 사용내역이 딸의 문자메시지로 전달되는 방식으로, 즉 문자메시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따뜻한 방식으로, 가부장의 귀환 없는 새로운 가족에 대해, 아니 그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가부장제를 다루는 소설로서 조남주의 <가출>은 접근성이 용이한 페미니즘 소설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단지 여성을 다루거나 여성이 겪는 억압이나 차별을 다루는 소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다양한 지점에서의 사회적 억압과 차별의 이면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고 그 차별 자체를 문제 삼는 소설을 두고 페미니즘 소설이라 불러 마땅하다면, 조남주의 <가출>은 맞춤한 페미니즘 소설이다."

정은경 평론가는 황정은 작가는 2010년 전후의 한국문학에서 중심 이슈가 되어 왔다고 말한다. 정은경 평론가는 파묘 과정을 그린 소설 <파묘>의 배경은 촛불집회인데, '파묘'에는 이순일의 가족사와 한국사의 상흔, 그리고 현재적 얼크러짐이 포개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은경 평론가는 황정은 작가의 <파묘>는 '묘지'로부터 이어진 우리의 역사와 현재를 바라보게 하며, 한국역사의 적폐가 파헤쳐지는 '촛불'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난맥을 함축적으로 이야기하고 애도하고 있는 소설이가도 전한다. 황정은 평론가는 <파묘>를 쓴 작가 황정은은 그 지난한 '파묘'의 과정이 험난하고 힘들더라도, '우리가 여기 함께' 하고 있지 않냐고 애써 위로하고 다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말하는 이것이다. 뉴질랜드로 돌아간 한만수는 한세진에게 '파묘' 이야기를 듣고,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라고 말한다. 그 말에 한세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아니라고.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파묘'하는 지난한 과정, 그리고 촛불집회에 함께하는 이들의 행동은 '효도'나 '정의' 같은 어떤 이념 때문이 아니다. 내가 속한 가정, 엄마, 함께 사는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어떤 것을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한다는 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한만수처럼 한국사회에 대해 늘어 놓는 객관적 논평, 충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세진처럼 엄마와 함께 새벽길에 나서고 가시밭길을 걸어 제사는 지내고 함께 내려온다는 것. 동행하는 그 마음과 행동이다. 또한 이순일의 계속 일렁이는 마음이 얘기하는 것처럼, 어떤 와중에 있다는 것은 객관적인 외부자일 수 없다는 것, 당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밖에도 <계간 아시아 54호>에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닌 평론가를 소재로 시작되는 이야기인 김형수 작가의 연재 <작가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팃사 니의 <이름 없는>, 마이 반 펀의 <선택한 무대> 등의 시와 이반의 <I am 여자>, 김송중의 <광동의 밤>, 챈드라하스 초우두리의 <나의 중국용의 시절>이라는 소설, 김재훈의 <제주 예멘 1년>이라는 글이 실려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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