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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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여가는 시간이 지나간 길 위의 발자국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삶의 얼굴들이 존재한다. 길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들과 뒤엉켜 그리움과 사랑, 후회와 상처의 기억들을 만나게 하는 장소이다. 어린 시절 상상했던 세계와 조우할 수 없지만, 걸어온 길 위의 시간이 쌓여서 우리는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마주하며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한지혜 작가가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 기록을 담은 에세이로 흥미롭다. 그녀는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버텨온 흔적과 기쁨이 남은 자리에 돌아보지 못한 다른 슬픔을 기억하며, 눈부신 태양처럼 찬란한 삶의 길이 아닌, 골목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 조용히 독자를 생생한 삶의 길목으로 안내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로 시작하는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라는 미당의 시 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해고대상자였던 과거에 한지혜 작가는 퍼붓는 눈 속에서 친구와 함께 길을 걸어간 시간을 기억해낸다. 함박눈이 떨어지는 폭설 위에서 그녀가 걸었던 길은 우울한 상흔을 남기는 대신 삶의 무게를 덜어낸 자의 희망을 보여준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라는 미당의 시 구절을 이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삶을 포용하는 태도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어렸을 때는 눈이 내리면 마냥 신나고 즐겁더니 나이를 먹으면서는 마음이 애틋해진다. 그게 "괜찮다" 소리를 듣고 난 이후부터 생긴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소리와 함께 내 서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누구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비로소 들으면서, 내 삶도 한결 깊어졌다. 춥고 흐린 날, 그게 창밖의 날씨든 내가 처한 인생이든 마음을 낮추면 세상 모든 만물은 그 안에 깃든 마음은 다 괜찮아질 수 있다. 나는 우선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한지혜 작가는 가난했지만 온 가족이 함께 살며 추억을 쌓았던, 지금은 사라져버린 어린 시절 좁은 골목길의 기억을 떠올린다.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복잡한 감정들이 뒤얽힌 일상, 옹기종기 모여있는 골목길에서 놀던 친구와의 추억,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하던 과거의 시간들이 깊은 그리움으로 몰려와 눈물이 날 것만 같다는 그녀의 글을 읽으며 지금의 나를 만든, 지나온 길의 시간들과 마주한다. 더 커다란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 작은 키로 나만의 우주 안에서 생의 기쁨과 고통을 일찍 알아버린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회상하며 그녀처럼 울어버렸다. 


"이제 그 길은 없다. 나는 여전히 그 길 위에 살고 있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길은 거미줄처럼 얽히고 꼬인 길을 툭 터서 하나로 만든 길이다. 한 사람도 지나가기 어려웠던 길을 이제는 자가용 두어 대가 나란히 달리기도 한다. 공중변소 앞에서 다리를 꼬고 줄을 설 필요도 없다. 칸칸이 늘어선 방들이 모두 층층이 올라가 아파트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 길 한 번 잃지 않고 살았던 나는 눈 한 번 휘두르는 끝이 보이는 넓은 길에서 오히려 막막하다. 꿈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 좁아 담벼락이 어깨를 스치는 바로 그 길이다. 걸을 때마다 길 위에서 길이 그리워 나는 더러 눈물이 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미래를 향하여 혹은 다른 삶을 향하여 한번 더 발걸음을 내딘 것, 그 의지가 바로 삶의 가장 긍정적인 순간이라는 한지혜 작가의 글에 공감했다. 그녀가 여성 작가로 글을 쓰며 살아가는 원동력은 성공하기 위한 욕망이 아닌, 주어진 생을 받아들이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모든 생을 멈추지 않았을때 행복은 우리의 주변을 향해 다가오며, 삶의 다양한 도전의 결과를 실패와 성공으로 가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행복이라는 선물을 움켜쥘 자격이 있다는 삶의 지혜를 전한다. 


"청춘 시절 내가 생각했던 성공의 단계는 겪어보니 그저 사회가 만들어놓은 욕망의 신기루였을 뿐이다. 갈 곳 없고 바라볼 곳 없는 시간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글을 썼다. 그리고 그 글로 작가가 되었다. 여전히 변두리의 시간을 살지만 태풍의 한 가운데 같던 그 폐허는 지나왔다. 생의 다음 순간,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 그건 참으로 소중한 것 같다. 그 장소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다음 문제다."


한지혜 작가가 삶의 지나온 시간 속에서 생생한 삶의 흔적 뿐만 아니라 죽음이라는 경험을 독자에게 이야기하여 눈길을 끈다. 그녀는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파리의 유명한 공원 묘역인 페르 라셰즈에서 길을 잃어버린 후 짐 모리슨의 무덤을 발견하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건낸다. 그녀는 길도 사람도 보이지 않던 방황의 시간에서 죽은 자로 가득한 무덤 앞에서 길고 짧은 생을 혼자서 돌아다니며 한참 동안 찾아 헤맨 문을 발견한다. 이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자가 애도하며 새로운 인생의 길을 시작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한지혜 작가는 여성 작가라는 삶의 길을 걸어오며 부딪혔던 다양한 사회적 시선들의 문제와 삶의 부조리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출산을 앞두고 강제적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던 일, 생리대 기본권과 관련된 저소득층 아이들의 자존에 대한 절실한 고민 등 그녀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이 담긴 글은 그녀가 살아온 삶의 길이 개인적인 서사를 넘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된다. 멀미 하던 어린 자신에게 손수건으로 부채를 부쳐주던 버스 안내양, 임산부라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 순간에 자신의 건강을 염려했던 음료를 배달해주던 아주머니의 편지, 아이의 유치원 재등록을 하지 않았을 때 서운함 가득한 표정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오던 유치원 버스 기사님을 보며 기득권이 중심인 세상에서 자신과 무관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은 순간들을 전하는 한지혜 작가의 글은 갑이 아닌 을의 연대가 버티며 살아갈 힘을 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음은 중앙으로 향하고, 욕망은 상단에서 춤을 추다 곤두박질치면 위로는 늘 내가 돌아보지 않던 자리에서 찾아온다. 일상에서 나랑 무관하다고 지나쳤던 사람들에게, 내게 그 자리를 떠날 때 내내 함께였다고 믿은 누구도 건네지 않는, 누구보다 따뜻한 인사를 받게 될 때마다 나는 부끄럽다. 그들을 보지 않았던 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들과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나도 모르게 부린 허세를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발자국을 지나온 자리마다 약하지만 꺼지지 않는 불빛이 있었기에, 길은 다양한 색채의 빛깔을 발휘한다. 한지혜 작가는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통해 하얀 눈이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기보다 눈 위에 발자국을 내딛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진실과 함께 나다운 삶의 얼굴로 살아가기 위한 각자의 답을 독자에게 질문한다.


"이제 이 글이 어디까지 어떻게 닿을지 모르겠다. 많은 곳에 닿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와 같았던 마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혹여 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러나 나는 언제나 실패에서 출발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시간의 힘을 믿는다. 생존이란, 삶이란 순간이 아니라 영속성을 가진 시간을 가리키는 거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당신들, 살아갈 당신들이 저마다의 힘으로 끝내 버티기를. 나는 가늘고 길게 쥔 펜으로 앞으로도 계속 당신들을 쓰고, 나를 쓰고, 이 삶을 기록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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