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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 - 루마니아의 소설가가 된 히키코모리
사이토 뎃초 지음, 이소담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0월
평점 :
책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는 루마니아의 소설가가 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히키모코리의 에세이이자, '루마니아어'라는 희소한 언어에 대한 사랑을 외치는 언어 오타쿠의 에세이이다. 저자 사이토 뎃초는 흔히 청춘의 황금기라고 일컬어지는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취업의 문턱에서 좌절을 맛본 뒤 방 안에 틀어박힌 '히키코모리'가 되었다. 남아도는 것은 시간밖에 없지만, 그 1분 1초를 맨정신으로 보내기 어려웠던 저자는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았고, 이윽고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않은 세계 각국의 인디 영화들에까지 시선을 돌린다. 그런 그의 인생에 운명적인 한 편의 루마니아 영화가 등장한다. 운명적인 사랑이 모두 그러하듯이, 한순간에 루마니아어와 사랑에 빠진 저자는 이후 희귀하고 특수한 '루마니아어'를 홀로 공부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사회와 융화되지 못하고 오직 모니터만 쳐다보던 히키코모리가 어떻게 희소하기로는 손에 꼽히는 루마니아어를 배우고, 그 언어로 소설을 쓰며, 세상에서 하나뿐일 유일무이한 작가가 될 수 있었는지데 대한 여정을 담고 있다.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라는 제목이 아깝지 않게 가능성과 희망을 있는 그대로 증명하는 이 책은 우리의 삶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인 사이토 뎃초는 4년간의 고독한 대학 생활과 취업 실패로 인해 은둔형 외톨이가 된 이후, 우연히 루마니아의 영화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의 영화 <경찰, 형용사>를 접하며 독학으로 루마니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루마니아어를 독학하면서 루마니아의 문화에 더욱 깊게 빠져들었고, 루마니아어로 소설과 시를 쓰던 중 온라인 문예지에 엽편소설을 발표하며 '일본인 최초 루마니아어 소설가'가 되었다. 루마니아어에서는 독특한 필치의 일본인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19 팬데믹 중 난치병인 크론병에 걸렸고, 투병 기간에 개인 블로그 note에 에세이나 자작 소설을 올렸다.
"말하자면 그거다. 히키코모리. 그러니까 은둔형 외툴이라는 거. 타고나기를 은둔하는 체질. 어린 시절을 보낸 방구석에서 아저씨로 늙을 운명을 짊어진 존재. 호두 껍데기에 갇힌 사회 부적응자. 무, 그런거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어떤 초월적인 존재는 나를 거기에서 끝나게 하지 않았다."
저자는 히키코모리 생활에서 가장 최악의 친구인 초조감이 고개를 불쑥 들 때 시작한 일이 바로 영화 비평을 쓰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처음에는 트위터에 대학 시절보다 길어진 감상문을 마구 적었고, 그게 더 길어지자 '하테나 블로그'라는 서비스를 이용해 장문의 영화 감상을 적었다. 저자는 영화 비평가 흉내를 하며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요즘 세상은 세계 영화제에 쉽게 갈 수 있고, 인터넷을 통해 일본에 알려지지 않은 영화를 볼 수 있지만 그런 확대가 너무 급속도이고 끝없이 이루어지니까 이런 걸 다루는 비평가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과거 영화사에 매달리거나 일본에서 개봉하는 영화에 근시안적으로 주목할 뿐이며, 저자는 그런 것이 시시했다고 이야기한다.
"영화를 볼 때만큼은 마음이 편했다. 내 상황과 전혀 다른 광경들이 눈에 들어오면 이런저런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고급 차가 멋지게 폭발하거나, 아이들이 컬러풀한 판타지 세계를 모험하거나, 할리우드 미남미녀가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광경이 그 무렵의 내게는 참을 수 없이 눈부셨고 그 자체만으로도 울컥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가끔 기어가득히 영화관에 간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TV나 컴퓨터나 태블릿으로 봤다. 그러니 화면도 작았다. 그래도 내 마음 상태는 훨씬 나아졌다. 이 현실 자체를 향한 폭발적인 애수, 파괴적인 불안, 차분한 분노를 잊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런 흉내 내기가 사실 중요하다.
비평이든 창작이든, 스포츠든, 어학이든, 나아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전부 모방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무작정 영화를 보고 영화 비평을 쓰고 영화 비평을 읽으면서, 나는 일본 영화 비평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일본의 영화 비평가는 영화가 말하는 방식에 대한 미학만 비대하고 말하는 것에 대한 미학이 없어 보였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그들은 일본에서 일본어 자막을 달고 상영하는 작품만 언급한다. 또 돈을 주지 않으면 쓰지 않고, 어떤 매체에서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을 매료한 대상은, 남에게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그저 자기가 쓰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인터넷에 영화 이야기를 마구마구 써대는 재야의 시네필들이었다고 말한다. 온라인 세상에는 제한이 없으니 일본에 공개되지 않은 영화에 관해서도 글을 쓰는 사람이 많았고, 구작이나 신작이라는 구분도 없고, 국경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저자는 일본 영화 비평가 중에는 계속 확장되어가는 세계에 흩어진 개개의 작품을 선으로 연결하려는 지성이 아예 사라진 듯했고, 자연스럽게 '일본에 공개되지 않은 작품'을 닥치는 대로 보고 비평을 쓰는 일을 시작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운명처럼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감독의 루마니아 영화 <경찰, 형용사>를 만난다. 저자는 영화 <경찰, 형용사>는 영화 비평가로서는 영화에 푹 빠져서 루마니아 비평가나 시나리로 작가와 관계를 맺은 계기가 되었고, 돌고 돌아 소설가로서 활동하기 위한 연결고리를 만들어준 작품이라고 말한다.
"루마니아어를 배우게 된 계기로서 특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영화가 언어, 바로 루마니아어 자체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수없이 루마니아어가 화제로 오른다. 이를테면 유튜브에서 흘러나온 왕년의 명곡을 듣더니 루마니아어 수사법을 토론하기 시작하거나, 주인공이 연인과 말다툼하는데 왜 그러니 지켜보면 정관사를 잘못 쓴게 원인이다.
즉 언어학적 통찰, 그것도 보편성보다는 루마니아어의 독특함을 둘러싼 통찰이 풍부하다. 영화도 훌륭하지만, 루마니아어 그 자체에 푹 빠지게 되는 작품이다."
저자는 루마니아어가 심금을 울릴 정도로 깊이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요소가 겹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루마니아어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마이너한 언어를 배운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낀 것이다. 오로지 즐거움만을 위해 마음 내키는 대로 시작한 루마니아어 오타쿠가 된 저자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대학에서도 일본 문학을 전공했지만, 강의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일본 문학 자체에 혐오감까지 들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히키코모리 생활을 시작해서 울적함에서 시작한 자신만의 영화 비평 쓰기가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비평을 쓰기 위해 이야기의 구조와 구성, 연출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야기와 연출의 교합이 어떤지를 끝없이, 영원히 분석하며 약 600편이나 되는 글을 올렸다고 말한다.
"이렇게 무사 수행을 하다 보면, 이야기를 어떻게 쓰면 좋은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어느 시기부터 나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외국 문학처럼 외국을 무대로 일본과 전혀 관련 없는 작품을 썼다. 영국, 아르헨티나, 슬로바키아...... 문학상에 응모하기에는 너무 짧은 외국'풍' 문학이었는데, 나도 소설을 완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성공 체험을 선물해주었다. 이렇게 문학에 자존감을 키운 나는 필연적으로 일본 문학에 회귀했다. 대학 강의에서 그렇게 노이로제가 걸렸는데도 마침내 내 언어로 일본에 관해 쓰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저자는 로이로제와 은둔을 거치며 자신을 둘러싼 일본이라는 사회에 깊은 절망과 허무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러니 쓰고 싶은 주제도 바로 거기에서부터 농밀하게 피어났고,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여성 차별이나 외국인 차별, 일상에서 마주치는 놀라운 악의, 그런 것에 대한 분노가 자신에게 언어를 내뱉게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다 저자는 페이스북으로 연결된 루마니아의 '사소설' 작가 랄루카에게 자신이 쓴 단편을 루마니아어로 번역한 작품을 읽어봐주기를 권하고, 인테리어 디자이너이면서 떠오르는 루마니아 신진 작가 미하일 빅투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내는 대담함을 선보인다. 특히, 히키코모리로 별 볼일 없이 살았던 자신이 루마니아 문단에 데뷔하게 된 것은 일본이 아니라 다른 나라인 루마니아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가장 좋은 형태로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글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작품을 보냈으니 그저 기다릴 뿐이다. 그러는 동안 <LiterNautica>에 올라온 작품을 읽으려고 하는데, 심장이 폭발할 듯이 긴장한 상태로는 루마니아어가 완전히 수수께끼 상형문자로 보였다. 그걸 해독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놓인 상황이 대체 무엇인가. 흥분과 불안이 교차하는 공격적인 찌릿찌릿한 모호함이었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일그러져서 한순간은 가속한 것 같다가 처절하게까지 그려졌다.
히키코모리로 지내는 것이 극에 달했을 때의 시간 감각과 비슷해 보이는데, 그게 완만한 자살 같다면 이건 좀 더 극적인, 세계가 적극적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 덜컥덜컥 흔드는 느낌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휘말려 내 마음이 어마어마하게 회전하는 것 같았다. 머리통에서 뇌가 쑥 날아가서 언덕을 데굴데굴 굴러가는 감각을 느꼈다."
저자는 루마니아 출판업계는 유럽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작기 때문에 소설을 써도 돈을 벌 수 없다고 말한다. 애초에 소설을 쓰는 사람 중에 소설을 써서 돈을 벌려는 인물이 거의 없고, 이런 사고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루마니아에서 소설가라면, 일본으로 말하면 자동으로 '겸업작가'가 된다. 미하이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겸 소설가, 랄루카 씨는 인류학자 겸 소설가, 이런 겸업이 기본이다.
다들 소설 밖에서 생활비를 벌고, 여가 시간에 아무런 걱정도 염려도 없이 그저 쓰고 싶은 소설을 쓴다. 그러니 소설을 쓰는 것은 직업이 될 수 없다."
"루마니아에서 소설 집필은 돈과 연결되지 않는다. 즉, 소설이라는 예술은 자본주의 논리 밖에 존재한다. '예술이 돈과 결탁하면 쓰레기가 된다'라는 고풍스러운 생각을 지닌 내게는 루마니아, 참으로 매력적이다."
저자는 일본은 작가가 신인상에 응모하는 형식이고, 상을 받으면 프로로 데뷔하는 권위주의적인 형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루마니아는 언제나 편집자와 일대일이어서 좋다고 이야기한다. 작품이 편집자의 마음에 들면 실리고, 마음에 안 들면 탈락하는 방식을 반복하면서 소설가로서 일희일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루마니아 이주를 꿈꾸고 있었는데, 크론병이라는 난치병에 걸려 완전히 무너진 기분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일본에 산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고, 일본인인 자신이 왜 루마니아어를 알고 있는가, 지금 자신은 왜 루마니아어로 소설을 쓰는가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을때 지금 쓰고 있는 에세이에 대한 집필 의뢰가 들어왔다고 이야기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좋은 나쁘든 지금 네가 거기 있는 게 최대의 강점"이라는 저자의 좌우명은 우리 자신이 지금 거기 있다는 사실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작업은 나 자신의 인생, 루마니어와 함께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고, 의미를 끄렁내는 과정이 되었다. 내 인생에도 의미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런 내 옆에는 늘 루마니아어가 있었다. 지금까지 과거는 전부 쓰레기였고 미래는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저 고통만 가득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 과거도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무엇보다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앞으로는 크론병에 관한 에세이를 쓰고 싶다. '동유럽의 상상력' 시리즈에서 내 작품집을 내고 싶다... 제법 괜찮은 기분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책은 나 자신을 위해서 썼지만,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쓰기도 했다. 즉 문학을 좋아해서 문학으로 세계에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약하거나 재력이나 시간이 없어서 일본에서 우물쭈물하며 방에 틀어박힌 녀석을 위한 거다. 외국으로 이주하거나 세계를 돌아다니며 외국어로 소설이나 시를 쓰고 문학을 연구하는 인간과 비교하면 나 같은 건 쓰레기라고 좌절한 당신 말이다. 게다가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지금은 모든 게 다 최악이니까, 일본 여기저기에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이 가득하다.
그래도 나는 바로 당신에게 다른 곳에는 없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게 나였으니까. 나 같은 건 형편없다고 생각했던 예전의 나. 외국에 갈 필요가 없다는 소리는 안 할 것이다. 갈 기회가 있다면 가는 게 좋다. 그저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곳이기에 해낼 수 있는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