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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아이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평점 :

김성중 작가는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장해 소설집 '개그맨', '국경시장'. 에디 혹은 애슐리', 중편소설 '이슬라' 등을 통해 환상과 실재가 뒤섞인 총천연색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 보여왔다. 그는 한계 없는 상상을 읽는 이를 순식간에 자신이 만든 세계 속으로 빨아들이는 탁월한 이야기로, 삶의 비의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문학적 서사로 구현해왔다.
<화성의 아이>는 김성중 작가가 등단 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장편소설로, 무려 삼백 년 후 미래의 화성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삼백 년 전 지구에서 미래의 화성으로 쏘아보낸 실험체가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던 각양각색의 존재들과 조우한다. 시시때때로 냉소적인 농담을 던지는 수다쟁이 유령 개, 마음을 가진 만능 화성 탐사로봇, 눈꺼풀 제거형을 받고 지구를 탈출한 소녀, 아득한 시간과 아흔아홉 우주를 가로질러 화성으로 날라온 정체불명의 존재까지. 각기 다른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은 유사 가족을 이루기도 하고 맞서기도 하며 연결의 순간을 빚어낸다.
<화성의 아이>는 화성을 배경으로 하지만 SF 소설은 아니다. 소설 속 '삼백 년 후 화성'은 끝없는 사막이 펼쳐진 황량한 행성이 아니라 수풀이 우거지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호수가 있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작가 김성중이 탄생시킨 또하나의 매혹적인 세계다. 어쩌면 화성판 <오즈의 마법사>라고도 말할 수 있을 이 이야기 속 매력적인 인물들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밤하늘에 두 개의 위성이 떠 있는 미래의 화성에 발 딛고 선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책은 다양한 캐릭터 중에서 가장 먼저 300년 전 지구에서 미래의 화성으로 쏘아올린 실험체 '루'의 시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뿐만 아니라 루는 자신이 격렬한 감정을 느끼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화성에서의 폐허가 더이상 냉혹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라이카와 데이모스가 생활이라는 리듬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소멸이라는 끝을 향해가는 운명 앞에서 루가 태어날 아이를 향해 말하는 글이 눈길을 끈다.
"동료들이 꿈에서 죽음으로 항로를 바꾸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충실하게 바이털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박동이 사라진 심장과 얼어버린 신체 속에 동면해 있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동안 화성은 붉은 벌레, 붉은 옷, 붉은 구름의 모습으로 꿈속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 나는 얼음으로 된 그릇이었으나 꿈만은 얼지 않았다. 몇 세기가 단지 기나긴 낮잠 같았다."
"그러나 나의 감정은 진짜이고, 진실이다. 알 수 없는 세계에 알 수 없는 존재로 내던져진 내가 스스로에게 분명히 해두는 소리였다. 이 감정은 진실이다. 나만의, 나만의 고유한 진실."
“나는 온 우주에서 오직 너만을 걱정한단다, 얘야. 모든 별은 어머니이고 우리는 춥지 않단다.”
루의 딸인 '마야'는 어머니를 죽음이라는 상실과 함께 태어난 마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이 책은 마야가 데이모스와 라이카를 통해서 따뜻한 연대을 경험하고 연인 키나를 만나서 사랑을 꽃피우는 감정을 이야기한다.
"먼저 어머니의 죽음이 있었고, 그다음에 나의 출생이 있었다. 그전에는 우주인의 공격이 있었고, 그전에는 우물이 있었다. 그전에는 쿠키처럼 구워진 별들이 노란 태양을 따라 천천히 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모든 이야기의 끝은 쿠키처럼 바싹 구워지다 부서져버리는 별의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내가 없다."
"‘화성은 얼어붙은 사막, 금성은 타오르는 지옥.’
오래전에 지구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이 땅은 그렇게 춥지만은 않다. 아늑한 우주선과 간헐천이 솟아오르는 우물, 무엇이든 가르쳐주는 데이모스와 모닥불처럼 따뜻한 라이카의 등이 있으니까."
"꽃잎에 눈이 가려진 키나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미소를 만들었다. 얼굴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아. 나는 홀린 듯이 몸을 굽혀 입을 맞췄다. 화성을 떠나는 순간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도 이 모습이다. 꽃잎을 덮은 채 웃고 있는 키나. 나의 친구, 나의 연인. 영원히 붉은 별 키나."
"오래전 우리가 쌍둥이 로봇으로 화성에 함께 왔을 때, 우리는 모든 모험과 실험을 함께했다. 화성의 크레이터를 샅샅이 찾아내고 사진을 찍으며 우리가 떠나온 ‘창백한 푸른 점’을 향해 데이터를 전송했다. 우리는 ‘애정’이라는 말을 알았고 ‘그리움’이라는 말도 알았다. 그것은 끝없이 한 방향으로 데이터를 송신하는 행위였다."
라이카는 과거 모스크바를 떠돌던 유기견이었지만, 출산한 새끼를 잃었고, 인간을 믿고 사랑한 결과 실험동물이 되어 스푸트니크 2호에 올라 수다쟁이 유령 개가 되었다. 이 책에서 인간에게 상처과 고통, 소외를 경험한 라이카는 비스듬히 처박힌 우주선에서 냉동 상태였다가 깨어난 루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루의 딸 마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다. 또한 유령 개 라이카는 진실한 사랑이 슬픔이 아니라 연약한 존재들을 연결하고 강인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
"붉은 별에 도착했을 때 평화를 느겼다. 이 별에는 인간은 고사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으니까. 황폐한 오렌지 빛 사막이 성모상 뒤의 덤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곳은 사랑할 인간이 없으므로 안전했다. 나는 나 자신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가 왔다. 삼백 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죽음밖에 남지 않은 짧은 생을 시작하기 위해 나에게 왔다. 루는 연약했다. 보호가 필요했고 아는 것이 적었으며 가진 것은 더 적었다. 고장난 우주선과 짧은 수명. 그게 다였다. 하지만 웃음만은 태양처럼 밝았다. 그 환한 웃음은 인공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온기가 내부를 다뜻하게 데우고 밖으로 흘러넘치는 듯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마야의 지성과 환상은 모두 루에게서 기인한다는 것, 마야가 어떤 식으로든 루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마야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마야가 더 많은 꿈의 물감을 풀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이 짠해진 나는 마야의 앙상한 어깨를 핥아주었다."
마음을 가진 만능 화성 탐사로봇 데이모스는 통증과 다정한 마음을 지닌 라이카처럼 자신의 존재에 의심을 품지 안않는다. 이 책에서 비인간인 유령개 라이카와 화성 탐사로봇 데이비스가 루에게서 태어난 딸 마야를 함께 양육하는 모습들이 눈길을 끈다.
"그들은 꿈을 꾸고 신기루를 본다. 나는 꿈꾸지 못하고 신기루 또한 보지 못한다. 나는 이 결함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결함은 로봇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개성이다. 금간 부분이 있어 특별해지는 도자기처럼 특정한 것에 대한 나의 무능이나 유치하게도 인간 흉내를 내는 것, 이런 것들이 데이모스라는 개별 주체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모든 것이 새로 태어나는 도중인 이곳. 마야보다 앞서 태어난 것은 '우물'이라 불렀던 작은 샘뿐이다. 우물은 점점 깊고 넓어져 호수가 되었고 가장자리에는 작은 파도마저 찰싹거리고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생명들은 순수하고 진실했다. 순수하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무언가'의 의도이다. '무언가'를 신이라고 부르든 우주의 질서라고 부르든 파악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대체 무슨 의도로 우리에게 자꾸 '선물'을 주는 거지?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바퀴 근처에서 새로운 버섯을 발견했다. 나는 버섯의 삿갓 부분을 조금 떼어내 조직을 관찰하기로 했다. 또다시 선물을 받은 셈이다."
"라이카는 펼쳐진 대기를 향해 윙크를 했다. 우유의 강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간절한 마음을 가졌다는 게 중요하지 기도가 이뤄지고 이뤄지지 않고는 상관없다고 라이카는 말했다."
키나는 마야에게 지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마야는 키나에게 화성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로에게 가까워진다. 키나는 마야의 아가미가 넓어질수록, 자신의 예지력과 생물과의 교감 능력 또한 늘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일어난' 일들에 대해 말하기가 어렵다. 대문에 '일어났으면 좋았을' 말들을 더 많이 꺼내놓는다.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아빠가 반란군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면, 배급받은 케이크의 촛불을 단번에 껐더가면 하는 것들을. 한번 속을 털어놓기 시작하자 멈출수가 없다. 나조차 들여다보기 무서웠던 과거가 중단되지 않고 펼쳐진다."
무해한 천국보다 지옥의 복잡함을 사랑하는 한 남자는 자신이 존엄한 생명에 대해서 저질렀던 비극적인 악행을 고백한다. 뿐만 아니라 남자는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마야를 알리체로부터 지켜낼 것이라는 결심을 한다.
"개와 로봇을 실험체에 붙여 한 세트로 구성한 트리플 데커는 내가 유일하게 로열 헤더로 참여한 프로젝트다. 내 키메라는 65개 종을 섞은 암컷인데, 한 개체를 성공시킬 때마다 사용되고 죽어나간 실험동물의 숫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65종이라니. 우리는 신을 만들려던 것일까? 신들은 인공 포궁 속에서 자주 사산됐고, 쓸데없이 연약했고, 태어나자마자 미치거나 죽어버리기 일쑤였다."
"서로의 품에 안겨 있는 소녀들과 숲의 번영은 연결되어 있다. 이 숲은 마야의 성장과 더불어 자라났고, 무성해졌고, 권역을 넓혀나갔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자연이 마치 마야의 '맞춰서' 자라도록 누군가 설계한 것일까? 이곳도 유리 돔을 씌운 개미들의 서식처럼 누군가의 실험실인가?"
"그 순간 나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희생이 없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라고 했다. 이 이상한 별에서, 사후도 우주도 꿈속도 환각도 아닌 구식 화성에서,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악몽 속으로 뛰어들었고, 몇 번이나 파도에 휩쓸려 난파되고 혀가 잘리고 새에 쪼이면서 이 자리에 서 있다. 모두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마치 화려하기만 한 화면보호기 같은 알리체는 상대방에게서 데이터를 빌려 형상으로 바꿀 뿐 독자적인 감각이 없는 상태다. 이 책에서 알리체가 별들을 파괴하고, 중력을 고무줄처럼 늘려가며 밤도 낮고 없는 시간을 건너뛰어 불사에 가까운 존재가 됐지만 타인이라는 빛이 존재하지 않았고 궁극적으로 자신이 얻은 것은 우주적 허무에 불과하다라는 것을 알게 되는 모습을 담아내어 인상적이다.
"내가 누리지 못한 뭔가가 마야에게는 있다. 저 의기양양한 푸른 숲을 보라. 윤슬이 반짝거리는 호수는 어떻고! 지구의 한 자락을 옮겨놓은 것 같은 숲과 호수는 마야가 단기간에 화성을 정복했음을, 그야말로 제대로 테라포밍했음을 역설하고 있다. 착생식물 하나, 금속 곤충 하나 변변히 키워내지 못한 내 고향 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나의 성장은 주변 은하를 파괴하는 데만 쓰였다. 거미가 떠나버린 거미줄, 무의미하게 패턴만 이루고 있는 거미줄. 내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그것뿐이다. 왜? 왜? 내가 하지 못한 일들을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마야가 어떻게 해줄 수 있었단 말인가?"
이 책은 벼룩 콜린스가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는 역할을 하여 여운을 남긴다.
"마침표를 넘어서는 공간을, 그 미지의 세계를, 책장이 덮이고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죽음 너머의 페이지를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우주까지 나가봤지만 사후 세계는 미지의 곳이니까. 그때까지 열심히 피를 빨아먹고 높이 뛰어 오를 것이다. 누군가 공중으로 솟아오른 내 모습을 본다면 문장 끝에 찍히는 마침표로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난 그런 것이 좋다. 예상을 벗어나는 존재인 것이 좋다. 이제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에 다다랐고, 작별인사를 하기 전에 내 모습을 여러분에게 공개하겠다. 자, 똑똑히 보아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