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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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진화생물학자다.

원제가 <Guns, Germs, and Steel(1997년)>인 <총, 균, 쇠>는 일찍이 <제3의 침팬지>로 인류 멸망에 대한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는 저자의 명작이다. 세상에 나온지 10년이나 지나서야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사실, 이 책은 평소 애용하는 도서관의 소장 목록에는 올라 있으나 서가에 책이 없었다. 물론, 대출된 상태도 아니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흔한 일은 아니기에 담당 사서에게 이 사실을 말하니 아무래도 책이 분실된 것 같다며 희망도서로 신청하시면 구입해 놓겠단다. 도서관 사서로부터 책이 들어왔으니 대출해가라는 안내전화를 받았다. 희망도서는 신청자에게 우선 대출권이 있으나 이틀이 지나면 일반인들에게 대출하게 된단다.  그나마 늦었지만 이제라도 '일본인은 어디서 왔는가'가 추가된 증보판(600여 페이지)을 접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인류의 역사는 인종의 차이가 아닌, 환경적 차이에 의해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다'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저자의 위대한 여정은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인 1972년 뉴기니 해변을 거닐다가, "우리 뉴기니 사람은 과거 어떤 경로로 뉴기니에 오게 되었으며, 유럽의 백인들은 지난 200년 사이에 어떻게 뉴기니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소?"라고 물어온 그곳 원주민인 얄리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조류를 연구하던 저자의 위대한 통찰력은 이처럼 사소하고도 바보스러운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만약, 저자가 그 당시 식자층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던 백인우월주의라는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더라면, 우리는 어쩌면 인류 역사 발전의 헤게모니를 과학적으로 규명한 <총, 균, 쇠>라는 명저를 접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한참이나 더 기다렸어야 했으리라.


저자는 유라시아 대륙이 다른 어떤 대륙보다 빨리 발전할 수 있었고, 다른 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식량생산에 있다고 보았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가 수렵채집 시대를 마감하고 정착할 수 있었던 건 다름아닌 식량의 작물화와 동물의 가축화였다. 주시하다시피, 메소포타미아 평원(일명 '비옥한 초승달지대')과 황허유역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발상지로 식량 생산과 정착생활이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프리카도 아메리카 대륙도 아닌, 유라시아 대륙 그것도 근동지역과 중국의 황허유역이어야만 했을까?  바로, 가축화/작물화의 재료인 야생 동식물의 대륙간 차이 때문이다.


식량 생산이야말로 대규모 인구로 성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인간 사회가 부족사회를 거쳐 추장 사회로 다시 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잉여 식량의 생산이 절대적이었다. 잉여 식량의 생산은 바로 남은 식량을 분배하는 일을 담당할 사람 즉 우두머리가 탄생할 기회와 함께 식량 획득에 직접적으로 동원될 필요가 없는 전문가 집단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되면서 과학기술과 사회제도의 발달을 촉진시켰던 것이다. 바로 총과 쇠의 탄생이다. 이 밖에도 기술자 및 종교인 그리고 군인계층을 먹여살리게 되면서 정착 농경 생활을 앞서 시작한 지역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즉, 여전히 채집이동생활에 머물러 있는-집단과의 충돌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신대륙이 유럽인들의 침입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총칼로 무장하고 말을 타고 쳐들어온 구대륙인들의 막강한 군사력과 함께 일찍부터 가축화가 이루어져 세균에 대한 내성이 생긴 유럽인들로부터 옮겨진 병원균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가축화와 작물화할 수 있었던 '재료'들이 유라시아에 집중되었던 걸까?

이 건 전적으로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도 얼룩말과 코뿔소 하마 들소 등 아프리카 초원의 대형 초식동물을 일찍부터 길들려 가축으로 삼으려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키울 수 있는 동물로 선택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조건들을 통과해야만 했다.  비용 대비 얻을 수 있는 고기의 양이 많아야 했으니 맹수는 일단 탈락이었고, 인간을 공격하지 않으며 무리를 짓는 특징이 있어야 하며 무리를 이끄는 리더를 알아보고 따르는 습성이 필요했다. 그래야 주인을 알아보고 복종하게 되므로... 이처럼 일명,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에 따라 가축화가 가능한 동물은 그 많고 많은 동물들 중 고작 소, 돼지, 양, 말, 개, 닭, 양봉낙타, 염소, 거위 등 예일곱종류에 불과했다.


한편, 인류의 출현이 다소 뒤늦어, 인류가 건너간 후 남획으로 거대초식동물이 멸종한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 대륙은 진화를 거친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며 서서히 문명화되기 시작할 시기에는 가축화할 동물군이 이미 멸종한 뒤였다. 유라시아 대륙인과는 달리 운이 없었던, 처음부터 불리한 출발일 수 밖에 없었다.


이들 대륙과는 달리 기린, 코뿔소, 코끼리, 얼룩말 등이 살던 아프리카는 인류가 처음으로 출현한 곳이기 때문에 그곳의 동물들은 미숙한 인류와 함께 생활하면서 인류에게 붙잡혀 멸종당하지 않을 기술을 함께 진화시켜 멸종은 면했지만, 하나같이 가축화에 적합한 조건들을 모두 갖고 있지 못했다. "부르심을 받은 자 많으나, 선택받은 자는 드물었던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신대륙과 아프리카의 비극이 시작된 것은 믿기 어렵지만 순전히 이와같은 지리적인 '우연'때문이었다고 한다.


자, 그렇다면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유라시아 대륙이 곡물의 작물화와 동물의 가축화에 유리하여 일찍부터 정착생활을 하면서 문자 제도 기술 등등을 발전시켰다면, 어째서 같은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아시아의 중국 대신 유럽이란 말인가? 고대문명 발상지 중의 하나인 중국은 나침반 종이 화약 등을 유럽보다 먼저 발명하는 등 15세기까지 인류 문화 발전을 선도하지 않았던가?


이와같은 질문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 있은 해답은 바로 '중국은 통일되어 있을 때가 많았던 반면 유럽은 언제나 분열되어 있었다'라는 단 한마디로 요약된다.

즉, 중국은 작은 영주국으로 분열되어 치열하게 경쟁하던 유럽과는 달리 통일되어 있어 '경쟁속에서의 발전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며, 독단적인 지배자가 내린 단 한번의 결정으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어 버리는 우(愚)를 피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저자가 들고 있는 다음의 사례야말로 '통합이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요, 분열이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교훈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1405 년~1433년에 일곱 차례의 선단이 중국을 떠나 항해했는데(환관 정화의 원정), 중국 조정의 두 파벌(환관과 그 반대파)사이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 반대파가 승리하자 곧 선단 파견이 중단되었다. 결국 조선소마저 해체하고 해야 항해를 금지했다.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있던 중국은 한번 결정이 내려지자 중국 전역에서 선단 파견이 중단되었고, 일시적이었던 이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다시 배를 만들어 그 일시적 결정의 어리석음을 입증하고 또 새로운 조선소들을 건설하려 해도,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조선소가 한 곳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에서 있었던 이 같은 일들을, 정치적으로 분열된 유럽의 탐험 선단이 항해를 시작했을 때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났지만 프랑스의 앙주 공의 신하가 되었고, 다시 포르투갈 왕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다가 포르투갈 왕에게 서진(西進) 탐험을 위한 배를 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메디나 세도니아 공에게 호소했지만 그 역시 거절했다. 메디나 첼리 공에게도 호소해 보았지만 또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국왕과 왕비에게 호소하자 그들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다시 요청했을 때는 결국 허락해주었다. 그 당시 만약 유럽이 통일되어 앞의 세 왕후 중의 한 명이 다스리고 있었다면 남북아메리카의 식민지화는 무산되었을지도 모른다.


유럽의 분열에서 비롯된 이 같은 결과는 중국의 통일이 빚어낸 결과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중국 조정은 해외 항해외의 활동에 대해서도 이따금씩 중단을 결정했다. 14세기에는 정교한 수력 방적기의 개발을 포기함으로써 산업 혁명의 문턱에서 물러났고, 세계의 시계 제작 기술을 선도하고 있던 기계식 시계를파기 또는 사실상 전폐해 버렸으며, 15세기 말 이후에는 기계 장치나 기술 전반에 걸쳐 후토하게 되었다. 통일의 이 같은 잠재적 해로움은 현대 중국에서도 다시 위력을 발휘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휩쓴 문화 대혁명의 광기 속에서 한명 또는 소수의 지도자들이 내린 결정 때문에 전국의 모든 학교가 5년 동안 문을 닫았던 것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p602~604 中-



현재, 빠른 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중국의 힘은 '규모의 경제'에서 나온 측면이 없지 않다. 규모의 경제는 전체를 통합한 상태에서 쉽게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전방식은 언젠가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성장/발전을 위해서는 치열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발상의 전환'에 따른 기술 도약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과연 중앙집권식 통일왕국의 재건설을 꿈꾸고 있는 현대 중국이 지방분권식 민주제도에 기초한 미국식 자유 경쟁과 창의성을 따라잡아 과거의 패권을 되찾을 수 있을까?

<총, 균, 쇠> 증보판에 실린 에필로그에 의하면 1997년 책이 나온 이후, 저자는 이미 이와 같은 질문들을 빌 게이츠를 비롯해서 수없이 많은 이들로부터 받았음을 알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인의 기원을 밝힌,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라는 제목의 특별 '부록'은 그동안 한일 양국 사이에서 끊이없이 논란이 되어 왔던 문제에 대해서 당사국 출신이 아닌, 국제적으로 저명한 학자의 학문적 성과이기에 더욱 의미심장에게 다가온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 일본인은 한반도에서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 농경과 기타 선진문물을 조몽인-일본 원주민인 홋가이도 아이누이족을 몰아내고 수렵채집 생활을 했던 이들-에게 전수하면서 야오이문명을 탄생시켰으며, 그 어느 어족(語族)과도 동일점을 발견할 수 없었는 일본어는 한반도의 고구려어를 어원(語原)으로 한다고 한다. 현재 한반도에서 쓰이고 있는 한국어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방언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신라는 그 당시 백제 고구려와는 달리 일본과의 교류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 한국어와 일본어의 이질성 역시 충분히 설명되는 문제라고 한다. 


역사 문제에 있어서 진실을 직시하지 않고 왜곡으로 일관하려는 일본에게 보내는 '경고음'이라 아니할 수 없다.

.

.

.

도대체 얼마나 넓은 마음을 가져야 위와 같은 통찰력을 갖을 수 있을까?

방대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마음 한켠이 싸늘해졌다.

이 와 같은 명저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한국을 비롯한 국가가 아닌, 미국을 포함한 서양에서 주로 탄생하는걸까? 하는 오래된 궁금증이 풀리면서 동시에 그동안 배우고 쌓아온 지식들이 왠지 통찰로 인도하는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인 건만 같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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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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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는 작가의 첫 작품집 <달려라, 아비>의 뒤를 이어 나온 두번째 작품집으로, 주로 2005년에서 2007년 사이 각종 문예지에 발표된 단편 여덟편을 모은 것이다. 2002년 스물둘이라는 젊은 나이로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혜성처럼 나타난 작가에 대한 문단과 독자의 관심을 이어간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다.


<달려라, 아비>와 <침이 고인다>는 각각 21세기와 함께 성인이 된, 소위 '88만원세대들의 자화상이자 넋두리다.

비록, 전쟁을 겪고 굶기를 밥먹듯 하진 않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부모 밑에서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내고, 마침내 대학생이 되어 상경하지만 기다리고 있는 건 도시 변두리의 반지하 자취방과 최저임금 아르바이트 뿐이다. '청춘'의 들끓는 고뇌도 불같은 열정도 없는 젊은이들은 소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명함'을 얻기 위해 불철주야 매진한다. 누구는 신림동 고시촌에서... 누구는 노량진 4인용 독서실에서......


특히, 둘만의 오붓한 '공간'이 절실한 젊은 연인들의 성탄 전야 풍경을 그린 <성탄특선>은 기성세대로서 적게는 10살 많게는 20살 어린 '3포세대'의 아픔과 슬픔이 절절히 전해져왔다.   


여자와 남자는 대학 때부터 사귀기 시작해 벌써 네번째 크리스마스를 맞는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건 올해가 처음이다. 첫번째 크리스마스 때, 여자는 남자에게 한마디 말도 않고 시골집에 내려가버렸다. 남자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게 아닐까, 통화가 안되는 휴대 전화를 붙들고 끙끙댔지만, 여자가 낙향한 이유는 단지 '옷이 없다'는 거였다.

(......)

두 번째 크리스마스 땐 남자가 고향에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어머님이 편찮으시다는 이유에서였다. 남자는 그날 서울에 있었다. 옷이 아니라 돈 때문이었다. 남자는 졸업 후 일년 동안 취직을 못한 탓에 여자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다.

(......)

남 자는 여자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고 싶었다. 저녁도 먹고, 선물도 주고, 와인이나 칵테일도 마시고, 평소 가던 곳보다 조금쯤 더 비싼 모텔에서 근사한 섹스도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남들처럼. 남자는 돈을 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크리스마스 날까지 여자에게 모든 비용을 부담하게 만드는 형편없는 남자는 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남자는 거짓말을 했다. '어머님이 편찮으시다.' 그것이 자신과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세 번째 크리스마스 즈음, 두 사람은 헤어진 상태였다. 여자가 취업 준비로 힘들어하는 동안, 남자는 야근과 과로 때문에 여자에게 마음을 쓰지 못했다.

(......)

그 리고 비로소 오늘, 이들은 둘만의 온전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도 기쁘고 여유롭게 성탄을 맞을 준비가 돼 있다. 이제 남자에겐 번듯한 직장이 있고 여자에게도 깔끔한 구두와 소박한 정장이 있다. 두 사라은 조금쯤 세련돼졌고, 데이트 비용보다 주차 공간을, 옷보다는 주택 청약을 고민하는 나이가 되었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건 옷이나 돈이 아닌 '방'일 것이다.


-김애란, <성탄특선> p91~95 中-


' 젊음'으로 대변되는 20대는 젊어서 푸르고 싱그러운 만큼, 또한 젊기에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사회 환경에 따라 각 세대가 보낸 청춘의 색채는 다르지만, 세대마다 개인이 어찌할 없어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6.25 전쟁 세대가 전쟁의 아픔과 배고픔을 견뎌야 했고, 4.19세대가 독재와 고강도의 노동을 견뎌야 했으며, 소위 '386'세대가 시위와 데모로 점철된 청춘을 보낼 수밖에 없었듯이 말이다. 어느 세대가 더 행복하고 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김애란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이별'과 '좌절'의 트라우마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내 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저당잡힌 취업준비생과 아르바이트생 혹은 비정규직 저임금에 시달리는 대졸자(혹은 휴학생)들의 깊은 좌절감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아마도 이제 막 사십 고비에 접어든 '초짜' 중년이나 이제 막 젊음의 딱지를 떼어낸 삼십대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취업의 좌절감이 생생하게 되살아 나리라. 무엇보다도 학원 강사를 '먹물들의 막장'이라고 표현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마치 보면 안 될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일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한동안 잊고 살았던 아니 깨끗이 잊고 싶었던 청춘의 씁쓸함이 입안 가득 단물처럼 고였다.


김애란의 단편들은 어딘지 모르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의 상처를 어루만지게 한다. 

지금 되돌아보면 밤하늘의 별처럼 화려하고 눈부시게 빛나던 청춘의 어느 그늘진 한켠을......



열차가 노량진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일들이 떠올랐다.

내 인생의 성좌 중 어느 한 점.

유난히 흔들리며 약하게 빛났던 작은 별에 깃든 이야기.

노량진.

좌절된 꿈처럼 그곳을 감싸 안고 있던 성운과 고운 색의 먼지들.


-김애란, <자오선을 지나갈 때> p125 中-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이십여년전 나도 노량진에 있었더랬다.

청운의 꿈이라기보다는 취업의 압박감과 거듭된 좌절감에 시달리면서 한동안 노량진의 새벽을 밟고 다녔더랬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의 주인공(정아영)처럼 잠깐 머물다 갈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말이다.


노 량진에는 머무는 사람보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혹 오래 머물더라도 사람들은 그곳을 '잠시 지나가고 있는 중'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나도, 재수생 언니도, 민식이도, 총무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지나가는'곳에서의 생활,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나는 지하철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김애란, <자오선을 지나갈 때> p137~138 中-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서 우주의 별자리를 떠올리는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어떤 작가의 말처럼 인간을 포함하여 우주의 일부분은 아무리 작더라도 모두 '질량보존의 법칙'의 적용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김애란 작가 역시 인간의 실존적 범주를 머나먼 저 우주의 끝까지 길게 연장시키는 재주를 갖고 있다.

'눈 먼 물고기처럼 정해진 노선대로 움직이는 지하철 안에 앉아,  정해진 궤도를 정해진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의 행성 속 '인간'임을 인식하고, 이를 타인에게 인식시키다니... 그 발상의 전환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가 '지하철'을 타고 한점에서 또 다른 한점으로 이동하듯,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이 땅에서 사라진 생명들은 '블랙박스'를 이용하여 지구에서 우주의 어느 별로 혹은 그 반대로 우주의 어느 별에서 다시 지구로 이동해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 잃은 <플라이데이터리코더>의 어린 주인공의 얼굴에 작가의 얼굴이 그리고 다시 나의 얼굴이 겹쳐졌다. 어짜피 이 땅의 모든 어미는 새끼보다 먼저 떠날 운명을 타고 나지 않았던가. 하여, 새끼들은 모두 대부분 엄마를 잃는다. 어린 새끼에게 엄마와의 이별은 참을 수없는 상처이자 슬픔일 터. 영원한 이별이 아닌, 그저 잠시 잠깐의 헤어짐이라고 해두자.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쪽 별에서 저쪽 별로 이동해간 것 뿐이라고...



나는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 오이도와 송탄이 매우 가까운 줄 알고 택시를 타면 금방이라고 말하던 친구가 떠오른다. 자가용만 타고 다녀 지하철 노선도 상에서 인접해 있으면 실제 거리도 그렇게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 친구가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화조차 낼 수 없었다. 다만, 4호선 오이도역과 1호선 송탄역 사이의 거리처럼 우리 둘 사이에는 친구지만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다.



김애란의 <침이 고인단>에 실려 있는 여덟 작품 중, 나는 <칼자국>이 가장 마음에 든다. 비록 '안목'은 없지만 문학적으로도 가장 완성도 높은 것 같고, 全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작품 <칼자국> 속에 등장하는 엄마는 '화장을 할 줄도 울 줄도 모르지만 순종적이지도 않은' 모성애의 전형이라 하겠다.

'난감한 남자'를 남편으로 삼은 죄로 20년 넘게 칼국수집 '만나당'을 운영한 엄마는 평생 '손안에 반지의 반짝임 대신 식칼의 번뜩임을 쥐고 살아 왔다.' 대략 난감한 그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무심한 듯 넘어가는 엄마....


'갚을 수는 없지만 잊어서는 결코 안되는 빚'이 있다면, 자식이 부모 특히 엄마에게 지고 있는 빚이리라. 김애란의 단편 <칼자국>은 바로 그 '빚'의 존재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별 다섯 '명품'이다.



'요즘 젊은 것들은 복도 많아. 우리 때에 비하면 세상 살기 얼마나 좋아졌어?!'라는 말을 달고 사는 기성세대가 아직도 있다면, 그들에게 김애란의 소설집을 읽어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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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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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부터 자자한 명성을 들어온 작가였다.

<달려라, 아비>는 20대초반에 이미 대상문학상(수상작: 노크하지 않는 집)을 수상하면서 일찌감치 문단에 데뷰한 작가의 초기 단편들을 모은 소설집이다. 

문학적 천재성을 타고난 작가들이 무릇 그렇듯, 김애란 역시 장편보다는 단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 같다. 특히, 독특한 언어적 표현은 가히 탄성을 불러 일으킨다.


' 내가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였을 때, 나는 내 안의 그 작은 어둠이 무서워 자주 울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작았던 시절ㅡ조글조글한 주름과, 작고 빨리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던 때 말이다. 그때 나의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말을 모르는 모뚱이가, 세상에 편지처럼 도착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김애란, <달려라, 아비> p8 中-


천진난만한 여아를 마주하며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떠올리고, 뜻하지 않은 반가움의 상징인 편지의 도착으로 아기의 탄생을 형언하는 그 발칙한 상상력에 처음부터 압도되었다.

무책임한 아빠를 두었으며 또 딱 그만큼한 무책임한 엄마를 둔 주인공의 '가족 로망스'는 해피엔딩이라 할 순 없어도 해피엔딩처럼 따듯하다.


여자를 덜컥 임신 시켜놓고는 출산하던 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남자...

그런 남자를 남편으로 그리고 아빠로 둔, 모녀의 삶이 순탄치는 않았을 터. 거친 삶의 질곡들이 작품 속 곳곳에서 은연 중에 튀어 나온다. 작품 해설에서는 이를 두고, '원치않는 탄생이라는 걸 거부하기 위해 아버지를 긍정하면서 정신적 상처를 만들지 않으려는 주인공 '나'의 '긍정적인 의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 처럼 아버지에 대한 주인공의 긍정적인 시선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남자를 이해하고 사랑한 엄마의 영향이 반영된 결과로 읽힌다. 

하여,

나는 김애란 작가의 초기 대표작 <달려라, 아비>의 또 다른 미덕을 주인공의 어머니에게 돌리고 싶다. 


어머니는 그날 밤, 아버지가 왜 집을 나갔는지 묻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또 절대 물어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어머니의 침울한 표정을 보자 울컥하니 신경질이 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매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버지가......미안하대. 평생 미안해하며 살았대. 이 사람 말로는." 어머니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나는 내친 김에 한마디 더 했다. "그리고 엄마, 그때 참 예뻤대......"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부분에?" 나는 편지를 훑는 시늉을 하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집에 와서 매주 잔디를 깎았습니다'라는 부분을 짚어주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여기."어머니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 부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손으로 곱게 매만졌다. 그때 나는 농담 잘하고 씩씩한 내 어머니가, 한번도 울어본 적 없으나 성대가 부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김애란, <달려라, 아비> p26 中-


인간에게 모친의 이미지는 일맥상통한다.

아 들이건 딸이건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뭐랄까 서로를 끌어당기는 지구와 달 사이의 인력만큼 강한 운명으로 엮여 있다고 한다면, 아버지와의 관계는 자석의 양극과 음극처럼 합일을 이루어내지 못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영향력을 투사하는 관계가 아닐까 싶다. 


"인간은 누구나 아버지의 영향을 받는다. 아버지가 없는 경우일지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부친의 부재'라는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김애란의 단편집 <달려라, 아비>는 물론이거니와, <스카이 콩콩> <사랑의 인사>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등등 여러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탄생과 존재 가치를 아버지-부재 여부와 상관없이-와의 관계 속에서 끈질기에 추구하고 있다.


전파상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과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형과 함께 살고 있는 '나'는 스카이 콩콩을 타며 놀 만큼 어리다. 그러면서도 주인공 '나'는 인간이란 그저 지면에서 2~3미터 높이의 가로등이 그려내는 원주율과 지구 원주율 사이에서 복작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만큼 어른스럽다. 바로 이 점이 주인공 '나'가 옥상에서 콩콩거리며 스카이 콩콩을 타는 행위가 절대로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는 까닭이다. 열심히 스카이 콩콩을 타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굴러떨어지는 돌을 언덕위로 계속해서 굴려 올리는 시지프시의 모습과 닮아 있지 않은가. 주인공 '나'는 스카이 콩콩을 타면서 짧은 한순간 지상에서 우주로 '도약'함으로서 '실존'하는 것이다.  



한편, 1인 가구의 각박한 도시 생활을 그려낸 <나는 편의점에 간다>와 <노크하지 않는 집>은 작품 전반을 걸쳐 관통하는 정서는 바로 외로움과 서글픔이다. 노동의 소외라는 후기산업화 시대를 거쳐 노동의 종말이라는 21세기 지식정보화시대의 자화상으로 읽히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면, 90년대 초반 대학에 다니던 내가 한, 첫번째 아르바이트는 바로 명동과 압구정동의 정해진 지점에서 하루종일 유동 인구를 연령별 성별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모 대기업이 일본식 체인점을 여는데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일본의 '로션'이라는 편의점이었다. 그 후 월드컵을 전후로 하여 도시의 요지(要地)를 속속 점령하기 시작한 편의점은 그로부터 고작 10여년 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인적이 드문 농촌 마을까지 깊숙히 들어가 있다.  '과연 이런 곳에 사람이 살긴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24시간 연중 무휴'라는 익숙한 로고의 편의점 간판이 인가의 불빛보다 먼저 나그네를 맞이하는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작품 해설 속의 지적처럼, 21세기 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획일화된 '편의점(패스트푸트점 포함)'과 '대형마트' 그리고 '원룸'이라 하겠다. 비록 가족과 관계가 단절되더라고 편의점과 대형마트와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 이제 더 이상 편의점 혹은 대형마트의 이용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거부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요건이 되었기때문이다. 가족보다 편의점의 존재가 더 중요해진 세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소름이 돋는다. '아니라고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속 허구'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임을 우린 모두 너무나 잘 안다.


<노크하지 않는 집>은 변두리 원룸촌의 일상적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개인의 사생활이 철저히 보호되는 편리한 생활공간이어야 할 그곳이 어서 빨리 탈출해야만 할 것 같은 으시시한 '귀신집'처럼 다가온다.

고시원 사람들은 서로 옆방에 누군가 사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한다. 통성명은 커녕 서로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묵계라고 한다. 

바로 '소통의 부재'다.

인간은 존재하나 인간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이웃간 소통이 단절된 사회는 생물학적 '생존'만 존재할 뿐 정신적 '생활'은 없는, 도시의 무덤이라 하겠다. 그 무덤 속에서 주인공 '나'는 절규한다. '미안해요, 무서워서 그랬습니다'라고......


서로의 감정과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더더욱 돈독해지는 인간관계의 부재야말로 우리 모두가 직면해 있는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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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이다.

다만, 굳이 소설의 3요소(인물, 사건, 배경)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인물과 배경의 부각이 너무 커서 사건 즉 '스토리의 부재'라는 점에서 소설 읽기의 재미는 다소 떨어지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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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 2012년 제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전민식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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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시내 대형 서점에서 눈에 띈 책인데 제8회 세계문학수상작품이란다.

작가 소개란에 '부산에서 태어났으나 평택에 있는 캠프 험프리라는 미군 기지촌에서 자랐다'고 적혀 있다.

얼마든지 감출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굳이' 밝혔다는 사실에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포함하여 자신의 전부를 미화하려고 하는 법인데...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는 한순간의 '실수'로 안정된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잘 나가는 컨설턴트에서 실업자로, 다시 노숙자로 전락한 주인공 임도랑의 방황과 사랑 그리고 희망과 좌절이 작품 전체에 깊숙히 배어 있다. 



고급 애완개들을 산책시키는 댓가로 생계를 유지하는 남자...

배신과 좌절보다 그를 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건,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끝없는 자기비애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우연한 행운...

마치 눈앞으로 천천히 지나가는 호화여객선 같다.


왠지 불안하지만 행운의 여신이 자신을 선택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싶다.

비록 목적지는 모르지만...

승선을 거절할 자존심이 그에게는 더이상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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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산책시키는 남자>의 가장 큰 장점이자 결점은 십년도 훨씬 넘게 작가 지망생으로 삶을 헤쳐왔다는 작가의 이력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작가가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작품을 읽는 내내 임도랑이라는 작품 속 주인공이 마치 전민식이라는 작가로 여러 차례 오버랩됨을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작가 자신이 경험한 바를 작품화시키면 사실적이다. 한마디로 '리얼'하다. 그리고 일찍이 박완서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작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건 작품화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경험한 걸 글로 표현하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소설을 읽는 목적이 어느 한 개인의 경험담을 엿보기 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캄캄한 어둠속을 더듬어 나가는 것처럼 외로움과 불안감이 교차하는 일상 속에서 소설을 펼쳐든다는 건 바로 희망 때문이다. 어둠 속, 저 깊은 곳에서 사그라질듯 깜빡이는 작은 희망의 불씨 하나를 만나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이다.  작은 불씨 하나가 어둠을 몰아낼 수 없고 굶주린 나그네에게 일용한 양식과 따듯한 쉼터를 제공해 줄 순 없지만, '저기에 그 누군가가 있구나... 나 혼자가 절대 아니었어...' 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나그네가 어둠을 뚫고 마침내 새벽을 맞이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작가란 이런 불씨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단순히 경험한 바를 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 의식을 작품 속에서 구현해내야 한다. 어둠 속 불씨처럼 나그네에게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를 전해주어야 한다. 


안 타깝게도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에게는 현실의 양감(量感)-나는 이 심사평을 '사실적으로'로 이해했다-은 충분히 느껴지나, 이와 같은 불씨가 없다. 비록 찰나일망정 깊디 깊은 어둠 속 마음 한켠을 훤하게 밝히는 그런 한 톨의 불씨 말이다.




끝으로 책 제목이다. 

'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라는 제목은 어딘지 모르게 '데자뷰'를 불러 일으킨다. 처음에는 이런 느낌이 뭔지 몰라 애써 외면했는데, 얼마 전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다시 한번 보고 나서 그 느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영화 <더 리더> 속에는 몇 편의 실제 책제목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안톤체홉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다.


남자 주인공 마이클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도입 부분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자 여주인공 한나는 서서히 책속으로 빠져든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한나에게 책 속에 펼쳐진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이었을까?

어쩌면 한나는 책 속의 여자 주인공처럼 사랑과 희망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사랑...

그리고...

희망...


이제 막 욕망에 눈을 뜬 십대 소년의 마음으로는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사랑이고 그런 희망이었을 것이다.


이 책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의 주인공 역시 그런 사랑과 희망을 꿈꾸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왠지 기지촌에서 유년을 보낸 작가만큼은 사랑과 희망을 간절히 품으며 소설을 써내려갔을 거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책 제목이 가져다 주는 절묘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 봄이 지기 전에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 책 읽어 주는 남자>를 다시 한번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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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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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 교수의 <욕망해도 괜찮아>를 읽고 진부함과 신선함이 교차했다.  

진부함이란 저자 스스로 지적(?)하고 있듯 특정 종교의 색채를 남김없이 발산한다는 점이고, 신선함이란 성인 남성의 일탈과 중산층의 이중성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저자의 또다른 저작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찾아 읽게 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불편해도 괜찮아>는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법학 교수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 속 인권 이야기다.


국내외의 다양한 영화 속 장면과 대화 혹은 줄거리 및 등장인물 설정에는 우리도 모르게 소수자의 인권이 무시되거나 심지어 유린되기까지 한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예를 들면, 영화 <300>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시키면서까지 배신자인 에피알테스를 꼽추 장애인으로 설정한 점과 뇌성마비 장애인 여성과 전과자 남성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 역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은연중에 스며들어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영화 <오아시스> 속 장애인의 관점이 사실은 장애인이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장애인은 이러할 것이다'라는 정상인의 상상 혹은 추측이야말로 이미 명작의 반열에 오른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맹점'인 것이다. 


공주는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뇌성마비 장애인 중에 일부가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주의 경우 의사표현이 분명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지적장애가 동반되지 않은 뇌성마지 장애인입니다. (......) 그런데 영화 속의 공주는 남자친구가 교도소에 가는데도 무기력하게 그냥 방치하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 공주는 경찰서에서 몸을 부딪치며 저항해본 것을 마지막으로 남자친구를 구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합니다. (......) 종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의 동의에 의한성관계였다는 점은 전과3범인 그가 당연히 주장해야 하는 내용입니다.입증이 어려운 상태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영화는 '사회적 편견'떼문에 공주와 종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사회의 편견 대무에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시각 자체야말로 편견입니다. 이창동 감독이나 문소리가 뇌성마비 장애인의 외적인 모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대로 재현해내는 데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뇌성마비 장애인의 내면을 제대로 읽어내는 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김두식, <불편해도 괜찮아> 147~149 中-



장애인에 대한 인권 유린뿐만이 아니다.

' 드라마 천국'이라 할만한  이 땅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사랑으로 어떻게 미화되고 있는지 그 궤적을 따라가 보면 심각한 남성우월주의와 마주하게 되고, 노동 관련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는 노사갈등이 어떻게 노노갈등으로 변질되었으며 노동운동단체들의 권력지향성과 이중성을 접하게 된다. 특히, 울산현대자동차 식당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 전원을 해고한 과정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밥, 꽃, 양>은 그 제목만으로도 한동안 명치끝이 아파왔다.


우리나라에는 비정규직들이 겪는 이런 기막힌 상황을 그린 훌륭한 다큐멘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분야의 선구적인 영화로는 1998년부터 3년간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벌어진 사건을 그린 임인애, 서은주감독의 <밥, 꽃, 양>(2002)을꼽을 수 있지요. 1998년 8월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정리해고에 반발하여 36일간 파업을 계속합니다. 이 파업의 결과로 노사는 277명만 정리해고하는 데 합의했고, 파업의 평화적인 종결은 새로운 노사문화의 창출로 기록되었습니다. 원래 노사는 식당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 276명 전원과 남성직원 한명을 해고하는데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식당 여성노동자 132명이 위로금을 받고 자진퇴사하자, 뒤늦게 그 빈자리르 여러 부서의 남성 노동자들로 채워넣었습니다. 이 식당 여성노동자들은 평상시뿐만 아니라 파업기간중에도 동료 남성노동자들을 위해 밥을 지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노사는 이들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평화로운 노사화합을 이끌어냈습니다. 정규직에서 잘린 여성노동자 144명은 현대자동차가 아니라 노조의 하청노동자로 재고용되었습니다. 월급은 60%깎였고 인원도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이듬해 현대자동차가 4천억원의 순이익을 내자 식당 여성노동자들은 함께 해고되었던 생산직 남성노동자들과 함께 복직투쟁에 나섰는데, 회사는 남성노동자들만 다시 채용하고 여성노동자들과는 아예 협상에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노조는 이 모든 과정에서 침묵했습니다.

(......)

우리나라에서도 대기업 노조와 소규모 노조,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 자기들끼리 싸우게 하는 '이노제노(以老制老)'정책이 성공을 거두기시작한 것입니다.

' 밥'을 짓다가 파업의 선봉에서 투쟁의 '꽃'이 되었고, 결국 남성중심의 노조와 회사측의 협상에 희생'양'이 되고 만 아줌마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싸움의 희생양은 일차적으로 <밥, 꽃, 양>의 식당 여성노동자들이었지만, 결국 남녀를 불문한 비정규직전체로 확산되었고, 앞으로는 정규직 노조로 이어질 게 분명합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아직 자기 힘을 유지하고 있지만, 회사가 정규직 자체를 잘 뽑지 않는 상황에서 정규직 노조의 입지도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김두식, <불편해도 괜찮아> 189~191 中-


'노동계의 이해집단 속에서 외면받아온 다큐멘터리 <밥, 꽃, 양>이 만들어진지 1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살펴보면, 결국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노조공동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저자의 이 한 마디야말로 오늘 우리가 직면한 이 땅의 노동 시장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많이 배우고 공부했으며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의 직업 안정성이 우선되어야 하며 더 많은 보수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김두식 교수가 책에서 밝힌 것처럼 철도공사 직원 월급이 교수보다 더 많아도 된다는 데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해먹고는 내팽개치는 '짓'만큼은 어떤 말로도 용서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노동계를 이끄는 노동운동가들은 반드시 이 점을 직시해야 하리라.


일본 제조업의 위력은 장인 정신에 밑바탕이 있다.

장인 정신이란 , 내가 만든 물건에 혼(魂)을 담아내는 것이다. 대량 생산 체제 속에서도 자부심을 갖고 있는 노동자의 손을 거친 물건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중국산 제품은 이제 전세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지만 '위조와 저질'의 대명사가 된지 오래다. 물건과 먹거리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전문가도 있다.

"사형제도가 건재하며 중형을 면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국사회애서 먹거리에 가해지는 불법행위는 전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한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중국인들에게는 장인정신 즉 자존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고...



책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와 특정 종교인 및 여성과 외국인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그동안 얼마나 편협하고 이기적인지 확인하는 과정은 '불편'함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다소 엉뚱한 책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참으로 많은 것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편견의 시작은 불편함 즉 마음의 불편함에서 시작되고 편견이 곧 차별과 폭력을 부른다. 그러므로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개인 마음속에 알게 모르게 내재되어있는 불편함을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리라.


2012년 임진년 한해를 마감하고 2013년 계사년 새해를 맞이하는 길목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명저를 한편 만난 것 같아 기쁘고도 고맙다. 



참!

여담이지만 한마디 남기자면, 외래어 표기법 원칙과는 다소 다른 표기법이 마음에 걸렸다. 예를 들면, 씨나리오, 씨애틀, 후쎄인, 메씨지, 씨스템, 쿄오또, 초오센진, 스딸린식 등등 외국어 표기에 있어 된소리되기가 혀용된 언어는 베트남과 타이어뿐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하나같이 외국어 표기법을 무시했나 싶다. 특히, 영국의 대처 수상을 '마가릿 새처'로 표기한 데에 이르자 정말 하마터면 화가 날뻔  했고 정말 그 이유가 궁금했다. 물론, 이와 같은 표기법은 저자의 의도라기보다는 출판사의 의도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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