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 개정판
셔윈 B. 뉴랜드 지음, 명희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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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상당히 오랫동안 외면받고 금기시되어 왔다.

산 자에게 죽음이란 미루고 피할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미루고 피하다가 급작스럽게 맞부닥치는 '어떤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웰빙(Well-being)'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과 성찰 또한 확대되고 있다.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는 40여년간 의사로 근무하면서 마주한 다양한 죽음에 대한 생생한 임상보고서이자, 의학적 관점을 뛰어넘어 한 인간으로서 '죽음'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한 자기고백서라 하겠다.


언젠가는 죽고 말 우리, 마지막 순간을 향해 한 걸음씩 서서히 나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자신의 생이 남들에게 흉한 모습을 보이지않고 마감될 수 있다는 것은 진정 축복이다. 완전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심장남이 멈춰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신체 조직은 그 나름대로의 속도에 따라 죽음의 과정에 돌입하게 된다. 죽음이란 영혼이 빠져 나갈 때처럼, '일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과거에는 심장이 박동을 멈추는 순간을 완전한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심장의 침묵 뒤에도 완전한 죽음을 향해 진행되는 소리 없는 과정들이 있다.


-셔윈 뉴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74~74 中-


갑 작스러운 죽음은 주로 심장마비와 같은 심혈관 질환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심혈관 질환은 혈관 속을 돌아다니던 찌꺼기들이 혈관을 막으면서 발생한다. 이 밖에 교통사고 등에 의한 사망은 외상에 따른 과다출혈이나 상처 부위에 염증이 일어나 발생하는 패혈증 등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서서히 한걸음 한걸음씩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 본 인생이란 결국 죽음으로 향해가는 일련의 지난한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노화'로 더 한층 구체화된다. 


저자는 할머니의 노화가 어떻게 죽음과 맞닿아 있는지에 대해서 전 과정을 간략하고도 애잔하게 묘사하면서 노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나이가 많아도 얼마든지 진취적이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가 인간답기 위해서는 생물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 있다. 문제는 그러한 구성 요소들을 부정하고 물리치려는 헛된 시도이다. 죽음에 대한 불필요한 저항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가슴을 해쳐선 안된다.

생 에 정해진 한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때 비로서 인생은 군형 있는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모든 즐거움과 성취감 그리고 고통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인생의 틀이 완성되는 것이다. 자연이 내린 한계를 억지로 뛰어넘으려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틀을 잃어버리게 된다.


-셔윈 뉴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133~134 中-


이 밖에도 저자는 노화의 불청객 중 하나인 '치매'에 대해서 구체적인 임상 사례를 빌려 자세히 소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살인과 자살 그리고 안락사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특히, 날카로운 흉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경우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죽음의 고통이 그다지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해서 인간은 스스로를 방어하는 쪽으로 부지런히 진화를 거듭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극단적인 고통이 수반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에 실제로 직접 직면하게 되면 평소 생각했던 것보다 고통의 강도가 덜 하다는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극심한 고통이나 두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인체에서는 고통을 잊게해주는 혹은 그 강도를 낮추어주는 호르몬 분비나 기타 자기방어 기제가 작동되기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죽음에 이른 사람들의 마지막 표정이 고통으로 이그러져있기보다는 허탈함과 안도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다는 점을 저자 역시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에이즈 환자들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의학적으로 서술하는 한편, 사회적 비난과 가족의 외면 속에서도 에이즈 환자의 죽음이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과 동성애자들이 보여주는 연대의식으로 얼마나 거룩하고 숭고할 수 있는지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암에 의한 죽음을 논하면서 저자는 의사의 '욕심'이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고통으로 몰아가는지에 대해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즉,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 그리고 암전문의들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인해 '자기 결정권'과 '심리적 자율권'을 행사하기를 포기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의 이와 같은 지적은 어째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을 해야 할 그 시간에 환자는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철저하게 고립된 채 각종 의료장비를 주렁주렁 매단 채 낯선 의료진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도 솔직한 답변이 되리라. 물론, 의료진들의 도전정신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의료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의료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간의 헛된 희망과 오만함 또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의사인 저자는 바로 이 점을 '내부 고발자'와 같은 심정으로 밝힌 것이다.


의사들이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이유는 실패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본능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본래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의학은 이들을 현대 장비와 새로운 약품 등으로 유혹하고 있다. 의사들은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을, 의학의 치료 능력으로써 누를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에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하는 환자, 그 환자들로부터 죽음의 마수를 떼어놓기 위해서 말이다. 의사들은 승리를 해야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승리하기 위해 우리 의사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학위를 따고, 힘든 수련 과정을 거쳐 자신의 입지를 다진다.

(......)

대부분의 의사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 특질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합당하고 합리적인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어느 선을 넘어 버릴 때, 다시 말해 통제력이 사라지게 될 때, 의사들은 자신의 무능력이 양산해낸 결과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의사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환자들보다 돌아가는상황을 더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강요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일단 결정내리고 그 결정을 환자들이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셔윈 뉴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366~367 中-


인생은 '멋진 죽음'으로 완성된다. 물론, 멋진 죽음이란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어 한마디로 정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극심한 고통속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건 결코 아닐 것이다. 완치 가능성이 낮은 각종 화학 요법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집에서 생애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벗들과 훌륭하게 보내고 죽음을 맞이한 것도 멋진 죽음일 수 있을 것이다. 차가운 병원이 아닌 온화하고 따듯한 가족의 품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또한 숭고하고 멋진 죽음이 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의사의 역할을 질병의 치료에만 두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환자가 고통없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와주는 것 또한 의사의 숭고한 사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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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중국은 없다 - 시진핑 시대 중국 경제의 위험한 진실
한우덕 지음 / 청림출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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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저자는 한국의 대표적인 중국 전문가다.

<우리가 아는 중국은 없다>에는 한중 수교 초창기부터 중국 대륙을 드나들면서 현장감을 익힌 저자의 눈으로 바라본 중국의 현재와 미래가 잘 담겨 있다.

1992 년 한중 수교는 한국의 수출구도를 바꾸는 일대 변화를 불러 왔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극복과 중진국 함정을 피할 수 있었던 건 '금모으기 운동' 때문이 아니라 바로 수교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대중 수출 덕분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90 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기업은 중국 현지에 생산 공정을 옮겨 놓고, 현지의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한국으로부터 수입해온 중간재를 조립 가공 후, 제3국으로로 수출함으로써 엄청난 이익을 거두어왔다. 이는 바꿔 말하면, 중국에 대한 한국 경제의 의존도가 확대되었다는 뜻이다.


빛과 어둠은 공존하는 법이다. 그동안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이득을 본 한국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즉, 중국의 성장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개혁개방 초기부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중국의 경제 성장은 대부분 개혁개방을 통한 대외수출 확대의 결과였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경제 악화로 중국의 성장은 더 이상 대외수출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 정부는 경제를 견인하기 위해 그동안 수출로 거둬드린 달러를 내수시장 활성화와 인프라 건설 분야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13억 인구를 보유한 중국의 내수 시장 잠재력은 어마어마하다.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의 내수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사활을 건 경쟁은 물론이고, 기술이전이라는 '독배'조차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 최고의 수주량을 자랑하던 한국의 조선업이 중국에게 1위 자리를 내주었고, 유럽의 에어버스와 미국의 보잉사는 해마다 200여대의 여객기를 구매하는 VIP 고객인 중국 항공사(중국의 항공분야는 중국항공, 남방항공, 동방항공 등 국유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즉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서양의 자유방임자본주의가 아닌, 국가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기업 대 기업 간 비지니스라기 보다는 기업 대 국가라는 형국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 기업을 포함하여 글로벌 기업들이 상대해야 하는 건 바로 중국 기업이 아닌 중국 정부이다. 그것도 그냥 정부가 아니라 엄청난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으면서 '공산당'으로 대변되는 폐쇄적 집단통치제도를 굳건히 고수하고 있다. 이런 중국 정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기업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구글이 한때 중국 본토에서 '바이두'에게 시장을 내주고 철수까지 하게 된 것이나, 프랑스 최대 유통업체인 까르푸가 티베트 독립 시위를 후원한다는 근거없는 소문에 떠밀려 철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중국 내수 시장에서 공정한 게임의 규칙은 사라진지 오래다. 자유방임자본주의의 관점으로 중국을 바라보고 접근한다면 말 그대로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중국의 공산당도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만 의지하여서는 거대 중국을 더 이상 이끌 수는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 산층의 부상, 내수중심으로 성장 패턴의 전환, 공산당과 중산층의 타협, 그리고 다으이 연성화... 이같은 트렌드를 꿰뚫는 키워드는 '민부(民富)'다. 기존의 성장의 '국가 강성'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앞으로는 성장의 과실이 일반 국민에게 돌아가도록 짜일 것이다. 시진핑 시대 중국 공산당이 대외적으로 어던 슬로건을 내걸지는 아지 아직 알수 없다. 다만, 그 방향은 국가보다는 민간이 더 부유해지는 민부의 철학을 담게 될 것이다.


-한우덕, <우리가 아는 중국은 없다> p 113~114 中-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저자 역시 향후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동안 중국의 공산당은 중산층을 끌어안고 하층민의 반발을 완화시키기 위해 더 한층 부드러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빠져 나간 자리에는 민족주의가 들어설 공산이 크다. 한 나라의 민족주의는 이웃국가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이 민족주의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자위차원인 수동적 측면이 아니라 힘을 과시하려는 확장/공격적 성격을 띄게 된다면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최근 중국이 일본 및 동남아시아 각국들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확장/공격적 외교 노선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중국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만약 민족주의에 기반한 확장/공격적 성향으로 바뀐다면 그 여파는 이웃국가에만 머물지 않고 전세계에게 미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여, 앞으로 한국은 단순히 돈을 더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중국 공산당의 '입과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중국 대륙에서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말은 지나간 옛말이 된지 오래다. 중국은 'rule-taker'에서 'rule-maker'가 되려고 한다. 즉, 기존의 국제 질서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꽌시'문화로 국제 질서를 바꾸려고 한다. 거대한 시장 규모만 보고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큰 코 다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 특히 중국의 지도층은 거대한 내수 시장을 외국에게 내줄 의향이 추호도 없다. 그렇다고 자국의 민영 기업을 키우려는 노력도 엿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의 내수 시장은 '국진민퇴(國進民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즉, 국가소유의 국유기업과 국가가 운영하는 국영기업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내수 시장의 핵심 산업을 독점하는 양상을 띄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익 배분의 결실은 자연스럽게 법을 정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갖고 있는 소수의 지배층에게 흘러 들어감으로써 빈부격차 심화와 권력형 부패라는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중국병'의 근원은 시장 경제 시스템 유지에 꼭 필요한 자율과 견제의 기능이 약하다는 데 있다. 정상적인 시장 경제 시스템이라면 각 경제 주체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이해관계의 타협점을 차즌ㄴ다. 그러나 중국은 그게 안 된다. 자신의 이익 행위가 사회 전체의 경제적 발전과 합치되지 않는다 .그래서 짝퉁이 성행하고 온갖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것이다. 이들을 몰아낼 수 잇는 시장의 자정기능은 턱없이 부족하다.

자율과 타협이 실종된 중국 시장경제 체제는 쉽게 '패자독식'의 구조로 빠지고 만다. 이긴 놈이 다 먹는 것이다. 센 놈이 약자의 것을 끊임없이 빼앗아 갈 수 있는 제도적 틀이 자리 잡고 있다. 약자는 죽어라 일해 모은 부를 자기도 모르게 빼앗긴다.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관리하고 유도해야 할 국가는 오히려 이익행위의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국유기업을 앞세워 산업을 독점하고 국유은행을 매개로 자본을 장악한다. 이로 인해 민영기업들은 산업의 변두리에서 허덕이게 되고 힘없는 노동자들은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우덕, <우리가 아는 중국은 없다> p204 中-



한편, 인프라 건설 분야에서는 우선  먼저 세계 최장 길이를 자랑하는 중국의 철도 부문에 대한 투자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2006 년 베이징과 라싸를 잇는 '칭짱철도'의 개통을 시작으로 고속철도사업까지 철도는 말그대로 중국의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火车头(기관차)'였다. 그리고 뒤이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겨냥한 건설 특수가 한바탕 중국 대륙을 휩쓸더니, 최근 2~3년간은 주택 건설붐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진 모양새다. 물론, 이 엄청난 공정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자금은 중국의 국유은행들로부터 나온다. 중국 정부는 국유은행을 동원해서 인프라 건설 투자에 대한 대출을 확대시켜 내수시장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유은행의 부실화 그리고 돈을 빌린 주체인 지방정부의 부실화가 우려된다.


전세계 특히 유럽을 강타한 금융위기가 2008년 미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다음번 위기의 진앙지는 중국의 지방정부 파산과 이에 따른 은행 부실화를 꼽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물론, 이상의 시나리오처럼 중국이 자유방임국가인 미국처럼 자국의 경제 위기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도록 '방임'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중국은 이때야말로 '책임있는 국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중국 공산당의 권력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부상은 지금까지 세계 경제에 크나큰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13억 인구의 함수가 언제나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13 억 함수'가 이제 거꾸로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세계는 중국의 거대 인구가 주는 '풍요'를 누려왔다. 저장성의 허름한 공장에서 하루 10시간 재봉틀을 돌리는 '샤오제(小姐, 소녀)'의 희생이 있었기에 세계 소비자들은 싼 값에 셔츠를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제 '노!'라고 말한다. 더 이상 싼 값에 노동력을 팔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은 원자재시장에서 자원을 쓸어가는 존재로 변했다. 서방에 풍요를 줬던 13억 인구가 이제는 고통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13억 함수의 패러독스다.

흔히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지대물박(地大物博)의 나라'로 표현한다. 땅이 크고 물산이 풍부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턱도 없는 소리다. 인구와 경제 규모를 비교해 볼때 중국이야말로 전형적인 자원 빈국이다. 중국이 세계 ㄱ여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퍼센트 정도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세계 시멘트의 절반, 철광석의 약 3분의 1, 구리의 40퍼센트를 먹어치우고 있다. 중국은 2010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으로 등장했다. 상하이에 건설되는 빌딩의 숫자에 따라 국제 철강 가격이 좌우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2010년 중국의 에너지 소비량은 22억 5000만톤(석유로 환산)으로 미국보다 4퍼센트 많았다. 물도 문제다.

655개 주요 도시 중 400개 도시가 물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절반은 수돗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전력 사정도 열악하다. 상하이, 광둥 등에 진출한 한국 중소기업들은 자주 '개사정삼(開四정三)'처분을 받는다. 일주일에 4일만 전기를 공급하고 나머지 3일은 아예 끊겠다는 통보다. '전력난;으로 기업인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요 즘은 곡물 사정이 특히 심하다. 중국 인구가 세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퍼센트에 달한다. 그러나 경작지 보유 비율은 8퍼센트에 불과하다. 천생적으로 곡물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게다가 자연재해는 매년 치러야 하는 연례행사가 됐다. (......)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경작지에 자연재해까지 덮치니 식량 확보에 어려움이 많다. 식량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세계 곡물시장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

돼지는 중국과 세계 경제의 역학 관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중국 각지역에서 키우는 돼지 수는 약 4억5000만마리에 달한다. 세계 전체 돼지 수의 절반에 해당하는수준이다. 돼지는 곡물 먹는 '기계'다. 돼지 몸무게 1킬로그램을 불리기 위해서는 약 3~4킬로그램의 곡물을 먹여야 한다. 특히 대형 기업 영농이 늘면서 중국에서도 사료 먹는 돼지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수년 동안 사료 수요는 연평균 20퍼센트 넘게 증가했다. 돼지고깃값이 오를 수 밖에 없다. 이는 중국 물가지수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인플레가 기승을 부리던 2011년 6월, 소비자 물가상승률 6.5퍼센트 중 1.5퍼센트포인트가 오로지 돼지고기값 때문에 발생했다. '돼재가 중국, 나아가 세계 인플레의 주범'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그야말로 '돼지 경제학'이다.


-한우덕, 우리가 하는 중국은 없다> p 218~221 中-


이와 같은 중국발 후폭풍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간단하다.

'made in china'에서  'made for china'로 바꾸어 중국인의 마음을 파고 드는 상품을 만들어 내수시장을 공략하라는 것이다. 각개의 우려 속에서 체결된 한중 수교가 한국에게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주었듯이 한중 FTA 역시 위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기회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견 타당한 말이다. 달리는 사자를 따라잡으려 하지 말고 달리는 사자 등위에 올라타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용기와 배짱 그리고 기술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연구개발을 통한 최첨단 기술력 확보와 '한류'등 문화 컨텐츠로 문화와 경제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중국 소비자의 마음을 파고 들 상품 개발에 앞장서야 할 대기업들은 중국의 성(省) 하나보다도 작다는 국내시장에서 영세상인들과 경쟁이나 하고 있다. '땅 짚고 헤엄치겠다'는 식의 자세야말로 경쟁력 강화에 자신이 없다는 방증이다.

한국의 대기업들은각고의 노력으로 초석을 다진 1세대 경영인과 정경유착과 카르텔로 성장한 2세대 경영인을 거쳐 3세대 경영인으로 그 바톤이 넘어가고 있다. 

부디, '3대 가는 부자없다'는 속담이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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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 너머에 - 아직도 가야 할 길 그리고 저 너머에
M. 스캇 펙 지음, 손홍기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그리고 저 너머에>는 1978년스캇 펙 박사의 첫번째 책인 <아직도 가야할 길>이 출간된 지 이십여년만에 나온 책으로 <아직도 가야 할 길>의 후속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결코 좁혀질 것같지 않은 종교와 과학의 경계를 허문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에서 스캇 펙은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참된 종교인으로의 삶의 자세로 해석한 것 같다. 


사실, 종교와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까지도 어쩌면 그 출발점은 같다. 

바로 '생각(思惟)라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도무지 풀릴 길 없는 수수께끼 앞에서 인류가 창조자(신)를 '창조'해낸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유 과정의 결과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유의 과정 속에서 인류의 종교가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한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 바로 철학이다. 그리고 경험과 사실에 입각한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란 다른 생물체와 마찬가지로 수분 단백질 등등의 물질로 이루어진 생명체일 뿐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과 <그리고 저 너머에> 등 스캇 펙 박사의 저서들은 이상의 세 가지 궁금증을 정신과 상담의라는 저자 자신의 직업적 특징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종교인으로서의 관점을 조화롭게 결합시켜 해답을 찾아 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특히, 정신과 의사로서의 관점은 일찍이 유대인 수용소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온 정신과 전문의로서 <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랭클을 떠올리게 하며, 사랑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종교적 관점은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릭 프롬을 떠올리게 한다. 굳이 차이라고 한다면 각기 다른 시대에서 태어나 각기 다른 경험을 했다는 시공간적 차이와 스캇 펙 박사가 훨씬 더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띄고 있다는 것 정도다.  하여, 비종교인으로서 스캇펙 박사의 책을 부담없이 읽어내려간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자의 영적인 경험과 주장들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인간 악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분석과 해석에는 십분 공감하는 바이다. 


악의 문제로 깊이 들어가기 전에 내가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삶의 목적이 그저 고통 없는, 곧 언제나 편안하고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문제 해결에는 고통이 다르고 차원 높은 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은 쉽지 않다.

(......)

우리들 대부분은 죄, 실패, 결함 등의 증거가 드러나 몰리게 되면 우리의 그림자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칼 융이 사용하는 '거부'라는 단어의 의미는 훨씬 적극적인 그 무엇을 포함한다. 죄와 악의 경계선을 넘어 버린 사람들의 특성은 자신들의 죄의식을 분명히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결함은 양심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양심의 고통을 인내하지 않고 거부해 버린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행위를 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죄가 아니라,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다.


-스캇 펙, <그리고 저 너머에> 86~94 中-


저자는 자신의 본질적 실체와 마주하려하지 않는 '거부'야말로 악의 근원이요 죄의 시작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양심의 가책'이란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진정한 죄란 바로 양심에 위반된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 자체를 회피하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이야말로 용서의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린 사실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훨씬 더 많이 속이며 살아간다. 바로 자기 자신의 본질과 마주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우리는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한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더 강하다. 물론 두 가지 형태의 부정직함은 서로를 부추겨 거짓의 상승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우리는 일정한시간 동안 일부의 사람들을 속일수 있지만, 자기 기만은 잠재적으로볼때 무한계로 나타날수 있다. 물론 우리가 악 또는 광기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한도 내에서이다.

자기 기만은 스스롱게 온유한 태도를 취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것이고, 자아의 '그림자'를 증대시키며, 동시에 자아에 대한 어둠과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와는 반대로 스스로에게 정직해진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자아를 사랑하는 행위를 선택한 것이다.


-스캇 펙, <그리고 저 너머에> 210 中-


스캇 펙은 <거짓의 사람들>에서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신(조물주)으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선에 복종할 것인지 아니면 악에 복종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혹시 선과 악의 경계선 언저리에 머물기를 선택할 순 없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저자는 C.S루이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주에 중립 지대란 없다. 어떤 곳에서나 어떤 순간에서나 산이 우리의 영혼을 원하거나 또는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원하고 있다"

아 마도 우리는 선과 악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신과 악마의 중간 지점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선택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선택'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며, 불복종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스캇 펙, <그리고 저 너머에> 210~211 中-



공교롭게도 스캇 펙 박사의 <그리고 저 너머에>와 셔윈 뉴랜드의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라는 책을 동시에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죽음을 가장 가깝게 지켜봐 온 의사의 근무일지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죽음의 양태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스캇 펙 박사가 <그리고 저 너머에>에서 언급하고 있는 '죽음'이 추상적인 차원이라고 한다면, 셔윈 뉴랜드 박사가 다루고 있는 '죽음'은 현실적인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생을 인위적으로 끝내고자 하는 결정은, 반드시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누구든지 그 죽음이 피치 못한 것이었음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교수였던 브리지맨은 1946년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로 말기 증세에 이른 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79세의 나이로 쓰러질 때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7권짜리 저서의 색인작업을 마무리한 후 권총으로 자살했다. 브래지맨은 자신이 직접 그 일을 수행할 수 밖에 없음을 한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직접 어떤 원칙을 세웠으면 좋겠네. 피할 수 없는 종말이 다가왔을때, 의사에게 끝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말일세"


-셔윈 뉴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224~225 中-


죽어가는 환자를 돕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불가항력적인 고통속에서 죽음으로 향해가고 있는 환자의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줄여주는 것 역시 의사의 역할이라 하겠다.  마땅히 합당한 가이드라인이 마련된다면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인간적 존엄성을 지켜낼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삶의 마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반면, 안락사에 대한 스캇 펙 박사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안락사를 삶의 의지 부족이나 순간의 판단 착오로 이루어지는 자살과 같은 차원에서 접근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내가 말하는 품위 있는 죽음이란 안락사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안락사란 태생적으로 산란한 것을 깨끗하게 처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 생각에 그것은 죽음에 따른 실존적 합법적인 고통을 줄이고, 그럼으로써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줄이는 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거부의 태도 또한 아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임박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거나, 죽음에 대한 자신의 느낌에 대해 입을 닫는다거나 심지어 먼 미래의 계획을 세우면서 아예 모르는 척하는 등의 제자각거부 형태를 보인다. 죽음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불가피한 죽음을 의식해야 되는 고통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의미 있는 의사소통의 기회를 막아 버리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으로 가면서까지 배움의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다.

품위 있게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죽음을 배움의 기회로 삼는 것이며, 영혼의 진정한 존엄성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육체적 파멸을 자기 삶의 정화 과정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캇 펙, <그리고 저 너머에> 210~211 中-




흔히, 인생을 뒤흔드는 책들이 그러하듯 한번 읽기만으로는 역부족인 것 같다.

특히, 나의 편견 혹은 짧은 지적 수준으로 말미암아 책을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집중력이 종종 흐트러졌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다시 되돌아가 읽기라는 초소한의 노력마저 하지 않았더랬다. 다시 읽어봤자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는 나태인가 교만인가? 아니면 둘 다 인가?

모든 악의 시작은 나태와 교만이라고 일갈한 스캇 펙 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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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보고서, 개정판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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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누구나 한번쯤 가져봤을 이와 같은 질문에 그 누구도 정답을 내놓지 못한다. 다만, 만약 인간이 선하기만 한 존재라면 이런 질문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인간은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라는 질문 자체야말로 인간에게는 선한 면 못지 않게 악한 면도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인간은 선한 면보다는 악한 면을 더 많이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신과 전문의로 정신분석과 상담 및 치료를 실시해온 스캇 펙 박사 역시 인간에게는 악한 면이 있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직업적으로 인간의 선한 모습보다는 악한 모습을 마주한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저자에게,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1983년도에 쓰여진 그의 명저, <거짓은 사람들>은, 인간은 왜 악한 걸까? 아니면 인간은 어떻게 악해지는 걸까? 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거짓의 사람들>에서 스캇 펙 박사가 예로 든 사람들은 병리학적으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아니다. 이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의 상처로 정신적 퇴행이나 투사 혹은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적 폐해가 크지 않다. 스캇 펙 박사가 주목한 '거짓의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자신을 위해 타인의 삶을 망치거나 사회에 크나큰 폐해를 끼치는 사람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식을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부모들 역시 스캇 펙 박사가 말한 '거짓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으며, 국민과 대중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정치인들 역시 '거짓의 사람들'에 포함된다. 

 

흔히,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만을 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스캇 펙 박사가 지적했듯,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갇혀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비록 입으로는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형량을 낮추기 위한 자구책일뿐,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잘못을 안다는 건 바로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죄책감이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쫒겨나면서 인류가 처음 느꼈던 감정 역시 바로 이 부끄러움이였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스스로의 모습과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에서 용서가 시작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종교적 가르침도 바로 이와 같은 이치에서 나온 것이리라.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은 스캇 펙 박사가 말한 '거짓의 사람들'이 아니다. 악을 일삼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행동이 '잘못'되었으며,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째서 악에 굴복하는 마는 걸까?

 

어떤 식으로든 말할 수 없는 고통, 보통 사람들이 겪는 것보다 훨씬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랆들이 대부분 정신적으로는 누구 못지않게 건겅하고 진보된 사람들이다. 위대한 지도자들 중에는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는 극심한 고통들을 견뎌 내는 이들이 많다. 거꾸로, 정서적 질환의 가장 밑바닥을 파 보면 감정적인 고통을 겪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마음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아주 많다. 우울과 회의와 혼란과 절망을 고스란히 경험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감 있고 편안하고 자신에 만족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건강할 수 있다. 사실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보다 확실한 질병에 대한 정의이다.

악한 사람들은 투사와 희생양 찾기(책임전가)를 통하여 자신들의 고통을 남에게 떠너밈으로써 죄책감의 고통을 깨끗이 거부한다. 죄책감은 자신의 죄, 부적절성, 불완전성을 일깨워 주는 고통스러운 인식인 까닭에서다. 이로써 그들 자신은 고통이 없을는지 몰라도 대신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들은 고통 유발자이다. 악한 사람들은 자기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병 든 사회의 축소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 스캇 펙, <거짓의 사람들> p166 中-

 

마음의 고통을 거부할 때, 악과 손을 잡는다.

자신의 미흡함과 부족함을 직시하지 않고 부정하고 외면할 때가 바로 악한 모습이 발현되는 순간인 것이다.


악한 개인은 나약한 영혼일 뿐이다. 그러나 악이 하나 둘 모여 집단을 이루면 어떻게 될까? 바로 영혼을 잃어버린 집단의 악이 만들어진다. 인류 역사상 자행된 전쟁과 학살은 모두 하나같이 집단 악의 발로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끄는 존재가 아닌 따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은 집단 속에서 훨씬 더 안정감을 느끼고 집단의 이름으로 잔인한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스캇 펙 박사는 베트남의 밀라이 학살 사태를 예로 들어 개인의 악이 어떻게 집단의 악으로 표출되는 탁월하게 분석하고 있다.

 

전문화란 집단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이점이다. 집단이 개인보다는 훨씬 더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이 있다. 제너럴 모터스사는 직원들이 업무부, 설계부, 생산부, 조립부 등으로 전문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토록 엄청난 수의 자동차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고도의 생활 수준도 그 기반은 전적으로 우리 사회의 전문화에 놓여 있다. 전문화 자체를 악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시대의 많은 악들이 이 전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철저한 확신을 갖고 있다. 전문화가 집단의 미성숙과 집단 악의 잠재성에 이바지하는 양상은 몇 가지 기제를 통해 다양하게 나타난다. 집단 내 개인들의 역할이 전문화될수록 개인이 도덕적 책임을 집단의 다른 부분에 전가시키는 일은 가능해지며 쉬워진다. 이 과정에서 개인이 자신의 양심을 버리는 것은 물론 집단 전체의 양심도 너무 분해되고 희석되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될 수 있다.

 

- 스캇 펙, <거짓의 사람들> p292~ 294-

 

이 밖에도 저자는 베트남전 초기 미국 사회의 '골치거리들'이 어떻게 군대에 자원 입대하게 되는지, 그리고 '골치거리들'만 집단적으로 모아 놓은 '군대'가 어떻게 이성을 잃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잔인한 학살을 하고도 그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스캇 펙 박사는 미국의 베트남 반전 시위가 본격화된 건 1967년 이후 그러니까 '골치거리들'이 다 군대에 입대한 후 더이상 보낼 사람들이 없어지자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사회적 '골치거리들'이 아닌, '모범시민들'이 군대에 끌려가게 되자, 들불처럼 일어났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까 미국 사회의 망썽쟁이들이 군대에 갈 때에는 미국 사회 전체가 침묵하거나 암묵적으로 지지하다가, 법과 질서를 잘 시키는 모범시민들이 군대에 가게 되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집단 이기심과 집단 악이 발현되는 메커니즘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미국 사회의 '골치거리들'은 집단 악의 희생자이자, 집단 악의 집행자인 것이다.

 

 

스캇 펙 박사는 이처럼 집단 악이 발현되는 가장 큰 원인으로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을 꼽고 있다.

 

게으름이란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은 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투표로 뽑은 정치인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지켜보며 감시하는 것을 귀찮아한다. '알아서 잘 하겠지...'하는 마음은 사실 '믿음'의 발로라기 보다는 '귀찮음'의 소산인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성찰과 죄책감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악은 바로 자기 성찰과 죄책감을 회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르시시즘은 어떻게 집단의 악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바로 집단의 응집력을 높이기 위해 외부의 적에 대한 집단 증오심과 적개심을 조장하고 실패와 패배를 모욕으로 받아들이며 무차별 보복을 감행한다.

 

무의식적이든 고의적이든 나르시시즘의 이용은 악한 것일 수 있다. 악한 개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들춰내는 것이라면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다 비난하고 파괴하려 함으로써 자신들의 자기 성찰과 죄책감을 피한다. 이처럼 악독한 나르시시즘적 행동이 집단에서도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실패한 집단이 가장 악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실패는 프라이드에 손상을 가져온다. 짐승도 상처를 입으면 악해진다. 건강한 유기체에서라면 실패는 자기 성찰과 비판에 자그제가 도리 것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자기 비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어ㄸ너 양상으로든 불가피하게 격렬히 분노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실패의 시간이다. 집단도 마찬가지다. 집단의 실패 및 자기 비판에 대한 자극은 집단의 프라이드와 응집력을 해치는 쪽으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집단 지도자들에게는 실패의 시절이 오면 다른 나라 사람이나 '적'을 향한 집단의 증오심을 한층 끌어올림으로써 집단 응집력을 강화하려 하는 것이 기본이다.

 

- 스캇 펙, <거짓의 사람들> p303~304-

 

스캇 펙 박사는 전문화가 갖고 있는 악의 잠재성과 함께 집단이 갖고 있는 악의 잠재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가 집단 안에서 조금만 더 개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책임감을 갖는다면, 우리가 평소 나태함에서 벗어나 조금만 더 진리와 선을 추구하기 위해 부지런해지고 교만 대신 겸손함을 배운다면, 집단 악이 탄생할 가능성 또한 현저하게 낮아지리라.

 

'결코 쉽지 않은 책'이라는 추천사처럼 이 책은 정말 쉬운 책이 아니다.

처음에는 저자의 '고백'처럼 지나치게 종교적 색채가 강해서 거부감이 일었으나, 책장을 넘길수록 저자의 주장에 귀 기울이게 된다. 첫 페이지부터 좀 더 마음을 열고 읽어볼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처음 질문인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라는 원론적인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이 질문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본다면, 인간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선으로 향할 것이냐 아니면 악으로 향할 것이야 는 전적으로 우리의 판단과 자유의지 그리고 행동에 달려 있다.

 

저자의 지적처럼, 이책은 위험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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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중국경제를 죽이는가 - 경제대국 중국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
랑셴핑 지음, 이지은 옮김 / 다산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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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랑셴핑은 현재 홍콩 중문대학 교수로, 4~5년 전부터 중화권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하며 널리 알려진 소위 중국의 '스타교수'다. 


한국에서도 2010년도에 <부자 중국, 가난한 중국인>을 비롯하여 저자의 책들이 대형 서점의 매대를 '점령'하면서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그 당시, 나 역시 <부자 중국, 가난한 중국인>을 읽으면서 '참신하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중국에도 있구나' 하고 깊은 인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내친김에 량셴핑 교수의 중국어 원서까지 구해 소장하고 있는 터이다.


하여, 우연히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그의 번역서 <누가 중국 경제를 죽이는가>와 <벼랑 끝에 선 중국 경제> 을 발견하곤 바로 빌려왔다. 이 두 권중, 먼저 출간된 <누가 중국 경제를 죽이는가>를 우선 읽었는데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책의 도입부분은  저자의 전매특허라고도 할 수 있는 중국 기업 문화에 대한 질타로 시작한다. 

중 국인이 추앙해마지 않는 삼국지의 제갈량이야말로 저(低)확률 경영의 전형이요, 요행심과 성과주의에 빠져 있는 중국 민족의 특징을 대변한다고 일갈한다. 중국인 못지않게 삼국지 속의 인물과 계락을 추종하는 분위기가 강한 한국 사회 역시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행심과 경박함 그리고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한다'며 중국의 기업과 기업가들을 '흠'잡던 랑셴핑은 갑자기 중국 정부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예를 들면, 원촨 대지진이야말로 베이징 올림픽보다 더 중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외국인들에게 이기적이고 돈만 아는 민족으로 인식되어 있던 중국인들이 원촨 대지진 구조 과정에서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민족이라는 점을 널리 알리게 되었단다.


'과연, 그런가...?'싶었다. 사실, 지진을 겪은 중국인들이 보여준 모습은 자연재해를 겪은 다른 민족들의 모습과 별반 큰 차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이 스스로를 높이 평가한 까닭은 무엇일까? 평소 남의 일에 개입하지 않기로 유명한 중국인들의 특성을 고려해보면 원촨 대지진때 둘 팔 걷고 나선 중국인들의 모습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고, 오히려 이 점이 외국인보다는 자국인들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원촨 대지진으로 중국인은 칸 아픔을 치렀지만 이를 겪으며 중국은 원촨 대지진과 진짜 중화 문화, 중국인의 속내, 민족적 개성을 온전히 전 세계인에게 보여주었다. (......) 원촨 대지진 이후에는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서구 언론의 견제가 거의 사라졌다. 심지어 수많은 반(反)중국 단체 조직원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이들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선 역시 이전과 달라졌다. 이전에 서양인들은 반중국 인사가 중국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 넘치는 중국에 반기를 든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모두 가슴 아파하는 원촨 대지진과 뒤이어 열린 베이징 올림픽은 이처럼 생각지도 못하게 성공적인 무화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랑셴핑, <누가 중국 경제를 죽이는가> p148 中-

 

나는 개인적으로 지식인의 역할이란 '파수꾼'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회 조직일지라도 '그늘'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의 잘못을 찾고 고쳐 나가는 사람이 앞서가듯 국가도 마찬가지다. 발전과 성장의 정점에서 자화자찬에 빠진다면 더 이상의 진보는 기대할 수 없고, 심지어 얼마 못가 후퇴와 몰락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지식인의 날카로운 현실 비판 정신이야말로 어둠을 비춰주는 등대처럼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비춰준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의 지식인은 중국의 앞날을 비춰줄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가? 

 

저자인 랑셴핑 교수는 5000살이나 나이를 먹은 거대한 늙은 노인이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크게 기지개를 켜는 모습으로 현재 중국의 모습을 비유하고 있고, 더 나아가 이런 점들이 전세계인들에게는 '놀라움'과 함께 크나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확하게 지적할 수 있는 안목과 용기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마저도 티베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균형을 잃어 버렸다. 아니 균형을 잃어버린 '척'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의 많은 유명인이 유독 티베트에 많은 관심을 두는 까닭에 대해 많은 독자가 어리둥절해한다.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이들 유명인의 생각을 파헤쳐보겠다.

할 리우드가 제작한 <티베트에서의 칠 년(Seven Years in Tibet)>(영화 <잃어버린 지평선>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1997년에 브래드 피트가 주인공으로 참여했다_옮김이)의 남자 주인공은 하인리히 하러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 나치군이다. 영화에서 하러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당시엔느 어린 소년이었다)를 만나 그의 소중한 친구이자 제자가 된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위대한 달라이 라마가 잔혹하기 이를 데없는 나치와 친구가 된단 말인가?

이 상한 문제에 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상당히 흥미로운 신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아주 아주 오랜 옛날에 아틀란티스라는 당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 살고 있었다. 풍요로운 이 땅은 앞선 문영을 배출했지만 대지진을 겪은 후 아틀란티스 대륙은 바다 미틍로 가라앉았고 시퍼런 바닷물은 그들이 창조한 문명을 집어삼켰다. 당시 대지진과 해일의 손아귀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아틀란티스인은 노아의 방주를 타고 세상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한 무리는 오늘날의 유럽으로 향해 독일인이 되었고 나머지는 동야으로 가 티베트인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독일의 인종주의자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

독일인의 혈통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대의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영화 <잃어버린 지평선>을 통해 퍼져나간 혈통주의는 서양 각국에 강력한 티베트 콤플렉스를 심어주었다. 노아의 방주를 타고 동쪽과 서쪽으로 흩어진 아틀란티스인이 각각 지금의 티베트인, 그리고 독일인이라는 이야기가 서양 사회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가 서양을 방문할 때마다 각국의 지도자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서양의 티베트 콤플렉스다.

(......)

기본적으로 나는 티베트 문제를 다루는 현 중국 정부의 태도에 찬성한다. 위에서 설명한 이유를 핑계로 중국을 분열시키는 이들을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샤론 스톤 사태에서 중국 국민과 중국 정부가 보여준 행동을 기쁘게 생각한다. 중국이 하나로 단결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랑셴핑, <누가 중국 경제를 죽이는가> p200~206 中-

 

중국은 티베트 문제에 있어서 항상 주장하는 것이 중국을 분열시키려는 음모라고 한다.

누가 분열을 조장하는가? 샤론스톤과 리차드 기어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 등 유명인사들인가?

티베트인들에게 물어봐야 하리라. 

 

2008 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일어난 티베트 시위에 대한 진실이 원촨 대지진에 파묻혀버렸다는 사실은 언급하지도 않은 채, 샤론스톤이나 스티븐 스필버그 등 유명인사들의 '반중국적 발언'을 강하게 비난한 점은 형평성도 논거도 잃어버린 것으로 수출용이라기보다는 중국 국내용 '멘트'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저자가 홍콩인으로 일찍이 미국에서 유학을 했기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나치게 모든 것들을 미국과 단순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과 비교하여 더 나으면 진짜 좋은 것이요 더 나쁘면 정말 나쁜 것이라는 이원적 발상은 우리나라의 식자층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다른 아시아 국가의 내노라하는 식자층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끝으로, 중국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상인집단의 역사를 간추린 마지막 부분은 흥미로웠다. 이 부분만 따로 분리하여 한권의 책으로 엮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특히, 소금판매로 부를 거머쥔 산시의 '진상(晉商)'과 안휘이의 '휘상(徽商)', 그리고 일찍부터 해상무역으로 상인(商人)의 반열에 오른 저장의 '호주방(湖州幇)'과 '영파방(寧波幇)'의 흥망성쇠는 마치 우리나라의 대하역사소설인 '상도(商道)'의 어느 한 페이지를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나 한때 천하를 주름 잡았던 이들 거상(巨商)들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로 사라져갔다면, 월상(粤商)인 '조주방(潮州幇)'과 '광주방(廣州幇)'은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로 넘어온 진정한 승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세계 각국으로 뻗어나가 있는 화교의 대부분 이들 월상의 후예들이지 않은가.

 

 

비록,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 자체 역시 작금의 중국과 중국인을 이해할 수 있는 바로미터라 하겠다.  중국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금물인 것처럼 무분별한 거부감 역시 금물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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