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중국경제를 죽이는가 - 경제대국 중국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
랑셴핑 지음, 이지은 옮김 / 다산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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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랑셴핑은 현재 홍콩 중문대학 교수로, 4~5년 전부터 중화권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하며 널리 알려진 소위 중국의 '스타교수'다. 


한국에서도 2010년도에 <부자 중국, 가난한 중국인>을 비롯하여 저자의 책들이 대형 서점의 매대를 '점령'하면서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그 당시, 나 역시 <부자 중국, 가난한 중국인>을 읽으면서 '참신하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중국에도 있구나' 하고 깊은 인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내친김에 량셴핑 교수의 중국어 원서까지 구해 소장하고 있는 터이다.


하여, 우연히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그의 번역서 <누가 중국 경제를 죽이는가>와 <벼랑 끝에 선 중국 경제> 을 발견하곤 바로 빌려왔다. 이 두 권중, 먼저 출간된 <누가 중국 경제를 죽이는가>를 우선 읽었는데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책의 도입부분은  저자의 전매특허라고도 할 수 있는 중국 기업 문화에 대한 질타로 시작한다. 

중 국인이 추앙해마지 않는 삼국지의 제갈량이야말로 저(低)확률 경영의 전형이요, 요행심과 성과주의에 빠져 있는 중국 민족의 특징을 대변한다고 일갈한다. 중국인 못지않게 삼국지 속의 인물과 계락을 추종하는 분위기가 강한 한국 사회 역시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행심과 경박함 그리고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한다'며 중국의 기업과 기업가들을 '흠'잡던 랑셴핑은 갑자기 중국 정부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예를 들면, 원촨 대지진이야말로 베이징 올림픽보다 더 중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외국인들에게 이기적이고 돈만 아는 민족으로 인식되어 있던 중국인들이 원촨 대지진 구조 과정에서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민족이라는 점을 널리 알리게 되었단다.


'과연, 그런가...?'싶었다. 사실, 지진을 겪은 중국인들이 보여준 모습은 자연재해를 겪은 다른 민족들의 모습과 별반 큰 차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이 스스로를 높이 평가한 까닭은 무엇일까? 평소 남의 일에 개입하지 않기로 유명한 중국인들의 특성을 고려해보면 원촨 대지진때 둘 팔 걷고 나선 중국인들의 모습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고, 오히려 이 점이 외국인보다는 자국인들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원촨 대지진으로 중국인은 칸 아픔을 치렀지만 이를 겪으며 중국은 원촨 대지진과 진짜 중화 문화, 중국인의 속내, 민족적 개성을 온전히 전 세계인에게 보여주었다. (......) 원촨 대지진 이후에는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서구 언론의 견제가 거의 사라졌다. 심지어 수많은 반(反)중국 단체 조직원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이들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선 역시 이전과 달라졌다. 이전에 서양인들은 반중국 인사가 중국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 넘치는 중국에 반기를 든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모두 가슴 아파하는 원촨 대지진과 뒤이어 열린 베이징 올림픽은 이처럼 생각지도 못하게 성공적인 무화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랑셴핑, <누가 중국 경제를 죽이는가> p148 中-

 

나는 개인적으로 지식인의 역할이란 '파수꾼'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회 조직일지라도 '그늘'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의 잘못을 찾고 고쳐 나가는 사람이 앞서가듯 국가도 마찬가지다. 발전과 성장의 정점에서 자화자찬에 빠진다면 더 이상의 진보는 기대할 수 없고, 심지어 얼마 못가 후퇴와 몰락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지식인의 날카로운 현실 비판 정신이야말로 어둠을 비춰주는 등대처럼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비춰준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의 지식인은 중국의 앞날을 비춰줄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가? 

 

저자인 랑셴핑 교수는 5000살이나 나이를 먹은 거대한 늙은 노인이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크게 기지개를 켜는 모습으로 현재 중국의 모습을 비유하고 있고, 더 나아가 이런 점들이 전세계인들에게는 '놀라움'과 함께 크나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확하게 지적할 수 있는 안목과 용기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마저도 티베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균형을 잃어 버렸다. 아니 균형을 잃어버린 '척'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의 많은 유명인이 유독 티베트에 많은 관심을 두는 까닭에 대해 많은 독자가 어리둥절해한다.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이들 유명인의 생각을 파헤쳐보겠다.

할 리우드가 제작한 <티베트에서의 칠 년(Seven Years in Tibet)>(영화 <잃어버린 지평선>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1997년에 브래드 피트가 주인공으로 참여했다_옮김이)의 남자 주인공은 하인리히 하러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 나치군이다. 영화에서 하러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당시엔느 어린 소년이었다)를 만나 그의 소중한 친구이자 제자가 된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위대한 달라이 라마가 잔혹하기 이를 데없는 나치와 친구가 된단 말인가?

이 상한 문제에 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상당히 흥미로운 신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아주 아주 오랜 옛날에 아틀란티스라는 당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 살고 있었다. 풍요로운 이 땅은 앞선 문영을 배출했지만 대지진을 겪은 후 아틀란티스 대륙은 바다 미틍로 가라앉았고 시퍼런 바닷물은 그들이 창조한 문명을 집어삼켰다. 당시 대지진과 해일의 손아귀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아틀란티스인은 노아의 방주를 타고 세상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한 무리는 오늘날의 유럽으로 향해 독일인이 되었고 나머지는 동야으로 가 티베트인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독일의 인종주의자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

독일인의 혈통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대의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영화 <잃어버린 지평선>을 통해 퍼져나간 혈통주의는 서양 각국에 강력한 티베트 콤플렉스를 심어주었다. 노아의 방주를 타고 동쪽과 서쪽으로 흩어진 아틀란티스인이 각각 지금의 티베트인, 그리고 독일인이라는 이야기가 서양 사회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가 서양을 방문할 때마다 각국의 지도자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서양의 티베트 콤플렉스다.

(......)

기본적으로 나는 티베트 문제를 다루는 현 중국 정부의 태도에 찬성한다. 위에서 설명한 이유를 핑계로 중국을 분열시키는 이들을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샤론 스톤 사태에서 중국 국민과 중국 정부가 보여준 행동을 기쁘게 생각한다. 중국이 하나로 단결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랑셴핑, <누가 중국 경제를 죽이는가> p200~206 中-

 

중국은 티베트 문제에 있어서 항상 주장하는 것이 중국을 분열시키려는 음모라고 한다.

누가 분열을 조장하는가? 샤론스톤과 리차드 기어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 등 유명인사들인가?

티베트인들에게 물어봐야 하리라. 

 

2008 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일어난 티베트 시위에 대한 진실이 원촨 대지진에 파묻혀버렸다는 사실은 언급하지도 않은 채, 샤론스톤이나 스티븐 스필버그 등 유명인사들의 '반중국적 발언'을 강하게 비난한 점은 형평성도 논거도 잃어버린 것으로 수출용이라기보다는 중국 국내용 '멘트'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저자가 홍콩인으로 일찍이 미국에서 유학을 했기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나치게 모든 것들을 미국과 단순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과 비교하여 더 나으면 진짜 좋은 것이요 더 나쁘면 정말 나쁜 것이라는 이원적 발상은 우리나라의 식자층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다른 아시아 국가의 내노라하는 식자층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끝으로, 중국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상인집단의 역사를 간추린 마지막 부분은 흥미로웠다. 이 부분만 따로 분리하여 한권의 책으로 엮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특히, 소금판매로 부를 거머쥔 산시의 '진상(晉商)'과 안휘이의 '휘상(徽商)', 그리고 일찍부터 해상무역으로 상인(商人)의 반열에 오른 저장의 '호주방(湖州幇)'과 '영파방(寧波幇)'의 흥망성쇠는 마치 우리나라의 대하역사소설인 '상도(商道)'의 어느 한 페이지를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나 한때 천하를 주름 잡았던 이들 거상(巨商)들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로 사라져갔다면, 월상(粤商)인 '조주방(潮州幇)'과 '광주방(廣州幇)'은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로 넘어온 진정한 승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세계 각국으로 뻗어나가 있는 화교의 대부분 이들 월상의 후예들이지 않은가.

 

 

비록,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 자체 역시 작금의 중국과 중국인을 이해할 수 있는 바로미터라 하겠다.  중국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금물인 것처럼 무분별한 거부감 역시 금물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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