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느끼는 낙타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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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만 작가 싼마오의 수필집 <사하라 이야기> <흐느끼는 낙타> <허수아비 일기> 등 3권을 다 읽었다.

1943년에 태어나 20세때부터 54개국을 여행하고 스페인 남자 호세와 결혼하여 서사하라에 정착했다. 그후 스페인 식민국이었던 서사하라가 내전에 휘말리자 스페인령 카나리아제도로 이주한 그녀는 남편 호세를 잠수 사고로 잃기 전까지 그곳에서 생활했다.

 

이번에 번역 출판된 3권의 산문집은 대부분 그녀가 서사하라와 카나리아제도에 머물던 지난 70년대에 쓰여졌다.

상당히 긴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글들은 마치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신선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타고난 그녀만의 솔직담백함 때문이리라.

 

<사하라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서사하라에 머물때의 경험담이 집중적으로 담겨 있는 그녀의 첫번째 산문집이다.

사하라에서의 이국적인 삶과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그녀만의 자유분방한 글쓰기로 읽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두번째 산문집인 <흐느끼는 낙타>는 내용도 문장도 전작(前作)보다는 훨씬 더 성숙해진 싼마오를 만날 수 있다.

단순히 독특한 일상과 풍경을 그려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고 있다. 이는 아마도 그녀가 당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서사하라가 모로코와 모리타니 등 이웃국가들의 이익 쟁탈전으로 돌변하는 혼란한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리라. 이번에 읽은 싼마오의 책 세 권 중 가장 마음에 든다. 

 

세번째 작품 <허수아비 일기>는 카나리아 제도로 이주한 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름다운 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카나라아 제도는 그녀의 손끝에서 지상 낙원으로 그려진다. 물론 그곳에도 관광지의 떠들썩함과 은퇴한 노인들의 외로운 삶이 드리워져 있지만 말이다. 

 

 

70년대 후반.

대만으로 돌아와 글을 쓰고 문학 강의를 하던 그녀는 1991년 4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생전에 그녀가 남긴 글들은 대만을 넘어 중국 대륙까지 폭넓게 읽히면서, 2007년 루쉰, 조설근, 바진, 진융, 이백의 뒤를 이어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중국 작가 6위에 오르기도 했단다.

이는 작가로서의 능력이 높게 평가된 것이라기보다는 21세기에 접어들었어도 여전히 해외유학이나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중국 대륙인의 간절한 소망이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누구나 싼마오처럼 자유로운 삶을 꿈꾸지만 아무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녀의 글들은 유쾌하지만 왠지 모르게 스산함을 자아낸다.

마치 비극으로 치닫는 영화의 아름다운 한장면을 보는 것만 같다.  

 

남편 호세의 잠수 사고는 그녀의 마지막 산문집인 <허수아비 일기>가 한창 쓰여지던 바로 그 시기의 어느날 일어났을 것이다.

비극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고오고 있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싼마오와 호세는 해변가를 거닐고 들판을 산책하는가 하면 거동이 불편한 옆집 노인들을 도와주는 등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채워나간다. 

 

카나리아제도에서의 삶이 안정되어갈수록 그녀의 글들이 평온하고 아기자기해질수록 내 마음은 심하게 요동쳤다.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마치 내가 읽기를 멈추면 싼마오의 시간도 함께 멈출 것만 같았다.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하거나 혹은 다른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야만 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싼마오에게 들이닥친 비극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나도 삶은 계속되는 법.  

일곱살 연하인 남편 호세를 잃은 싼마오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십여년 남짓했던 고국에서의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까?

싼마오가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버린 후, 호세의 죽음과 그 이후의 자신의 삶에 관한 글들을 남겼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 이후 그녀의 삶에 대한 분명한 한가지 사실은 그녀가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너무도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녀는 스스로 사막을 선택한 이방인이 되었듯이, 다시 이방인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싼마오를 만나 가장 좋았던 건, 그녀가 그 당시 여성으로서는 흔치 않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다 갔다는 점이다.

그녀는 숨쉬고 있는 매순간을 다른 누구의 모습도 아닌,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았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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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은 따뜻하다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쥘리 마로 지음, 정혜용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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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란색은 따뜻하다, 2

쥘리 마로의 <파란색은 따뜻하다 (원제: Le bleu est une couleur chaude)>는 그래픽노블이다. 그래픽노블은 만화와 소설의 중간 단계에 해당되는 새로운 쟝르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상당히 낯설었다.

 

올해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Blue is the Warmest Color(한국명: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바로 쥘리 마로의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만든 것이란다. .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면서 국내에서도 화제를 불러모았던 작품인데, 의도와는 달리 파격적인 동성애 장면등으로 작품이 담아내고 있는 주제가 가려진 것 같아 아쉽다.  

 

작품은 클라망틴을 떠나본 후 그녀의 유언에 따라 엠마가 그녀의 일기를 읽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취한다.

일기는 1994년 10월12일 열다섯 생일날을 맞은 클라망틴이 외할머니로부터 일기장을 선물받으면서 시작된다.

 

고등학교에 막 입학한 사춘기 소녀의 재기발랄함과 호기심이 잔뜩 묻어난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같은 학교 3학년 남학생인 토마와 만나러 가는 날. 클라망틴은 머리를 온통 파란색으로 물들인 여성과 마주친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클라망틴은 스스로도 받아들일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이고 만다.

 

짓궂은 동성급우의 악의적인 키스가 발단이 되어 본의 아니게 레즈비언이라는 오해를 친구들로부터 받자 클라망틴은 거칠게 화를 낸다. 친구들에게 쏟아지는 그녀의 분노는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분노에 다름 아니었다. '남과 다르다는 걸 인식하지만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그녀의 독백이야말로 모든 성적소수자들이 첫번째로 마주하는 '장벽'이 아닐까 싶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이듬해 여름.

게이인 친구 발랑탕과 함께 가게 된 게이바에서 나와 우연히 찾아간 레즈바에서 클라망틴은 파란머리 여성과 두번째로 만나게 된다. 

파란머리의 여자는 자신을 엠마라고 소개한다.

그로부터 몇 일뒤.

엠마는 클라망틴의 학교 앞으로 그녀를 찾아하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깊은 호감을 확인하면서도 클라망틴은 엠마가 친구들 앞에 나타난 것에 대해 화를 내고 만다.

이로 인해 결국 엠마로부터 연락이 끊기자, 클라망틴은 초조, 불안해하다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인 발랑탕을 찾아가 한바탕 울음을 쏟는다.

이 장면을 보면서, '사랑 앞에서 우물쭈물하고 가슴 아파하는 건 이성애자나 동성애자나 똑같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 클라망틴이 엠마의 집으로 찾아가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걷잡을 수없이 깊어진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가면 갈수록 엠마의 파트너인 사빈의 존재가 두번째 '장벽'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엠마의 모습은 상당히 이기적으로 보였다. 사랑을 위해 모든 걸 감당하기로 한 클라망틴에 비해 엠마는 아무것도 포기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엠마에게 클라망틴은 갈망과 열정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형용할 길 없는 깊은 공허감에 빠진다. 

결국 클라망틴의 가족에게 두 사람의 관계가 발각(?)되면서 집에서 쫒겨난 클라망틴은 갑작스럽게 엠마와 함께 살게 된다.

 

그 사이 세월은 흐르고 흘러 클라망틴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날.

공적인 가치관을 중시 여기는 엠마로 인해 상처받고 갈등하던 클라망틴은 우연히 직장 남자동료와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분노한 엠마에 의해 거리로 쫒겨난다. 친구 발랑탕이 실연의 아픔으로 힘겨워하는 클라망틴을 보살피지만 왠지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폐동맥고혈압증을 앓고 있던 클라망틴은 남몰래 약물치료를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발랑탕의 중재로 다시 재외한 클라망틴과 엠마...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을 재확인한 것도 잠시, 클라망틴은 엠마의 곁을 영원히 떠나고 만다. 그러나 사랑만큼은 남겨둔 채...

 

내가 가지고 가는 건 나의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들, 대부분 너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야...

우리의 웃음, 우리의 사랑... 네 시선에 깃든 파란색,

온몸으로 부딛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널 사랑했던 청소년기,

그 시절 밤마다 내게 찾아들던 네 머리카락의 파란색.

나는 떠나고 너는 남는 지금, 제발, 부탁이야... 넌 살아야 해.

네게 남은 그 소중한 삶을 오롯이 살아. 그리고 마지막 침상에 누워 있는 지금의 나처럼,

후회하지도 말고, 너 자신과도 화해해.

네가 내게 주었던 삶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을 거야.

엠마...

영원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었지,

사랑은 무척 추상적이고 감지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야.

사랑은 우리에게 달려있어.

그걸 느끼고 겪는 건 우리니까.

만약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랑도 존재하지 않겠지.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잖아.

그러니 사랑도 그럴 수밖에 없어.

사랑은 불타오르고, 수명을 다하고, 산산조각나고, 우리를 조각내고, 다시 살아나...

그러니까 우리를 다시 살려내,

사랑은 아마도 영원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우리를,

사랑은 우리를 영원하게 만들어...

우리가 깨워 불러낸 사랑은 우리의 죽음을 넘어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간단다. 

 

 -쥘리 마로, <파란색은 따뜻하다>p154~155 中-

 

 

클라망틴...

그녀는 이렇게 떠나갔다....

엠마를 남겨둔 채...

자신의 사랑만은 그녀 곁에 남겨둔 채...

 

<가장 따뜻한 색, 블루

한편, 직접 보지 못한 영화는 원작과는 다소 다른 것 같다.

영화의 줄거리는 인터넷상에 공개된 예고편과 조각 영상들 그리고 개인블로그인 http://qwepoi2004.blog.me/60201578016 을 참조했다.

 

일단은 클라망틴의 이름이 아델로 바뀌었고, 그녀의 절친인 게이 발랑탕이 등장하지 않거나 비중이 크지 않은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한 클라망틴(아니, '아델'이지..)은 유치원선생님이 되었고, 화가가 된 엠마를 내조한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엠마는 아델을 홀로 남겨두고....

엠마가 없는 빈공간 속에서 아델은 홀로 공허함을 달래다가 돌발적으로 직장의 남자동료와 '바람'을 피우게 된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엠마에게 쫒겨난 아델...

엠마를 잃은 아니 사랑을 잃은 아델은 정처없이 거리를 헤매인다.

시간은 쉴새없이 흐르고 또 흘러,,, 아델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엠마는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하지만 여전히 엠마를 잊지 못하는 아델....

마지막 희망을 품고 푸른색 원피스 차림으로 찾아간 엠마의 전시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엠마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새로운 애인의 웃음 뿐.

 

아델은 이제 완벽히 혼자다.

쓸쓸히 뒤돌아서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사랑이 머물다 떠나간 자리의 스산함 그 자체다.

 

클라망틴의 죽음으로 끝나는 원작에 비해, 영화는 다소 희망적이다.

사랑이 떠나간 아델의 그 자리엔 언젠가는 새로운 사랑이 피어날 것이므로...

.

.

.

이성애자인 나에겐 분명 소화하기 힘든 작품이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한가지는,

칸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스티븐 스필버그가 말했다시피 '동성애가 아닌 보편적 사랑을 이야기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동성애에 편견을 갖고 있건 아니건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강렬한 첫만남, 끌림, 떨림, 질투, 열정, 이별 등등...보편적인 사랑의 감성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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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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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주제 사라마구의 <눈 뜬 자들의 도시(2006년)>은 흔히 <눈 먼 자들의 도시(1997년)> 후속작으로 알려져 있다.

 

모두 장님이 되었다가 시력을 회복한, 소위 '백색 질병'이 도시를 강타한지 4년이 흘렀다. 

사람들은 다시 볼 수 있게 되자, 눈이 멀었을 때의 참상들을 집단적 침묵 속에 가라앉혔다. 

 

침묵과 맞바꾼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어느날.

수도에서 실시된 지방 선거에서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발생한다. 

 

'유효표 숫자는 25%에도 미치지 못했다. 우익정당 13%로 1위를 차지했으며, 중도정당 9%, 좌익정당이 2.5%였다. 무효표나 기권은 거의 없었다. 나머지 표, 그러니까 전체 표의 70%이상이 모두 백지였다!'

 

권력의 총체인 '정부'는 혼란에 빠졌고, 투표 당일의 폭풍우 등 선거 결과를 날씨 탓으로 재빠르게 돌린 후, 일주일 뒤 다시 투표를 실시했다.

두번째 투표 결과를 총리가 발표한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오늘 우리나라 수도에서 실시된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익정당 8%, 중도정당 8%, 좌익정당 1%, 기권없음, 무효표 없음, 백지투표 83%. 총리는 말을 끊고 옆에 있던 잔으로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오늘의 투표가 지난 일요일에 드러난 경향의 확인인 동시에 악화임을 알기 때문에, 이 곤혹스러운 결과의 모든 원인을 진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데 만장일치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대통령 각하와 논의한 끝에 현 정부의 정통성에 문제가 제기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방금 실시된 선거는 지방선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오히려 자신의 절박하고 긴급한 의무가 지난 칠  일간의 비정상적 사태를 심도 있게 조사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이 사태에 경악한 증인인 동시에 대담한 참여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되어 몹시 안타깝지만, 우리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생활의 민주적이고 정상적인 상태에 잔혹한 타격을 준 이 백지투표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닙니다, 이 백지투표는 이 도시의 백 명의 선거인 당 여든세 명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그 비애국적인 손으로 백지를 투표함에 넣었습니다. 총리는 다시 물을 마셨다.


-주제 사라마구, <눈 뜬 자들의 도시> p43-

 

도시의 집단적(?)인 백지 투표에 두려움을 느낀 정부는 도시 전체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계엄령이 내려진지 얼마 안 되어, 도심 한곳에서 원인 모를(?)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한다. 

정부는 도시를 지탱하던 치안, 보건 등등의 서비스가 사라져 시민들이 공황상태에 빠지면, 백지 투표 사태를 주도한 인물이나 실체가 들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백지 투표를 불러온 원인이 밝혀지지 않자, 정부는 마치 적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포에 질려 총알을 난사하는 군인들처럼 수도를 다른 도시로 옮기고 '탈출'을 시도한다.

새벽에 도시를 몰래 빠져나가려는 정부측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대로변 건물과 빌딩 곳곳에서 하나둘씩 전등이 커진다. 마치 성탄 트리가 밝혀지듯 온 도시가 불빛으로 반짝거렸다.

정부의 탈출행렬을 만류하고 진상을 낱낱히 고백할 것으로 생각했던 정부 관계자들은 아연실색하고 만다. 그들은 자신들이 떠난 후, 한때는 정부의 수도였던 도시를 폐쇄시키고 수도 시민들의 탈출을 엄격하게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과 총리는 4년전에 일어났던 '백지 실명'사태와 이번 '백지 투표' 사태를 연관시키고 관련자 수색에 나선다.

 

 

우리는 참으로 별난 나라에 살고 있구료, 이 행성의 다른 곳에서는 일어난 적도 없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니 말이요. 하지만 그런 경우가 우리나라에 처음은 아닙니다, 굳이 상기시켜 들릴 필요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각하, 내 말이 바로 그거요, 총리. 하지만 두 사건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그렇겠지, 전에는 백 색 실명 전염병이었고 이번에는 백지투표라는 전염병이니까. 우리는 첫 번째 전염병의 이유도 아직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이번 것도 마찬가지잖소. 밝혀낼 것입니다, 각하, 밝혀내겠습니다. 첫 번째 경우에도 벽에 부딪혔는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각하, 믿음이 근본입니다. 뭐에, 누구한테 믿음을 가지라는 거요. 민주적 제도에 믿음을 가져야지요.

(......)

정부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앉아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아직 우리 탄약이 바닥난 게 아닙니다, 우리 화살통에는 아직 화살이 있습니다. 총리 과녁을 제대로 보고 있기를 바랄 뿐이오. 적만 눈에 보이면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가 아니오, 우리는 적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 않소, 누군지도 모르지 않소. 나타날 겁니다, 각하,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영원히 숨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주제 사라마구, <눈 뜬 자들의 도시> p112~113-

 

쉼표와 마침표로만 이어지는 주제 사라마구의 문체는 독자들로 하여금 일말의 숨돌리기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긴장하지 않으면 이야기의 끈을 놓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바짝 긴장한 채, 간신히 그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어찔한 현기증이 찾아온다.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어디선가 많이 일어난 듯한...

이런 걸, '데자뷰'라고 한다지...

 

 

주제 사라마구는 언뜻 말도 안되는 상황을 설정해 놓고는 오싹할 정도로 현실 정부를 재현해 낸다.

이는 아마도 평생동안 반정부적인 입장을 고수해왔던 그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불법 공산주의 정당에 몸담고 반정부투쟁을 실천에 옮긴 바 있으며, 열렬한 공산주의 지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주제 사라마구의 전작,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대중연대를 통한 희망을 보았던 사람들은 그 후속작인 <눈 뜬 자들의 도시>에서 절망을 마주하게 된다..

 

백색 질병이 난무하던 시절, 눈을 뜬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정부는 경정, 겸감, 경사로 구성된 3인조 특별공작팀을 수도로 보낸다. 그들의 임무는 의사의 아내와 함께 살아남았던 6인을 특별 감시하고 심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작팀의 감시와 심문 속에서도 특별한 혐의점은 발견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혐의유무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정도의 상태에 이르면, 이젠 혐의점이 없어도 혐의가 있는 것이며, 죄란 만들어 내면 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언제나 희생양이므로...

 

의사가 끼어들려 하자 부인이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좋아요, 그럼 이 얘기를 해주세요, 이건 비밀이 아닐 테니까, 사년 전에 내가 눈 이 멀었거나 멀지 않았다는 것에 경찰이 왜 관심을 가지는 거죠. 만일 부인이 다른 모든 사람처럼 눈이 멀었다면, 나 자신처럼 눈이 멀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지 않을 거요, 눈이 멀지 않은 게 범죄인가요, 여자가 물었다. 아니, 눈이 멀지 않은 건 예전에도 범죄가 아니었고 지금도 절대 범죄일 수 없소, 물론, 부인이 그런 말을 했으니까 이야기하지만, 눈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를 수는 있는 거지요, 범죄요, 살인, 여자는 조언을 구하듯이 남편을 흘끗 보더니 다시 얼른 경정을 보며 말했다, 그래요, 맞아요, 나는 한 남자를 죽였어요, 여자는 더 말을 하지 않고, 경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기다렸다. 경정은 수첩에 뭘 쓰는 척했지만, 그저 시간을 벌려는 행동일 뿐이었다.

-주제 사라마구, <눈 뜬 자들의 도시> p302-

 

경정은 양심을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의 임무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의사의 아내는 비록 살인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 상대는 눈 먼 여자들을 강제 추행한, 죽어 마땅한 '짐승'이었다는 걸 잘 알기에 그녀의 살인행위는 무죄이며 오히려 칭송받아야 한다는 걸, 그의 양심이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달받은 작전의 의미와 불러올 결과 또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의사의 아내를 보호하고 지켜주려 한다. 그런 행동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수도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여기서 독자들은 언뜻 스쳐지나가는 '희망의 빛'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의사의 아내는 경정을 죽인 하얀 점이 박힌 파란 타이를 맨 남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두 발은 그녀의 몸에 박혔고, 마지막 한발은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부터 그녀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하얀 눈물을 핥아주던 개가 맞았다.

 

한 눈 먼 남자가 물었다, 무슨 소리 들었나, 총소리가 세 발 들렸는데, 다른 눈먼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개 우는 소리도 들리던데, 지금은 그쳤어, 세 번째 총소리 때문일 거야. 잘 됐군,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싫어.

-주제 사라마구, <눈 뜬 자들의 도시> p428-

 

'짖자, 개가 말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작품은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싫어'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작가는 잔인하게도 희망의 빛을 꺼뜨린 것도 모자라, 마지막 불씨까지 없애버린다. 깨끗이...

그나마 '짖자'던, 개마저 죽여버린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눈 뜬 자들의 도시>의 사람들은 의사의 아내가 죽고 짖는 개가 죽어서 눈이 먼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은 이미 총성이 울리기 전에 멀어 있었다. 주제 사라마구는 그들이(인간이) '또 다시' 눈이 멀었기 때문에 의사의 안내와 짖는 개가 죽은 것임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만약, 사람들이 다시 눈이 멀지 않았더라면 의사의 아내와 짖는 개는 죽지 않았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일찍이 중국의 현대 문학가 중 하나인 라오셔(老舍)의 단편 중 <개(狗)>라는 작품이 있다.

개의 입장에서 사람들로부터 받는 야박한 대우를 기록한 작품으로, 이기적인 세상인심을 풍자한 작품이다.

'개'란 일찍부터 사람과 가장 가까이 있는 동물이지만, 또한 가장 험한 욕이 되기도 한다. 

사람에게 '개'같다란 표현은 다름 아닌 욕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개보다도 못한....'이란 말은 더욱 심한 언사라 하겠다. 

 

이제, 주제 사라마구가 두 편의 작품 속에 개를 등장시킨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그는 개의 죽음을 단순히 '개죽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개의 죽음을 알리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세상을 향해 '짖어 대는 개'가 더 이상 없는 세상에서, '개죽음'은 더욱 더 은밀하고 빈번하게 일어날 것임을 경고하고자 한 건 아니었을까.


 

끝으로, 작가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해마지 않던 정부에 의한 통제와 억압이 공산주의사회에서 일어난 것을 직접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마지막 순간까지 공산주의자로 남았을까? 

젊은 시절의 이상을 생의 마지막까지 지켜내고자했던 개인적 열정의 산물인지....

아니면, 바뀐 세상과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왕년(往年)의 열정'에만 매달려 노년을 보내는 늙은자의 고집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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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주제 사라마구는 199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출신 작가다.

선과 악 사이에서 방황하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로 유명한 그는, 자신의 대표작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08년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작가의 주제의식이 영화의 충격적인 장면들 속에 가려져 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오감을 자극하는 더럽고 추한 영화 장면들 속에서 유일하게 눈 뜬 자인 의사 아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춘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만큼 많지 않으리라.

나 는 영화를 보지 않고 작품을 읽었을 따름이지만 읽는 내내 어쩔 수 없이 머리속으로 그려지는 영상만으로도 저절로 눈이 감기고 고개가 돌려졌다. 게다가 문장부호를 생략한채 끊임없이 이어지는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사라마구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 러나 사려 깊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배반해 버리고, 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부해 온 도덕적 양심은 지금도 존재하고 또 전에도 늘 존재해 왔다. 그것은 영혼이란 것이 혼란스러운 명제로 전락해 버린 제사기(지질 시대의 최후기로, 현대를 포함하는 시대:옮긴이)의 철학자들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세월이 흐르고, 더불어 사회도 진화하고 유전자도 바뀌면서, 우리의 양심은 결국 피의 색깔과 눈물의 소금기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우리의 눈은 내부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눈은 우리가 입으로는 부정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관찰에 덧붙여, 특수한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그 특수한 상황이란, 단순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어떤 악한 행동을 저질렀을때 생기는 가책이라는 것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온갖 종류의 공포와 뒤섞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잘못을 얼버무리려 하는 사람은 결국, 가혹하게도, 자신이 받아 마땅한 벌의 두배를 받게 된다. -p25-



어느날.

서 른 여덟의 신체 건강한  남자가 차를 운전하다가 갑자기 두 눈이 멀어 버린다. 그의 눈앞에는 순식간에 마치 우유 속에 빠진 것처럼 '백색' 세상만이 펼쳐졌다. 마치 전염병처럼 눈먼 사람과 접촉했던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백색의 세상'에 갇혀버리자, 당국은 '백색 질병'이라 칭하고 눈먼 자들과 눈멀 자들을 버려진 정신병원에 가둬 버린다.


처음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에는 식욕과 성욕 그리고 탐욕만 남게 된 눈먼 자들은 양심의 눈까지 멀게 된다.

오물과 배설물로 뒤범벅이 된 공간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자인 의사의 아내는 곧 작가의 투영체라 하겠다. 사라마구는 그녀의 눈과 입 그리고 손(행동)을 통해 눈 먼 세상을 고발하고 대중을 일깨운다.


나 도 지치기 시작했어요, 때로는 나도 눈이 멀었으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으면, 다른 사람들이 지고 있는 의무 이상을 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어요. 우리는 당신한테 의지하는 데 익숙해졌어, 당신이 없다면, 우리는 한 번 더 눈이 머는 꼴이 될 거야, 당신 눈 덕분에 우리는 그래도 눈이 좀 덜 먼 셈이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볼게요, 그 이상은 약속 못해요. -p338



눈 먼 자들만 있는 세계에서 눈 뜬 자는 우월한 위치에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능력을 이용하여 눈 먼 자들을 착취하고 심지어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눈 먼 자들을 돕기로 마음 먹는다.

볼 수 있다는 능력을 볼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사용한다.

이기적인 인간의 또 다른 이면에는 바로 이와 같은 이타성이 자리하며, 바로 여기에서 '희망'이라 불리우는 가냘픈 싹이 자라난다. 


어쩌면 의사의 아내 역시 눈이 멀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본 것들은 육체적인 눈에 비친 '상(像)'이 아니라 마음, 즉 양심의 눈에 비친 '상(像)' 일 수도 있으므로...


갑작스럽게 아무 이유 없이 눈이 안 보였던 사람들은 어느날 갑자기 눈이 보이게 된다.

다시 눈 뜬 세상으로 나온 그들이 마주한 세상은 어떤 곳일까?

당연히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호수와 웃음과 서로에 대한 배려가 넘치는 세상이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의 사의 아내는 일어나 창으로 갔다. 그녀는 쓰레기로 가득 찬 거리,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며 노래부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어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내 차례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p359




'눈 먼 자들의 세상'이 끝나자, '눈 뜬 자들의 도시'가 펼쳐진다.


거장은 9년간의 시차를 두고 <눈 뜬 자들의 도시>로 우리를 안내한다. 


고통스럽고 두렵지만 그의 안내를 차마 뿌리칠 수 없다.

그건, 볼 수 있지만 보지 않으려는 것과 다름 아닌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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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그의 이름 석자를 들어 알게 된 건 십년하고도 몇 년이나 더 전의 일이었지만 난 그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깎지 않은 수염과 봉두난발한 헤어스타일하며 제멋대로 껴입었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옷차림 등등...

노숙자인지 원시인인지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는 그에게 사람들 특히 젊은 것(?)들이 '총수'라는 존칭까지 붙여가며 칭송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런 그가 최근 불쑥 내 삶에 들어왔다.

십여년이 넘도록 잊혀졌던 그의 이름이 어떻게 내 머리속에 떠올랐으며, 검색창에 그 이름을 입력하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모르겠다.

 


간단한 프로필-그는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다-과 함께 그가 쓴 책들이 나왔다.

그의 책, <건투를 빈다>는 과거 몇 년동안 인터넷 방송을 통해 해온 '고민&상담'들 중, 일부를 추려 묶은 청춘상담서라 하겠다. 2008년 겨울에 출판되었으니 아이러니컬하게도 청춘상담서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보다도 무려 2년이나 먼저 나온 셈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김어준과 김난도 달라도 너무 달라 보인(였)다.

한쪽이 엄친아 출신 교수라면 다른 한쪽은 문제아 출신 소장파 유명인사로 분류될 수 있겠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특별히(?) 엄친아/엄친딸들을 위한 인생안내서라면, <건투를 빈다>는 엄친아/엄친딸이 될 수 없었던 젊은 '루저들'을 위한 인생상담서라고 하겠다. 또한, 전자가 교육적 목적에 충실한 감동적인 책이라면, 비속어가 아슬아슬하게 난무하는 후자는 불량도서에 가깝다.


우선, 10대에게 고하는 그의 불량스런 외침부터 들어보자.


두발 자유화. 이 쌍팔 년도 이슈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란다. 참, 후지다. 바리깡으로 학생 관리하겠다는 발상이 여전히 유효한 교육정책이 된다는 거, 정말 후지다. (......) 해서 결심했다. 사실대로 고백하기로, 10대들, 지금부터 잘 들어주시라. 이거 어른들끼리 암묵적 합의로 당신들에겐 그 접근을 원천 차단해온 기밀 되겠다. 먼저 두발과 공부의 상관관계, 한마디로, 없다. 학생이 공부나 하지 머릴 왜 길러, 왜 못 길러, 다리 털, 겨드랑이 털, 꼬추 털과는 다르게 두개골 털에는 DHA함유되어 있나. 그냥 이유는 털이 아니라 통제권 문제다. 머리털 내주면 쥐고 있던 학생 통제권 상실할까 두려운 거다. 선생님 자신들도 그 방식으로 육성됐다. 물론 자신들도 싫어했다. 하지만 편하다. 통제에 용이하니까. (......) 말 나온 김에 딴것도 고백하자. 공부 열심히 하면 훌륭한 사람된다? 거짓말이다. 우리나라 공교육 열심히 따라가면 시험 잘 치는 사람된다. 그럼 시험 잘 치면 훌륭한 사람 되나? 아니다. 시험 잘 치면 점수 잘 나온다. 하지만 점수와 훌륭한 사람과의 상관관계, 없다. 단, 점수 높으면 연봉 높을 확률, 상대적으로 높다. 그건 맞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또 아니다. 돈 버는 능력과 공부 능력, 별개다. 그럼 왜 어른들이 공부 공부 하나. 불안해서. 공부 외에 어떻게 훌륭한 사람 되는 건지 어른들도 모르니까.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지, 어른들 모른다. 물론 공부 잘 하면 좋다. 유용하다. 하지만 공부와 훌륭한 사람, 관계 없다.


-김어준, <건투를 빈다> p42~43 中-



'어헛! 어디서 감히... 어른들끼리의 비밀을 폭로하고 난리야! 애들 버릇 나빠지게스리...'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고백부터 하자면, 나는 기성세대이고 뼛속 깊이 '모범생 DNA'가 새겨져 있으니까...

 

그러나 인정할 건 하기로 한다.

그의 말, 하나도 틀리지 않다. 다 맞다. 그러나 10대란 아직 머리도 마음도 다 자라지 않은 불안전한 존재로써 10대시절의 선택은 성인이 된 후 후회할 가능성 90% 넘는다는 사실 또한 알려줬어야 한다.

 

그리고 10대의 김어준 역시 모범생에 우등생 출신이었을 개연성 심히 높아보인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2학년까지 미국에서 보냈으며, S대를 목표로 삼수를 했던 그의 '과거'는 그 당시 세대로서는 소수의 특권층만 누릴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눈에는 이십대 사이에 불어닥친 '난도 열풍' 못지 않게, 십대들의 '총수님 추앙' 또한 위험해 보인다. 

 

사실, <건투를 빈다>는 십대가 아닌, 20세 이상 40세 미만 성인을 대상으로 한다. 김어준의 열성팬들이 주로 집결해 있는 연령층으로, 이들이 직면한 고민에 대한 그의 답변은 솔직하고 멋지다. 특히, 원시인(?)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깊이 있는 통찰력과 지성미가 돋보인다.


삶을 장악하라!


키 때문에 결혼을 못 할지도 모른다고? 아니지. 문제의 본질은 뼈의 길이가 아니라, 그로 인한 자존심의 결여다. 본능적으로 최고 우성 유전자를 판독해내는 여자들이 기가 막히게 구분해내는 건, 기장이 아니라, 바로 그 결여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스스로를 농담거리로 만들어버릴 만큼 견고하고 대범한 자기인식은, 그 자체로, 졸라 섹시하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당신을 진정 안 섹시하게 만드는 범인은 뼈의 길이가 아니라, 그로 인해 스스로 주눅 드는, 당신의 자기인식인 게다.-p59~60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한다지만 당신은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이다. 그러는 거 효도라 착각 마시라. 효도 아니다. 공포다. 부모 낙담시키고, 기대 저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하여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분리되는 데 대한 공포. -p125

가족 구성원 간 과잉 감정은 이 자폐적이고 방어적인 가족주의의 필연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과도하게 기대하고 요구하며 또 그로 인해 과도하게 상처받고 실망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정도 이상의 감정 비용을 지불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바가지를 쓰고 있다고 여긴다. 모두가 모두에게 그렇게 채무관계로 결박되어 있다. 명절은 이제 씨족 행사도, 집단 귀향도 아니다. 평소 마땅한 분량의 가족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자들이 그 죄의식을 탕감받으러 가는 날. 그러니 길이 막혀 다행이다. 부모는 신분이 아니라 실체다. 가족극의 배역이 아니라 구체적인 여자와 남자다. 그들은 숭고한 효의 대상이 아니라 애틋한 관심의 대상이다. -p109


정말 비겁한 건 자신이 비겁하다는 걸 인정 못하는 거다.


삶과 미래가 실천과 계획에 의해 대부분 결정 난다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어느날 갑자기 닥쳐온 우연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선택으로 인한 비용과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겠다면, 자신이 그 정도로 비겁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란 걸 스스로 인정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감수할 의사와 용기가 있다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쁜 인간은 아니다. 그러나 선택에 마땅히 따르는 이러한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는 경우 부지기수다. 핑계를찾고 이유를 찾는다.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결정적 차이는 거기서 만들어진다. 그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갖가지 거짓과 사기의 결과는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좀먹는다. -p138~139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기꺼이 감당할 마음가짐이 먼저다.


진짜 문제는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 결과를 감당하는게 두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감당하기 싫어 아예 선택 자체를 피해버린다. (...)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후회될 땐 잘못된 선택을 되돌아볼 때가 아니라 그때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을 때다.-p223~224


단언컨데, 그의 지적인 능력은 탄탄한 정규교육과 폭넓은 독서 그리고 배낭여행 덕분이었을 것이다.  

반면, 그에게 다소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균형 감각'과 '표현 방식'이 아닐까 싶다.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다. 다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이 몸이 거부할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젊은이들에게 '그냥 마음이 가는대로 선택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면 그것이 곧 책임이다.'식의 솔루션은 마음의 갈등과 번민, 그리고 후회, 반성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해지는 인간의 정신적 성장과정을 지나치게 소홀히 다룰 소지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솔직한 표현 방식은 높이 살만 하나, 지나치면 이 또한 '예의'에서 벗어난다.

'인간에 대한 예의'란 상대방의 옳고 그름이나 도덕적 성품의 높낮이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상대방이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보여주는 태도, 즉 예의인 것이다. 내가 싫어도, 나와 맞지 않아도,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것! 그게 바로 예의다. 인간에 대한 예의...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젊은 세대는 김어준을 '총수님! 총수님!' 하고 따르고, 기성세대들은 '또라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그 이유를 말이다. 

 

일탈과 반항을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젊은 세대의 특징이 그의 무교양(무례) 및 탈규범적 생활방식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한편, 욕망과 책임 사이에서 방황하던 2,30대를 거쳐 40대에 도달한 기성세대는 욕망 대신 책임을 선택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들은 절제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 그들에게 자유란 곧 안정이다.  이런 기성세대들에게 김어준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또 한명의 '피터팬 증후군' 환자로 보일 따름이다. 

 

그는 자유로워보인다.

하고 싶은 말 다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그런 그에게 꼭 한마디만 하련다.

'최대한 본능에 충실하자'는 본능지상주의는, 사실 본능을 최대한 억제하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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