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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대가의 첫걸음이란...? 이런 것일까...
우선 이 작품은 에밀 졸라의 대표작이 아니다.
에밀 졸라가 누구던가?
플로베르의 사실주의를 이어받아 자연주의 사조를 만들어낸 작가이자, 양심적 지식인이요 행동하는 지성인의 표상과 같은 인물이지 않은가.
<테레즈 라캥>은 바로 에밀 졸라가 스물 여섯이던 1866년도에 완성한 첫번째 장편으로, 출간되자마자 평론가들의 악평에
시달렸지만 사실적 글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과학적 글쓰기(자연주의)를 시도하고 완성한 첫작품으로 추앙받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훨씬 더 전에 쓰여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세월의 간극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과 적나라한 표현들로 불편했던 글읽기가 중반을 거쳐 후반부로 갈수록 대가의 진가가 들어나는데.... 정말이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테레즈 라캥은 고모인 라캥 부인의 손에서 사촌 카미유와 함께 자란다. 성인이 된 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부부가 된다.
얼마간의 자산을 갖고 있던 라캥 부인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온갖 정성을 다 들여 키운 병약한 아들 카미유를 테레즈가 자신을 대신하여
정성스럽게 돌봐주는 것이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에서 도시로 이전하여 뒷골목에서 조그마한 잡화상을 꾸려나간다.
병약하고 매력없는 남편과 집안 전체를 감싸고 있는 권태의 그림자에 둘러싸여 젊음을 소진하고 있던 테레즈에게 한 남자가 나타난다. 다름
아닌, 남편의 어린시절 친구였던 로랑이다. 테레즈의 눈에는 건강하고 멋지게만 보이는 로랑은 사실은 게으름뱅이에다가 동물적인 욕망의 소유자에
무위도식만을 꿈꾸는 '한량'이요, '건달'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테레즈와 로랑은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게 되고, 결국은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간다.
로랑은 한 손으로 카미유의 목을 죄면서 여전히 카미유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다른 한 손으로 카미유를 배에서 들어올렸다.
카미유는 로앙의 힘센 팔 끝에서 마치 어린애처럼 공중에 들려 있었다. 그런데 잠시 로랑이 목을 내놓고 머리를 숙이고 있자 분노와 공포로 미쳐
있던 카미유는 몸을 비틀면서 입을 벌리더니 그 목을 꽉 깨물었다. 살인자가 고통의 고함을 참으면서 카미유를 냅다 강물에 던졌을 때 카미유의
이에는 로랑의 살점이 붙어 있었다.
-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 p120-
두 사람은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라자 아예 친구이자 남편인 카미유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는, 라캥 부인의 재산을 차지할 속셈으로
결혼까지 하게 된다.
뭐...
여기까지는 겉으로 들어나지만 않을 뿐,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서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리고 천륜을 저버린 이 두 사람이
죄과를 치른다는 이야기 역시 흔하디 흔하여 놀라운 일도 아니다.
내 마음을 송두리채 뒤흔들어 놓은 건, 그 다음부터다.
마침내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카미유가 제거되고, 살인자들은 의심을 받기는 커녕 카미유 친모인 라캥부인의 전폭적인 믿음과 사랑 속에서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이제 라캥부인의 재산 또한 테레즈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일이 뜻대로 진행되어 가는 이 마당에, 쾌재를 불러도 부족할 마당에 이 두 사람은 서로를 멀리하고 원망하고 증오하면서 불행의 나락으로 거침없이 굴러 떨어진다.
어느 곳에나, 카미유는 따라 다녔다.
잠을 자는 부부의 침대 한가운데에도...
목요일 저녁 만찬 자리에도...
철도국을 그만둔 로랑이 차린 아뜨리에에도...
로랑은 두 주일 넘게 어떻게 하면 카미유를 다시 죽일 수 있을지 생각했다. 물에 던졌는데도 아주 죽어버리지 않고 매일 밤 그들의 침대로
와서 눕곤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살인을 끝내고 그들의 사랑에 마음 편히 취하려는 순간, 희생자는 다시 살아나서 그들의 잠자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테레즈는 과부가 아니었다. 테레즈가 죽은 자를 남편으로 갖고 있는 한, 로랑은 그녀의 두번째 남편일 뿐이었다.
-p234~235-
죽은 자는 천사도 되고 성모도 되고 어린이도 되고 산적도 되었다. 이번에는 만화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그는 특징을 과장해서 괴상한 윤곽을
그리고 기괴한 얼굴들을 꾸며냈다. 하지만 죽은 자의 독특한 초상화를 더욱 무섭게 만들어놓을 따름이었다. 그는 마침내 개, 고양이를 그려보았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도 어딘지 카미유를 닮아 있었다. -p264-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라캥 부인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두 사람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다가 중풍에 걸리고 만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녀는 그저 두 눈만 움직일 뿐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두 사람은 서로 죽일 듯이 싸웠고...서서히 미쳐갔다...
그리고, 마침내...
두려움과 고통에 울부짖던 테레즈와 로랑은 라캥 부인 앞에서 사죄를 하고 서로의 죄를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아, 라캥 부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이 부분에서 두 눈을 꼭 감고 말았다.
두사람이 저지른 죄 중,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죄는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니요 심지어 카미유를 물에 빠뜨려 죽인 죄도 아닌, 바로 라캥
부인에게 그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평생 이렇게 심한 절망 속에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끔찍한 진실은 마치 번개처럼 부인의 눈을 불태우고, 그 마음속에 벼락같은 타격을
주었다. (...) 분노와 고통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그녀의 육체 속에서 사납게 요동치고 있었다. (...) 마음속에서 일어난 화는 더욱
무시무시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왈칵 무너진 것 같았다. 그녀의 전 생애는 황폐하게 되고, 모든 애정과 선의와 헌신은 난폭하게 뒤집혀 발길에
짓밟혔다. 그녀는 따듯하고 애정에 싸인 생활을 해왔었다. 그런데 삶의 막바지에, 조용하고 행복한 생활의 믿음을 가지고 무덤 속으로 떠나려 할
때, 단 하나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모든 것이 거짓이며, 모든 것이 죄악이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찢어진 베일을 통해서, 자기가 보았다고 생각했던
사랑과 우정의 피아에서 피아 치욕의 흉악한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 만일 저주할 수만 있었더라면 그녀는 하느림을 저주했을 것이다. 하는님은
그녀를 곰살궂고 착한 소녀처럼 다루고, 조용한 기쁨의 거짓된 캔버스로 그녀의 눈을 즐겁게 해주면서 육십 년 이상 속여왔던 것이다.
(...)
하느님은 나빴다.
하느님은 진작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천진스럽게 눈을 감은 채 죽도록 내버려두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을 부정하고
우정을 부정하고 희생하는 마음을 부정하면서 죽어갈 수밖에 없다. 남은 것은 살인과 욕정뿐이었다.
-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 p274~276 中-
테레즈와 로랑은 왜 이랬을까?
왜 끝까지 부인을 속이지 못했을까?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은 '죄 사함을 받고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겠다'는 이기심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지극히
'인간'다웠다. 이기적인 지극히 이기적인...
자신들의 결혼이 살인의 숙명적 벌이라는 것을 내놓고 인정하기는 싫었다. 그들은 자기들 눈앞에
전개도는 생활을, 진실을 외치는 마음속의 목소리를 듣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폭발 속에서, 자신들의 고뇌의 깊이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게 했으나 결국 황폐하고 견딜 수 없는 존재만을 남긴, 그들 본성이 가진 열정적인 이기심만은 분간할 수 있었다. -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 p288~289 中-
그나마 위안이라면, 라캥 부인이 보는 앞에서 이 두 살인자들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뿐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을 통해 받은 감동이 생각보다 강렬하고 깊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감히 이 작품을 감추어진 '히든고전명작'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한다.
대가의 이름에 걸맞는 걸작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라.
+)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읽게 된 신형철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에서 그는 에밀 졸라의 이 작품을 두고
이렇게 일갈했다.
본능, 충동, 욕망, 사랑. 언뜻 비슷해 보이는 개념들입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개념들끼리는 서로 겹치는 데가 있어 보입니다. 본능이나
충동이나, 충동이나 욕망이나, 욕망이나 사랑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그러나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을 비교해보면 선뜻 그게 그거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본능과 사랑은 썩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네 가지를 일종의 스펙트럼으로 간주해보면 어떨까요. 빨강에서 보라까지, 본능에서
사랑까지. 인간이라는 우주 안에는 저 네 가지 종류의 정념(적당한 표현은 아니지만 마땅한 게 없네요)이 일종의 스펙트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러 헷갈립니다.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 정념은 본능일까, 충동일까, 욕망일까, 사랑일까. 헷갈려서 불안하고, 불안해서
실수하고, 실수해서 후회합니다. (...)
테레즈와 로랑이야말로 그 정념의 스펙트럼에서 길을 잃고 만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저 정념들의 논리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본능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늘 이렇게 해왔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한다." 욕망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이것은 금지돼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할 것이다." 충동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나는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을 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테레즈와 로랑은 금지된 관계였기 때문에 그토록 뜨거운 욕망을 가질 수 있었고, 금기가 사라진 순간 욕망을 잃어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가학, 피학 충동뿐입니다. 사랑이라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욕망이었고,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욕망의 버팀목이었으며, 버팀목이 사라진 자리에는 맹목적인 충동만이 남았습니다. 이것이 이 연애의 전말기입니다.
-신형철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399~341
中-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바로 에밀 졸라의 이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 또한 새롭게 알게 되었다.
테레즈의 남편 카미유을 로랑이 물에 빠뜨려 죽일 때, 카미유에게 목을 물어 뜯기게 되고...
테레즈는 로랑의 이 '상처' 부위를 애무하며 희열을 느낀다.
이에 대한 신형철의 말을 들어보자.
이 대목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테레즈가 로랑의 목덜미에 마치 "뜨거운 쇠를 대는 것"처럼 키스를 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을 하고 있다"라는 충동의 논리를 따르면서 말이지요. 목덜미라니, 뱀파이어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신형철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399~341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