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치유는 너다 - 인생에, 사랑에, 관계에 아직은 서툰 당신을 위한 삶의 수업
김재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김재진 시인의 시집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때』를 빌리면서 충동적(?)으로 손이 간 책이다.

흠...

'역시 시인은 시로 말하는 거다.'

 

원래부터 '평온이니... 치유니...' 하는 류의 책들은 지나치게 종교적이거나 인위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더랬지...

 

이 책 역시 그런 거 같다.

 

그냥, 요즘 계절 탓(?)도 있고... 해서 읽긴 읽었다만 그냥 시집만 볼 걸... 그랬다.

이건, 아마도 전적으로 내 잘못이 크다 하겠다.  적당히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아는 만큼 아는 나로선... 이미 다 알고 있거나 한번쯤은 가슴 설레였던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몇 문장들은 옮겨 적고 싶을 만큼 빼어났음은 인정해야겠지...

 

 

 

 

성공하려면 성공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며, 행복하려면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자주 불행한 길을 택한다. 모순된 말이지만, 더 많이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이 불행해져도 괜찮다고 믿는 것이다. p35

 

사랑은 때론 최선을 다하다가 일을 망친다. 내가 하는 최선이 알고 보면 나를 위한 최선이지, 상대에겐 최악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나와 같이 생각하기보다 타인을 타인으로 인정할 때 사랑은 비로소 온전한 모습을 갖춘다. p159

 

그대가 할 일은 사랑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막기 위해 쌓아놓은 그대 안의 장벽들을 허무는 것이다. p161

 

누가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거든

나를 적시며 흘러가 버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강물이라고 해라.

 

상처받은 이를 껴안기에 나는 너무 작다.

작은 나를 넘어서기에도 나는 너무 작다.

멀리 있는 사람이여, 나는 아직 너를 안을 수가 없다. p174

 

따뜻한 손으로 내 차가운 손 잡으며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네 손의 체온이 내게 가르쳐줄 때

너는 나의 하나뿐인 치유다. p179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만난 경우는 없다. 오히려 꼭 그 사람을 만났어야 하는 것이다. 원수같이 헤어졌다 해도 내 인생에 그는 필요한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그와의 경험을 통해 나는 크게 학습할 것이 있었던 것이다. 인생은 우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p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만드는 힘>

 

눈 무게 견디지 못한 나무들이 부러집니다.

그대 무게 견디지 못한 나도

부러질지 모릅니다.

눈썹 위에 얹히는 눈은

나비보다 가볍습니다.

가벼운 것이 모여 무거움을 만듭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쌓아두면 무겁습니다.

사랑은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딥니다. p199

 

 

사랑에 대한 말들은

때로 우리를 긴장시킨다.

우리 모두는 사랑에 상처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상처 나게 했던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다.

예습하지 않은 인간관계가

우리를 아프게 했던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살얼음 밟으며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밥 한 그릇 따뜻하게 나누기보다

한 그릇 밥조차 제 몫으로 챙기기 위해

적으로 서진 않았던가?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갈 세월이 짧아

어둡고 차가운 새벽

누군가를 용서하기에 앞서

누군가에게 용서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갚아야 할 빚처럼 떠오르는 새벽 p238

 

 

 

때로 용서할 수 없어 우리는 누군가를 버리고, 용서받지 못해 또 누군가로부터 떠나게 된다. 용서보다는 차라리 망각을 선택해 잊어버리려 애쓰지만 강력한 것일수록 쉽게 잊혀지지도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내가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김재진 지음 / 시와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싯구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의 김재진 시인의 시는 '치유와 위안'이다. 

 

 

나의 치유는

너다.

달이 구름을 빠져나가듯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너는 내게 그 모든 것이다.

모든 치유는 온전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아무것도 아니기에 나는

그 모두였고

내가 꿈꾸지 못한 너는 나의

하나뿐인 치유다.   -김재진, <치유>-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너는 내게 그 모든 것'이라는 문장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문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이런 거겠지...

'나'로 가득차 있던 마음의 방을 비우고 그곳에 '너'의 자리를 만드는 거...

 

비우려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돼...

나를 지키기 위해 꼭꼭 닫아 걸었던 그 문을...

문이 열리면, 미처 '너'가 당도하기도 전에 세찬 비바람이 먼저 들이닥치지...

 

그래도 괜찮겠니...?

아파도 괜찮겠니...?

 

그래도 괜찮다면, 진짜 사랑인 거야.

 

 

시인은 바로 이 순간을 말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아픔을 사랑하는 것'이라서, 아픈 것이고...

'그 사람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라서, 힘겨운 것이며....

또한 '그 사람의 우주를 받아들이는 것'이라서, 두려운 것이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아프고 힘겹고 두려워도 괜찮다고...

사랑으로 아픈 이 순간, 괜찮다고...

 

 

 

그리고...

이어서, 또 다시 내 눈길이 오래도록 머문 시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을 가장 많이 닮았어.

 

 

 -<그 산에 다시 갈 수 있을까?>-

 

사랑하지 않기 위해 사랑을 감추고

마음 아프지 않기 위해 마음을 감추고

더 이상 감출 것 없는 생의 끝에서

끊어진 울음 따라 마음 누르는

네가 숨 가쁜 탄식이라면

오래된 탄식이 만날 침묵이라면

내가 바친 기도는 메마른 숲.

아무것도 더 해볼 수 없어 울음 누를 때

늦도록 꽃 못 피운 산이라네.

 

 

-<슬픔의 나이>-

 

별똥별 하나 떨어진다 해서

우주가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내가 네게로부터 멀어진다 해서

내 마음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시인 마종기,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 개정판 아주 사적인, 긴 만남 1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이 존재'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마음의 우주'다.

 

 

마종기 시인과 가수 루시드폴(본명: 조윤석) 사이에 오고간 편지들을 읽고 있노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있다는 그 깊은 '심연'조차 사라지고 없다.

1938년 1월생인 마종기 시인과 1975년생인 루시드폴 사이를 가르는 무려(?) 36년이라는 세월의 깊이도 미국과 유럽이라는 공간적 거리감도 어느덧 무의미해진다.

 

이 책을 읽기 전,

루시드폴이라는 사람이 나에게 준 인상이란 그저 '요즘은 가수도 학벌로 되는 시대인가 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였다. 그런데 지난 가을 시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노랫말에 그의 자작곡이 다섯곡이나 뽑혀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은 다소 뜻밖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가 최근에 결혼을 하면서 다시 검색어에 오르내리면서 내 관심이 자연스럽게 집중되었다.

 

한편, 마종기 시인은 한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로서의 삶을 살면서도 시인으로서의 삶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인물이다. 다만, 수능시험에 출제될 정도로 유명(?)하다는 그의 시는 나에게 그 어떤 특별한 감흥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루시드폴은 그의 시들을 읽으면서 외국에서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달래고 노래까지 만들었는데...

다만, 그의 부친이 나에게 어릴 적 깊은 감동을 전해주었던 아동문학가 마해송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를 좋아할 이유, 충분하다.

 

편지 속에서 읽혀지는 루시드폴은 '떠날 때를 아는 사람'같고...

 

#- 여기에 더 이상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습니다.익숙해진다는 것이 두려워진 걸까요. 주로 3,4년이 걸리는 학위를 마칠 때가 되면 자기가 연구하던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그 연구실에서 발언권도 강해지고, 그러면서 일종의 권력도 가지게 되지요.(한국이나 유럽이나 사람 사는 건 어디를 가나 매한가지인가 봅니다). 그러면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기가 있던 곳에 눌러앉게 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아무튼 왠지 모르게 지금이 그냥 '떠나야 할 때'라고 느껴져서 그런지 교수님의 '배려'가 그리 반갑지많은 않았지요. -p80

 

처음엔 마종기 시인 역시 나처럼 루시드폴의 노래들을 이해하지 못했더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 이 노래들은 혹 대화를 나누려는 외로운 영혼의 숨소리 같은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되었단다.

 

루시드폴의 가사도 마종기 시인의 시도 소위 '시작(詩作)법'에서 한발 빗겨나 있다. 쉽고 편하게... 느낌의 순간을 살려 최대한 솔직하게... 솔직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거니까.

 

편지 속에서 느껴지는 루시드폴은 또한 '괴짜'이면서도 별 생각없는 '범인'같다...

 

#- '루시드폴'이라는 이름이 궁금하셨군요. 저는 그 얘기만 나오면 참 창피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깊게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앨범이 나오기 전에 라디오 출연을 하게 되었는데 혼자 방송에 나가는 것이 쑥스러웠어요. 또 당시 녹음을 해주신 분이자 저의 소속사 사장이었던 분과 함께 팀(뮤지션+엔지니어)개념으로, 일종의 프로젝트처럼 소개를하면 어떨까 해서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정했지요. -p138

 

 

그리고 또 한없이 맑고 착한 사람 같다는 거...

 

#- 아아, 이 시를(마종기 <동생을 위한 조시>) 저는 얼마나 많이도 읽었던가요. 그리고 늘 이 시의 뒷부부늘 읽을 때면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있어 전철역에서, 집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전화를 하는 중에 얼마나 읽고 또 읽어주었던지. 보내주신 편지 중에서 무엇보다도 '쉽고 좋은 시'라는 시구가 가슴을 울렸습니다. 그 '쉽다'라는 것이 저에겐 단어 그대로의 '쉽다'가 아니라, 시인의 가슴에서 독자의 가슴으로 '쉽게'가는, 그런 시가 '쉽고 좋은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결심하게 되었지요. 나는 쉽고 좋은 노래를 써야겠구나......

 

 

 

마종기 시인과 가수 루시드폴의 만남은 마종기 시인이 언급했던 것처럼 조국(혹은 모국이나 고국)이 아닌, 이국땅에 있었다는 '디아스포라(diaspofa:이산의 백성)'라는 공통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루시드폴은 유럽 땅에 도착해서야 마종기 시인의 시집을 펼쳐들었고 깊이 매료되니 말이다. 일찍 고국을 떠나 의학자로서 시를 썼던 마종기 시인의 정서가 공학도로서 노랫말을 짓고 부르는 그의 심장에 정확하게 꽂혔다고나 할까.

아무튼 둘 다 남다름과 특별함을 모두 겸비한, 이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라 하겠다.

 

그들의 우정에 마음이 따듯해지면서도 한편으론 부럽기 그지없다. 

그들에게 주워져 맘껏 향유되는 지성과 감성이 나에겐 허락되지 않았음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가의 첫걸음이란...? 이런 것일까...

 

우선 이 작품은 에밀 졸라의 대표작이 아니다.

에밀 졸라가 누구던가? 

플로베르의 사실주의를 이어받아 자연주의 사조를 만들어낸 작가이자, 양심적 지식인이요 행동하는 지성인의 표상과 같은 인물이지 않은가.

 

<테레즈 라캥>은 바로 에밀 졸라가 스물 여섯이던 1866년도에 완성한 첫번째 장편으로, 출간되자마자 평론가들의 악평에 시달렸지만 사실적 글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과학적 글쓰기(자연주의)를 시도하고 완성한  첫작품으로 추앙받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훨씬 더 전에 쓰여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세월의 간극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과 적나라한 표현들로 불편했던 글읽기가 중반을 거쳐 후반부로 갈수록 대가의 진가가 들어나는데.... 정말이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테레즈 라캥은 고모인 라캥 부인의 손에서 사촌 카미유와 함께 자란다. 성인이 된 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부부가 된다.

얼마간의 자산을 갖고 있던 라캥 부인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온갖 정성을 다 들여 키운 병약한 아들 카미유를 테레즈가 자신을 대신하여 정성스럽게 돌봐주는 것이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에서 도시로 이전하여 뒷골목에서 조그마한 잡화상을 꾸려나간다. 

 

병약하고 매력없는 남편과 집안 전체를 감싸고 있는 권태의 그림자에 둘러싸여 젊음을 소진하고 있던 테레즈에게 한 남자가 나타난다. 다름 아닌, 남편의 어린시절 친구였던 로랑이다. 테레즈의 눈에는 건강하고 멋지게만 보이는 로랑은 사실은 게으름뱅이에다가 동물적인 욕망의 소유자에 무위도식만을 꿈꾸는 '한량'이요, '건달'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테레즈와 로랑은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게 되고, 결국은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간다.

 

로랑은 한 손으로 카미유의 목을 죄면서 여전히 카미유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다른 한 손으로 카미유를 배에서 들어올렸다. 카미유는 로앙의 힘센 팔 끝에서 마치 어린애처럼 공중에 들려 있었다. 그런데 잠시 로랑이 목을 내놓고 머리를 숙이고 있자 분노와 공포로 미쳐 있던 카미유는 몸을 비틀면서 입을 벌리더니 그 목을 꽉 깨물었다. 살인자가 고통의 고함을 참으면서 카미유를 냅다 강물에 던졌을 때 카미유의 이에는 로랑의 살점이 붙어 있었다. 

-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 p120-

 

두 사람은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라자 아예 친구이자 남편인 카미유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는, 라캥 부인의 재산을 차지할 속셈으로 결혼까지 하게 된다.

 

뭐...

여기까지는 겉으로 들어나지만 않을 뿐,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서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리고 천륜을 저버린 이 두 사람이 죄과를 치른다는 이야기 역시 흔하디 흔하여 놀라운 일도 아니다.

 

내 마음을 송두리채 뒤흔들어 놓은 건, 그 다음부터다.

마침내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카미유가 제거되고, 살인자들은 의심을 받기는 커녕 카미유 친모인 라캥부인의 전폭적인 믿음과 사랑 속에서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이제 라캥부인의 재산 또한 테레즈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일이 뜻대로 진행되어 가는 이 마당에, 쾌재를 불러도 부족할 마당에 이 두 사람은 서로를 멀리하고 원망하고 증오하면서 불행의 나락으로 거침없이 굴러 떨어진다. 

 

어느 곳에나, 카미유는 따라 다녔다.

잠을 자는 부부의 침대 한가운데에도...

목요일 저녁 만찬 자리에도...

철도국을 그만둔 로랑이 차린 아뜨리에에도...

 

로랑은 두 주일 넘게 어떻게 하면 카미유를 다시 죽일 수 있을지 생각했다. 물에 던졌는데도 아주 죽어버리지 않고 매일 밤 그들의 침대로 와서 눕곤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살인을 끝내고 그들의 사랑에 마음 편히 취하려는 순간, 희생자는 다시 살아나서 그들의 잠자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테레즈는 과부가 아니었다. 테레즈가 죽은 자를 남편으로 갖고 있는 한, 로랑은 그녀의 두번째 남편일 뿐이었다. -p234~235-

 

죽은 자는 천사도 되고 성모도 되고 어린이도 되고 산적도 되었다. 이번에는 만화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그는 특징을 과장해서 괴상한 윤곽을 그리고 기괴한 얼굴들을 꾸며냈다. 하지만 죽은 자의 독특한 초상화를 더욱 무섭게 만들어놓을 따름이었다. 그는 마침내 개, 고양이를 그려보았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도 어딘지 카미유를 닮아 있었다. -p264-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라캥 부인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두 사람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다가 중풍에 걸리고 만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녀는 그저 두 눈만 움직일 뿐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두 사람은 서로 죽일 듯이 싸웠고...서서히 미쳐갔다...

그리고, 마침내...

두려움과 고통에 울부짖던 테레즈와 로랑은 라캥 부인 앞에서 사죄를 하고 서로의 죄를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아, 라캥 부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이 부분에서 두 눈을 꼭 감고 말았다.

두사람이 저지른 죄 중,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죄는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니요 심지어 카미유를 물에 빠뜨려 죽인 죄도 아닌, 바로 라캥 부인에게 그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평생 이렇게 심한 절망 속에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끔찍한 진실은 마치 번개처럼 부인의 눈을 불태우고, 그 마음속에 벼락같은 타격을 주었다. (...) 분노와 고통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그녀의 육체 속에서 사납게 요동치고 있었다. (...) 마음속에서 일어난 화는 더욱 무시무시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왈칵 무너진 것 같았다. 그녀의 전 생애는 황폐하게 되고, 모든 애정과 선의와 헌신은 난폭하게 뒤집혀 발길에 짓밟혔다. 그녀는 따듯하고 애정에 싸인 생활을 해왔었다. 그런데 삶의 막바지에, 조용하고 행복한 생활의 믿음을 가지고 무덤 속으로 떠나려 할 때, 단 하나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모든 것이 거짓이며, 모든 것이 죄악이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찢어진 베일을 통해서, 자기가 보았다고 생각했던 사랑과 우정의 피아에서 피아 치욕의 흉악한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 만일 저주할 수만 있었더라면 그녀는 하느림을 저주했을 것이다. 하는님은 그녀를 곰살궂고 착한 소녀처럼 다루고, 조용한 기쁨의 거짓된 캔버스로 그녀의 눈을 즐겁게 해주면서 육십 년 이상 속여왔던 것이다. (...)

 

하느님은 나빴다.

하느님은 진작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천진스럽게 눈을 감은 채 죽도록 내버려두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을 부정하고 우정을 부정하고 희생하는 마음을 부정하면서 죽어갈 수밖에 없다. 남은 것은 살인과 욕정뿐이었다.

-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 p274~276 中-

 

 

테레즈와 로랑은 왜 이랬을까?

왜 끝까지 부인을 속이지 못했을까?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은 '죄 사함을 받고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겠다'는 이기심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지극히 '인간'다웠다. 이기적인 지극히 이기적인...

 

자신들의 결혼이 살인의 숙명적 벌이라는 것을 내놓고 인정하기는 싫었다. 그들은 자기들 눈앞에 전개도는 생활을, 진실을 외치는 마음속의 목소리를 듣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폭발 속에서, 자신들의 고뇌의 깊이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게 했으나 결국 황폐하고 견딜 수 없는 존재만을 남긴, 그들 본성이 가진 열정적인 이기심만은 분간할 수 있었다. -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 p288~289 中-

 

그나마 위안이라면, 라캥 부인이 보는 앞에서 이 두 살인자들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뿐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을 통해 받은 감동이 생각보다 강렬하고 깊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감히 이 작품을 감추어진 '히든고전명작'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한다.

대가의 이름에 걸맞는 걸작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라.

 

 

 

 

+)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읽게 된 신형철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에서 그는 에밀 졸라의 이 작품을 두고 이렇게 일갈했다. 

 

본능, 충동, 욕망, 사랑. 언뜻 비슷해 보이는 개념들입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개념들끼리는 서로 겹치는 데가 있어 보입니다. 본능이나 충동이나, 충동이나 욕망이나, 욕망이나 사랑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그러나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을 비교해보면 선뜻 그게 그거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본능과 사랑은 썩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네 가지를 일종의 스펙트럼으로 간주해보면 어떨까요. 빨강에서 보라까지, 본능에서 사랑까지. 인간이라는 우주 안에는 저 네 가지 종류의 정념(적당한 표현은 아니지만 마땅한 게 없네요)이 일종의 스펙트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러 헷갈립니다.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 정념은 본능일까, 충동일까, 욕망일까, 사랑일까. 헷갈려서 불안하고, 불안해서 실수하고, 실수해서 후회합니다. (...)

 

테레즈와 로랑이야말로 그 정념의 스펙트럼에서 길을 잃고 만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저 정념들의 논리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본능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늘 이렇게 해왔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한다." 욕망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이것은 금지돼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할 것이다." 충동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나는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을 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테레즈와 로랑은 금지된 관계였기 때문에 그토록 뜨거운 욕망을 가질 수 있었고, 금기가 사라진 순간 욕망을 잃어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가학, 피학 충동뿐입니다. 사랑이라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욕망이었고,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욕망의 버팀목이었으며, 버팀목이 사라진 자리에는 맹목적인 충동만이 남았습니다. 이것이 이 연애의 전말기입니다.

 

-신형철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399~341 中-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바로 에밀 졸라의 이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 또한 새롭게 알게 되었다.

테레즈의 남편 카미유을 로랑이 물에 빠뜨려 죽일 때, 카미유에게 목을 물어 뜯기게 되고...

테레즈는 로랑의 이 '상처' 부위를 애무하며 희열을 느낀다.

이에 대한 신형철의 말을 들어보자.

 

이 대목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테레즈가 로랑의 목덜미에 마치 "뜨거운 쇠를 대는 것"처럼 키스를 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을 하고 있다"라는 충동의 논리를 따르면서 말이지요. 목덜미라니, 뱀파이어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신형철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399~341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 평범하지 않지만 평범한 소수자들의 이야기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1
인권운동사랑방 엮음 / 오월의봄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땅에서 '남다름'은 차이나 독특함이 아닌, 차별의 충분조건이 아닐까 싶다.

'차이와 차별'

말 그대로 한긋 차이건만, 그 이면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공간'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린 때때로 아무것도 모른 채 혹은 알면서도 그 '공간' 속에서 눈 뜬 장님이 되어 이리저리 헤매인다.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는 바로 그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 환한 조명등을 밝히고 확대경을 들이댄 작업의 결과라 하겠다. 

그리고 그 결과,

드러나는 우리의 치부, 치부들...

 

성소수자, 외국인이주민, 비혼모/미혼모, 장애인, 여성과 남여비정규직 노동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는 주로 '무시'하거나 '학대',  둘 중 한가지로 나타난다.  

이들에게 무시나 학대가 가해지는 것은 이들이 위험해서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위험하지 않기 때문에, 즉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놓고(?) 무시하고 학대한다. 

 

이 과정에서 대중들은 두 눈을 꼭 감아 버린다.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아닌 척... 있어도 없는 척...

그저 불편하고 어찌할 수 없어서 두 눈 질끈 감아 버렸을 뿐인데, 개개인의 이와 같은 행동들은 차별의 고착화와 악순환, 규범화에 일조한다. 자기 자신도 언젠가 혹은 어디선간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더라도 여전히 차별에 두 눈 꼭 감을 수 있을까?

 

두려워서 혹은 모르거나 귀찮아서...

너와 내가 차별을 두 눈 꼭 감고 있는 가운데, 일부 용기 있는 사람들은 감은 두 눈 번쩍 뜨고는 현실을 직시하곤 한다. 그리고 직접 두 눈으로 본 것들을 눈 감은 대중들에게 말해준다.

우리가 두 귀를 막지 않는 한, 열린 우리 귀전에 울리는 그들의 목소리는 커다란 공명이 되어 세상을 바꾸는 신호탄이 되리라.

 

 

 

#-1 비혼모

 

저출산이 그토록 중요한 문제라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회재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라면 왜 승민을 비롯한 비혼모들은 아직까지도 복지제도의 공백과 차별적인 사회의 시선들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까? 애성애 결혼제도와 소위 '정상가족'내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의 재생산권 실천과 출산은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헌신과 책임으로 인정받고 지지받지만, 남성 가부장의 승인 없는 아이를 낳음으로써 모(母)가 되고자하는 여성은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받는 사회, 이것이 한국 사회의 현주소다.  -p34

 

#-2 결혼이주여성

 

'다문화'가 하나의 유행처럼 한국 사회에 등장하면서 이주여성 관련 프로그램이 급증했다. (...) 대표적인 것이 어느 은행에서 주는 '다문화가정대상'인데, 2006년 결혼해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째 되던 날 남편이 사망하였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그녀는 신장병을 앓고 있는 시어머니와 정신지체 1급 시숙을 모시고 살면서, 남편이 남긴 빚까지 짊어지고 억척스럽게 생계를 이어가며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다문화가정 대상'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전통적인 효부상에 가깝다. 이 상은 한국 사회가 바라는 결혼이주여성의 모습을 함축한다. 서구 중산층 페미니즘 물결의 영향을 받아 '드세진' 한국 여성에게서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순종성과 전통적 여성상을 이주여성들에게 기대한다. -p87

 

#-3 성소수자

 

사회적 커밍아웃과 오랜 인권 활동을 통해서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성소수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별종들'일 뿐이며, 가려진 존재댜. (...)연분홍치마의 커밍아웃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 <종로의 기적>의 주인공들은 관객들에게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 했다. "성소수자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거주하거나 일하는 공간에서 누군가 커밍아웃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곳은 아마도 성소수자들에게 무척이나 차별적인 공간일 것입니다." -p113~114

 

 

#-4 이주노동자

 

모든 이주노동자들이 가난한 것도 아니고 또 모든 빈곤의 원인이 이주로 인한 것도 아니지만,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과 빈곤의 얼굴을 공유하며 새로운 빈곤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은 이주 문제와 빈곤 문제의 끈끈한 화학적 결합을 예고한다. (...)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되는 것 자체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 존재를 가늠하게 해준다. -p137~138

 

#-5 AIDS감염자

 

사실 내가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게차별이거든. 내가 당당하게 나가서 내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사회가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들잖아. 내가 내 테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회가 그런 테두리를 만들고 있다고 있다고.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를 꼭 강압적으로나 법적으로 규제하는 것만 차별이 아니야. 다 자유롭게 다루지만 스스로를 어떤 테두리에 속하도록 몰아가지. 너도 생각해봐. 직장에서 자기가 감염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법적으로는 해고할 수 없게 돼 있지. 안전장치는 돼 있어. 그런데 차별이라는 건 보이지 않는 거야.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 같은 거. 목소리를 내려면, 진짜 어떤, 한 사람이 인생을 걸고 해야 되는 거야. -p180

 

#-6 십대 레즈비언

 

서윤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조롱하고 드러내는 또래들과 선생님이 있던 학교에서 일상적인 괴롭힘에 직면해 있었다. 침묵과 무시라는 대응 전략을 구사하다가 그 전략으로도 견디지 못하는 감정적 상태에서 스스로 학교 밖으로 걸어나왔지만 사람들은 학교 밖 청소년을 낯선 존재로 여기며, 그들에게 의아하고 불편한 시선을 던진다. 서윤은 학교 안에서는 성정체성에 가해진 괴로움을 견뎌야 하고 학교 밖에서는 불편한 질문과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p210

 

#-7 비정규직 남여 노동자

 

똑같은 공고를 나왔어도 사무직이냐 생산직이냐에 따라 달라진 대우와 열등감, 전문대를 나온 동료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느꼈던 차별적인 생각이나, 교회에서 만난 같은 또래의 대학생들 사이에서 느끼는 문화적 이질감에 대한 영석 씨의 이야기는 차별이 얼마나 삶의 공간을 오가며 치밀하게 엮여 있는지 확연히 보여준다. 살아온 환경, 집안의 경제적 조건이나 수입에 따라 여가도, 연애도, 즐기는 문화도 모두 달라진다. 고등학교를 나와 기술을 가진 남성 비정규직 노동자 영석 씨와 학업도 제대로 못 마치고 평생 가족들을 돌보며 살아 온 나이 든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명희 씨의 삶은 또 얼마나 다른가. 영성씨와 명희 씨가 만난다면 무엇에 대해 함께 싸우고, 무엇을 위해 서로 연대 해야 할까. -p248

.

.

.

소설같은 이야기지만 현실이요, 또한 사실이다.

이에 대해, 작업을 마친 활동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차별은 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차라리 소설이 될 수 없는 이야기다. 너무나 평범한데, 너무나 평범하지 않아서...'

 

이처럼 '너무 평범한, 그렇지만 너무나 평범하지 않은' 차별의 부름에 어떤 목소리로 응답할지는 또 다시 우리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