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쓰기의 모든 것 Part 1 : 플롯과 구조 - 독자를 사로잡는 이야기에는 뛰어난 플롯이 있다 소설쓰기의 모든 것 1
제임스 스콧 벨 지음, 김진아 옮김 / 다른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쓰기의 모든 것>시리즈는 Part 01~Part 04로 총 4 Part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Part는 각기 다른 작가에 의해 쓰여질 예정이다. 현재(2011.10월) '플롯과 구조(part 01)'편과 '묘사와 배경(Part 02)'편이 출간되어 있으며 앞으로 인물,감정,시점(Part 03)과 대화(Part 04)편이 출간될 예정이다.


<소설쓰기의 모든 것>시리즈는 글쓰기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기술'이라는 점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각 파트를 담당한 지은이들 역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 하나만으로 작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쓰기의 방법을 이야기한다.


특히, Part 01의 플롯과 구조에서 지은이인 제임스 스콧 벨은 어떻게 하면 독자의 시선을 사로 잡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준다. 그는 스티븐 킹, 리처드 매드슨, 딘 쿤츠 등등 스릴러 소설 분야의 거장들의 작품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소설이 어째서 재미있는지 꼼꼼하게 분석하여 설명해준다.


스콧 벨은 '우선, 비정상적인 사건들을 일으켜라. 그리고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라.'고 주장한다.

날씨나 계절 혹은 지리적 배경을 세부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지루함을 동반할 따름이다. 스토리와 관련이 없는 부수적인 설명들은 가차없이 삭제한다.

썸네일 

놀라운 사건 사고 혹은 장면으로 독자의 시선을 붙드는데 성공했다면 이제부터는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사건의 개요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독자들을 납득시켜라.' 독자로 하여금 사건의 발생 원인이나 인물의 행위에 대해 '충분히 그럴 만 하다'고 동의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작가가 여러 분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범죄소설이라면 범죄자와 피해자의 심리와 행동 및 인체구조와 의학적 배경 지식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정소설 역시 법에 대한 기초 상식만으로는 독자를 효과적으로 설득시키지 못한다.


끝으로, '마지막 대단원에서 독자의 긴장감이 풀릴 즈음 막판 반전도 빼먹으면 안된다.'고 강조하다. 막판 반전으로는 제프리 디버의 <소녀의 무덤>을 최고로 치고 싶다. <소설쓰기의 모든 것>시리즈 Part 01에서 많은 소설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대부분 스티븐 킹, 리처드 매드슨, 딘 쿤츠 등의 작품들이었다. 아무래도 문학소설보다는 대중소설이 플롯과 구조가 훨씬 더 선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임스 스콧 벨은 어린 시절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생계를 위해 로스쿨를 마치고 로펌에서 변호사로 10여년 간 근무하다가 전업 작가로 들어선 인물이다. 그는 소설을 쓰기에 앞서 20여 편이 넘는 스릴러 소설들을 읽고 꼼꼼하게 분석한 후, 하나의 공식을 도출해냈다.


(목표를 위한) 행동 --> (그에 대한)반응 --> 대단원(비극/해피엔드)이 바로 그것이다.


각 단계는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예를 들면, 겉으로는 목표달성을 했지만 주인공이 불행할 수도 있고, 비록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주인공이 삶의 의미라든가 가족간 사랑 등등 비물질적인 가치를 깨닫게 되다는식말이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이유 역시 다양하다. 직업적 소명일수도 있고 사랑이나 우정 혹은 약속등을 지키기 위한 것일수도 있고 그것을 깨트리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소설쓰기의 모든것 part01을 읽은 후, 나는 이 책에 언급되어 있는 작품들 중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와 제임스 스콧 벨이 좋아한다는 딘 쿤츠의 작품이었다. 딘 쿤츠 역시 많은 작품을 갖고 있는 작가였는데 내가 읽은 작품은 <검은 비밀의 밤>이었다.


그리고 세번째로 읽은 작품은 제프리 디버의 <소녀의 무덤>이다. 이 작품은 도살장을 배경으로 한 인질극이다.

<소설쓰기의 모든 것-Part 01:플롯과 구조>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성공한 소설 작품들은 하나같이 근사한 주인공과 탄탄한 플롯 및 구조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참고로, <나는 전설이다>와 <검은 비밀의 밤> <소녀의 무덤>등 이상 세작품에 대한 도서감상문을 알라딘 서제의 같은 카테고리 안에 올려놓았으니 자세한 줄거리는 생략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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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글쓰기다 - 이제 번역가는 글쓰기로 말한다
이종인 지음 / 즐거운상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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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5년 동안 영어 전문 번역가로 살아온 지은이의 내공이 엿보인다.


'번역은 글쓰기다'라는 책 제목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한줄 한줄 섬세하게 다듬은 문장들과 번역실제를 통해 번역의 기술을 설명한 점도 훌륭한다.

 

번역이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것'에 머물지 않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처럼 '2의 창작'이 되려면 번역가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루쉰과 무마카미 하루키와 같은 소설가들이 각각 독일소설과 영어번역을 많이 했다는 점도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면서 나도 언젠가는 번역가로 출발하여 작가가 된 사람들처럼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되새기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양억관 김남희 등 일본어 번역가들의 실력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종인은 영어 번역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어 번역가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한껏 들어내고 있다.

 

특히, 그가 언급한 양억관 김난주 부부는 일본어 부부 번역가로 한국내에서 일본 소설 매니아 층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일찍이 일본 문학을 접하면서 어쩌면 이렇게 빼어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감탄하며 눈여겨 본 역자의 이름이 바로 이들이었다. 특히, 그 당시 읽었던 아사다 지로의 주옥같은 단편들은 정말 '번역문학'의 백미라 할 만 하다.

 

 

다만, 나의 전공 분야인 중국어번역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아쉽다. 그만큼 영어나 일본어에 비해 중국어번역이 뒤늦게 출발한 감이 없지 않은 데다가 아직까지는 한국 출판계와 독서시장에서 중국번역문학이 확실한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2000년대 중후반에 접어 들면서 몇몇 세간에 화제를 뿌리는 중국책들이 번역 소개되곤 하지만 아직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영어나 일본어 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국 출판시장이 그 규모면에 있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학 분야에만 치중되어 있는 중국어 출판 시장에 관심과 역량을 더욱 집중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중국 현대 문학을 전공한 소수의 교수진에 의한 추천과 번역에만 치중해서는 중국 소설에 대한 한국 독자층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기타 중국내 '연줄'등 정치적 파워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한국의 중국어 번역 분야에 중국교포출신 비전문가 대거 진출하면서 실력있는 중국어 번역가의 설자리가 점점 좁아져 고급 인재들이 번역에 종사하지 않게 되면서 번역의 질이 떨어지고, 이는 또 다시 독자들의 악평과 외면을 불러 일으키는 악순환을 끊지 않으면 안된다.

 

중국어 번역 출판계가 직면한 이와 같은 어려움은 한편으론 그만큼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중국어 소설 번역을 대표하는 이름 있는 번역가가 아직 없다는 점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내가 첫번째로 중국어 번역계에서 네임밸류를 갖는 번역가가 되겠다'는 의욕을 다지는 계기로 삼으면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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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관하여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2
예자오옌 지음, 조성웅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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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57년 쑤저우에서 태어나 난징대에서 수학한 작가는 중국의 대표적인 문인집안 출신이다. 그의 조부인 예성타오(葉聖陶)는 중국 최초의 창작 동화집인 <허수아비(稻草人)>의 저자이며, 부친 예쯔청(葉至誠) 역시 책을 좋아한 장서가였다고 한다. 그와 동년배의 작가들이 문화대혁명으로 암울한 십대를 보낸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자오옌은 일찍부터 동서양 고전과 현대 문학을 두루 접하면서 작가적인 감수성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중국식 블랙코메디라 할 수 있는 <화장실에 관하여(關于厠間)>는 동양 고전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화장실을 소재로 한 이 중편 작품은 역자인 조성웅씨의 표현대로 배설 욕구와 함께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 권력욕, 성욕, 치욕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니 좀 더 깊게 파고 들면 이런 욕망의 표출과 좌절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화자인 '나'를 통해 문화대혁명 때 지식인이었던 부모가 동네 공동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해야 했던 일과 지식인의 자녀인 화자 또한 피난처로 삼은 시골 학교에서 마찬가지로 화장실 청소를 맡으라는 담임선생님의 명령에 '무단결석'으로 저항한 일들을 거론하며 인간 욕구의 뒤틀린 단면을 보여준다. 

 

깨끗이 청소를 해도 어느새 금방 더러워져버리는 동네의 공동 화장실은 '혁명'을 거친 후 일정 시간이 흐르면 다시 원래의 부패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버리는 현상과 이상하리만치 닮아 있다. 가장 사적인 개인의 '배설' 행위는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가장 집단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일단 담장 밖으로 던져진 문제는 내가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내 일'에서 내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하겠지라는 '너의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지만 9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중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건, 만리장성도 아니요 자금성도 아닌 중국의 그 독특한(?) 화장실이었다. 누구라도 안 가고는 단 하루도 견딜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혁명하느라 바빴던 대다수 중국인들에 의해 관심 밖으로 훌쩍 던져 버려진 화장실을 작가는 놓치지 않았다. 

 

포기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쉰 양하이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바지의 그 부분이 돌연 짙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느릿느릿 그러나 활짝 피는 한 송이 꽃처럼 보였다. 처음엔살짝 젖었던 부위가 점점 커졌고 수정 같은 물방울이 한 점씨 배어나더니 급기야는 땅에 똑똑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인 오줌은 이내 낮은 곳을 향해 천천히 흘러갔다.

 

                                                    -예자오옌, <화장실에 관하여> 中,1991년12월 作- 

마치, 80대년 홍콩 르와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회사의 꽃으로 뭇남성들의 로망이었던 양하이링이 대도시 상하이에서 시내 관광을 하다 화장실을 찾지 못하고 결국 화장실을 바로 코 앞에 두고 실례를 하는 이 장면 말이다. 

 

천천히 날아오른 총알에 핏줄이가 솟구치고 인물의 표정이 극대화되면서 장엄한 배경음악이 흐른다......

배설과 죽음이라는 상황만 다를 뿐 분위기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다.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시각적 효과가 강렬한 이 장면을 매우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리라. 매우 리얼하게 묘사하여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 장면을 말이다. 

 

 

우수중편문학상과 장쑤문학예술상을 수상한 <추월루> 역시 예자오옌의 대표작으로써 손색이 없다. 청말과 민국을 거쳐며 격동의 현대사를 살다 간 중국의 마지막 지주 딩(丁) 선생의 생애가 작가의 담담한 필치에 담겨 한편의 역사드라마가 펼쳐진다. 

 

청 조정에서 한림원 관리로 일했던 딩 선생은 자신의 칠순을 기념하여 뒤뜰에 '추월루'를 앉힌다.  수 천년 동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축첩제도와 남존여비사상 그리고 철저한 신분제 사회의 마지막 황혼빛이 이곳 추월루에 비쳐든다.  

 

딩 선생은 평생 자신이 과거 시험 출신이란느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비록 향시, 회시, 전시를 잇따라 장원으로 급제하지는 못했으나 시험을 치를 때마다 합격을 했던 것이다. 늠생은 말할 것도 없고 향시에 합격한 거인이나 회시에 합격한 진사도 말 한마디로 결정되었다.

(......)

신당이 득세했을 때는 고관이 될 수 있었는데 재수없게 목이 잘렸다. 그리하여 딩 선생은 회를 피해서 상하이로 일본으로 정신없이 도피하였다.

청나라 말기, 일본은 중국 혁명의 근거지였다. 딩 선생이 일본에 있을 때는 혁명이 자신을 찾아왔다. 여러 사람이 그가 진사 출신이란 점을 맘에 들어했다. 그는 어영부영 동맹회에 가입을 하고 맹세를 했다. 수류탄을 던지고 봉기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한 일이라고는 유학생 집회에 두 번쯤 가서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고어체의 격문을 썼을 뿐, 그 외에는 예전처럼 공부만 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춘추삼전정의>의 초고도 사실 그때 완성한 것이었다.

민국 이후, 딩 선생이 가장 몰두하고 있는 일은 자기 뜻대로 누각을 짓는 것이었다.

(......)

추월루가 완공되고 일 년이 채 못 되어 일본인이 왔다. 딩 선생은 추월루에 칩거하면서 수천 년에 걸친 중국 문명과 역사를 뒤적이면서 처연하게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 태어나 온갖 천신만고를 다 겪는 듯한 감회에 빠졌다.

                                                                                   -예자오옌, <추월루> 中-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대학살을 일삼자, 딩 선생의 큰 사위 밍쉬안과 장손 보치 그리고 둘째 손자인 중샹 등이 모두 피난을 떠가고 딩 선생과 그의 어린 첩 샤오원만이 홀로 남는다. 두달이 지나 가족들이 돌아오고 어르신을 모신 샤오원의 위상은 높아진다. 칠순을 넘긴 딩 선생에겐 이미 열 명의 딸이 있건만 샤오원과의 사이에서 이제 막 아장 아장 걸음마를 하는 막내딸 샤오마오를 두었다.

 

칠십 평생 딩 선생의 삶은 제국의 몰락과 열강의 침략 그리고 비적과 혁명군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중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지혜가 깊다 한들, 역사의 큰 물줄기를 막거나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상을 미리 내다본다는 '혜안'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연히 역사의 흐름을 잘 탄 것에 불과할 뿐, 개인의 역할이나 노력은 사실 극히 미약했으리라. 딩 선생은 이 모든 이치를 깨닫기라도 한 듯 혼란스런 세상을 뒤로 하고 스스로를 추월루 속에 감금시켜 버린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모습은 마지막 선비로서의 예를 충분히 갖춘 것이었다.

 

딩 선생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무슨 큰 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다만 등에 종기가 났을 뿐이었다. 민간에서 흔히 '등띠'라고 부르는 질환이었다. 심지어는 딩 선생 자신도 크게 생각하지 않고 늘 하던대로 먹고 마셨으며, 숨이 끊기던 그날에는 사우원에게 영화도 보러가게 해주었따.

(......)

갑자기 딩 선생이 비명을 지르며 답답증을 호소했다. 중샹은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댔다.

(......)

"가만히 앉았거라, 할아비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중샹은 훈계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각오를 다진 후 하문을 기다렸다. 딩 선생은 그의 태연한 모습을 보고 탄식하며 말했다.

"성인은 예절에 구속받지 않고, 현인은 예절을 굳게 지키며, 어리석은 자는 예절을 잃고 함부로 행동한다고 했다. 할아비는 늙고 병들었지만 이 도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 너희 같은 젊은이들에게는, 할아비가 여러 말 해도 쓸모가 없겠지."

말은 마치고 눈을 감은 그의 표정은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중샹은 할아버지를 불렀지만 훈계는 맏고 싶지 않았떤 터라 일부러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고개를 돌려보니 딩 선생은 이미 잠들어 있었고 눈물이 코끝에 달린 채 빛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중샹은 그 코끝에 맺힌 눈물이 계화향처럼 느껴졌다.

                                                                                      -예자오옌, <추월루> 中-

 

 

1987년 12월 作 <대추나무 이야기>는 예자오옌의 출세작이라고 하는데, 불분명한 인칭과 시점으로 인해 나에게는 상당히 어렵게 느껴졌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난징 대학살의 유탄을 피하기 위해 난징의 부잣집 외동딸 쉬윈은 서둘러 얼한과 결혼한 후 그의 고향으로 간다. 그렇지만 얼한이 고향마을의 비적 두목인 바이롄에게 목숨을 잃게 되면서 청상과부가 된 쉬윈의 삶은 그때부터 얽히고 섥히기 시작한다. 결국, 남편을 죽인 바이롄의 애첩이 된 쉬윈은 얼한의 동생 얼융이 바이롄을 토벌하러 오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세상이 또 한번 바뀌어 천하가 공산당의 손아귀에 떨어지고...쉬윈 또한 어느 평범한 노동자의 모습으로 삶의 마지막 종착역을 향해 천천히 달려간다. 그리고 20대 젊은 나이에 병사한 그녀의 아들 융융과 생년월일이 같다는 작가인 '나'와 조우하게 되면서 그녀의 파란만장한 과거사와 주변 인물들의 행적이 세상밖으로 나오게 된다.

 

대하역사소설 정도의 중량감을 갖춘 이 작품은 '무인칭 화자'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무명의 논픽션 작가가 등장하여 1970년대 타이핑 읍의 파출소 소장인 얼융을 인터뷰하면서 바이롄과의 악연이 서술된다. 그리고 작품의 말미에 작가 예자오옌을 대신하는 듯한 젊은 작가가 현재 시점에서 이젠 노인이 된 쉬윈을 만나 그녀의 과거사와 아들 융융의 이야기를 보충하는 형식이다. 

 

작가는 어째서 이처럼 다양한 화자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했을까?

일관적이지 않은 시점으로 인해, 독자는 적지 않은 등장인물들과 큼지막한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종종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새로 시도된 형식이거나 아니면 작가 개인의 취향이나 고도로 계산된 의도가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와 같은 형식을 취한 이유를 모르겠다. 

 

참고로, 미야베 미유키의 사회파 추리소설 <이유> 역시 무인칭 화자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렇지만 작품은 어디까지나 사건에 연류되어 있는 인물들을 방사형으로 이어 나가면서 인터뷰하는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 살인사건을 제3자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형식을 통해 작가는 독자와 사건 그리고 독자와 등장인물들간에 일정한 거리감을 둠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탐정의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건-혹은 '작품'-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의 이와 같은 작품 형식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데이코쿠 은행사건의 수수께끼-일본의 검은 안개 중에서>와 상당히 닮아 있다.

 

 

한편,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리고 대학입시제도 부활과 함께 성년을 맞이한 중국의 젊은 지식층 부부의 결혼생활을 그린 <연가>는 풍자와 과장으로 얼룩져 있는 중국의 신사실주의 문학에서 '사실주의'의 진수를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와 감정변화를 섬세한 터치로 그려낸 <연가>는 공교롭게도 1989년에 일어난 톈안먼사건 바로 전해인 1988년 9월29일에 쓰여져, 중국의 80년대를 이해할 수 있는 방향타가 되어준다.

 

그 당시 중국 지식층은 비전없는 '단위(직장)'에서의 시간때우기와 아르바이트를 통한 부수입 올리기 그리고 부모세대와는 달리 가족을 위한 희생정신의 부재와 개인적인 감정과 삶의 중시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갖추기 시작했다. 90년대 이후 중국의 폭발적인 성장과 사회변화를 견인한 내재적 힘의 원동력이 바로 이들은 아니었을까?  이들은 과연 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사회의 빠르고 놀라운 변화에 어떠한 역할을 했을까?

 

청왕조의 멸망과 공산주의 혁명 그리고 문화대혁명을 다룬 작품들은 많은 반면, 80년대 이후의 중국 그리고 중국인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을 접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예자오옌의 <연가>는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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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수업 (양장) - 글 잘 쓰는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
도러시아 브랜디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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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34 년도에 처음으로 출판된 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수업>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이들을 '작가의 길'로 인도한 글쓰기의 '바이블'이라 할 만하다. 다만 그 명성에 비해 한국에서는 상당히 뒤늦게 번역 소개되었고, 최근 인터넷 개인 블로그의 발달과 더불어 '일반인의 책쓰기와 책내기'가 유행하면서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주로 구체적인 방법론을 언급하고 있다면 도러시아 브랜디는 이보다 훨씬 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점이 그 어떤 글쓰기의 기술을 논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사람들은 '내가 살아온 인생을 책으로 쓰면 한 열권은 될 것이다.'라는 말을 종종 한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책을 갖고 싶어하며 어떠한 형식이든지 글쓰기를 시도해 봤다는 걸 감안한다면 이 세상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작가들이 살았었고 또 살고 있어야 하리라.


사실, 모든 일들이 그렇듯 글쓰기의 성패 역시 추진력과 인내심에 달려 있다. 즉, 모든 사람들이 신선하고 창의적인 이야기들을 알고 있고 또 지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글로 엮어 내는 이들은 결국 추진력과 인내심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일 뿐이다.



이제 '재능은 배운다고 해서 트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맥빠지는 말 속에 숨은 진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은 옳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거의 전적으로 그르다.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재능이 느는 것은 아니지만 재능이 늘기를 바랄 이유가 없다. 재능이라는 자원은 그 양이 아무리 미미하다 하더라도 평생을 가도 다 쓸 수 없을 만큼 충만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고난 재능을 더 늘리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시대와 인종을 초월해 위대한 사람들은, 마치 처음부터 불순물이 섞이지않은 그야말로 순수한 재능을 타고나기라도 한 듯 너무나 위대해서 편의상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삶과 예술 작업에서 나머지 인간들보다 그러한 기능을 좀더 자유롭게 발휘했을 뿐이다. 재능의 흔적을 아예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인간은 없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너무나 위대해 타고난 재능을 남김 없이 무한정 사용하는 인간 또한 없다.                               

                                                              -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수업>중-

 

 

도러시아 브랜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바로 '작가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글쓰기 또한 연습을 통해 향상되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본성은 이중 인격이 아닌 삼중 인격이라는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작가는  이중 인격이 아니라 삼중 인격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본성은 이중이 아니라 삼중이라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이르게 된다. 희미하든 뚜렷하든, 지속적이든 산발적이든 삼중 인격 가운데 이 세 번째는 바로 각자이 타고난 재능이다. 번득이는 통찰력과 날카로운  직관 그리고 상상력은 서로 협력해 평범한 경험을 '더 고귀한 현실이라는 환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런 점에서 이 세 가지는 예술의 필수 요소다. 아니면 한 발 양보해 삶을 해석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다.

                                                                -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수업>중-

 

쓰여진지 다소 오래된 책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책을 읽는 독자로서의 자세를 갖추지 못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작가수업>을 읽으면서 솔직히 깊게 빠져들지는 못했다. 다소 어려웠다고나 할까. 그건 아마도 작가로서 갖추어야 하는 내면적인 면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작가도 아닌 내가, 작가가 되려고 제대로 된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내가 어떻게 동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책을 읽는 과정 곳곳에서 벽에 부딪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는 나 자신을 보면서 '작가가 되고 싶다'와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뜨거운 욕망이 내 안에 꿈틀거리고 있음을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이제는 욕망을 행동에 옮겨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확인하게 되었다.


참고로, 만약 내가 이 책을 다시 손에 든다면 그건 순전히 <작가수업>에 대한 영국의 소설가 겸 문학 창작 강사인 하비 채프먼의 다음과 같은 평가 때문일 것이다.

 

1934년에 처음 출간된 <작가수업>은 오늘날 글쓰기에 관한 가장 훌륭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이 책은 지난 75년 동안 끊임없이 판매됐으며, 똑같이 그렇게 판매됐다고 주장할 만한 다른 창조적 글쓰기 지침서는 사실상 없다. 도러시아 브랜디는 누구든 글을 쓸 수 있고 모든 이가 제각가의 글쓰기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녀는 창조적 글쓰기라는 행위가 어렵지 않을뿐더러 소수의 지식인들이나 추구할 일로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야기 구성을 어떻게 짜고 등장인물을 어떻게 만들어 내고 하는 것 따위에 관한 조언은 한마디로 하지않느다. 대신에 자신의 창조성을 강화하고 그녀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다고 믿는 무의식적 글쓰기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지침을 제시한다. 그녀는 이 책에서 이런 주제들을 다룬다.

작가의 기질을 배양하는 방법, 작가의 이중 인격, 쉬운 글쓰기, 일정한 시간에 글쓰는 방법, 순수한 시각을 되찾는 법, 독창성 대 모방, 작가의 비법 등등. 이 가운데 마지막 것이 최고다. 이것은 자신의 독창성을 직접 발굴해낼 수 있는 실용적인 방법이다. 사실 이책을 작가의 비법에 관한 이 한 장(章)만으로도 구입할 가치가 있다.


   -하비 채프먼(영국 소설가 겸 문학 창작 강사, www.novel-writing-help.com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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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생각쓰기
윌리엄 진서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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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진서의

 

글쓰기의 방법과 기능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책이 30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도 좋은 글을 쓰고 싶어하고 그 방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인터넷과 워드프로세서의 발달로 과거보다 글쓰기의 기회가 많아졌고 한결 수월해진것도 있지만 인간은 뭔가 읽고 쓰고 남기고 추억하는 욕망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가르쳤던 강사이자 작가였던 윌리엄 진서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글쓰기는 힘 안들이고 쉽게 써내려간 글처럼 보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작가의 피나는 연습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글은 편안함과 평범한 속에 누구나 느끼는 진실을 담고 있다.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글쓰기 행위는 자기 성찰이며 반성이고 또한 용서이자 이해의 과정인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상처받고 긴장하게 마련이다. 자신의 일부를 종이 위에 펼쳐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이끌리지만,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대로 쓰지 못한다. 집필이라는 것을 한답시고 앉아 있지만, 종이 위에 나타나는 자신은 글을 쓰기 위해 앉아 있는 사람보다 훨씬 뻣뻣하게만 보인다. 문제는 그런 긴장 뒤에 있는 진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글 쓰는 이가 팔아야 하는 것은 글의 주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나를 발견하는 글쓰기 中-


 

그 다음으로 윌리엄 진서가 말하는 좋은 글의 조건은 다름 아닌 '간결함'이다. 문장 속에서 뺄 수 있는 표현은 뺄 수 있는데까지 전부 빼야 한다. 사실, 글쓰기 과정에서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빼거나 생략하는 것이다. 아직도 나는 보여주기 위한 글쓰기 즉 글쓰기의 결과에 얽매이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글다운 글은 입력키보다는 삭제키를 잘 사용함으로써 탄생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사람들은 대체로 글을 난삽하게 쓰는 병이 있다. 살다보면 불필요한 단어, 반복적인 문장, 과시적인 장식, 무의미한 전문용어 때문에 숨이 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 글이 난삽하다는 것은 뜻이 같은 짧은 단어를 제쳐두고 까다로운 표현을 쓴다는 것이다. (...) 장황한 완곡어법을 써도 문장이 난삽해진다. (...) 자기 잘못을 감추기 위해 사용하는 공식적인 표현도 난삽하다. 무언가를 설명하려 할 때 쓰는 긴 표현도 조심해야 한다. "~라 덧붙일 수 있다.", "~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따위가 그렇다. 덧불일 수 있다면 그냥 덧불이자. 어떤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면 그냥 지적하자. 무언가에 주목하는 것이 흥미롭다면 그냥 흥미롭게 하자.

                                                                       -버릴 수 있는 만큼 버리자 中-


윌리엄 진서가 지적한 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즐겨 쓰는 표현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지금껏 나는 난삽한 글들만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면서 뭔가 대단한 것을 만들어낸다는 자기 만족감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윌리엄 진서가 구체적인 예시문장을 들어 설명한 부분은 비록 원문이 영어 문장이긴 하지만 한국어 문장을 '난삽'하게 만드는 표현들로 채워져 있어 배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밖에도 <글쓰기 생각쓰기>에는 인터뷰, 여행기, 회고록, 설명문, 비즈니스문장, 비평문, 콩트 등등 다양한 장르에 적합한 글쓰기 방법들을 세세하게 알려준다. 다만, 윌리엄 진서의 모국어가 영어인 관계로 한국어 번역본을 통해 글쓰기 방법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전달되기를 바란다는 건 독자의 과욕인 것 같다. 문법이 중요하지만 기본 회화를 바탕으로 접근해야 이해하기 쉽듯이, 글쓰기의 이론 또한 분명 중요하지만 충분한 실전 연습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렵고 지겨운 '공부'일 뿐이다. 일단, 쓰고 보자. 그것도 많이......


글쓰기 이론에서 멈짓한 책장은 어렵게 4부로 넘어갔고,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의 자세'에 귀기울이던 나는 3부에서 읽기를 멈추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제목들을 눈여겨 보자.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글쓰기 자세란 무엇인지 가르쳐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른 작가를 모방하기를 주저하지 말자. 모방은 예술이나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창조적 과정의 일부이다. 바흐도 피카소도 애초부터 완전히 바흐나 피카소인 채로 솟아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본보기가 있어야 했다. 글쓰기에서는 특히 그렇다. 관심 있는 분야에서 최고의 작가를 골라서 그 작품을 큰 소리로 읽어보자. 그들의 목소리와 감각을, 다시 말해 언어에 대한 태도를 귀로 받아들이자. 모방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와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일랑 말자. 곧 그 껍질을 벗고 여러분 자신으로 자라게 될 테니.

                                                            -글의 목소리를 듣자 中-


'언어에 대한 태도를 귀로 받아들이자'란 문장이 특히 마음에 든다. 오랫동안 이 문장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글은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청각과 시각, 촉각등 오감뿐만 아니라 때론 환각까지도 동원해야 한다. '언.어.에. 대.한. 태.도.를. 귀.로. 받.아.들.이.자.' 정말 어디선가 귓전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윌리엄 진서는 말한다. "누구나 글을 잘 쓰고 싶어 하지만 글을 잘 쓰는 일은 어렵다. 만약 글쓰기가 고통이고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건 정말 글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습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한마디만큼 위로와 용기를 일깨워주는 말도 없을 것이다.


작가는 글을 쓰는 순간 스스로에게 시동을 걸어야 한다. 그것은 배우나 무용가나 화가나 음악가에 못지 않은 일이다. 한바탕 강렬한 에너지를 쏟아 우리를 휩쓸어가는 작가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이 자리에 앉기만 하면 글이 술술 나오는 줄 안다. 아무도 매일 아침 그들이 시동을 걸기 위해 쏟는노력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즐거움, 두려움, 자신감 中-


한때 정상에 있었지만 이젠 스포츠 뉴스에서 멀어진 프로골퍼인 박지은선수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솔직히 골프를 제일 잘 치던 때에도 골프 그 자체보다는 골프를 잘 쳤을 때 따라오는 것들 예를 들면 상금이라든지 인기와 같은 것들에만 관심을 갖었었어요."


과정보다 결과에 집중한다면 오히려 과정에 집중할 수 없어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는 법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과정이 아닌 결과에 집중하게 되면 글의 형식과 내용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윌리엄 진서는 이를 '최종 결과물의 횡포'라고 일갈했다.


작가들이 완성된 글에 집착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글의 형식과 목소리와 내용을 정하기 위해 미리 내려야 하는 모든 결정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단히 미국적인 문제다. 미국 문화는 승리를 숭배한다. 코치는 이겨야 돈을 받고, 교사는 학생들을 최고의 대학에 보내야 인정을 받는다. 그보다 덜 매력적인 성취, 예를 들어 배움, 지혜, 성장, 자신감, 실패의 극복 따위는 성적을 매길 수 없으므로 그만큼 존중받지 못한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돈이 최고의 성적표이다.

                                                                -최종 결과물의 횡포 中-


윌리엄 진서는 '어떻게 하면 제 글을 팔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는단다. 왜냐하면 그는 글 쓰는 사람에게 글을 파는 법을 가르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글 쓰는 법을 가르치고 싶을 따름이고, 글쓰기가 탄탄하면 저절로 좋은 글이 나올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팔릴 것이라고 말한다.


중국어 번역을 하면서 전문적으로 중국어 번역을 가르치고 있는 나 역시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중국어 번역으로 돈을 벌 수 있나요?  얼마나 벌 수 있나요?" 번역가는 물론 번역 의뢰가 들어오고 의뢰에 따라 번역을 완료하여 납품하면 번역료를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번역 의뢰를 받느냐?'하는 것이다. 나는 '번역실력이 좋다면 언젠가는 번역을 할 기회가 오고 그리고 인정받게 된다'고 말한다. 나 역시 번역을 잘 할 수 있는 방법과 이를 되도록 잘 가르치려 노력할 따름이지, 번역으로 돈을 버는 방법이나 자신의 번역을 잘 파는 방법만큼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내리는 결정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많은 시간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 여러분의 세심한 노력이 문장 하나가 제대로 나왔을 때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여러분도 알고 독자도 안다.

                                                                          -글쓰기는 결정의 연속 中-


글쓰기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바로 결정의 연속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린다. 너무 큰 결정이라서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기도 하지만 이런 결정을 내릴 기회는 일생을 통털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고작해야 한 두번이고 많아도 다섯손가락을 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인생을 좌우할 큰 결정보다는 매일 매일 이루어지는 작고 사소한 결정들이 모여 우리 인생을 만든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고 시시한 결정일지라도 신중하되 일단 하기로 결정했다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종종 글쓰기의 가장 큰 목적은 기억을 간직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윌리엄 진서는 회고록 쓰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작가는 기억을 지키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문장을 보자마자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그래 맞다! 작가는 바로 기억을 지키는 사람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윌리엄 진서는 글쟁이가 갖추어야 할 자세로 '최선을 다해서 쓰되, 자신의 글을 끝까지 지키고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통 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원고료가 입금된 걸 확인한 뒤에는 자신이 넘긴 원고의 여정에 동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위험하다. 자신의 글이 함부로 수정되고 인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대중을 위한 글을 쓸 자격이 없는 것이다. 윌리엄 진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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