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먹는 사람들 조매제 빈처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48
신경숙.은희경 외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신경숙은 1985년<겨울 우화>로 등단했으나 1996년 <풍금이 있던 자리>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특유의 서정적이고 여성적인 필치로 90년대 한국문학의 특징을 새롭게 구축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에 출생하여 어렵고 힘든 어린시절을 보내고 70년대의 경제성장과 80년대의 집단적 정치담론 시기를 거친 그녀는 비슷한 동년배 작가들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상징되는 후일담 문학으로 일관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작품 세계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집단속에 머물러 있던 개개인이 집단 밖으로 나오면서 존재감을 부각시켰던 90년대의 시대적 배경과 대중의 요구와 잘 부합되었다고 하겠다. 어쩌면 이와 같은 우연적 일치가 그녀로 하여금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하게 만들고 2000년대를 지나오면서 작가로서의 확고부동한 위치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든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배드민턴치는 여자-1992년> <감자먹는 사람들-1996년> <부석사-2000년> 등은 상처받은 연약한 개인에 대한 '랩소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배드민턴치는 여자>는 여성이 스스로 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남성의 욕망에 '의해' 혹은 욕망에 '대한' 객체로 등장한다. 신경숙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특정한 이름없이 3인칭으로 불리우는 경우가 많다. <배드민턴치는 여자> 역시 화자인 그녀에게 전해진 명함으로 '이세호'라는 이름이 등장할 뿐 구체적인 이름이나 호칭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작가와 등장인물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함이고 이와 같은 '작가-등장인물'간의 거리는 '독자와 등장인물간의 거리를 결정한다. 즉,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감정이입을 최대한도로 억제시키려는 작가의 계산된 의도라고 할 수 있겠다.

 

화원에서 일하는 '그녀'는 사진기자인 '그'의 갑작스러운 술자리 고백에 이리저리 휘청거린다

나, 할 말이 있어.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지난 여름에 그놈의 바이올렛 때문에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알아? 당신 내 카메라 바라보느라고 눈 내리깔고 있을 때, 아 이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눈썹도 있구나, 내낸 생각했지. 내 마음 몰랐지요?

                                                                      -신경숙, <배드민턴치는 여자- 中>

 

남자의 작업성 멘트와 민소매 브라우스 밑의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시작으로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갈구하게 된다. 하지만 유부남인 그는 사랑에 쫒겨 자신을 찾아온, 회사앞의 카페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도 못 알아본다.

 

절망한 그녀는 베드민턴을 치고 있는 짧은 치마의 여자들을 '야릇하게' 쳐다보던 인부들이 앉아 쉬었던 공사현장으로 찾아가 포크레인 위로 기어올라간다. 그리고 스스로를 '매장'시켜 버린다. 물론, 여기에서 포크레인은 남성성과 욕망의 주체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거대하고 강한 가부장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힌다.

당신은 잊었지? 그날 밤 내 소매 없는 자줏빛 실크 브라우스 밑의 팔뚝에 돋아 있던 좁쌀 만한 소름들, 그걸 쓰다듬어 주었던 일을, 당신은 잊었어, 내가 어떻게 해야 당신이 나를 기억할까.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매장할 흙이 없어 손짓을 멈추고 밤 별들을 눈으로 올라다본다. 그의 얼굴이 잠시, 별들 속에 섞여 피어났을 때 그녀 눈 속의 공허함이 잠시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곧 다시 초점이 없어진다. 너무 짧은 공허한 빛남. 지금 그녀는 넋을 잃었을까? 공허한 빛남이 사라지고 난 뒤 그녀는 아무 짓도 안 하고 끄덕끄덕 졸고만 있다.

                                                                  -신경숙, <배드민턴치는 여자- 中>

 

 

고흐의 작품명이기도 한, <감자먹는 사람들>은 서간체 형식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감자먹는 사람들>은 전북 정읍의 한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성장과정과 환경 및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들에 대한 사유가 가장 많이 투영되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신경숙 작가는 '밥을 한 소쿠리 비벼 놓자, 어린 자식들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것을 보고 두렵고 무서웠다'라는 부친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구로공단에서 일하면서 산업체 야간 고등학교를 다닌 작가의 이력을 보아도 힘든 노동을 묵묵히 견디며 조촐한 양식으로 기꺼이 끼니를 때우는 '감자먹는 사람들'의 초상은 그리 멀리 있는 것같지 않다.

 

<감자먹는 사람들>의 작중 화자는 뇌수 속을 떠다니는 석회질로 인해 걸핏하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입원 중인 아버지를 돌보고 있다. 음반을 냈으나 인기를 얻지 못한 무명 가수인 화자는 공교롭게도 등단은 했으나 대표작도 없고 이름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신예작가시절의 작가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감자먹는 사람들>의 작중 화자의 아버지는 한의원이었던 부친이 전쟁 직후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을때 종가 큰형님을 치료하러 찾았다가 병이 옮아 그만 이틀 간격으로 부친과 모친을 모두 잃고 모진 세상을 살아온 이다. 그런 이의 독백을 읽고 있자니 마음속으로 두갈래 물길이 저절로 생겨 흘렀내렸다.

 

이 천지간에......아베 어메를 이틀 사이로 다 잃고 나니께는 입이 닫혀버리더라. 아베 어메를 다 묻고 나서는 그만 나도 죽어버리야지 했다. 단 하루도 살어갈 자신이 없드라. 눈을 뜨면 무서운 생각만 왈칵 밀려들고 문을 열고 대문을 보면 금세 아베 어메가 들어설 것만 같고......세상 사람덜이 모두 다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고 그만 죽어버리야지 해서 철길로 안 나갔냐. 근디 죽게 되질 않더라. 기차가 오면 뛰어들어 버릴 생각으로 나갔는디 마음과는 달리 머리서 기찻소리가 들리면 논둑 뒤로 몸을 숨기곤 했어. 기찻길 너머로 멀리 선산이 보이지 않겄냐. 온종일을 그 자리에 앉어서 울었다. 그 어디께 아베 어메가 있겄지 쳐다봄서 온졸일 울었더니마는 목이 쉬어서는 그나마 닫힌 입이 더는 한마디로 안 나오더라.

(......)

너그덜이 생기고부터는 세상이 덜 무섭고 조금은 만만해 비더라. 나는 암말도 않고 너그덜 가르치는 일로만 살았어야. 누가 시비를 붙여도 속으로 그맀다. 내 자석들이 핵교 다니고 있으니께 너그덜이 나한테 그리 봐야 암 소용 없다. 한때 집을 버리고 다르케 살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근디 양친 잃고서 그토록이나 무섭든 내 맴이 나를 붙들더라. 내가 다르케 살자고 너그덜을 무섭게 할 수가 없드나. 나는 가진 것은 없으니께 어떻게든 핵교에나 보내서 배울 만큼은 배우게 혀서 지 걸음들을 걷게 해주야지......그 생각이 마음조차 다물게 허더라.입이 다물고......또 입 다물고 말았던 내 맴이 내 병이다. 그것이 내 머릿속을 그르케 만든 것이여. 너거 어메조차 나한티 어째 그르케 말을 안 허냐고 답답히서 살지를 못허겄다고 해도 나는 암말도 안 허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였다. 말이 무서웠지야. 천지간에 양친도 없는 사람이 허는 말을 누가 듣기나 허겄나 싶기도 허더라. 근디 그것이 병이 되야서 돌아왔는갑다......안 글면 어쩌서 내가 이렇다냐?

- 신경숙, <감자먹는 사람들> 中-

 

가진 것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아무말도 안 하는 것은 몰라서 혹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침묵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무기였음을......

 

행운과 불운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도 선과 악을 구분하지도 않은 채, 누구에게나 느닷없이 찾아든다. 철거덕 철거덕 달려오는 기차의 강철 바퀴 소리처럼.

 

 

신경숙의 <부석사>는 나에게 아주 특별한 작품으로 다가왔다.

작품 속 공간적 배경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산 아래의 오피스텔이며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길에 들어서 있는 양로원이며......

말하자면, 내가 여섯살때부터 30년 넘게 살아온 세검정 일대-좀 더 정확하게는 구기동-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북5도청이며 청록양로원(작품에서는 이름을 살짝 바꾼 듯, 정식명칭은 청운양로원)등등 작품을 읽는 동안 마음만은 추억속의 '그곳'을 헤매이고 있었다.

 

암튼, 지금은 이사를 왔지만 계절마다 버스를 타고 부암동 언덕을 지나 세검정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내가 졸업한 세검정초등학교를 지나는 그 순간만큼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회에 빠져들곤 한다.

 

<부석사>라는 작품을 잘 살펴보면, 작가가 작중 화자가 사는 '그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는 개연성이 있다. <감자먹는 사람들>속에서 주인공의 큰 오빠가 처음으로 집을 샀던 동네가 '역촌동'으로 나오는데 역촌동은 구기동에서 터널 하나만 건너면 금방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부석사>의 여주인공이 올케 언니네를 방문하여 이것저것 밑반찬을 찬합에 담아 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혹시 그 올케 언니네 동네가 구기동에서 가까운 역촌동은 아니었을까?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가공의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실제하는 그곳과 너무나도 유사한 것이 매우 신기했다.

 

내 머리속으로 마치 마쓰모토 세이초가 모리 오가이의 고쿠라 일기를 바탕으로 <어느 고쿠라 일기전>을 쓴 것처럼 <부석사>를 배경으로 한 글을 한편 써볼까? 하는 생각이 삐져 올라온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자, 그럼 이제부터는 작품 <부석사>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1월1일 부석사를 향해 출발한 남녀는 결국 <부석사>에 가지 못한다.

이들은 같은 오피스텔에 거주한다는 점과 종종 북한산 산책길에 남의 집 텃밭에서 야채 서리를 함께했던 '인연'으로 새해 첫날 실과 바늘이 통과할 정도로 살짝 떠 있다는 부석(浮石)을 보기 위해 가볍게(?) 부석사에 갈 약속을 한다.

여자는 자신을 배신하고 영문학계의 원로의 딸과 결혼해버린 P의 돌발적인 방문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남자는 자신이 촬영한 다큐멘터리가 실화가 아닌 꾸며진 것이라는 소문의 진원지인 박PD의 방문을 피하기 위해서......

아, 참! 그리고 동료(?)에게 공격을 받은 경험을 갖고 있어 개를 무서워하는 개도 함께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부석사를 찾아가는 길위에서 여자친구에게 배신당한 남자와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은 여자는 과연 새로운 인연이 될 수 있을까.

 

부석사를 찾아가는 길에 두 사람이 탄 차는 눈길에 길을 잘못 찾아들어 낭떠러지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그러나 작품은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을 그들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희망도 실망도 아직은 이르다. 아니 어쩌면 살짝 떨어진 상태로 언젠가는 맞닿을 것이라는 희망 하나로 천만년을 함께 해온 부석처럼 인간 관계 역시 희망과 실망이 살짝 살짝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이 내리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귓결에 머무는데도 그는 눈을 뜨지 못했다. 박PD는 돌아갔을까. 그들이 찾지 못한 부석사가 바로 근처에 있는 겐가. 희미한 범종 소리가 눈을 뜨지 못하는 그의 구에 머문다. 그녀도 범종 소리를 들었는지 손을 뻗어 첼로 소리를 줄인다. 종소리가 눈발 속의 골짜기를 거쳐 그들을 에워싼다. 여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마음뿐이었다. 어깨가 내려앉는 듯한 피로에 점령되어 그는 점점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녀는 보온통을 기울여 종이 컵에 커피를 다른다. 수석사의 포캐져 있는 두 개의 돌을 닿지 않고 떠있는 것일까. 커피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자꾸만 자신의 얼굴을 쓸어 내리고 있다. 그녀는 문득 잠든 그와 자신이 부석처럼 느껴진다. 지도에도 없는 산길 낭떠러지 앞의 흰 자동차 앞유리에 희끗희끗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또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뒷자리에 개켜져 있는 담요를 끌어와 그의 무릎을 덮어준다. 그녀의 기척에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 그는 이 순간만은 반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혹시, 저 여자와 함게 나무뿌리가 점령해버린 옛집에 가볼 수 있을는지. 이제 차창은 눈에 덮여 바같이 내다보이지도 않는다.

                                                                                     -신경숙,<부석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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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10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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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목>은 이제는 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의 데뷰작이자 생전에 작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밝힌바 있다. 썸네일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박완서의 작품 세계는 6.25전쟁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나목> 역시 전쟁 기간 미군 PX에서 육체적 생존을 위해 정신적 생존을 저당 잡힌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작품을 <오발탄>이나 <수난시대>등과 같이 전쟁을 정면에서 다룬 전후 후일담 소설의 일환으로 볼 수는 없다. <나목> 역시 전쟁통에 두 오빠를 잃고 하루 아침에 생활전선에 뛰어든 젊은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1인칭주인공 시점의 애정소설이자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여타의 반전소설과는 달리 전쟁이라는 흔치 않은 체험이 개인에게 미치는 심리적 정신적 차원의 상처에만 천착하지 않는다.

 

 

작품 속 주인공인 이경은 물론 당연히 작가 자신의 투영이며 새파랗게 젊디 젊은 시절 그녀가 사랑했던 중년 남자는 박수근을 모델로 하고 있다. 다른 환쟁이들과는 달리 깊은 슬픔을 담고 있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슬픔을 보게 되고 또 바로 그러한 연유로 그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목>은 희생적인 이타적 사랑이라기 보다는 나르시시즘적인 이기적 사랑의 색채를 띠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랑은 눈먼 자기애로 끝나는 것이 아닌, 성숙한 자기 성찰로 마무리된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枝]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무,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의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에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썸네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 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대하며 그 여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음을 깨닫는다. -박완서 <裸木> 중-


1931년에 출생한 작가는 마흔살이 되된 해인 1970년 11월 동아일보 장편소설 부문에 <나목>이 당선되면서 등단한다. 40여년 전에 쓰여진 작품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읽는 내내 유행 지난 유행가를 듣는 것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한계인 설명하기식 전개 역시 작품을 읽는 밀도감과 긴장잠을 떨어뜨린다.

 

그렇지만 위대한 작가의 초기작들이 종종 갖고 있는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박완서의 <나목>은 사랑스럽다. 왜냐하면 '치유의 글쓰기'로 대표되는 박완서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11월...

내가 한창 자랄 때처럼 집집마다 수십포기씩 김장을 하던 시절은 더 이상 아니지만, 마지막 입새를 떨군 채 온몸을 부르르 떨며 겨울을 맞이하는 나목(裸木)들 만큼은 변함이 없다.

한올 하나 안 남기고 전부를 내놓을 수 있는 건, 아직은 저 멀리 있지만 분명 봄의 생명이 다가올 것임을 그래서 버린 것만큼 아니 버린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푸르름을 전해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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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릴 없이 조바심치던 그 연유를 이제서야 할 것 같다.

박완서는 스무살 즈음에 겪었던 체험을 바탕으로 쓴 <나목>이란 작품으로 등단했다.

내가 태어나기 바로 전 해인 1970년 마흔살의 나이에 말이다.

박완서란 작가가 등단한 바로 이듬해에 태어난 나는 올해로 마흔 한번째 해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마흔살에 쓴 작품 <나목> 역시 이제 막 마흔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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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이청준」 - 눈길, 서편제, 벌레 이야기 사피엔스 한국문학 중.단편소설 4
이청준 지음, 김준우 엮음 / 사피엔스21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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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일이다. 한국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의 작품 그것도 대표작을 이제서야 마주했으니 말이다. 도서관 사서로부터 건내 받은 책은 놀라울 정도로 두꺼웠고 또 많이 닳아 있었다. 두산동아에서 한국현대소설100권대계 시리즈로 출판되어 <병신과 머저리> <서편제> <눈길>등등 작가의 중단편 수작들을 알뜰이 담고 있었다.


 

 

썸네일 썸네일 썸네일

 

 

사랑도 너무 깊으면 상처가 되는 법이다.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어미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새벽길을 더듬어 아들을 배웅하며 솟구치는 감정을 다스렸으리라. 이른 새벽 굴뚝위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꾸역꾸역 하염없이 밀려 올라오는 그 감정을...

 

 

그런 어미를 따라가는 그 아들의 발걸음 또한 자꾸 흐트러진다. 야속하리만치 퍼붓기만 하는 눈발속으로 온 몸을 감추고만 싶었을 터. 살다보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어도 때론 현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기에 소년은 아직 한참이나 어리다. 그저 쏟아지는 눈발이 야속할 따름이다.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앞으로 감내해야 할 삶의 무게가 얼마나 크고 가혹할지 가늠조차 할 길 없는 아들로서는 배웅하는 어머니를 남겨두고 서둘러 버스에 오르는 일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눈길에 선명히 남아 있는 아들의 발자국을 보며 돌아갈 집 없는 마을로 되돌아가는 어미의 슬픔을 아들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아들이 떠나버린 시골 버스터미널 대합실에는 모정(母情)만이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

 

한해가 가고...

두해가 가고...

십년이 지나고...

또 십년이 지나도...

 

새벽의 눈길 위에 모자(母子)는 여전히 서 있었던 것이다.

 

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면해 온 건 어미에 대한 부양 의무가 아니라 바로 그 슬픔이었으리라. 새벽 눈길 위에 꾹꾹 찍힌 아들의 발자국을 보며 오던 길 되짚어 가던 어미의 그 슬픔말이다.


 

부모 자식간의 인연은 '천륜'이라 한다.

이처럼 '뻔한' 내용의 '뻔한' 슬픔에...

나는 또 그 '뻔한' 눈물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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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냐 추녀냐 - 문화 마찰의 최전선인 통역 현장 이야기 지식여행자 3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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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냐 추녀냐>는 요네하라 마리의 생생한 통역 경험담을 묶은 것으로 1995년 요미우리 수필부문 수상작이다. 대부분의 통역 이론서들이 난해하거나 통역사들의 개인적 체험 위주여서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과는 달리, 그녀는 한껏 몸을 낮춰 독자들과 눈을 맞춘다. 통역과 번역의 차이 그리고 통역에도 동시통역과 순차통역이 있다는 것 등등...요네하라 마리와 함께라면 어렵고 복잡한 혹은 베일에 가려 있는 통번역의 세계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통번역사를 꿈꾸는 이들이나 일반인 모두 일독할 만하다.


당연히 완벽하고 이상적인 통번역은 일단 원문에서 전달하려는 내용을 남김없이 정확하게 전해야 한다. 그리고 번역이라면 원래 그렇게 쓴 것처럼 자연스럽게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통역이라면 원래 그렇게 발언한 것처럼 자연스럽고 무리 없고 거슬리지 않아야만 우리는 좋은 통번역이라고 판단한다.

(...) 그리고 역문의 좋은 정도, 역문이 얼마나 정돈되어 있는지, 편안하게 들리는지를 여자의 용모에 비유하여, 정돈된 경우에는 미녀, 아무리 봐도 번역한 티가 나면서 어색한 역문일 경우에는 추녀라고 분류하면 네 가지 조합이 생기는데 다음과 같다. 정숙한 미녀, 부정한 미녀, 정숙한 추녀, 부정한 추녀.

-미녀냐 추녀냐 中-


 

요네하라 마리의 설명에 의하면,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통번역 즉 '정숙한 미녀'일테고, 가장 안좋은 경우는 아름답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통번역 즉 '부정한 추녀'일 것이다. 그러나 통번역사가 신이 아닌 바에야 언제나 어느 분야에서나 완벽한 결과물을 도출해낼 수는 없으니 '정숙한 미녀'는 그저 지향할 뿐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만찬가지로 언제나 어느 분야에서나 부정확한 오역과 세련되지 못한 통번역으로 일관한다면 아무도 일을 맡기려 하지 않을 것이니 자연스럽게 퇴출되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직역과 의역, 오역과 정역 사이에서 피 말리는 재주를 부려야 하는 통번역사로서 그녀의 '미녀와 추녀론'에  크게 공감하며 무릎을 쳤다. 뿐만 아니라, 출발어를 듣거나 읽은 후, 도착어로 말하거나 쓰는 통번역의 과정을 '블랙박스'에 비유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고 많은 학자들이 연구해 왔던 통번역이 이루어지는 과정 즉 통번역사의 두뇌 활동 과정은 사실 '검은 비밀의 세계'처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개발된 그 어떤 통번역기기들도 통번역사를 100%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래에 대해 단정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만 기계문명이 발전을 거듭한다하더라도 인간 통번역사를 대체하는 기계장비의 출현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참! 그리고 <미녀냐 추녀냐>를 통해 일본의 통역세계와 한국의 통역세계의 가장 큰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일본에서는 도착어보다는 출발어를 모국어로 하는 통역 즉, '정숙한 추녀'가 '부정한 미녀'보다 훨씬 선호된다는 것이다. 출발어를 모국어로 하는 통역사의 통역은 비록 거칠고 어색한 면이 있지만 원문을 오해하거나 곡해할 가능성은 극히 낮은 반면, 도착어를 모국어로 하는 통역사의 통역은 자연스러우나 원문이 모국어가 아니므로 그만큼 못 알아듣거나 오해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과연, 정확성을 추구하는 일본인답다. 섬세함이나 정확성 면에서 일본에 훨씬 못 미치는 한국은 통역 분야에서도 보여지는 결과와 겉치레에 더 치중하는 것같아 씁쓸하다.


그리고 저자가 러시아어 통역사이다보니 러시아와 관련된 일화와 러시아어-일본어 간의 통번역을 다루고 있어 한국인 독자들에게는 이해가 잘 안 되거나 공감의 정도가 다소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옥의 티'라 하겠다. 그렇지만 이 책의 역자 역시 이대통번역대학원 출신이라 일반 번역사라면 달리 해석하거나 표현될 수 있는 부분들을 놓치지 않고 적확하게 옮긴 점은 미덕이라 할 만하다.


끝으로,요네하라 마리의 책들을 접하면 접할수록 떠오르는 질문 한가지가 있다.

'난다 긴다하는 한국의 그 많은 동시통역사들은 다들 어디로 간 걸까?'

나 역시 밀려드는 자괴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동안 몇 권의 번역서가 출판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번역사로서의 사회적 역할과 임무에 충실했다고 스스로 자부해왔으니 말이다.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요네하라 마리처럼 일본에서는 자신의 직업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루고 직업적 체험을 바탕으로 책을 출판하는 일을 흔히 볼 수있다. 그들 역시 한국인들처럼 먹고 살기 바쁠텐데 말이다. 

세세한 일까지도 기록하고 정리하여 보관하는 일본인의 자세는 정말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분명 본받을 만한 점임에는 틀림없다. 그녀의 또 다른 책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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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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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학의 힘을 믿는다'라는 한마디의 말을 나는 믿었다.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의 작품을 단 한편도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읽는 방법>에 이어 <책을 읽는 방법>까지 단숨에 읽은 이유는 바로 그 '믿음'때문이었다. 

 

속도와 양을 점점 중시하는 시대에 '슬로 리딩'을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는 순수문학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장중한 울림이 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지금까지 독서의 질보다는 양을 중시하지 않았나 싶다. 최소한의 시간을 투자하여 최대한 빨리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어했으니 말이다.


참으로 어리석었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공감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거니와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 버리는 부분 또한 상당하면서도 버젓히 블로그에 독서일기를 썼다. 마치 난 이런 이런 책을 읽었노라고 자랑하는 것처럼...

 

사실 최근들어 우후죽순처럼 출판되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독서관련 서적들을 보면, '한달에 백권의 책을 읽으니 인생이 바뀌어 있더라'라는 식으로 깊이 있는 슬로리딩보다는 스피드리딩을 강조하고 있는 것같다. 물론, 다독(多讀)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독서 경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되고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 이와 같은 독서 경력은 일정 분량 이상의 책을 읽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를 포함하여 상당수의 사람들이 다독에만 치중한 나머지 정독의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은  '슬로리딩'의 중요성을 감지한 이들에게 슬로리딩의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기존의 독서관련 책들과 엄연히 구분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본 서적들이 그러하듯, 차례만으로 대략의 내용과 주제를 파악할 수 있도록 잘 짜여진 구성이 우선 눈에 띄었다. 뿐만 아니라 작가이기 이전에 독자로서 그리고 자칭 '슬로 리더'이자 '슬로 라이터'인 히라노 게이치로의 독서방법을 살짝 엿보는 즐거움은 '덤'으로 누릴 수 있다.

 

히라노가 주장하는 슬로 리딩의 몇 가지 테크닉을 나열하자면,

조사, 조동사에 주의하고 사전 찾는 습관을 기르며 작자의 의도를 파악함과 동시에 창조적인 '오독'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앞으로'가 아닌 '깊게' 읽을 것과 다시 읽기 즉 재독(再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읽기'만을 놓고 본다면, 나름 스스로 독서광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나는 유난히 '다시 읽기'에 인색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까지 '다시 읽기'를 일종의 시간낭비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수박 겉핥기'식 독서를 해왔단 말인가.

 

이 밖에도 '밑줄과 표시' 역시 슬로 리딩의 기술로 소개하고 있다.

참고로, 나를 예로 들어 말하자면 이 점에 있어서 만큼은 슬로 리딩을 실천하고 있는 것같다. 주로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는 관계로 밑줄은 그을 수 없지만, 그 대신 작은 수첩을 항상 휴대하면서 중요한 문장등을 수시로 메모한다. 그리고 메모하기에 분량이 다소 많은 경우에는 해당 페이지의 한쪽 모서리를 살짝 접어 놓는다. -게이치로의 설명에 따르면 서양에서는 이런 식으로 책 모서리를 접는 걸 'dog ear'라고 한단다- 나중에 블로그에 독서일기를 쓸 때 인용하거나 다시 찾아보기 쉽도록 하기 위함이다. 

 

슬로 리딩 실천편에서는 8명의 작가의 여덟편의 작품을 텍스트로 삼아 어떻게 슬로 리딩을 하는지 혹은 슬로 리딩의 결과로 작품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작년에 읽었던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으로 더 한층 이해가 깊어진 걸 실감할 수 있었고, 안락사 문제를 다룬 모리 오가이의 <다카세부네>편을 읽을 때에는 일본 현대 문학에서의 모리 오가이의 자리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마쓰모토 세이초의 <고쿠라 일기전>을 비롯하여 세이초의 작품 세계에 자주 등장하는 모리 오가이를 히라노 게이치로도 언급한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 밖에도 카프카의 <다리>에 대한 분석은 그 자체만으로 한편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매우 짧은 작품인 <다리>는 카프카의 <변신>과 비견되는 작품이라는데, 나는 처음 접하는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기에 전문을 옮겨 본다.

 

  나는 뻣뻣하고 차가웠다. 나는 다리였다. 어느 심연 위에 나는 있었다. 이편에는 두 발끝이, 저편에는 두 손이 뚫고 들어가 있어, 부스러 떨어지는 진흙을 나는 단단히 붙들고 늘어지고 있었다. 치맛자락이 내 옆구리 쪽으로 날렸다. 아래 깊은 곳에서는 얼음 같은, 숭어들 노니는 개울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다니기 어려운 고지(高地)로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관광객은 없었다. 이 다리는 지도에조차도 올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ㅡ그렇게 나는 누워 기다렸다. 기다려야 했다. 무너지지 않은 바에야 한번 만들어진 다리가 다리이기를 중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번은 저녁 무렵이었다ㅡ그게 첫번째 날 저녁이었는지, 천번째 날 저녁이었는지는 모르겠다ㅡ나의 생각이란 항시 뒤죽박죽이 되었고 항시 빙빙 돌았으니. 여름 저녁 무렵 한층 더 어둡게 개울이 좔좔 흐르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에게로 오는, 나에게로 오는 발소리. 몸을 쭉 펴라. 다리여, 당당한 태세를 취하라, 난간 없는 들보여, 너에게 몸을 맡기는 이를 받쳐주어라. 그의 걸음걸이의 불안정을 눈에 띄지 않게 메워주어라. 그래도 그가 흔들거리거든 신분을 밝히고 나서 산신(山神)처럼 그를 건너편 땅에다 휙 집어 던져주어라.


그가 왔다, 그는 지팡이 끝에 박힌 쇠징으로 나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그거로 내 치맛자락을 걷어올려 내 몸위에 가지런히 해주었다. 무성한 내 털 속으로 지팡이 끝을 옮기더니 그 지팡이를 , 아마도 격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며, 오래 털 속에 눕혀져 있게 버려두었다. 그 다음에는 그러나ㅡ마침 나는 그를 따라 산골짜기 너머로 아득히 꿈에 잠겨 있었다, 그가 두 발로 내 몸 한가운데서 뛰어올랐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면서도 격한 고통에 몸서리를 쳤다.


그게 누구였을까? 어린아이였을까? 꿈이었을까? 노상강도였을까? 자살자? 유혹자? 파괴자? 하여 나는 그를 보려고 몸을 틀었다. 다리가 몸을 틀다니! 미처 몸을 다 틀기도 전에 나는 벌써 추락하고 있었다. 추락하였다. 그리고 어느덧 산산히 찢기고 찔려 있었다. 격류(激流)속에서도 항시 그렇게도 평화스럽게 나를 응시했던 삐죽삐죽 솟은 돌멩이들에.

 

-프란츠 카프카, <다리> -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작품을 관료제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고 있다. 산이라는 거대한 전체에 속한 작은 다리는 사회에 속한 일개 개인으로, 필사적으로 버텨내는 다리를 직업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대사회의 직장인으로 대치시킨다.

 

   <다리>가 섬뜩한 분위기를 풍긴는 것은, 그러한 회사에서의 역할을 빼앗기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서야 '나'는 '꿰뚫림'우로써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가 잡고 있는 산(사회나 제도)역시 끝부분부터 '부슬부슬 무너져내리고'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그'가 누구였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낙하 장면에서도 '그'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기술은 없다.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나'가 정말로 자신의 역할과 합치하고 있는지를 충격을 통해 시험해보는 자이다. 보통은 권력자로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 충격은 그를 일상(='다리'로서 계곡에 걸려 있는 것)에서 일탈 시킬 정도였고, 그 때문에 그만 몸을 틀어버렸다. 누구일까? 전 쟁 등과 같은 파멸적 상황의 비유일까?ㅡ유감스럽게도 여기서 더 파고들 수는 없지만, 이러한 수수께기를 늘 기억하고 있으면 책을 읽고 있지 않을 대에도 머릿속에서 계속 슬로 리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작품을 다시 읽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때마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 <책을 읽는 방법> 제3부 동서고금의 텍스트를읽다: 슬로리딩 실천편 中-

 

히라노의 해석에 공감하면서도 두 가지 의문이 남는다.

 

하나는 '내 치맛자락을 올려 내 몸위에 가지런히 해주었다'라는 문장으로 보아, 다리의 성(姓)을 여자로 봐야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그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으니 작품을 관료사회의 비판으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지 않을까. 카프카는 어째서 다리에게 '치마'라는 여성의 옷차림을 부여했을까? 그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두번째는 히라노는 다리가 무너져 내린 이유를 일상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권력자'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나는 다리의 무너져내림이 권력자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행위 즉 '피동'이 아닌 사회권력에 대한 능동적인 저항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다리는 그 '누구'인지 모를 인물이 맞은 편으로 건널 수 있도록 묵묵히 견뎌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몸을 틀었기 때문이다. 

 

 '그게 누구였을까? 어린아이였을까? 꿈이었을까? 노상강도였을까? 자살자? 유혹자? 파괴자? 하여 나는 그를 보려고 몸을 틀었다.'                                             -프란츠 카프카, <다리> 中-


다리의 무너짐(=죽음)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와 같은 절규이자 굴종의 삶에 대한 도전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계시다면, 히라노의 해석에 토를 단 것이 아니라 그의 슬로 리딩을 실천한 과정에서 얻은 결과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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