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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여자
권우정 감독, 소희주 외 출연 / 이오스엔터 / 2012년 8월
평점 :
"니네집은 시골이라 좋겠다."
그래 좋다. 우리집에서 먹는 채소며 곡식은 전부 유기농이다. 밭에서 직접 길러다 먹고 논에서 직접 추수해 도정한 쌀을 먹고 있으니까 말이다. 철마다 옥수수, 토마토, 고구마, 밤 등등 주전부리도 남아날 정도로 넉넉하다. 참기름, 들기름? 깨 길러서 방앗간 가져가 직접 짜다 먹는다. 중국산이 다 뭐냐. 우리집은 그런거 모른다. 집 근처에는 블루베리, 포도, 머루, 자두, 복숭아 나무도 있다. 약 안처도 열매 실하게 맺어서 먹고 남으면 술 담글 정도로 푸짐하다. 게다가 이게 다 공짜다. 그저 밭에 나가서 캐고, 따고, 털어오면 된다. 그뿐이냐. 우리집은 김장할 때 무, 배추, 파, 마늘, 고추, 생강 하나도 안산다. 심어먹으니까.
"그래? 좋겠다. 나도 시골 살았으면 좋겠다. 땅 밟으면서 살고 싶어."
장난하냐? 이게 다 그냥 나오는게 아니다. 때되면 모길러서 논에 모내기 하고, 밭에 콩심고 깨심고 고구마 심고 고추심고 옥수수심고 이게 끝이 아니다. 가물면 물 대줘야지, 풀 자라면 메줘야지, 엇자라지 않게 줄도 줘야지 기타 등등! 밭일이든 논일이든 매일 매일 일이 끝도 없다. 농사 라고 하면 그저 제때에 심어주고, 제때에 재배하는 건줄 아는데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게 아니다. 밖에 내다 팔 정도는 아니더라도 내가족, 내식구 풍족하게 먹이려고만 하더라도 그게 노동량이 만만치가 않다 이말이다. 나는 아주 가끔 엄마 아빠 도와 손이나 더하는 수준이지만 일 한번 도와드리면 3일을 앓아 눕는다. '에이 씨, 그냥 사다 먹어!' 내가 해마다 이 말을 안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치가 않아요.
사람들은 시골에서 농사짓고 산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 근거없는 로망을 갖는다. 노력한 만큼 결실을 내어 주는 정직한 땅에 기대어 사는 삶, 눈치주는 상사나 괴롭히는 동료가 없는 자유로운 직장,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자연 친화적인 삶! 뭐 전부 맞는 소리다만, 농민으로 밥벌어 먹으며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아름답고 느긋한 삶이 절대로 아니다. 몸을 쓰는 일이니 고생스럽고, 고생스러운 반면에 수익은 날씨나 정부의 정책에 따라 로또 수준이다. 게다가 기계를 쓰는 일이 많고, 농약을 쓰기도 하므로 위험요소가 아주 많다. 말 그대로 3D업종인 샘. 평생을 땅을 밟으며 살아오신 나의 부모님은 항상 말씀 하셨다. '공부 열심히 해라. 그리고 너는 절대 농사 지으면서 살지 말아라.'
농촌생활에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때 마다 '고마 정신 차리소!'라고 외치고 싶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그런 로망을 갖게 된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고향 찾아 떠나는 여러 프로그램들, 아이돌들이 시골가서 일하는 프로그램, 귀농 체험 프로그램! TV에서 보여지는 단편적인 모습들이야 도시생활만 해 본 사람들은 이색적이고 좋아보이겠지만 막상 현실이 TV에 보여지는 것만 같으냐 이말이다. 결국 그럴듯 하고 아름다운 부분만 보여주는 TV의 탓이 크다.
그런데 이 영화는 100프로 리얼이다. 농촌에서 농민으로 산다는 건 이런 거예요~를 아주 리얼하게 보여준다. 감독은 여성 농민 3인과 1년여간 동거 아닌 동거를 하며 이 영화를 찍었다. 대학 공부도 한 여자들이지만 스스로 농촌에서 농민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여자들, 일명 땅의 여자들의 삶을 순도 100퍼센트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선보인 것이다. 농촌에서 산다는 것, 농민의 아내로 산다는 것, 농민의 며느리로 산다는 것, 농촌 아이들의 엄마로 산다는 것, 또한 한 사람의 농민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친숙하고 가식없이 보여줬다. 이런 삶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정말 특별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도 평범하다고 말한다. <땅의 여자>특별하고 평범한 그 사이 어디쯤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가 기획된 것은 2005년, 감독이 홍콩에서 있었던 WTO 반대 투쟁에서 아주 특별해 보이는 두 여자를 만났을 때부터 이다. 당시 투쟁에 참가 했던 강선희 씨와 그녀의 시어머니의 모습은 고부간이 아니라 농촌 문제 해결을 위해 결의한 ‘동지’ 같았다고 감독은 전한다. 그녀들의 인상적인 모습에 호기심을 갖게 된 감독은 그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했고, 결국 그들의 사는 진주시 지수면에 머물며 그들을 촬영할 것을 허락받는다. 소희주 씨의 도움으로 마을 빈집에 거주하며 그녀들의 농사일을 돕고, 그녀들의 농민 모임에 동참하고, 그녀들의 안방까지 드나들며 리얼한 땅의 여자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게 된 감독, 그녀가 농촌의 여성 농민들의 삶을 이야기 한다.
대학 시절부터 농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아가씨들은 ‘나는 나중에 농촌에 시집가서 살 거야’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다녔고, 그 특별한 선언을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된다. 그 인연은 세 아가씨가 같은 농촌 마을에 시집을 가게 되면서 진득하게 이어지게 됐고 그 결과 아가씨들은 아지매가 되어 벌써 13년째 마을 주민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단다.
농사일과 농민회 간부 일을 겸하느라 엄마로서도 아내로서도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는 소희주 씨는 남편의 눈치와 핀잔도 불사하며 열심히 농민회 활동을 한다. 여성 농민모임을 이끌며 다양한 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정부의 부당한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백발이 성성한 농촌 아지매들을 모으고 단풍놀이 가는 것처럼 시위를 하러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남편과 밭일을 하고 집에 축사를 짓고 소들 들이며 바쁘게 농민으로의 삶을 살아간다.
강선희 씨는 농사일에 영 소질이 없다. 그녀는 밭일보다는 마을 아이들의 선생님 노릇을 더 잘한다. 그런 선희 씨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것은 그녀의 시어머니로 며느리의 바깥일을 열심히 내조해 주신다. 선희 씨의 남편은 젊은 날 열정적으로 농민 운동을 벌였던 사람이지만 덕분에 심각한 지병을 얻어 버렸다. 아픈 남편과 농사일을 맡아 주시는 시어머니를 뒤로 하고 선희 씨는 농민회 활동과 농민 권익 신장을 위한 정당 활동에 열심히 참여한다. 항상 가족들에게 미안한 부분이지만 선희 씨는 농촌의 문제들을 무시하며 농사만 짓고 살 수는 없다. 물론 그녀의 활발한 활동은 그녀를 지지해 주는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변은주 씨는 농촌에서 여성 농민으로 산다는 것의 고충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농민의 아내로, 농민의 며느리로 살며 집안 농사일의 주도권에서 항상 뒷전일 수밖에 없는 본인의 입장은 때때로 회의스럽다. 은주 씨는 최근 시댁으로부터 분가했다. 분가를 하기까지 시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평생 시부모를 모시며 농민의 며느리로 살아오신 시어머니는 은주 씨를 이해할 수 없고, 은주 씨도 그런 시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함께 살아간다. 함께 일을 하고 함께 밥을 먹는다. 서운한 부분은 남편과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며 얘기하고 쿨하게 풀어버린다. 최근 은주 씨는 사회복지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농민의 아내로, 며느리로 정신없이 역할에 치여 살아오면서도 놓지 않았던 꿈에 한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카메라는 그녀들의 일터와 모임은 물론 안방과 주방까지 못가는 곳 없이 다니며 그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다. 이것이 바로 100프로 리얼! 농촌에서 농민으로 살아가는 땅의 여자들의 삶이다.
영화는 무언가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농촌에 지금 이런 문제가 있으니 우리 모두 관심을 갖고 해결하자! 는 것도 아니고, 농촌 생활은 이렇게 좋은 것이니 우리 모두 귀농합시다! 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농촌에 사는 여성 농민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뭐랄까, 스크린으로 옮겨진 ‘인간극장’이랄까?
뭐 그래서 좋다. 포장되지 않은 농촌에서의 일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농촌 생활에 근거 없는 환상을 품고 있는 이들이 불편한 나는 진짜 옆집 아줌마 얘기 같은 이 다큐멘터리가 퍽 인상적이었다. 일반인들이지만 카메라를 전혀 불편해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개하고 허심탄회하게 감독과 소통하는 땅의 여자들을 보며 이렇게 되기까지의 감독의 노력이 보일 것도 같아서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게 탄생한 영상이 정말 리얼하고 꾸밈이 없어서 보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다만 조금 산만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더라.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농촌에서의 일이란 것이 단순해 보이지만 가짓수도 많고 할 일도 많기 때문에 일하는 모습만 담아도 번잡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농민회에 참석하고 각가지 활동을 벌이는 모습도 더해졌는데다가 세 명의 여인들의 일상을 그런 식으로 교차 편집되어 있으니 당연히 보기에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기 전에 농민운동에 남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는 여성 농민들의 일상이라는 소개를 봤는데 그럼 농민 운동을 하는 모습을 집중해서 다루려나, 농민으로서의 모습을 집중해서 다루려나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결국은 어느 한쪽에도 추가 기울지 않더라. 어느 쪽 기우는 것은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그들의 사는 모습을 담아 내고 싶었던 거 같은데 그렇다면 구태여 그런 캐스팅이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뭐 조금, 아주 살짝. 내가 농촌 아지매들의 일상을 너무 친숙하게 접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삶’은 어디에라도 존재한다. 그것을 특별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특별할 것이고,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해 버린다면 그냥 그런 것이다. 다만, 다르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보든 경이로울 것이며 느끼는 것이 많을 것이다. 농촌 라이프에 남다른 로망을 갖고 있는 사람, 다른 삶의 모습에 다채로운 감상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은 이 영화가 아주 보석 같을 것이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