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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1 ㅣ 지혜가 드는 창 44
진중권 지음 / 새길아카데미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예술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살았다. 특별히 뛰어난 재능이 있거나 여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처럼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과는 상관없는 세계라 여겼다. 역사 공부할 때는 예술사 때문에 짜증났다. 그 부분이 외울 건 무척 많은데 알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심 가지 않고, 어렵고, 부담스러운. 잘 나고 돈 많은 사람들이나 거들먹거리며 아는 척하는. 내게 ‘예술에 대한 지식’은 그런 영역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을까? 생각해보면 편식이 너무 심했던 것 같기도 하다.
“유명한 미술사가 곰브리치에 따르면,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린 오로지 눈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개념적 사유를 하는 인간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知)의 도식’을 적용하게 된다. 말하지만, 시지각(視知覺) 자체가 벌써 개념적 사유라는 색안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p26.
우리가 어떻게 보는가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같다.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어떻게 보는가가 정해진다. 보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판단하는 일은 무엇이 가치 있는가를 판단하는 일과 같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 여기면 그것을 좋아하게 되고, 반대로 추하다 여기면 싫어하게 된다. 사실 대개 사람들은 옳고 그름보다는 좋고 싫음을 가지고 판단한다. 이렇게 보면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틀이 곧 세상이 어때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틀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수많은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산다. 하지만 어떤 것을 왜 아름답다 여기게 되는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내가 어떤 것을 왜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는지는 진지하게 돌아보면서도, 내가 걸그룹의 늘씬한 몸과 예쁘장한 얼굴 앞에서 왜 침을 흘리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취향의 이유를 나도 모른다. 어쩌면 진짜 내 취향이 무엇인지마저 생각해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미학은 아름다움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는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예술학’이라 부르기도 한다더라. 역사나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는 시대의 지배적 사고와 가치관에 갇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술을 나름대로 시각으로 바라보는 힘을 가진 사람은 자기 시대의 일반적 미적 취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는 만큼 남들이 말하는 대로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역사나 철학을 아는 것만큼 예술을 아는 것도 필요하다. 달리 생각해보니 예술을 ‘잘’ 보는 것이야 말로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예술 작품을 잘 알고, 예술가를 줄줄 꿰는 건 의미 없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바라봤는가를 아는 것. 어느 시대에 어떤 의도로 예술품을 만들었는지를 아는 것. 시대마다 예술의 기준과 미의 기준이 달랐으며, 그 기준들이 그 시대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었는지를 아는 것. 이 시대는 어떤 기준으로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게 우리 사는 모습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아는 것. 그래서 누구나 미학을 어느 정도 알아두는 게 참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학은 선뜻 다가가기 어렵다.
“미학 오디세이” 1권은 사람들이 예전부터 예술을 어떻게 생각했고, 아름다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다룬다.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미학사를 알 수 있다. 한 시대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가 예술로 드러난다. 그렇다보니 주술 신앙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 근대 헤겔까지, 우리가 철학자라 생각한 사람들이 예술과 미학을 이야기하며 책에 나온다.
철학도 다루다보니 책 난이도가 만만치는 않다. 하지만 글쓴이, 진중권은 참 어려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쉽게 설명하려 애썼다. 읽어보면 알게 된다. 설명이 얼마나 친절하게 잘 되었는지를. 알레고리, 파토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아나그노리시스 … 뭐 이런 신기한 말들을 참 재미있고 쉽게 만날 수 있다. 2권은 조금 더 어렵다고 하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다. 아무튼 1권은 예술을 전혀 모르는 나도 천천히 따라갈 만했다. 어렵지 않게, 그렇지만 가볍지 않은 수준으로 미학을 맛보기에 이만한 책이 또 있을까?
“우리가 아는 한, 감상을 위한 예술의 전통은 겨우 몇 백 년 밖에 안 된다. 르네상스 때조차 예술은 뚜렷한 실용적 목적을 갖고 있었다.” p30.
“우린 예술을 정서나 감수성 따위와 관련짓지만,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들에게 예술은 테크네, 곧 합리적 규칙에 따른 활동이었다. 따라서 당시엔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합리적 제작 규칙을 가진 모든 활동, 즉 의자나 침대를 만드는 수공 활동과 학문까지도 예술(테크네)로 간주했다.” p90.
아무도 학교 미술 시간에 알려주지 않은 이야기.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감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예술을 다뤘다. 그 목적은 바로, 예술로 ‘진리’에 다가서는 것이었다.
“예술과 진리를 연결하는 것 – 이게 바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수많은 미학적 변주곡의 중심 테마다.” p52.
예술은 가상을 만든다. 가상으로 현실을 보여주고 때로는 현실 이상의 그 무언가를 보여주려 한다. 옛 사람들은 ‘그 무언가’가 ‘진리’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가상과 진리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대략 두 가지 노선이 있었다. 플라톤은 예술이 가상을 포기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가상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은 그 뒤에도 여러 가지로 변형되고 뒤섞이면서, 미학사 속에서 자꾸 되풀이된다.” p5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둘은 예술로 진리에 다가서는 방법에서 생각이 달랐다.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를 오갔다.
“사물이 아름다우려면 엄격한 비례 속에 약간의 빗나감을 표현하고 있어야 한다.” p69.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은 완벽한 비례에 맞게 만들었다고 알았다. 그런데 그리스 조각의 ‘전형’이라는 작품들은 그런 게 아니었다. 처음에 완벽하게만 만드니까 뭔가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고 하다. 그래서 아주 살짝 어긋나게, 완벽함에서 빗나가게 표현하자 더 아름다워졌다고 한다.
왠지 삶에 적용해도 될 것 같은 이야기다. 뭐든지 너무 완벽하면 안 된다. 살짝 빗나가는 정도가 괜찮다.
“먼저 불완전한 시각 조건에 따른 변화들은 빼야할 거다. 진정한 미는 감각에 좌우되는 게 아니니까. … 원근법을 무시해야 한다는 얘기다. 또 형태를 마음대로 변형해도 안 된다. … 정신은 빛이고, 물질은 덩어리이자 어둠이다. 따라서 물질은 넘어서 정신에 도달하려면, 깊이와 그림자를 피하고 사물의 빛나는 표면만을 묘사해야 한다.” p118-119.
중세 사람들은 예술로 천상의 진리를 나타내고 싶어 했다. 영원한 진리는 이 세계가 아니라 피안의 ‘이데아’에 있다고 믿은 플라톤의 생각과 같았던 셈이다. 그러려면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흉내 내기보다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 모습으로 사물을 표현해야 했다. 원근도 없고 명암도 없어서 모든 게 허공에 붕 뜬 것처럼 보이는 어설픈 그림들. 그런데 그 그림들이 못났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었다.
“중세 예술은 예술사의 퇴보가 아니라 그 자체가 훌륭한 가치를 지닌 예술이다. 사실 묘사에서 물질세계를 희생했지만 인간의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힘에선 중세 예술을 따라갈 수 있는 건 없다.” p129.
하지만 지금 세계를 보지 않고 죽음 너머 다른 세상만 바라보는 사고방식은 시대 자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눈앞의 세상은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생각. 지금 삶의 모든 것이 죽음 뒤의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함이라는 생각. 죽어서 천국가기 위해서는 지금 오로지 신의 말씀만 따르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 과연 이렇게 살면서 누가 마음껏 웃을 수 있었을까?
“중세는 웃음이 없는 시대였다. 물론 이 숨 막히는 시대에도 통풍구는 있었다. 그건 카니발이라는 축제인데, 여기서만큼은 음탕한 행위와 우스꽝스러운 언동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이 며칠을 제외하면 사회는 늘 엄숙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교회는 종말론을 유포하여, 사람들을 늘 종교적 흥분 상태 속에 붙잡아 놓으려 했다. 종말이 온다는데 웃을 기분이 나겠는가?” p174.
그 뒤로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은 진리가 천상이 아니라 땅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천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진리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이었다. 그래서 예술도 변했다. 이제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을 긍정하고 똑바로 보기 시작한다. 진리는 바로 눈앞에 있다. 그래서 눈앞의 세계를 정확히 흉내 내는 데 몰두한다. 기하학을 응용한 원근법 같은 엄밀한 과학 법칙이 예술 영역에 들어왔다.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다 빈치에게 회화와 과학 사이엔 아무런 중요한 차이도 없었다. 그의 활동 자체가 그랬다. 그는 회화는 몇 점 남기지 않고 대신에 수많은 드로잉을 남겼는데, 어느 게 예술적 동기에서, 그리고 어느 게 과학적 동기에서 그린 건지 구분하기란 매우 힘들다. … 실제로 그는 모든 자연과학적 지식을 동원해 그림을 그렸다. 실제로 그의 그림 속엔 원근법은 물론이고 해부학, 생리학, 광학론, 색채론 등 온갖 자연과학이 다 들어있다.” p181.
예술가는 현실을 엄격한 법칙에 따라 묘사하면서 세계를 진실하게 드러낸다. 그렇게 진리에 가까이 간다. 예술은 르네상스 시대에 과학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예술을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다 빈치는 예술의 목적을 외부 세계의 과학적 인식에 두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아름답다고 항상 좋은 것은 아니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에게서 예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미의 창조’에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미와 예술을 밀접히 결합시켰다.” p188.
이어서 17세기가 되면,
“루벤스의 그림이 보여주듯이, 바로크 예술은 르네상스나 고전주의와 매우 다르다. 윤곽은 뚜렷하지 않고, 묘사는 격정적이며, 구도는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p204.
예술의 목적이 점점 ‘진리 추구’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옮겨가고 있었다. 세계를 정밀하게 모사하기보다 윤곽선을 흐릿하게 만들고, 멈춘 모양새를 정확히 그리기보다 격동적인 움직임을 거침없이 묘사한다. 사람들이 찾기 시작한 건 어쩌면 사람 자체가 아니었을까?
18세기에 계몽주의와 합리적 사고방식이 발달하면서 예술 인식도 드디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는다. 이 때 미학이 탄생했다.
“이 시대 미학은 두 갈래로 나뉘어 발전한다. 하나는 대륙의 합리론적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의 경험론적 흐름이다. 어쨌든 18세기에도 고전주의적 관념이 여전히 우세했으나, 전 세기와는 달리 차차 예술은 ‘감성’의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p214.
드디어 예술을 감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예술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듯이.
“바움가르텐은 감성을 인식으로 간주함으로써 감성을 복권시켰다. … 예술을 ‘진리’의 전달 매체로 보는 근대 ‘진리 미학’의 전통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어 헤겔에게서 완성된다. … 또 하나의 노선이 나온다. 이 노선은 영국의 취미론에서 시작되어 칸트에서 완성된다. 이들에 따르면, 미는 ‘인식’이 아니라 ‘쾌감’이며, 예술의 본질은 ‘진리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 예술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상상력의 유희’며, 예술가는 고정된 법칙에 따르지 않고 ‘영감’에 따라 자유로이 창작을 한다.” p225-226.
예술을 ‘진리’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보는 관점에 이어 예술을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으로 생각하는 관점이 나타났다. 헤겔과 칸트가 각각의 입장을 대표했다.
칸트는 예술을 다른 무언가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처럼 미를 선(善)이나 진(眞)에, 예술을 도덕이나 종교 또는 철학에 종속시켰다. 하지만 우린 다르다. 우린 그저 즐거움 때문에 예술을 감상한다. …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순수 예술’, 즉 진리나 도덕적 교훈을 주지 않는 예술은 타락한 것으로 여겼다. 이런 이상한 생각에서 예술을 해방시킨 사람이 칸트다. 예술이 오늘날처럼 자기 고유의 ‘자율성’을 갖게 된 건 순전히 칸트 덕분인데, 우리가 예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대부분 그에게서 물려받은 거다. 가령 예술이 ‘형식’이며 ‘상상력’의 소산이며 ‘천재’의 산물이며…….” p229.
“예술을 천재의 소산으로 봄으로써 그는 고전주의 미학과 대립되는 새로운 미학에 길을 열어준다. 바로 ‘낭만주의 미학’이다. 예술가는 더 이상 규칙을 습득하여 자연을 모방하는 ‘장인’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내는 ‘천재’다.” p238-239.
이렇게 예술을,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것처럼 다들 보기 시작했다. 데이트하러 미술관에 갔다가 뭔지 모를 그림을 보고 감동을 느끼고, 그림인지 뭔지를 그리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진리를 찾는 치열한 싸움이었던 예술을 좀 더 소박한 모습으로 바꿔놓은 사람이 칸트였다. 경건함을 대신해 사람 감정이 들어찬다. 객관만 중요하게 생각하다가 이제는 주관 또한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세계 전체만 보던 눈을 돌려 개인도 바라보기 시작한다.
“테오도르 립스(1851-1914)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감정이입설’이라는 걸로 유명한데, 이는 현대의 주관주의적 미 이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객관화한 자기 향수’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감정을 자연 속에 집어넣은 게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거다. 자연의 아름다운 사물은 실은 우리가 그 속에 집어넣은 우리 감정이다.” p280-281.
반대로 여전히 예술은 진리를 향한다고 변함없이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헤겔이었다. 칸트는 예술을 도구에서 해방시켰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계속 진리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헤겔은 자연 세계가 처음에 어떤 절대자의 정신(이념)이 밖으로 표출되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거울을 보고 나를 발견하는 것처럼, 절대자의 이념은 자기를 찾으려 자연 세계에 스스로를 쏟아냈다. 자연 세계는 곧 절대자의 모습이다.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정신을 가진 존재는 인간이다. 인간은 절대자가 만들어놓은 자연 속에서 정신을 발전시켜가며 진리를 찾아간다. 세계를 만든 건 절대자이지만, 세계를 완성하는 건 인간의 정신이다. 인간이 진리를 찾으려 가장 먼저 사용하는 도구가 감각을 다루는 예술이다. 예술은 표상을 다루는 종교로, 다시 개념을 다루는 철학으로 역할을 넘긴다. 인간은 처음 감각 세계와 만나며 진리를 찾다가, 마지막에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절대자의 진리와 만나게 된다.
헤겔이 보기에 예술로 진리를 찾던 시대는 고대 그리스 때 정점을 찍고 저물었다. 인간 정신이 발달하여 감각을 직접 다루던 수준을 뛰어 넘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종교의 시대를 지나 철학의 시대가 다가왔으며, 세계가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보았다. 그럼 이제 예술은 진리를 찾는 도구에서 해방된 것일까?
“예술의 미래는 ‘종교’에 있다. … 이제 이념은 ‘감각’이 아니라 ‘표상’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 하지만 종교는 다시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이때쯤 세계의 역사는 저녁 무렵으로 접어든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철학)는 해질녘이 돼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고 한다.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힘차게 밤하늘을 날아오르면서, 세계의 역사는 완성에 도달한다.” p265-266.
예술은 처음에 주술이었다가, 천상의 영광과 진리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가, 시간이 흐르며 인간이 사는 세상의 진리를 찾는 도구로 땅에 내려왔다. 이제는 진리를 찾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람에게 즐거움과 쾌감을 주는 중요한 무언가가 되었다. 이와 함께 세상의 주인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정체 모를 주술이었다가, 천상 세계에 사는 위대한 조물주였다가, 살아 숨 쉬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인간이 되었다.
이 책은 대학생 때 겉멋 들어 사놓았다가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책장으로 들어갔던 비운의 주인공이다. 그때는 이런 걸 알아서 무슨 소용이냐는 마음이 컸다. 지금 와서 다시 읽어보니 이런 건 꼭 알아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을 보고 느낀다는 건 세상을 보고 느낀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예술도 결국은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는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진중권은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2권도 책장에 있다. 거기서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잠깐 훑어보니 현대 미술과 함께 진리는 무엇이고, 주관과 객관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다루는 것 같다.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