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보는 나, 착각하는 너 - 나보다 타인이 더 신경 쓰이는 사람들 심리학 3부작
박진영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을 즐겨 만나는 편이 아니다. 혼자 다니고 혼자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옆에 누가 있으면 좋지만 홀로 시간 보내는 쪽이 더 편하다. 칩거하거나 은둔하지는 않지만 그런 생활이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주말은 또 어떤가. 약속이 생기면 나가지만 약속 잡지 않는 하루가 반가울 때도 많다. 피곤할 때는 그냥 누구와도 말 섞지 않고 조용히 혼자 노래나 듣다가 잠들고 싶다. 누군가 나 같은 사람에게 꼬리표를 붙였다. ‘내향적 성격이라고. 나도 내가 그러려니 하며 살았다. 차라리 내 본성에 맞게 살자 싶었다. 혼자 있는 게 좋으면 쭉 혼자 있으면 되는 거다. 왜 다들 사람을 만나지 못해 안달인가?

 

그러나 글쓴이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사람 만나는 데 내향적 외향적 성격 따로 없다. 사람 좋아하고 찾는 건 사람이니까 그런 거다. 내향적 성격도 사람 만나는 걸 사실 좋아한다. 다만 외향적 성격보다 내향적 성격이 어떤 에너지, ‘사람 만나는 즐거움을 찾는 적극적 태도가 부족할 뿐이다. 생긴 대로 살라는 게 성격이 내향적이라고 외롭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내향적인 사람도 자기에게 맞는 방식으로 곁에 사람을 두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 ? 사람이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니까.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다. p14-15.

 

 

사람이 외로우면 우울하다. 게다가 몸까지 아프다. 반대로 아픈 사람은 누군가 곁에 있어주기만 해도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아픔은 곁에 있어줄 사람 하나 없다는 사실이며, 누군가 옆에 따뜻하게 있어줄 때 사람은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다.

 

실제로 곁에서 자신을 지지하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환자들이 그렇지 않은 환자들에 비해 병을 빨리 이겨내고 생존율도 높다. 또한 대체적으로 사회의 관계의 크기가 큰 것, 즉 단순히 친구가 많은 것보다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환자들의 건강에 더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p119.

 

 

사람은 누군가 옆에 있어야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속 얘기 털어놓고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보내는 삶이야말로 정말 행복 그 자체다.

 

인생은 시간이다. “인생을 잘 살았는가?”라는 질문은 순간순간의 시간, 즉 일상을 얼마나 잘 보냈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p98.

 

연구 결과 여러 가지 일상적인 활동 중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활동이 주로 행복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행복한 인생은 일상의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에 달려 있다. 이러한 결과는 행복하게 사는 데에는 곁에 있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종종 운동도 하는 것만 한게 없다는 걸 보여준다. p100-101.

 

 

다른 사람 마음을 알고 싶어서 심리학책을 들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보편적으로 어떤 생물이고, 어떤 마음을 타고 났는지를 더 잘 알게 되어서 좋은 것 같다.

 

나는 나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야 진짜 내가 될 수 있다. 잘 보이기 위해 깔끔하게 씻고, 옷을 차려 입고, 눈치도 봐가면서 자기를 조절한다. 그리고 옆에 누군가 있기에 마음껏 즐거워할 수도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건 다른 사람의 존재 때문이다.

 

글쓴이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사람은 어쨌든 사람과 함께 살아야한다.”

 

!’하고 그냥 흘려들었던 말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실험사례와 이론을 펼쳐 보이며 설득하는 글쓴이를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글쓴이는 한편 사람 사는 모습을 담백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때로는 그 모습이 아름답지 못하다 해도.

 

권력을 맛보게 되면 사람들은 공감능력(타인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함께 느끼는 것)과 조망수용능력(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것)이 떨어지게 된다. 이는 권력이 없는 사람은 권력이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고 의중을 읽어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그 반대는 잘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p262.

 

 

슬프다. 사람이란 알고 보면 얼마나 천하고 얄팍한 존재인가. 알량한 권력일지언정 그게 자기 손 안에 있으면 신나서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는 게 사람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무척 옳은 말이다. 다만 자리가 좋은 사람을 만드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권력자들은 어느 쪽일까? 자리에 앉을수록 훌륭해지는 편일까, 아니면 형편없어지는 편일까.

 

아래 내용은 더 슬프다.

 

모방 행동은 직장 상사 같은 권력자들 앞에서 더 활발하게 일어난다. <월 스트리트 저널>에 소개된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권력자들이 웃을 때 미묘한 미소까지도 열심히 따라하는 모습을 보인다. p272.

 

 

어머나. 세상에. 씁쓸하지만 부정하기 어렵네. 나도 혹시 무의식적으로 저러고 있지 않았는지 돌아본다.

 

사람은 알수록 참 재미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힘써서 스스로를 바꿔보는 일도 좋다. 하지만 때때로 사람은 사실 이런 존재구나하며 있는 그대로 자기를 받아들여볼 수 있다면, 사람을 알아가며 나도 그렇게 알아갈 수 있다면 사는 게 참 풍성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임 -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 찍다보면 놀란다. 분명히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가 또렷하게 찍혀있다. 내 눈은 분명히 뭔가를 봤지만 실제로 보지는 않았다. 내 눈은 그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모습도 똑같다.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지우는 기준틀. 모든 것은 ‘프레임’에 맞게 들어오거나 잘려나가거나.


영리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도 프레임을 늘 그럴싸하게 잘 잡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대로 보니까 잘 대처할 수 있겠지. 한치 앞도 못 보는 깜깜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모든 일에 프레임을 잘 잡고 있는가를 되돌아봐야겠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프레임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프레임은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작가가 작품 사진을 찍지 못하는 이유가 사진기의 성능에 있다기보다 ‘멋진 장면’을 포착하지 못한 데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p39-40.



프레임을 어떻게 잡고 보느냐가 무척 중요하다.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가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결정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게 될지를 그려주기도 한다.



상위 수준과 하위 수준 프레임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상위 프레임에서는 ‘Why’를 묻지만 하위 프레임에서는 ‘How’를 묻는다는 점이다. 상위 프레임은 왜 이 일이 필요한지 그 이유와 의미, 목표를 묻는다. 비전을 묻고 이상을 세운다. 그러나 하위 수준의 프레임에서는 그 일을 하기가 쉬운지 어려운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성공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지 등 구체적인 절차부터 묻는다. 그래서 궁극적인 목표나 큰 그림을 놓치고 항상 주변머리의 이슈들을 좇느라 에너지를 허비하고 만다. p24.



인식의 한계를 다루는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볼만하다. 사람은 모든 것을 두루 한 번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프레임한대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프레임은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경계, 한계선이 된다. 프레임은 ‘자기’가 될 수도, ‘현재 시점’이 될 수도, 아니면 다른 그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사람은 그 한계 때문에 어리석게 결정하고 행동한다.



미국 예일 대학교의 스턴버그 교수는 어리석음의 첫 번째 조건으로 ‘자기중심성’을 꼽고 있다. p77.


자기라는 프레임에 갇힌 우리는 우리의 의사 전달이 항상 정확하고 객관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전달한 말과 메모,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은 오직 우리 자신의 프레임 속에서만 자명한 것 일뿐, 다른 사람의 프레임에서 보자면 지극히 애매하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p79.


나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에, 내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현실 사이에는 어떤 왜곡도 없다고 믿는 이런 경향성을 철학과 심리학에서는 ‘소박한 실재론’이라고 한다. p80.


자기 프레임을 과도하게 쓰다보면 ‘나는 남들을 잘 알고 있는데 남들은 나를 잘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 나는 한눈에 척 보면 너를 알지만, 너는 척 봐서 나를 모른다는 생각이 깊게 깔려 있는 것이다. …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내면이 겉으로 잘 드러난다고 믿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특징적인 몇몇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나는 너를 알지만 너는 나를 모른다’는 생각은 자기중심성이 만들어낸 착각이고 미신일 뿐이다. 정답은 ‘나도 너를 모르고 너도 나를 모른다’거나 ‘나는 네가 나를 아는 정도만 너를 안다’이다. p91-93.



이래서 공자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근심하라”고 말했던 것일까? 내가 사는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사람은 현재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일까? 생각도 그저 현재에 갇힐 뿐이다. 현재 내 모습 때문에 과거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앞일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한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이 과거의 자신에게도 있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 다시 말해 사람들이 회상해낸 자신의 과거 모습은 과거의 실제 모습을 닮았다기보다는 현재의 자기 모습을 더 닮는다는 것이다. … ‘우리 땐 안 그랬는데’, ‘저 나이 때 난 그러지 않았는데’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하면 ‘정말 그랬을까?’하고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p106-109.


‘현재 프레임’은 과거에 대한 회상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측 과정에도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 애초에 미래에 대한 우리의 계획이 현재의 의지에 의해 지나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 미래를 예측할 때 현재 존재하는 자기 내면의 의지만 보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에는 존재하게 될 여러 상황 요인들을 고려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p116-120.



삶의 질은 미래 감정을 지금 어떻게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감정을 정확하게 내다보지 못한다. 자기가 미래에 뭘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선택을 하고서는 왜 그랬을까 후회하곤 한다. 글쓴이의 충고는 이렇다.



이제라도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는 항상 가장 좋아하는 것을 골라라. 좋아하는 것을 반복해서 선택했을 때가, 이것저것 다양하게 섞어놓은 종합선물세트를 골랐을 때보다 실제 만족도가 더 크다는 점을 기억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p123.



마음의 상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상처를 훨씬 빨리 극복할 테니 말이다. 다른 즐거움이나 몰두할 거리를 찾아내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뿐한 모습으로 금방 다시 돌아온다. 상처가 오래오래 나를 괴롭힐 것이라는 생각도 하나의 프레임일 뿐이다.



마음에도 심리적 면역체계가 존재한다. 실제로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이 시림 면역체계는 분주히 움직여서 우리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스스로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게 힘을 준다. 그러나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지 않은 현 시점에서 미래의 스트레스 상황을 상상만 할 때는, 그런 면역체계가 작동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부정적인 사건의 충격을 과대 예측하게 된다. p126.



이름을 잘 붙이는 건 중요한 일이다. 이름이 참 많은 것을 바꾼다. ‘이름 프레임’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영역이 돈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사람들은 돈의 출처에 따라 돈에다 갖가지 이름을 붙이고는 마치 서로 다른 돈 인양 차별해서 쓰는 습관이 있다. 특히 공돈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면 그 돈은 어차피 없었던 돈이라는 프레임이 작용하게 되고 결국 돈을 쉽게 써버리고 만다. … 지혜로운 경제생활의 출발은 돈에다 이름을 붙이지 않는데서 시작된다. 특히나 공돈이라는 이름은 피하는 것이 좋다. p135-137.



이런 내용도 재미있다. 내가 나름대로 숙고해서 내린다는 결정이 실제로 어떤 것이었나를 돌아보게 된다.



연구 결과는 어떤 대안이든지 그것이 ‘현재 상태’로 주어져 있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바꾸기보다는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이 처음 접하는 대안으로 제시될 경우에는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음에도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언가를 계속 유지하고자 할 때 그 결정은 객관적으로 최선의 것이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현재 상태’였기 때문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p174.



한 번 고른 물건은 쉽게 바꾸지 않는다. 그게 나의 미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게다가 좋다고 거듭해서 같은 대상을 고른 게 사실은 내게 그다지 좋은 결정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저 안이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다룬다. 어리석은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을 어리석은 구석을 알려준다. 책을 읽다보면 누구보다도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실제로는 많은 한계를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빤한 내용이 종종 보이고 중언부언 반복되는 내용도 꽤 있다. 하지만 거짓 위로나 누구나 하는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해놓은 많은 심리학책과는 다르다. 나를, 내 어리석음을 만나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얼마만큼 어리석게 태어나지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 말고는 내게 달린 문제다. 출퇴근길에 가볍게 읽으며 나의 태도와 생각 습관을 정리해볼만하다.



삶의 상황들은 일방적으로 주어지지만, 그 상황에 대한 프레임은 철저하게 우리 자신이 선택해야할 몫이다. p1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학 오디세이 3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부터 예술은 당시의 세계상을 반영했다. 세계가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구조화된 우주(코스모스)로 여겨지던 시대에, 예술 역시 질서와 조화(코스모스)를 구현한 작은 우주로 간주되었다. 현대에 들어와 이 코스모스로서의 우주라는 관념이 무너진 후, 예술 역시 더 이상 아름다운 조화를 추구하는 대신에 매우 난해하고 혼돈스런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은 현대 세계상의 그림인 셈이다. p268.

 

 

예술은 한 때 세계를 모방했다. 세계를 그대로 옮겨서 진리를 드러내려 했다.

 

어느 순간 눈앞에 있는 세상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인지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직선이 정말로 곧은지, 곡선이 정말로 굽었는지, 눈으로 보는 빨간색이 정말 빨간색이 맞는지, 멀고 가깝게 느끼는 사물들이 실제로 그렇게 있는지 실제로는 알 수 없다는 게 근대 해석학의 주장이었다.

 

혼란이 일어났다. 이제 예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려한다(‘현시’). 일부러 시각의 혼란을 강조한다. 또는 사물의 형상을 될 수 있는 한 단순하게 묘사한다. 구체적 맥락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만 남겨두는 거다. 그렇게 인간 감각의 한계를 드러낸다. 보지 않고 있던 것을 새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주고, 번뜩이는 깨달음을 주려 한다. 하이데거는 고흐가 그린 구두 그림 앞에서 하나의 세계를 느낀다.

 

 

감추어지고 잊혀졌던 구두의 진정한 의미. 그게 작품 속에서 불현 듯 열리는 체험. 하이데거는 이를 구두라는 도구의 존재가 드러나는 사건이라 불렀다. 고흐의 작품 앞에서 구두를 바라보는 일상적 시각은 깨지고,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이때 우리에게 은폐되고 망각된 존재자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존재체험, 이런 존재사건을 일으키는 게 예술작품의 본질이다. 작품의 진리는 존재자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존재의 현시(presentation)에 있다. p118.

 

 

여기까지가 미학 오디세이 2권에서도 다룬 모더니즘 예술이다. 그런데 혼란과 전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예 작품에서 하나의 정해진 의미를 찾지 말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개시로서의 진리를 말한다는 점에서 탈근대적이다. 하지만 작품의 최종적 진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근대의 한계에 머문다. 데리다는 이마저 해체하려고 한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하나의 작품에 최종적 해석이 있다는 믿음, 누군가 그 진리를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풀어주고, 그것을 무한히 전개시키는 것이다. p187.

 

 

왜 이렇게까지 멀리 나가는 것일까? 얼마나 더 해체하고, 뒤집어야 끝이 나는 걸까? 아마도 이제 더 이상 진짜를 찾는 게 의미 없어진 세상,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를 구별하는 게 불가능해진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원본과 복제, 진짜와 가짜를 나눌 수 없다는데. 진리 또한 찾을 수가 없겠지. 아니, 그런 시도 자체가 의미 없어지겠지.

 

 

더 이상 우리는 세계를 맨눈으로 보지 않는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대부분 신문, 방송, 인터넷 등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세계는 이제 육안으로 본 게 아니라 기술복제된 영상들로 구성된다. 미국에 가보지 않은 나도 미국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사진, 영화, 컴퓨터 영상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렇다면 내게 미국은 현실인가? 아니면 환영인가? p61.

 

전송된 영상들이 우리 방 안을 채우고, 우리는 그 기술복제된 영상들을 통해 세계를 체험하고, 그것들을 재료로 우리 자신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 복제영상들은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남이 본 것을 촬영해 복제한 것이므로, 그걸로 만들어진 세계는 일종의 매트릭스가 되는 것이다. 미디어에서 튀어나와 나의 세계를 이루는 이 환영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p64.

 

 

우리는 이제 화면없이 산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자기 세계를 건축하는데 필요한 재료를 직접 경험보다 어딘가에서 복제되어 전송된 영상으로 끌어 모은다. 허상이 가득한 세계. 그 허무함으로 쌓아올린 나의 세계. 이미 19세기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가 보는 화면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사진을 누군가 발명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카메라가 발명됨으로써 세계를 재현할 의무를 사진이 떠맡게 된다. p59.

 

 

예전에 예술이 하던 일을 사진이 넘겨받는다. 그런데 예술 작품과 사진은 완전히 다르다. 예술 작품은 원본이 따로 있다. 그러나 사진은 무엇이 원작이고 무엇이 복제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사진은 시작부터 무언가의 복제이고, 복제를 그대로 무한정 찍어낼 수 있기도 하니까. 그 마술은 세상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었다.

 

 

사진은 시뮬라르크다. 하나의 필름에서 인화한 수많은 사진들 중 어느 게 원작인가? 전국에서 동시 개봉되는 영화중에 어느 게 원작인가? 거기에 원작은 없다. 혹은 모든 게 원작이다. 사진과 영화는 원작과 복제의 구별을 모른다. 처음부터 복제된 상태로 원작이 된다. 이렇게 원본 없는 복제를 우리는 시뮬라르크라 불렀다. p281-282.

 

 

원작은 없고 복제로 가득 찬 세상. 게다가 텔레비전 생중계로 원작과 복제 사이에 원래 존재하던 시차도 사라지면서 가상과 실재의 구분이 무너진다. 나는 실시간 중계 화면 앞에서 내 앞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가상을 보고 있다. 하지만 같은 시간에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 사건을 보고 있다는 점에서 실재를 겪는 것이기도 하다.

 

안더스는 텔레비전으로 전송되는 복제영상을 팬텀(Phantom)’이라 부른다. 그것은 가상도 아니고 실재도 아닌 유령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특히 이는 실시간 중계를 할 때 뚜렷이 나타난다. p313.

 

 

이제 진짜를 찾고 진리를 밝혀내는 일보다 복제들을 어떻게 쌓아 세계를 만드는지를 따지는 문제가 중요해진다.

 

 

소위 편집의 예술이라는 게 있다. 동일한 영상의 요소라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그것들의 전체적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편집자를 세계의 건축가로 만드는 이 편집의 틀을 안더스는 매트릭스라 부른다. p315.

 

 

같은 말을 프랑스의 보드리야르는 다르게 쓴다.

 

시뮬라르크란 안더스가 말한 팬텀에 해당하고, ‘시뮬라시옹이란 그가 말한 매트릭스를 고쳐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시뮬라르크는 이 세계를 이루는 재료이며, 시뮬라시옹이란 그 재료로 세계를 구성하는 활판이라고 할 수 있다. p325.

 

 

세계를 이루는 재료는 원본 없는 복제, 시뮬라르크다. 그 복제들을 쌓아 올린, 가상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시뮬라시옹이다. 이 단어들은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를 매우 잘 설명해준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거대한 시뮬라시옹이다. 그 유명한 디즈니랜드성은 실은 독일의 어느 성을 베낀 것이다. 미국이 거대한 기상이라 함은 자본주의 자체가 거대한 시뮬라시옹이고, 그 자본주의가 가장 급진적인 곳이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은 하나의 코드로 같은 제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재생산(복제)의 체제다. 여기서 사물은 곧 시뮬라르크가 된다. p326.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교환가치를 위한 생산이다. 그래서 질적으로 다른 사물들을 약분(約分) 가능하게 만든다. 사물의 고유한 질을 지우고, 그것들의 가치를 화폐의 양으로 환원시킨다. 자본주의는 인간마저도 획일화한다. 하나의 코드로 수많은 복제들을 찍어내는 게 자본주의 생산의 특징이다. 때문에 자본은 인간마저도 제 버릇대로 코드로 찍어내려 한다. 자본은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을 확대 재생산시켜줄 클론을 원할 뿐이다. p147.

 

 

자본주의는 거대한 가상이다. 모든 게 숫자로 바뀌는 이 세상에서 생명의, 인간의 맥락은 사라진다. 모든 게 허상이고 복제라는데, 내 존재도 허무하기 짝이 없는 클론으로 취급받는다. 중요한 건 인간 존엄성이 아니다. 오로지 자본의 이익, 대차대조표 위 손익계산만 따질 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이걸 그대로 두고 봐야 하는가?

 

이제는 꽤 오래전 물건이 된 매트릭스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고뇌한다. 빨간약을 먹을 것인가, 파란약을 먹을 것인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것인가, 그냥 눈감고 고민 없이 살던 대로 마음 편하게 살 것인가. 주인공의 고민이 곧 우리 고민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봐야 하나?

 

 

현대 예술은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한다. ? 소통은 코드를 전제하고, ‘코드는 획일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예술은 사회 안에 통용되는 코드를 거부한다. 그 결과 오늘날의 예술은 평균적인 대중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는 현대 예술이 관리되는 사회의 비인간성이 항의하는 방식이다. p149.

 

 

현대 예술가들은 충격 요법을 쓴다. 현대 예술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눈앞에 펼쳐놓고서는 우리를 쇼킹하게 한다. 우리에게 깨어나라고 외친다.

 

어떤 화가는 사람을 짓이겨진 고깃덩어리로 처절하게 묘사한다. 아예 그림에서 얼굴을 지우기도 한다. 사람 얼굴은 인격이자 주체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내 이목구비, 내 표정은 곧 . 그런데 그걸 깨끗하게 지워버린다. 주체를 찾을 수 없게 된 사회에서 예술이 주체를 거짓으로 그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거울을 보라. 아무리 힘을 빼도 그 얼굴에서 짜임새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당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합리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얼굴은 주체. 베이컨은 화면에서 얼굴을 지울 때 근대의 합리적 주체라는 환상을 해체시킨 셈이다. 이로써 근대의 이성중심주의가 무너진다. p248.

 

 

또 어떤 화가는 화폭에 물감을 그냥 마구 뿌려놓고서는 작품이라고 걸어놓는다. 다른 누군가는 그림 같지도 않은, 온통 까맣게 칠한 큰 사각형 하나만 그려놓았다. 눈앞의 모든 것이 허상이고 덧없는 복제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메시지일까? 아니면 이제는 예술이 예술이 아니게 된 걸까. 사실 작품이라고 하는데 작품 같지도 않은 것들이 널렸고, 굳이 예술 작품이 아니어도 나날이 멋스러워지는 주변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다.

 

 

평범한 것과 미적인 것. 둘 사이의 구별이 지워지는 현상을 보드리야르는 초미학이라 부른다. 미적인 것이 극점에 달하면 그것은 외려 사라진다. 모든 게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 예술은 또한 모든 것이 되고 있다.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도시 풍경, 예술을 방불체하는 기발한 상업 광고, 작품을 연상시키는 멋진 상품들. 예술은 현실로 실현되고 있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모든 것이 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예술에 종언을 구한다. “예술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은 죽는 것이다.” p359.

 

 

학교 다닐 때 미술 교과서에서 현대 예술을 보면 그저 이렇게 생각했다.

 

세상에는 정말 쓸데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그냥 밥 먹고 똥 싸는 것이 차라리 낫겠네. 그런데 또 누군가는 저렇게 싸놓은 똥을 돈 주고 사기도 하는구나.’

 

이제는 적어도 그렇게 보지는 않을 것 같다. 진중권이 쓴 책 세 권 달랑 읽었다고 예술을 보는 눈이 확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눈앞의 작품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을 것 같다.

 

현대 예술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아름답다 여기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저 멀리서 어서 쫓아오라고 외치는 꼴이 아니꼽기도 하다. 하지만 그 외침을 들을 필요가 있다.

 

복제품으로 살고 싶지 않다면. 숫자로 여겨지기 싫다면. ‘관리 대상으로 다뤄지지 않으려면. 참되게 살고 싶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선은 남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눈부터 키워야 하는 것 같다. 현대 예술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알아보는 일은 그래서 가치 있다.

 

 

관리되는 사회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탈주의 실천이다. 개별자의 고유성을 지우고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사회.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진리는 거기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단독자로 남는 것이다. 자신을 쫓아오는 모든 동일성의 폭력에서 끝없이 벗어나는 것. 바로 그것만이 이 사회에서 인간이 참되게 존재하는 방식이다. p156.

 

 

 

한편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 조작과 편집 문제는 정치적으로도 생각해볼 문제다. 우리는 가짜 대통령을 끌어내려서 감옥에 보냈다. 하지만 이 모든 성취를 도로 빼앗길 수도 있는,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

 

모든 문제를 박근혜 한 명의 탓으로 몰아가서는 나머지는 그냥 덮어놓고 대충 끝내려는 미심쩍은 분위기를 느낀다. 어느새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지만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뤄지는가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오늘, 2017416일은 가슴 시리게 햇볕이 따뜻하다. 3년이 흘렀지만 슬픔은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슬픔을 끝났다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 삶 또한 비극이 될 것이다.

 

언론은 모든 관심을 대통령 선거로 돌리려 애쓰고 있다. 대통령을 누구로 뽑느냐는 중요하다. 하지만 대통령 하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환상 속의 세상’, 시뮬라시옹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진중권의 지적대로 민주주의는 거대한 시뮬라시옹이다. 하지만 시뮬라시옹의 환상을 현실이 때때로 부순다. 우리는 그걸 할 수 있을까? 구치소의 박근혜보다 구치소 바깥의 박근혜들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게 거대 재벌이 될 수도 있고, 눈앞의 권위적인 직장상사일수도 있고, 가부장적인 남편이나 아버지가, 또는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까?

 

구치소 밖의 박근혜, 우리 곁의 박근혜, 우리 안의 박근혜를 남김없이 쫓아내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뤄낼 수 있을까?

 

 

과거의 조작은 사실을 날조하거나, 해석을 왜곡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의 조작은 그렇게 유치하지 않다. 더 중요한 조작은 편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작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 선택학으로써 이루어진다. p318.

 

소위 최고 권력자라는 이들은 실은 권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거대기업, 고위 관료, 정치인들의 복잡한 커넥션으로 이루어진 권력은 실은 절대로 선출될 수 없는 어떤 시스템이다. 하지만 한 인물에게 표를 던져 대통령으로 뽑는 이들은, 그것으로 자기들이 권력을 선출한다고 굳게 믿는다. 소위 민주주의는 이 착각을 먹고 사는 거대한 시뮬라시옹이다. p33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4-19 1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민주주의의 환상과 착각을 이해해야 됩니다. 제가 밝힌 입장은 민주주의를 완전 부정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단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국민들은 권력에 또 속으면서 당합니다.

돌아온탕아 2017-04-19 21:03   좋아요 0 | URL
동감해요. 민주주의는 단점도 많고, 단점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데에도 능하지요.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를 이루기 위해선 시스템에 길들여져선 안 됩니다.
 
미학 오디세이 2 지혜가 드는 창 45
진중권 지음 / 새길아카데미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어릴 때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서 재미있다 생각한 부분이 있었다. 걸리버는 처음에 소인국에, 다음에는 거인국에 표류한다. 여기서 소인국과 거인국 여인들 미모를 묘사한다. 소인국 여인은 예쁘든 추하든 걸리버 눈에 하나같이 피부가 뽀얗고 아기같이 곱다. 거인국 여인은, 제아무리 자기 나라에서 최고 미녀 소리를 듣는다하더라도 걸리버가 보기에는 하나같이 모공도 너무 크고 달 표면같이 피부가 거칠고 흉할 뿐이다. 그 나라 사람들 기준은 걸리버에게 전혀 쓸모없다. 이방인의 낯선 눈에는 모든 것이 관습과 달리 보이니까.

 

내 눈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고 있을까? 내가 보는 대로 세계가 존재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모습일까? 내 팔 위를 기어가는 작은 개미 눈에는 내 피부가 어떻게 보일까? 줄긋는데 쓰는 쭉 뻗은 30센티 자는 정말로 직선일까? 만약 가시광선을 벗어나 적외선이나 자외선 영역까지 볼 수 있는 생명체가 내 눈앞의 컬러 사진을 본다면, 그의 눈에도 여전히 사진이 아름답게 보일까? ‘색맹인 개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항상 이런 것들이 궁금했다. 내가 믿는 진실은 정말 진실일까? 믿을만해서 믿는 것일까, 믿어야 한다고 분명하다고 배웠기 때문에 믿을만하다 여기는 것일까?

 

 

자연과학은 우리의 머리 밖에 세계가 실제로 있고, 또 우리가 그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훗설은 이 소박한 생각을 자연주의적 태도라 부른다. 훗설의 현상학은 이 소박한 태도를 비판하는데서 출발한다. 사실 소박한 실재론은 전혀 근거없는 가정에 불과하다. 자연과학이 그려내는 세계가 정말로 세계의 참모습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p423.

 

 

미학 오디세이 2권은 현대 모더니즘 예술과 칸트헤겔 이후 근대 미학을 다룬다. 흥미로운 주제가 많이 나온다. 앞서 1권에서는 객관적 세계를 흉내 내던 예술이 어떻게 주관적 성격을 차차 띠게 되는지, 그래서 주관과 객관의 문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다뤘다. 2권은 객관’, ‘진리가 뭔지, 그게 확실한 것인지를 묻고, 예술을 누가 완성하는지를 따져보는 데까지 나아간다.

 

2권은 여러 사상가들, 메를로퐁티, 크로체, 하이데거, 하르트만, 가다머, 프로이트 같은 해석학, 심리학 쪽 근현대 학자들이 두루 나온다. 예술 이야기도 있지만 예술을 해석하는 생각의 틀, 철학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그만큼 묵직해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이건 분명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본 전제들을 의심하는 주제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또 정신없이 읽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 예술은 그림 밖의 어떤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지시하는 게 있다면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여기서 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로의 전환이 시작된다.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엔 내용이나 주제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색과 형태라는 형식 요소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즉 미적 정보만 있을 뿐이다. 이제 현대 예술을 보고 저게 뭘 그린 거냐고 물으면 실례가 되는 건 이 때문이다. p330.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세잔느 이래 추상주의, 표현주의, 레디메이드, 초현실주의라는 모더니즘 예술이 어쩌다 그렇게 기괴한 형상을 하게 되었는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이제 작품에서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의심해보자고 이야기한다. 세잔느는 우리가 진짜처럼 생각하는 질서정연한 세계의 모습이 실제로는 사람이 만들어낸 투시원근법이라는 틀에 맞춰진 허구가 아니냐고 묻는다. 하이데거는 진리, 세계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프로이트는 의식 바탕에 깔린 거대한 무의식과 꿈을 이야기한다. 하나같이 자명한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을 의심하는 이야기들이다.

 

 

우리 인간은 저 친구처럼 세계 속에 던져져있죠.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계-속의-존재라나요? 따라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언제나 세계 속에 있는 지식체계나 가치관에 물들어 있기 마련이죠. 세계를 있는 그대로볼 수 없단 얘긴가? 바로 그겁니다. 우린 단지 세계 속에서 배운 대로 볼 뿐이죠. p427.

 

결국 선입관(선이해)이 없으면 우린 아예 세계를 볼 수가 없게 되죠. 세계 속에서 배운 방식대로 세계를 본다? 그걸 해석학에선 지평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이해하려면, 그걸 지평 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p429.

 

 

이런 의심들이 쌓여 예술도 변한다. 눈앞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세계 모습을 기정사실화하는 묘사 방식을 버리고, 대상을 재현하는 목표도 포기한다. 형태와 색을 제멋대로 재구성한다. 피카소는 여러 시점에서 본 3차원 대상을 번역과정없이 그대로 2차원 평면에 그린다. 살바도르 달리는 꿈과 몽상, 환각을 스스럼없이 화폭에 옮긴다. 예술은 그저 예술계라는 제도가 인정하는 관습(코드)일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공장에서 찍어낸 변기를 그대로 전시해놓고 이건 예술이다라고 외치기도 한다. 오로지 예술가만이 작품을 완성한다는 믿음도 옅어진다. 예술가가 아니라 수용자가 의미를 완성한다는 이론이 나오고, 아예 미완성 상태로 출시해서 관람자들이 작품을 저마다 해석하고 완성할 수 있도록 하는 예술 작업이 유행한다. 결국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든 것을 의심하는데서 나온 변화들이다. ‘저것도 예술이라고 걸어 놨나하고 생각했던 모더니즘 예술은 알고 보니 근대라는 종교적 환상을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한 어떤 근대인들의 아우성이었다. 인간이 쌓아올린 이성이라는 거대한 탑, ‘명석판명한 근대 지식 체계가 실제로는 얼마나 허약한 바탕 위에 섰는지를 생각해보자는 제안이었다.

 

확실한 건 없다. 현대 과학은 물질 기본 입자가 어느 시점에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을지조차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확실하면서 완벽한 무언가를 찾으려할수록 찾을 수 없게 된다. 인간에게 세상은 언제까지고 불확실한 모순 덩어리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 몸 바깥 세계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를 보고 싶으면 내 몸에서 내가 벗어나야하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세계를 완벽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오늘 봤던 무언가가 내일은 전혀 다르게 보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어쨌든 사유의 형식에서든 내용에서든, 우린 어쩔 수 없이 이상한 패러독스에 빠져든다. p585.

 

악순환(Teufelskreis). 글자 그대로 옮기면 악마의 고리란 뜻이다. 어쩌면 악마의 고리는 인간 지성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해석학에선 아예 이 숙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우린 순환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이 순환의 고리를 도는 가운데, 우리의 지식은 더 풍부해진다. 그럼 하이데거의 말대로, 문제는 순환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순환 속에 올바로들어가는 게 아닐까? p567.

 

 

아름다움은 모든 게 확실하게 보일 때보다 불확실한 무언가가 적당히 섞일 때 더해지는 법이라니까. 세상을 아름답게 인식하고 살아가는 방법도 어쩌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은 질서 또는 예측 가능성(네그엔트로피)과 예측 불가능성(엔트로피)의 함수 관계에 있다는 얘기다. p512.

 

정보 이론에선 미를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의 최적의(optimal) 관계로 규정한다. 말하자면, 일탈과 질서, 예측 불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이 적절한 비례를 이룰 때, 사물은 가장 아름답다는 얘기다. 그리스인들이 도리스식 기둥의 2/3지점에 의도적으로 도들림을 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p512-513.

 

 

당연히 여기는 것들을 더 이상 당연히 여기지 않는 것. 거기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아름다움이 샘솟는다.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기. 익숙한 삶을 낯설게 보기. 죽은 하루를 새롭게 되살리기. 마침표나 느낌표보다 역시 물음표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린 친숙한 사물엔 주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무의식중에 흘러가버리는 죽은사물이다. 죽은 사물을 되살릴수는 없을까? 낯설게 하기! 사물을 낯설게 만들 때 비로소 우리는 거기에 주목하게 된다. p515.

 

 

 

굳이 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의심하고 따지며 살아야 되나 싶기도 하다. 질문할수록 불편해지고, 의심할수록 혼란에 빠지니까. 그냥 믿던 대로 생각하고, 남들 살아오던 대로 나도 살아가면 내 마음도 편하고 모두가 편안하다. 하지만 우리는 따져보고 묻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현재 생각과 믿음에 갇히면 안 된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포기하면 안 되는 것처럼. 그게 예술이 말하는 아름다움, 미학이 보여주는 삶의 미학이 아닐까 싶다.

 

 

에코는 이렇게 혼란스럽고 다가치적이며 다의적인 작품의 세계를 코스모스와 카오스를 합쳐 카오스모스(chaosmos)라 부른다. 무한히 많은 뜻을 지니면서도 닫혀 있는 작품, 무한하면서도 닫혀 있는 우주. 어쨌든 카오스모스를 추구하는 오늘날의 열린 예술 작품은 현대 사회의 어떤 징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건 세계관과 가치관의 중심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혼란스런 상황의 반영이다. 하이젠베르크(1901~76)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세계를 확실하고 고정된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우린 그 속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새로운 인간 유형의 가능성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경직된 생각을 기꺼이 바꾸려는 자세를 가진 인간, 말하자면 자신의 삶과 인식의 도식을 혁신하는 데로 열려 있고, 자기 능력의 발전과 지평의 확대에 대해 생산적인 인간 유형 말이다. p553-5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학 오디세이 1 지혜가 드는 창 44
진중권 지음 / 새길아카데미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예술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살았다. 특별히 뛰어난 재능이 있거나 여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처럼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과는 상관없는 세계라 여겼다. 역사 공부할 때는 예술사 때문에 짜증났다. 그 부분이 외울 건 무척 많은데 알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심 가지 않고, 어렵고, 부담스러운. 잘 나고 돈 많은 사람들이나 거들먹거리며 아는 척하는. 내게 ‘예술에 대한 지식’은 그런 영역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을까? 생각해보면 편식이 너무 심했던 것 같기도 하다.




“유명한 미술사가 곰브리치에 따르면,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린 오로지 눈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개념적 사유를 하는 인간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知)의 도식’을 적용하게 된다. 말하지만, 시지각(視知覺) 자체가 벌써 개념적 사유라는 색안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p26.



우리가 어떻게 보는가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같다.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어떻게 보는가가 정해진다. 보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판단하는 일은 무엇이 가치 있는가를 판단하는 일과 같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 여기면 그것을 좋아하게 되고, 반대로 추하다 여기면 싫어하게 된다. 사실 대개 사람들은 옳고 그름보다는 좋고 싫음을 가지고 판단한다. 이렇게 보면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틀이 곧 세상이 어때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틀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수많은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산다. 하지만 어떤 것을 왜 아름답다 여기게 되는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내가 어떤 것을 왜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는지는 진지하게 돌아보면서도, 내가 걸그룹의 늘씬한 몸과 예쁘장한 얼굴 앞에서 왜 침을 흘리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취향의 이유를 나도 모른다. 어쩌면 진짜 내 취향이 무엇인지마저 생각해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미학은 아름다움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는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예술학’이라 부르기도 한다더라. 역사나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는 시대의 지배적 사고와 가치관에 갇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술을 나름대로 시각으로 바라보는 힘을 가진 사람은 자기 시대의 일반적 미적 취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는 만큼 남들이 말하는 대로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역사나 철학을 아는 것만큼 예술을 아는 것도 필요하다. 달리 생각해보니 예술을 ‘잘’ 보는 것이야 말로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예술 작품을 잘 알고, 예술가를 줄줄 꿰는 건 의미 없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바라봤는가를 아는 것. 어느 시대에 어떤 의도로 예술품을 만들었는지를 아는 것. 시대마다 예술의 기준과 미의 기준이 달랐으며, 그 기준들이 그 시대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었는지를 아는 것. 이 시대는 어떤 기준으로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게 우리 사는 모습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아는 것. 그래서 누구나 미학을 어느 정도 알아두는 게 참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학은 선뜻 다가가기 어렵다.


“미학 오디세이” 1권은 사람들이 예전부터 예술을 어떻게 생각했고, 아름다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다룬다.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미학사를 알 수 있다. 한 시대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가 예술로 드러난다. 그렇다보니 주술 신앙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 근대 헤겔까지, 우리가 철학자라 생각한 사람들이 예술과 미학을 이야기하며 책에 나온다.


철학도 다루다보니 책 난이도가 만만치는 않다. 하지만 글쓴이, 진중권은 참 어려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쉽게 설명하려 애썼다. 읽어보면 알게 된다. 설명이 얼마나 친절하게 잘 되었는지를. 알레고리, 파토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아나그노리시스 … 뭐 이런 신기한 말들을 참 재미있고 쉽게 만날 수 있다. 2권은 조금 더 어렵다고 하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다. 아무튼 1권은 예술을 전혀 모르는 나도 천천히 따라갈 만했다. 어렵지 않게, 그렇지만 가볍지 않은 수준으로 미학을 맛보기에 이만한 책이 또 있을까?




“우리가 아는 한, 감상을 위한 예술의 전통은 겨우 몇 백 년 밖에 안 된다. 르네상스 때조차 예술은 뚜렷한 실용적 목적을 갖고 있었다.” p30.


“우린 예술을 정서나 감수성 따위와 관련짓지만,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들에게 예술은 테크네, 곧 합리적 규칙에 따른 활동이었다. 따라서 당시엔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합리적 제작 규칙을 가진 모든 활동, 즉 의자나 침대를 만드는 수공 활동과 학문까지도 예술(테크네)로 간주했다.” p90.


아무도 학교 미술 시간에 알려주지 않은 이야기.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감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예술을 다뤘다. 그 목적은 바로, 예술로 ‘진리’에 다가서는 것이었다.


“예술과 진리를 연결하는 것 – 이게 바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수많은 미학적 변주곡의 중심 테마다.” p52.


예술은 가상을 만든다. 가상으로 현실을 보여주고 때로는 현실 이상의 그 무언가를 보여주려 한다. 옛 사람들은 ‘그 무언가’가 ‘진리’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가상과 진리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대략 두 가지 노선이 있었다. 플라톤은 예술이 가상을 포기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가상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은 그 뒤에도 여러 가지로 변형되고 뒤섞이면서, 미학사 속에서 자꾸 되풀이된다.” p5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둘은 예술로 진리에 다가서는 방법에서 생각이 달랐다.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를 오갔다.



“사물이 아름다우려면 엄격한 비례 속에 약간의 빗나감을 표현하고 있어야 한다.” p69.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은 완벽한 비례에 맞게 만들었다고 알았다. 그런데 그리스 조각의 ‘전형’이라는 작품들은 그런 게 아니었다. 처음에 완벽하게만 만드니까 뭔가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고 하다. 그래서 아주 살짝 어긋나게, 완벽함에서 빗나가게 표현하자 더 아름다워졌다고 한다.


왠지 삶에 적용해도 될 것 같은 이야기다. 뭐든지 너무 완벽하면 안 된다. 살짝 빗나가는 정도가 괜찮다.



“먼저 불완전한 시각 조건에 따른 변화들은 빼야할 거다. 진정한 미는 감각에 좌우되는 게 아니니까. … 원근법을 무시해야 한다는 얘기다. 또 형태를 마음대로 변형해도 안 된다. … 정신은 빛이고, 물질은 덩어리이자 어둠이다. 따라서 물질은 넘어서 정신에 도달하려면, 깊이와 그림자를 피하고 사물의 빛나는 표면만을 묘사해야 한다.” p118-119.


중세 사람들은 예술로 천상의 진리를 나타내고 싶어 했다. 영원한 진리는 이 세계가 아니라 피안의 ‘이데아’에 있다고 믿은 플라톤의 생각과 같았던 셈이다. 그러려면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흉내 내기보다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 모습으로 사물을 표현해야 했다. 원근도 없고 명암도 없어서 모든 게 허공에 붕 뜬 것처럼 보이는 어설픈 그림들. 그런데 그 그림들이 못났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었다.


“중세 예술은 예술사의 퇴보가 아니라 그 자체가 훌륭한 가치를 지닌 예술이다. 사실 묘사에서 물질세계를 희생했지만 인간의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힘에선 중세 예술을 따라갈 수 있는 건 없다.” p129.


하지만 지금 세계를 보지 않고 죽음 너머 다른 세상만 바라보는 사고방식은 시대 자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눈앞의 세상은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생각. 지금 삶의 모든 것이 죽음 뒤의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함이라는 생각. 죽어서 천국가기 위해서는 지금 오로지 신의 말씀만 따르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 과연 이렇게 살면서 누가 마음껏 웃을 수 있었을까?


“중세는 웃음이 없는 시대였다. 물론 이 숨 막히는 시대에도 통풍구는 있었다. 그건 카니발이라는 축제인데, 여기서만큼은 음탕한 행위와 우스꽝스러운 언동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이 며칠을 제외하면 사회는 늘 엄숙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교회는 종말론을 유포하여, 사람들을 늘 종교적 흥분 상태 속에 붙잡아 놓으려 했다. 종말이 온다는데 웃을 기분이 나겠는가?” p174.



그 뒤로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은 진리가 천상이 아니라 땅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천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진리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이었다. 그래서 예술도 변했다. 이제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을 긍정하고 똑바로 보기 시작한다. 진리는 바로 눈앞에 있다. 그래서 눈앞의 세계를 정확히 흉내 내는 데 몰두한다. 기하학을 응용한 원근법 같은 엄밀한 과학 법칙이 예술 영역에 들어왔다.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다 빈치에게 회화와 과학 사이엔 아무런 중요한 차이도 없었다. 그의 활동 자체가 그랬다. 그는 회화는 몇 점 남기지 않고 대신에 수많은 드로잉을 남겼는데, 어느 게 예술적 동기에서, 그리고 어느 게 과학적 동기에서 그린 건지 구분하기란 매우 힘들다. … 실제로 그는 모든 자연과학적 지식을 동원해 그림을 그렸다. 실제로 그의 그림 속엔 원근법은 물론이고 해부학, 생리학, 광학론, 색채론 등 온갖 자연과학이 다 들어있다.” p181.


예술가는 현실을 엄격한 법칙에 따라 묘사하면서 세계를 진실하게 드러낸다. 그렇게 진리에 가까이 간다. 예술은 르네상스 시대에 과학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예술을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다 빈치는 예술의 목적을 외부 세계의 과학적 인식에 두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아름답다고 항상 좋은 것은 아니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에게서 예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미의 창조’에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미와 예술을 밀접히 결합시켰다.” p188.


이어서 17세기가 되면,


“루벤스의 그림이 보여주듯이, 바로크 예술은 르네상스나 고전주의와 매우 다르다. 윤곽은 뚜렷하지 않고, 묘사는 격정적이며, 구도는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p204.


예술의 목적이 점점 ‘진리 추구’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옮겨가고 있었다. 세계를 정밀하게 모사하기보다 윤곽선을 흐릿하게 만들고, 멈춘 모양새를 정확히 그리기보다 격동적인 움직임을 거침없이 묘사한다. 사람들이 찾기 시작한 건 어쩌면 사람 자체가 아니었을까?



18세기에 계몽주의와 합리적 사고방식이 발달하면서 예술 인식도 드디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는다. 이 때 미학이 탄생했다.


“이 시대 미학은 두 갈래로 나뉘어 발전한다. 하나는 대륙의 합리론적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의 경험론적 흐름이다. 어쨌든 18세기에도 고전주의적 관념이 여전히 우세했으나, 전 세기와는 달리 차차 예술은 ‘감성’의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p214.


드디어 예술을 감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예술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듯이.


“바움가르텐은 감성을 인식으로 간주함으로써 감성을 복권시켰다. … 예술을 ‘진리’의 전달 매체로 보는 근대 ‘진리 미학’의 전통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어 헤겔에게서 완성된다. … 또 하나의 노선이 나온다. 이 노선은 영국의 취미론에서 시작되어 칸트에서 완성된다. 이들에 따르면, 미는 ‘인식’이 아니라 ‘쾌감’이며, 예술의 본질은 ‘진리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 예술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상상력의 유희’며, 예술가는 고정된 법칙에 따르지 않고 ‘영감’에 따라 자유로이 창작을 한다.” p225-226.


예술을 ‘진리’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보는 관점에 이어 예술을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으로 생각하는 관점이 나타났다. 헤겔과 칸트가 각각의 입장을 대표했다.



칸트는 예술을 다른 무언가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처럼 미를 선(善)이나 진(眞)에, 예술을 도덕이나 종교 또는 철학에 종속시켰다. 하지만 우린 다르다. 우린 그저 즐거움 때문에 예술을 감상한다. …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순수 예술’, 즉 진리나 도덕적 교훈을 주지 않는 예술은 타락한 것으로 여겼다. 이런 이상한 생각에서 예술을 해방시킨 사람이 칸트다. 예술이 오늘날처럼 자기 고유의 ‘자율성’을 갖게 된 건 순전히 칸트 덕분인데, 우리가 예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대부분 그에게서 물려받은 거다. 가령 예술이 ‘형식’이며 ‘상상력’의 소산이며 ‘천재’의 산물이며…….” p229.


“예술을 천재의 소산으로 봄으로써 그는 고전주의 미학과 대립되는 새로운 미학에 길을 열어준다. 바로 ‘낭만주의 미학’이다. 예술가는 더 이상 규칙을 습득하여 자연을 모방하는 ‘장인’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내는 ‘천재’다.” p238-239.


이렇게 예술을,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것처럼 다들 보기 시작했다. 데이트하러 미술관에 갔다가 뭔지 모를 그림을 보고 감동을 느끼고, 그림인지 뭔지를 그리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진리를 찾는 치열한 싸움이었던 예술을 좀 더 소박한 모습으로 바꿔놓은 사람이 칸트였다. 경건함을 대신해 사람 감정이 들어찬다. 객관만 중요하게 생각하다가 이제는 주관 또한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세계 전체만 보던 눈을 돌려 개인도 바라보기 시작한다.


“테오도르 립스(1851-1914)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감정이입설’이라는 걸로 유명한데, 이는 현대의 주관주의적 미 이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객관화한 자기 향수’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감정을 자연 속에 집어넣은 게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거다. 자연의 아름다운 사물은 실은 우리가 그 속에 집어넣은 우리 감정이다.” p280-281.



반대로 여전히 예술은 진리를 향한다고 변함없이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헤겔이었다. 칸트는 예술을 도구에서 해방시켰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계속 진리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헤겔은 자연 세계가 처음에 어떤 절대자의 정신(이념)이 밖으로 표출되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거울을 보고 나를 발견하는 것처럼, 절대자의 이념은 자기를 찾으려 자연 세계에 스스로를 쏟아냈다. 자연 세계는 곧 절대자의 모습이다.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정신을 가진 존재는 인간이다. 인간은 절대자가 만들어놓은 자연 속에서 정신을 발전시켜가며 진리를 찾아간다. 세계를 만든 건 절대자이지만, 세계를 완성하는 건 인간의 정신이다. 인간이 진리를 찾으려 가장 먼저 사용하는 도구가 감각을 다루는 예술이다. 예술은 표상을 다루는 종교로, 다시 개념을 다루는 철학으로 역할을 넘긴다. 인간은 처음 감각 세계와 만나며 진리를 찾다가, 마지막에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절대자의 진리와 만나게 된다.


헤겔이 보기에 예술로 진리를 찾던 시대는 고대 그리스 때 정점을 찍고 저물었다. 인간 정신이 발달하여 감각을 직접 다루던 수준을 뛰어 넘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종교의 시대를 지나 철학의 시대가 다가왔으며, 세계가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보았다. 그럼 이제 예술은 진리를 찾는 도구에서 해방된 것일까?


“예술의 미래는 ‘종교’에 있다. … 이제 이념은 ‘감각’이 아니라 ‘표상’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 하지만 종교는 다시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이때쯤 세계의 역사는 저녁 무렵으로 접어든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철학)는 해질녘이 돼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고 한다.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힘차게 밤하늘을 날아오르면서, 세계의 역사는 완성에 도달한다.” p265-266.



예술은 처음에 주술이었다가, 천상의 영광과 진리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가, 시간이 흐르며 인간이 사는 세상의 진리를 찾는 도구로 땅에 내려왔다. 이제는 진리를 찾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람에게 즐거움과 쾌감을 주는 중요한 무언가가 되었다. 이와 함께 세상의 주인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정체 모를 주술이었다가, 천상 세계에 사는 위대한 조물주였다가, 살아 숨 쉬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인간이 되었다.




이 책은 대학생 때 겉멋 들어 사놓았다가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책장으로 들어갔던 비운의 주인공이다. 그때는 이런 걸 알아서 무슨 소용이냐는 마음이 컸다. 지금 와서 다시 읽어보니 이런 건 꼭 알아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을 보고 느낀다는 건 세상을 보고 느낀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예술도 결국은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는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진중권은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2권도 책장에 있다. 거기서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잠깐 훑어보니 현대 미술과 함께 진리는 무엇이고, 주관과 객관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다루는 것 같다.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