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 김규항 아포리즘
김규항 지음, 변정수 엮음 / 알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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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을 구분해야 한다. 고독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고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 차단된 고통이다. 자신과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까. 고독을 피한다면 늘 사람에 둘러싸여도 외로움을 피할 수 없다. 용맹하게 고독해야 한다. p6.

 

 

글을 어렵게 쓰지 않는다. 알아듣기 힘들게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맨날 쓰는 평범한 단어를 똑같이 쓰고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본 것 같은 이야기를 다시 한다. 굳이 또 읽거나 들어야 하나 싶은 말을 또 한다. 하지만 남다르다. 전혀 특별할 게 없는 말인데 가슴을 쿵쿵 울린다. 읽다 보면 무척 짜릿하다. 비결이 뭘까?

 

일상에서 우리가 얻는 배움이나 깨달음도 다 그렇지 않을까? 누구나 다 알 것 같은 그런 말 한 마디가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하게 다가와 마음을 움직인다.

 

마음을 움직이는 말 한 마디. 때때로 그런 말을 해주는 어른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만 많이 먹은 무늬만 어른 말고 나이와 상관없이 진짜로 뭔가 배우고 싶은 면모가 있는 그런 어른. ! 이 책의 평범한 글들이 비범하게 마음을 울린 비결이 뭔지 알 것 같다. 그냥, 이 책을 쓴 사람이 진짜 어른이었던 것이다.

 

 

담배를 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끊는 것이다. 나머지 방법들은 실은 담배를 끊는 방법이 아니라 담배에 대한 미련을 표현하는 방법들이다. p82.

 

 

김규항은 나이가 꽤 많다. 1962년생이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다보면 주변에서 보는 흔한 62년생 아저씨들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종류의 어른을 만나게 된다. 칼 같이 단호하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옳은 건 옳고 틀린 건 틀리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뭐’, ‘좋은 게 좋은 거지같은 말이 끼어들 틈이 없다. 화려한 수사법 같은 거 없다. 구차한 변명도 없다.

 

 

현명한 사람 중에, 단단하게 살아가는 사람 중에 매사에 남 탓만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p120.

 

 

뻥으로 센 척 나오는 말들이 아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담금질해온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내뿜는 뜨거운 기운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평생 힘껏 자기 일 열심히 해온 어느 노동자의 단단한 뒷모습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어쩌다보니 나도 말로 뭔가를 가르치며 살아야 하는 노동을 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이상한 헛소리나 지껄이는 추한 아저씨가 되지 않을까?

 

 

아저씨는 나에 대해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른다.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남에 대해서도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른다. 나의 껍데기에 대해서만, 남의 껍데기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말한다. 아저씨는 더 이상 중년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경계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란 유기적이며 아저씨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누구든 조금씩은 아저씨다. p124.

 

 

김규항이 왜 여느 아저씨처럼 느껴지지 않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는 아저씨가 아니었으니까. ‘아저씨란 나이와 상관없이 참 애처로운 존재다. 껍데기나 훑으며 지나가는 삶이라니. 껍데기 말고 알맹이를 만나려면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면 안 된다. 물건 소비하듯 삶을 지나치면 안 된다. 대충 시간을 흘려보내면 안 된다. 인생의 파도 속에서 나를 잃으면 안 된다.

 

나는 상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좀 더 훌륭하게 살 수 있다. p22.

 

자기를 성찰한다는 건 자기만 생각하지 않는 것, 남 생각도 하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결국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다. p109.

 

사람이 양식 있게 산다는 건 양식 있는 어휘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크든 작든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일에 양식 있게 판단하는 것이다. 실은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고 그걸 지키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 유식하다 무식하다는 제도교육 학력과는 상관이 없다.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볼 줄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무식한 사람이다. p39.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 양식을 갖추고 살아야 한다. 그 생각, 양식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다. 자기가 누리는 깃털 같이 가벼운 안락한 일상의 허상에서 내려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 보려고 한다면. 나 자신만 편하고 부유하게 잘 살면 된다는 편협한 인식을 깰 수 있다면. 결국 김규항이 말하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최소한의 상식이다.

 

 

남보다 호사를 누리는 게 자랑이 아니라 머리를 긁적이게 하는, 대개의 사람이 그 정도의 양식을 갖춘다면, 천국에 다가간 게 아닐까. p67.

 

남 겪는 걸 겪지 않고 남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이 되긴 어렵다. p48.

 

오늘 20대는 모두 88만원 세대인가? 그렇진 않다. 그중엔 소수의 88억 세대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존재한다. 대다수의 20대가 88만원 세대가 되어야 하는 이유 또한 소수의 88억 세대가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존재하기 때문(혹은, 존재하게하기 위해서)이다. 인텔리들이 계급이라는 말을 폐기하려는 경향과는 아랑곳없이 계급적 격차는 더욱 더 벌어지고 있다. p87.

 

 

아직까지 계급을 빼놓고 인간세상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보지 못했다. 역사에서 계급 갈등을 뺀다면 역사책에 실린 수많은 글자들은 신화 속 옛날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대체 왜 계급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걸까? 구닥다리 같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다보니 세대 간 갈등이니 세대 전쟁이니 같은 헛발질을 계속 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틀은 현실의 부조리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힘을 더 키워주게 된다.

 

글을 읽다가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다. 나만의 착각 속에서 안주하지 않으려면 세상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내 옆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도 보지 못하게 된다. 다른 사람 눈물이 아픈 건 모르고 내 눈물 짠 것만 생각하며 살다간 악취 나는 삶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이 책은 김규항의 신작은 아닌 것 같다. B급 좌파에서 읽었던 구절들도 보여 반가웠다. 아마도 글쓴이가 지금까지 써왔던 칼럼들을 엮은이가 잘 발췌해서 내놓은 모양이다. 김규항의 책들을 꾸준히 읽어온 사람이라면 이 책은 그다지 새롭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예전 책 한 두 권 읽어봤거나 처음 접해보는 사람은 무척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꾸준히 읽어왔던 사람이더라도 분명히 얻어갈 만한 게 있는 책이다.

 

칼럼의 구체적 장면들은 지워졌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좀 더 내 관점에서 읽기가 가능했다. “! 세상 다 끝난 거 아니야! 너는 충분히 가치 있고 멋있어! 그러니까 힘내라고 말해주는 책만 힘을 주는 게 아니다. 때때로 어떻게 살아야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는지를 따져보면서 따끔하게 등짝 때려주는 말도 필요하다. 대충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핑계 대지 말고 제대로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힘을 주는 책이다.

 

 

인간의 모습에서 겸손보다 더 품위 있는 건 없다. p13.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우애나 연대 없이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소비나 물질적 축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순간, 바로 그 순간들이다.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경로는 사랑이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확인할 때 우린 어지간히 고단한 삶속에서도 행복하다. p23.

 

우리가 못 한다 아쉬워하는 많은 것들도 실을 안 해도 그만인 것들. p24.

 

남이 보기에 내가 어떤가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만드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혼 없는 좀비가 되지 않는 비결은 내가 보기에 나는 어떤가를 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혼자일 수 있는 시간과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힘. p6.

 

현재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대안도 없다. 현재에 대한 비판은 대안의 첫 걸음이다. ‘대안 없는 비판이라는 비판은 실은 어느 누구도 대안의 첫걸음도 떼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살포되는 체제의 주문呪文이다. p78.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회복하는 건 벽돌에서 인간이 되는 것, 개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 취향과 내 문화와 내 교육관과 내 인생관과 내 세계관과 내 연애의 기준을 가진 비로소 한 개인이 되는 것이다. p123.

 

 

 

덧붙여서.

이 구절은 무슨 말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도 결혼을 하고 나중에 딸을 낳아서 키워보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딸은 단지 딸, 아들 하는 자식 중의 하나가 아니다. 딸은 한 남자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장 정교하게 알아낼 수 있는(폭로하는), ‘삶의 시험지이다. 한 남자가 딸에게서 존경받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면 그의 삶은 좀 더 근사해질 것이다.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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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2017-07-0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화책 중에 ‘짜장, 짬뽕, 탕수육‘이란 책이 있어요.어떤 아이가 그걸 읽고 독서감상문이라면서 서너줄 써왔는데 요는 그거더군요. 자기가 짜장을 좋아한다고 해서 짬뽕을 좋아하는 친구의 취향을 지적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향에 대한 존중과 취향에 대한 예의만 잘 지켜도 꼰대로서의 답답함은 벗어던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그리고 또 하나!! 사랑하는 딸에 대한 좋은 부모에 대한 접근과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모색이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강구로 전환되는 찰나...저는 독서라는 돌파구를 찾게 되었습니다.물론 어려운 책보다는 아직은 소설이 더 좋네요^^

돌아온탕아 2017-07-05 17:32   좋아요 0 | URL
서로가 불편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하는지를 모두가 깊이 고민한다면 지금보다는 세상이 훨씬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무척 멋진 돌파구를 찾으셨네요! 응원합니다.

cyrus 2017-07-05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자신이 누군지 모르면 남이 어떻게 살아가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합니다. 라캉의 말대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됩니다.

돌아온탕아 2017-07-05 17:33   좋아요 0 | URL
라캉 철학을 읽어보고 싶어지는 댓글..이네요 :) 주변에도 꼭 남이 뭐하고 다니는지 캐고 다니고 남의 말 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대개 자기를 그다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사랑하지 않는 분 같더라고요.

데미안 2017-07-05 1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비슷한 어조의 책이 있어요. 황현산 선생남의 밤은 선생이다!!

돌아온탕아 2017-07-05 17:37   좋아요 0 | URL
황현산... 고종석의 문장이라는 책을 읽다가 접한 이름이네요.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