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 뇌과학과 신경과학이 밝혀낸 생후배선의 비밀
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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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잘 읽혔던 뇌과학 책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가 스토리텔링을 잘했다. 가볍게 읽을만한 쉬운 내용은 아니어서 다 읽는 데 시간이 꽤 한참 걸리긴 했지만, 원래 조금은 어려운 내용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서술은 칭찬해 줄 만하다. 다만 뒷부분에 번역의 질이 급격하게 무너져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구간이 있다는 게 조금은 아쉬운 점이다.

뇌는 컴퓨터나 기계와는 달라서, 새로운 자극과 환경 변화, 심지어 신체의 손상이나 완전히 새로운 감각기관의 접속에도 유연하게 자기의 회로를 바꾼다. 완벽한 플러그 앤 플레이가 가능한, 끊임없이 자기 성질과 모습을 바꾸는 게 되는 환상적인 CPU와 메인보드라고 해야 할까? 뇌의 유연성은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경험을 쌓고 세계관을 만들고 전문성이 쌓이면서 점차 감소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경험이나 자극을 만나면 그 와중에도 유연하게 자기 스스로를 바꾼다. 마치 나무에 새겨진 나이테와 비슷한, 뇌가 스스로를 바꾸어가며 만들어낸 사람의 회선이 바로 그 사람의 역사이자 그 사람 자체이며, 그의 세계가 될 것이다. 나는 아래 구절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학교의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삶의 짜릿함은 우리가 지금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현재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 중인가에 있다.˝



한글 번역판의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라는 서정적인 제목은 책에 실제로 나오는 구절을 딴 것이다. 나는 영어판 책의 원제인 ˝Livewired˝가 책 내용을 가장 정직하게 잘 드러내준다고 생각하지만, 한글 번역판의 제목 역시 무척 잘 뽑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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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가 끝난 뒤 펭귄클래식 8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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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중단편 모음집이다. ˝안나 카레니나˝ 같은 장편을 읽기에는 부담스러우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보다는 톨스토이를 깊이 읽어보고 싶다면, 이 책이 좋으리라. 톨스토이 소설은 작가만의 종교관과 시대상을 적당히 걷어내고 본다면 요즘 소설 못지않게 깔끔하게 재미있다. 번역도 괜찮아서 읽기 편안하다.

나는 중편 ˝위조 쿠폰˝이 가장 재미있었다. 당시 러시아 보통 사람들에 대한 묘사나 이야기의 치밀한 구조도 좋았지만, 아래 구절을 읽은 것만으로도 무척 좋았다. 아하. 다만 그렇게 사는 게 더 나을 뿐이라니.

˝착한 행실은 반드시 천국에서 보상받는다고, 성경을 읽고 생각하신 모양이죠?˝
˝우리가 그걸 어찌 알 수 있겠어요.˝ 마리야 세묘노브나가 말했다. ˝다만 그렇게 사는 게 더 나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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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참 힘들었다. 대사가 무척 장황하여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2부는...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주인공 파우스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헬레네를 쫓아 고대 그리스 신화 속으로 환상의 모험을 떠나니까. 서양사와 그리스 로마 신화를 대충이라도 알아야 이야기의 폭풍 속에서 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호메로스 시대뿐만 아니라 괴테의 시대에도 헬레네가 최고였구나.

그러나 이야기가 모두 끝을 맺으면 묵직한 한방이 온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건 무자비한 괴물이라, 아무리 대단한 사랑을 하고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도 작은 먼지 한 톨 만큼이 부족하다고 불같이 화를 내고 어린애처럼 떼를 쓴다. 그리고 삶의 끝이 다가오면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진다. 긴 이야기 끝에 맞닥뜨린 허무함이라 그런가. 죽음을 앞두기 전에는 절대 알지 못할 그 공허함이라는 감정을 어째 미리 살짝 맛은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만으로도 ˝파우스트˝를 읽은 시간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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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계약을 해도 파우스트처럼 구원을 받아 천상으로 끌어올려질 수 있나요?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 지옥불에 던져지는 결말도 너무 뻔하지만, 갑자기 모든 것을 용서받고 구원받는 결말도 뜬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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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 조급하고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마음 처방전, 100만 부 기념 전면 개정판
와타나베 준이치 지음, 정세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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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예민한 사람을 위해 이런 책이 나왔나 보다. 결국 ˝둔감력이 당신을 살릴 거예요˝라는 한 마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작고 소박한 책이지만 요즘 들어 읽은 것들 중에서 가장 많은 걸 느끼게 해주었다.

맞아요. 둔감력이 나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둔감하면서 너그러운 사람이 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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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 신화·거짓말·유토피아
자미라 엘 우아실.프리데만 카릭 지음, 김현정 옮김 / 원더박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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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의 이 문장은 책을 펼친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야기와 함께 성장하고 이야기와 함께 묘지에 묻힌다.˝

무작위로 복잡한 자연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사람은 좀 더 친절하게 정리 정돈한, 요약되고 윤색된 이야기를 만들어 세계를 인식한다. 그리고 잘 살아가기 위하여 자기의 삶도 이야기로 만들어나간다. 고난을 딛고 일어서서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가는 다양한 버전의 각자의 영웅담은 곧 사람이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이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나는 보물이자 보물 지도이며 보물을 찾으러 가는 여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누구이며 어떤지는 내가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통해 확립된다.˝

세상은 이야기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틀로 만들어낸 가상 현실에서 살아가며, 어떤 이야기를 쓰고 읽느냐에 따라 ‘현실‘도 달라질 것이다.

사람의 인식론을 다루는 현대 철학과 뇌과학의 다양한 담론을 어렵지 않게 녹여낸 책이다. 읽으면서 무척 즐거웠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집단과 사회를 만드는 이야기, 국가와 인간 세계를 만드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돌아가는가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간다. 특히 나쁜 이야기들, 즉 사람들을 거짓으로 선동하는 이야기들에 우리가 얼마나 잘 꾀어드는지 중세 마녀사냥과 나치, 트럼프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대목은 꽤 읽을만했다. 저자의 박식함과 솜씨가 무척 훌륭하다고 느꼈다.

나는 앞으로 내가 상황을 어떤 이야기로 인식하려고 하는 건지, 그리고 내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오늘 하루, 일 년, 그리고 삶 전체를 어떤 내러티브로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지를 항상 의식하게 될 것 같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시간은 무척 값지게 남을 것이다.

탁월한 문장들이 참으로 많아서, 밑줄을 엄청 친 책으로 기억할 것 같다. 그러나 엉망인 문장들도 많아서 끝까지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저자가 원래 이렇게 썼는지 아니면 번역을 성의 없게 한 것인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이렇게 읽기 힘든 책을 만나면 나의 독해 능력만을 탓했던 것 같다. 너무 순진했던 것 같다. 잘 읽히지 않게 쓴 책은 좋은 책이 아니다.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럼 다시 읽어보고 싶다.

주제 의식이 이야기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까? 이 책의 짜임새가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이야기의 대단원이라고 할, 지금 세상의 이야기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으며 세상을 좀 더 나은 이야기로 어떻게 쓸 것인가를 두고 저자의 대안을 제시한 끝부분에는 공감이 가지 않는 대목들이 몇몇 눈에 띈다. 뭐랄까, 짜증 나게 구는, 교조주의자가 외치는 구호 같달까. 끝으로 갈수록 말이 좀 세다. 제 잘난 맛에 신나게 떠들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는 않는. 자기 이야기를 좀 더 많은 사람이 듣길 원한다면 때때로 자기가 말하는 투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뭐, 이 또한 저자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일 따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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