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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3 ㅣ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부터 예술은 당시의 세계상을 반영했다. 세계가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구조화된 우주(코스모스)로 여겨지던 시대에, 예술 역시 질서와 조화(코스모스)를 구현한 작은 우주로 간주되었다. 현대에 들어와 이 코스모스로서의 우주라는 관념이 무너진 후, 예술 역시 더 이상 아름다운 ‘조화’를 추구하는 대신에 매우 난해하고 혼돈스런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은 현대 세계상의 그림인 셈이다. p268.
예술은 한 때 세계를 모방했다. 세계를 그대로 옮겨서 진리를 드러내려 했다.
어느 순간 눈앞에 있는 세상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인지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직선이 정말로 곧은지, 곡선이 정말로 굽었는지, 눈으로 보는 빨간색이 정말 빨간색이 맞는지, 멀고 가깝게 느끼는 사물들이 실제로 그렇게 있는지 실제로는 알 수 없다는 게 근대 해석학의 주장이었다.
혼란이 일어났다. 이제 예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려한다(‘현시’). 일부러 시각의 혼란을 강조한다. 또는 사물의 형상을 될 수 있는 한 단순하게 묘사한다. 구체적 맥락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만 남겨두는 거다. 그렇게 인간 감각의 한계를 드러낸다. 보지 않고 있던 것을 새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주고, 번뜩이는 깨달음을 주려 한다. 하이데거는 고흐가 그린 구두 그림 앞에서 하나의 세계를 느낀다.
감추어지고 잊혀졌던 구두의 진정한 의미. 그게 작품 속에서 불현 듯 열리는 체험. 하이데거는 이를 구두라는 도구의 ‘존재’가 드러나는 사건이라 불렀다. 고흐의 작품 앞에서 구두를 바라보는 일상적 시각은 깨지고,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이때 우리에게 은폐되고 망각된 존재자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존재체험, 이런 존재사건을 일으키는 게 예술작품의 본질이다. 작품의 진리는 존재자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존재의 현시(presentation)에 있다. p118.
여기까지가 미학 오디세이 2권에서도 다룬 모더니즘 예술이다. 그런데 혼란과 전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예 작품에서 ‘하나의 정해진 의미’를 찾지 말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개시’로서의 진리를 말한다는 점에서 탈근대적이다. 하지만 … 작품의 최종적 진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근대의 한계에 머문다. 데리다는 이마저 해체하려고 한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하나의 작품에 최종적 해석이 있다는 믿음, 누군가 그 진리를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풀어주고, 그것을 무한히 전개시키는 것이다. p187.
왜 이렇게까지 멀리 나가는 것일까? 얼마나 더 해체하고, 뒤집어야 끝이 나는 걸까? 아마도 이제 더 이상 ‘진짜’를 찾는 게 의미 없어진 세상,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를 구별하는 게 불가능해진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원본과 복제, 진짜와 가짜를 나눌 수 없다는데. 진리 또한 찾을 수가 없겠지. 아니, 그런 시도 자체가 의미 없어지겠지.
더 이상 우리는 세계를 맨눈으로 보지 않는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대부분 신문, 방송, 인터넷 등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세계는 이제 육안으로 본 게 아니라 기술복제된 영상들로 구성된다. 미국에 가보지 않은 나도 미국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사진, 영화, 컴퓨터 영상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렇다면 내게 미국은 현실인가? 아니면 환영인가? p61.
전송된 영상들이 우리 방 안을 채우고, 우리는 그 기술복제된 영상들을 통해 세계를 체험하고, 그것들을 재료로 우리 자신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 복제영상들은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남이 본 것을 촬영해 복제한 것이므로, 그걸로 만들어진 세계는 일종의 ‘매트릭스’가 되는 것이다. 미디어에서 튀어나와 나의 세계를 이루는 이 환영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p64.
우리는 이제 ‘화면’ 없이 산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자기 세계를 ‘건축’하는데 필요한 재료를 직접 경험보다 어딘가에서 복제되어 전송된 영상으로 끌어 모은다. 허상이 가득한 세계. 그 허무함으로 쌓아올린 나의 세계. 이미 19세기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가 보는 ‘화면’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사진을 누군가 발명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카메라가 발명됨으로써 세계를 재현할 의무를 사진이 떠맡게 된다. p59.
예전에 예술이 하던 일을 사진이 넘겨받는다. 그런데 예술 작품과 사진은 완전히 다르다. 예술 작품은 ‘원본’이 따로 있다. 그러나 사진은 무엇이 원작이고 무엇이 복제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사진은 시작부터 무언가의 ‘복제’이고, 복제를 그대로 무한정 찍어낼 수 있기도 하니까. 그 마술은 세상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었다.
사진은 시뮬라르크다. … 하나의 필름에서 인화한 수많은 사진들 중 어느 게 원작인가? 전국에서 동시 개봉되는 영화중에 어느 게 원작인가? 거기에 원작은 없다. 혹은 모든 게 원작이다. 사진과 영화는 원작과 복제의 구별을 모른다. 처음부터 복제된 상태로 원작이 된다. 이렇게 원본 없는 복제를 우리는 ‘시뮬라르크’라 불렀다. p281-282.
원작은 없고 복제로 가득 찬 세상. 게다가 텔레비전 생중계로 원작과 복제 사이에 원래 존재하던 ‘시차’도 사라지면서 가상과 실재의 구분이 무너진다. 나는 실시간 중계 화면 앞에서 내 앞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가상’을 보고 있다. 하지만 같은 시간에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 사건을 보고 있다는 점에서 ‘실재’를 겪는 것이기도 하다.
안더스는 텔레비전으로 전송되는 복제영상을 ‘팬텀(Phantom)’이라 부른다. 그것은 가상도 아니고 실재도 아닌 유령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특히 이는 실시간 중계를 할 때 뚜렷이 나타난다. p313.
이제 진짜를 찾고 진리를 밝혀내는 일보다 복제들을 어떻게 쌓아 세계를 만드는지를 따지는 문제가 중요해진다.
소위 편집의 예술이라는 게 있다. 동일한 영상의 요소라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그것들의 전체적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편집자를 세계의 건축가로 만드는 이 편집의 틀을 안더스는 ‘매트릭스’라 부른다. p315.
같은 말을 프랑스의 보드리야르는 다르게 쓴다.
‘시뮬라르크’란 안더스가 말한 ‘팬텀’에 해당하고, ‘시뮬라시옹’이란 그가 말한 ‘매트릭스’를 고쳐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시뮬라르크는 이 세계를 이루는 재료이며, 시뮬라시옹이란 그 재료로 세계를 구성하는 활판이라고 할 수 있다. p325.
세계를 이루는 재료는 원본 없는 복제, 시뮬라르크다. 그 복제들을 쌓아 올린, 가상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시뮬라시옹이다. 이 단어들은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를 매우 잘 설명해준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거대한 시뮬라시옹이다. 그 유명한 디즈니랜드성은 실은 독일의 어느 성을 베낀 것이다. … 미국이 거대한 기상이라 함은 … 자본주의 자체가 거대한 시뮬라시옹이고, 그 자본주의가 가장 급진적인 곳이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은 하나의 코드로 같은 제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재생산(복제)의 체제다. 여기서 사물은 곧 시뮬라르크가 된다. p326.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교환가치를 위한 생산이다. 그래서 질적으로 다른 사물들을 약분(約分) 가능하게 만든다. … 사물의 고유한 질을 지우고, 그것들의 가치를 화폐의 양으로 환원시킨다. 자본주의는 인간마저도 획일화한다. … 하나의 ‘코드’로 수많은 복제들을 찍어내는 게 자본주의 생산의 특징이다. 때문에 자본은 인간마저도 제 버릇대로 ‘코드’로 찍어내려 한다. 자본은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을 확대 재생산시켜줄 클론을 원할 뿐이다. p147.
자본주의는 거대한 가상이다. 모든 게 숫자로 바뀌는 이 세상에서 생명의, 인간의 맥락은 사라진다. 모든 게 허상이고 복제라는데, 내 존재도 허무하기 짝이 없는 클론으로 취급받는다. 중요한 건 인간 존엄성이 아니다. 오로지 자본의 이익, 대차대조표 위 손익계산만 따질 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이걸 그대로 두고 봐야 하는가?
이제는 꽤 오래전 물건이 된 “매트릭스”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고뇌한다. 빨간약을 먹을 것인가, 파란약을 먹을 것인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것인가, 그냥 눈감고 고민 없이 살던 대로 마음 편하게 살 것인가. 주인공의 고민이 곧 우리 고민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봐야 하나?
현대 예술은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한다. 왜? 소통은 ‘코드’를 전제하고, ‘코드’는 획일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예술은 사회 안에 통용되는 ‘코드’를 거부한다. 그 결과 오늘날의 예술은 평균적인 대중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는 현대 예술이 관리되는 사회의 비인간성이 항의하는 방식이다. p149.
현대 예술가들은 충격 요법을 쓴다. 현대 예술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눈앞에 펼쳐놓고서는 우리를 ‘쇼킹’하게 한다. 우리에게 “깨어나라”고 외친다.
어떤 화가는 사람을 짓이겨진 고깃덩어리로 처절하게 묘사한다. 아예 그림에서 얼굴을 지우기도 한다. 사람 얼굴은 인격이자 주체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내 이목구비, 내 표정은 곧 ‘나’다. 그런데 그걸 깨끗하게 지워버린다. 주체를 찾을 수 없게 된 사회에서 예술이 주체를 거짓으로 그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거울을 보라. 아무리 힘을 빼도 그 얼굴에서 짜임새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당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합리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얼굴은 ‘주체’다. 베이컨은 화면에서 얼굴을 지울 때 근대의 ‘합리적 주체’라는 환상을 해체시킨 셈이다. 이로써 근대의 이성중심주의가 무너진다. p248.
또 어떤 화가는 화폭에 물감을 그냥 마구 뿌려놓고서는 작품이라고 걸어놓는다. 다른 누군가는 그림 같지도 않은, 온통 까맣게 칠한 큰 사각형 하나만 그려놓았다. 눈앞의 모든 것이 허상이고 덧없는 복제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메시지일까? 아니면 이제는 예술이 예술이 아니게 된 걸까. 사실 작품이라고 하는데 작품 같지도 않은 것들이 널렸고, 굳이 예술 작품이 아니어도 나날이 멋스러워지는 주변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다.
평범한 것과 미적인 것. 둘 사이의 구별이 지워지는 현상을 보드리야르는 ‘초미학’이라 부른다. 미적인 것이 극점에 달하면 그것은 외려 사라진다. 모든 게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 예술은 또한 모든 것이 되고 있다.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도시 풍경, 예술을 방불체하는 기발한 상업 광고, 작품을 연상시키는 멋진 상품들. 예술은 현실로 실현되고 있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모든 것이 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예술에 종언을 구한다. “예술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은 죽는 것이다.” p359.
학교 다닐 때 미술 교과서에서 현대 예술을 보면 그저 이렇게 생각했다.
‘세상에는 정말 쓸데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그냥 밥 먹고 똥 싸는 것이 차라리 낫겠네. 그런데 또 누군가는 저렇게 싸놓은 똥을 돈 주고 사기도 하는구나.’
이제는 적어도 그렇게 보지는 않을 것 같다. 진중권이 쓴 책 세 권 달랑 읽었다고 예술을 보는 눈이 확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눈앞의 작품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을 것 같다.
현대 예술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아름답다 여기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저 멀리서 어서 쫓아오라고 외치는 꼴이 아니꼽기도 하다. 하지만 그 외침을 들을 필요가 있다.
복제품으로 살고 싶지 않다면. 숫자로 여겨지기 싫다면. ‘관리 대상’으로 다뤄지지 않으려면. 참되게 살고 싶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선은 남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눈부터 키워야 하는 것 같다. 현대 예술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알아보는 일은 그래서 가치 있다.
관리되는 사회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탈주’의 실천이다. 개별자의 고유성을 지우고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사회.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진리는 거기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단독자로 남는 것이다. 자신을 쫓아오는 모든 동일성의 폭력에서 끝없이 벗어나는 것. 바로 그것만이 이 사회에서 인간이 참되게 존재하는 방식이다. p156.
한편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 조작과 편집 문제는 정치적으로도 생각해볼 문제다. 우리는 가짜 대통령을 끌어내려서 감옥에 보냈다. 하지만 이 모든 성취를 도로 빼앗길 수도 있는,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
모든 문제를 박근혜 한 명의 탓으로 몰아가서는 나머지는 그냥 덮어놓고 대충 끝내려는 미심쩍은 분위기를 느낀다. 어느새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지만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뤄지는가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오늘, 2017년 4월 16일은 가슴 시리게 햇볕이 따뜻하다. 3년이 흘렀지만 슬픔은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슬픔을 끝났다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 삶 또한 비극이 될 것이다.
언론은 모든 관심을 대통령 선거로 돌리려 애쓰고 있다. 대통령을 누구로 뽑느냐는 중요하다. 하지만 대통령 하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환상 속의 세상’, 시뮬라시옹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진중권의 지적대로 민주주의는 거대한 시뮬라시옹이다. 하지만 시뮬라시옹의 환상을 현실이 때때로 부순다. 우리는 그걸 할 수 있을까? 구치소의 박근혜보다 구치소 바깥의 ‘박근혜들’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게 거대 재벌이 될 수도 있고, 눈앞의 권위적인 직장상사일수도 있고, 가부장적인 남편이나 아버지가, 또는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까?
구치소 밖의 박근혜, 우리 곁의 박근혜, 우리 안의 박근혜를 남김없이 쫓아내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뤄낼 수 있을까?
과거의 조작은 사실을 날조하거나, 해석을 왜곡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의 조작은 그렇게 유치하지 않다. 더 중요한 조작은 편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작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 선택학으로써 이루어진다. p318.
소위 ‘최고 권력자’라는 이들은 실은 권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 거대기업, 고위 관료, 정치인들의 복잡한 커넥션으로 이루어진 권력은 실은 절대로 ‘선출’될 수 없는 어떤 시스템이다. 하지만 한 인물에게 표를 던져 대통령으로 뽑는 이들은, 그것으로 자기들이 권력을 선출한다고 굳게 믿는다. 소위 ‘민주주의’는 이 착각을 먹고 사는 거대한 시뮬라시옹이다. p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