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2 지혜가 드는 창 45
진중권 지음 / 새길아카데미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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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서 재미있다 생각한 부분이 있었다. 걸리버는 처음에 소인국에, 다음에는 거인국에 표류한다. 여기서 소인국과 거인국 여인들 미모를 묘사한다. 소인국 여인은 예쁘든 추하든 걸리버 눈에 하나같이 피부가 뽀얗고 아기같이 곱다. 거인국 여인은, 제아무리 자기 나라에서 최고 미녀 소리를 듣는다하더라도 걸리버가 보기에는 하나같이 모공도 너무 크고 달 표면같이 피부가 거칠고 흉할 뿐이다. 그 나라 사람들 기준은 걸리버에게 전혀 쓸모없다. 이방인의 낯선 눈에는 모든 것이 관습과 달리 보이니까.

 

내 눈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고 있을까? 내가 보는 대로 세계가 존재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모습일까? 내 팔 위를 기어가는 작은 개미 눈에는 내 피부가 어떻게 보일까? 줄긋는데 쓰는 쭉 뻗은 30센티 자는 정말로 직선일까? 만약 가시광선을 벗어나 적외선이나 자외선 영역까지 볼 수 있는 생명체가 내 눈앞의 컬러 사진을 본다면, 그의 눈에도 여전히 사진이 아름답게 보일까? ‘색맹인 개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항상 이런 것들이 궁금했다. 내가 믿는 진실은 정말 진실일까? 믿을만해서 믿는 것일까, 믿어야 한다고 분명하다고 배웠기 때문에 믿을만하다 여기는 것일까?

 

 

자연과학은 우리의 머리 밖에 세계가 실제로 있고, 또 우리가 그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훗설은 이 소박한 생각을 자연주의적 태도라 부른다. 훗설의 현상학은 이 소박한 태도를 비판하는데서 출발한다. 사실 소박한 실재론은 전혀 근거없는 가정에 불과하다. 자연과학이 그려내는 세계가 정말로 세계의 참모습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p423.

 

 

미학 오디세이 2권은 현대 모더니즘 예술과 칸트헤겔 이후 근대 미학을 다룬다. 흥미로운 주제가 많이 나온다. 앞서 1권에서는 객관적 세계를 흉내 내던 예술이 어떻게 주관적 성격을 차차 띠게 되는지, 그래서 주관과 객관의 문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다뤘다. 2권은 객관’, ‘진리가 뭔지, 그게 확실한 것인지를 묻고, 예술을 누가 완성하는지를 따져보는 데까지 나아간다.

 

2권은 여러 사상가들, 메를로퐁티, 크로체, 하이데거, 하르트만, 가다머, 프로이트 같은 해석학, 심리학 쪽 근현대 학자들이 두루 나온다. 예술 이야기도 있지만 예술을 해석하는 생각의 틀, 철학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그만큼 묵직해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이건 분명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본 전제들을 의심하는 주제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또 정신없이 읽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 예술은 그림 밖의 어떤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지시하는 게 있다면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여기서 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로의 전환이 시작된다.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엔 내용이나 주제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색과 형태라는 형식 요소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즉 미적 정보만 있을 뿐이다. 이제 현대 예술을 보고 저게 뭘 그린 거냐고 물으면 실례가 되는 건 이 때문이다. p330.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세잔느 이래 추상주의, 표현주의, 레디메이드, 초현실주의라는 모더니즘 예술이 어쩌다 그렇게 기괴한 형상을 하게 되었는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이제 작품에서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의심해보자고 이야기한다. 세잔느는 우리가 진짜처럼 생각하는 질서정연한 세계의 모습이 실제로는 사람이 만들어낸 투시원근법이라는 틀에 맞춰진 허구가 아니냐고 묻는다. 하이데거는 진리, 세계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프로이트는 의식 바탕에 깔린 거대한 무의식과 꿈을 이야기한다. 하나같이 자명한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을 의심하는 이야기들이다.

 

 

우리 인간은 저 친구처럼 세계 속에 던져져있죠.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계-속의-존재라나요? 따라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언제나 세계 속에 있는 지식체계나 가치관에 물들어 있기 마련이죠. 세계를 있는 그대로볼 수 없단 얘긴가? 바로 그겁니다. 우린 단지 세계 속에서 배운 대로 볼 뿐이죠. p427.

 

결국 선입관(선이해)이 없으면 우린 아예 세계를 볼 수가 없게 되죠. 세계 속에서 배운 방식대로 세계를 본다? 그걸 해석학에선 지평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이해하려면, 그걸 지평 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p429.

 

 

이런 의심들이 쌓여 예술도 변한다. 눈앞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세계 모습을 기정사실화하는 묘사 방식을 버리고, 대상을 재현하는 목표도 포기한다. 형태와 색을 제멋대로 재구성한다. 피카소는 여러 시점에서 본 3차원 대상을 번역과정없이 그대로 2차원 평면에 그린다. 살바도르 달리는 꿈과 몽상, 환각을 스스럼없이 화폭에 옮긴다. 예술은 그저 예술계라는 제도가 인정하는 관습(코드)일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공장에서 찍어낸 변기를 그대로 전시해놓고 이건 예술이다라고 외치기도 한다. 오로지 예술가만이 작품을 완성한다는 믿음도 옅어진다. 예술가가 아니라 수용자가 의미를 완성한다는 이론이 나오고, 아예 미완성 상태로 출시해서 관람자들이 작품을 저마다 해석하고 완성할 수 있도록 하는 예술 작업이 유행한다. 결국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든 것을 의심하는데서 나온 변화들이다. ‘저것도 예술이라고 걸어 놨나하고 생각했던 모더니즘 예술은 알고 보니 근대라는 종교적 환상을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한 어떤 근대인들의 아우성이었다. 인간이 쌓아올린 이성이라는 거대한 탑, ‘명석판명한 근대 지식 체계가 실제로는 얼마나 허약한 바탕 위에 섰는지를 생각해보자는 제안이었다.

 

확실한 건 없다. 현대 과학은 물질 기본 입자가 어느 시점에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을지조차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확실하면서 완벽한 무언가를 찾으려할수록 찾을 수 없게 된다. 인간에게 세상은 언제까지고 불확실한 모순 덩어리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 몸 바깥 세계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를 보고 싶으면 내 몸에서 내가 벗어나야하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세계를 완벽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오늘 봤던 무언가가 내일은 전혀 다르게 보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어쨌든 사유의 형식에서든 내용에서든, 우린 어쩔 수 없이 이상한 패러독스에 빠져든다. p585.

 

악순환(Teufelskreis). 글자 그대로 옮기면 악마의 고리란 뜻이다. 어쩌면 악마의 고리는 인간 지성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해석학에선 아예 이 숙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우린 순환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이 순환의 고리를 도는 가운데, 우리의 지식은 더 풍부해진다. 그럼 하이데거의 말대로, 문제는 순환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순환 속에 올바로들어가는 게 아닐까? p567.

 

 

아름다움은 모든 게 확실하게 보일 때보다 불확실한 무언가가 적당히 섞일 때 더해지는 법이라니까. 세상을 아름답게 인식하고 살아가는 방법도 어쩌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은 질서 또는 예측 가능성(네그엔트로피)과 예측 불가능성(엔트로피)의 함수 관계에 있다는 얘기다. p512.

 

정보 이론에선 미를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의 최적의(optimal) 관계로 규정한다. 말하자면, 일탈과 질서, 예측 불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이 적절한 비례를 이룰 때, 사물은 가장 아름답다는 얘기다. 그리스인들이 도리스식 기둥의 2/3지점에 의도적으로 도들림을 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p512-513.

 

 

당연히 여기는 것들을 더 이상 당연히 여기지 않는 것. 거기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아름다움이 샘솟는다.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기. 익숙한 삶을 낯설게 보기. 죽은 하루를 새롭게 되살리기. 마침표나 느낌표보다 역시 물음표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린 친숙한 사물엔 주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무의식중에 흘러가버리는 죽은사물이다. 죽은 사물을 되살릴수는 없을까? 낯설게 하기! 사물을 낯설게 만들 때 비로소 우리는 거기에 주목하게 된다. p515.

 

 

 

굳이 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의심하고 따지며 살아야 되나 싶기도 하다. 질문할수록 불편해지고, 의심할수록 혼란에 빠지니까. 그냥 믿던 대로 생각하고, 남들 살아오던 대로 나도 살아가면 내 마음도 편하고 모두가 편안하다. 하지만 우리는 따져보고 묻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현재 생각과 믿음에 갇히면 안 된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포기하면 안 되는 것처럼. 그게 예술이 말하는 아름다움, 미학이 보여주는 삶의 미학이 아닐까 싶다.

 

 

에코는 이렇게 혼란스럽고 다가치적이며 다의적인 작품의 세계를 코스모스와 카오스를 합쳐 카오스모스(chaosmos)라 부른다. 무한히 많은 뜻을 지니면서도 닫혀 있는 작품, 무한하면서도 닫혀 있는 우주. 어쨌든 카오스모스를 추구하는 오늘날의 열린 예술 작품은 현대 사회의 어떤 징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건 세계관과 가치관의 중심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혼란스런 상황의 반영이다. 하이젠베르크(1901~76)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세계를 확실하고 고정된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우린 그 속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새로운 인간 유형의 가능성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경직된 생각을 기꺼이 바꾸려는 자세를 가진 인간, 말하자면 자신의 삶과 인식의 도식을 혁신하는 데로 열려 있고, 자기 능력의 발전과 지평의 확대에 대해 생산적인 인간 유형 말이다. p553-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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