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이리의 교사론 -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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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신이 가르치기만 하는 전문가 교사-이런 교사는 사실 없습니다-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사이기에 정치적인 투사들입니다. 우리의 일은 수학이나 지리, 구문, 역사를 가르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과를 진지하고 유능하게 가르치는 일도, 사회의 불공평함에 뛰어들어서 헌신하는 일도 우리의 직무입니다.” p152-153.




파울로 프레이리는 교육학자, 교육사상가다. 인간해방을 위한 교육을 외치며 평생 열심히 싸운 사람. 박해, 투옥, 추방이 이어졌지만 굽히지 않고 우직하게 신념을 지켰다. 그에게 교육은 삶이자, 희망이자, 투쟁이었다. 실천이 곧 이론이었던 사람. 이론이 곧 실천이었던 사람. 뜨겁게 투쟁한 사람. 누구보다도 뜨겁게 사람을 사랑한 사람.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부제가 붙었다. 교사는 어때야 하는가. 교육자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그런 이야기가 한 장 한 장 묵직하게 담겼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좋은 선생은 그저 잘 가르치고 일 잘 하는 교사가 아니다. 함부로 가르치지 않는 사람. 학생 앞에 서서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옆에 서서 함께 비판적으로 교실을 읽고, 세상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 사람. 잘 가르치면서도 잘 싸우는 사람. 옳게 생각하면서 기꺼이 옳게 행동하는 사람. 민주적 사회를 위해 싸우며 민주적 학교와 교실을 쟁취하려 기꺼이 몸을 던지는 사람. 말과 실천이 따로 놀지 않는 사람. 무엇보다도, 학습자를, 그리고 가르치는 과정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선생하기 참 만만치 않다. 나는 어떤 선생으로 살아왔나. 오래 전 선물 받은 이 책을 뒤늦게 펴들고 생각에 빠진다. 뭔가 중요한 걸 잊었던 건 아닐까? 잘 살고 있나? 잘 가르치고 있나? 원래 이렇게 하려던 게 맞나? 질문이 많아진다.




“교육자들은 아이들이 활동하는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꿈꾸는 세계에 대해, 그들 세계의 공격성으로부터 자신을 기술적으로 방어하는 아이들의 언어에 대해 알아야 하며, 학교에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p183.


나는 어디를 보고 있었나? 아이들 얼굴보다 모니터와 서류더미를 더 많이 쳐다보지는 않았던가? 당연한 이야기인데 당연하게 지키지는 못하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교무실에 앉아있었나 싶다. 분명히 내가 원해서 이러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간절히 원했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책임이다.




“현명하고 유능한 교사라면 누구나 직시해야 하는 기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교육자와 학습자의 관계야말로 교육자가 장단기적으로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 점에서, 우리 교육자들은 학습자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p151.


“학교에서 학습자들에게 그리고 학습자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학습자들의 나이에 관계없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민주적 교사들은 학습자들이 교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도록 만듭니다. … 민주적 교사는 학습자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학습자들이 교사에게도 귀 기울이도록 가르칩니다.” p167.


역사 가르치며 목에 핏대 가득 세우고 민주주의를 말한다. 그런데 내 수업은? 매년 첫 수업시간에 분위기 잡는다면서 “너희가 나에게 예의를 지켜준다면 나도 예의를 지키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용서치 않을 거야”라며 엄포를 놓지 않았던가? 실제로 수업을 아예 거부하거나 겉도는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말과 행동을 보였던가? 좋게 타일러지지 않는 학생을 어떻게 다루었던가? 그들과 대화라는 걸 하긴 했던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하기 보다는 잘 다듬어진 기술적 방법으로 윽박질렀다가 풀어줬다가 하면서 행동을 내 뜻대로 조종하려고 하지는 않았나?


질문을 하다 보니 참 우습다.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권위주의를 스스로 허용했던가. 찝찝해하면서도 금방 흘려버린 것들이 무척 많았다.


교실에서 모든 것을 허락할 수는 없다. 자유와 무절제는 다르니까. 프레이리가 말하는 ‘자유와 규율 사이 긴장’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경력은 쌓였는데 이토록 중요한 질문에 아직 답을 명쾌하게 내놓지 못하겠다. 다만 아래 글귀를 마음에 새긴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내가 들어가는 교실을 조금씩이라도 바꿔보자고 마음 먹어본다.


“가르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교육 실천은 하나의 재앙입니다. 행정당국이 자신의 가르치는 자유를 제한하면 저항하면서, 스스로는 불명예스럽게도 배우는 사람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그 교사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p145-146.


“우리가 민주주의를 헛된 꿈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는 발달 중인 아이들과 학생들의 상태 그대로를 존중해줘야 합니다.” p115.


“나는 교사들이 완벽한 성자가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장점도 있고 실수도 하는 인간이기에, 교사들은 절제를 위한 투쟁, 자유를 위한 투쟁,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규율을 세우기 위한 투쟁을 증언해야(스스로 증명해보여야) 합니다.” p155.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사랑이 없다면 교사들의 활동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학생들을 향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과정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p125.




이 책은 읽기 어렵다. 원래 어려운 책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런데 말투가 어색하거나 딱딱하다. 번역서의 한계다. 하지만 내용이 너무 좋다. 감수할만하다.


다만, 좀 더 친절하게 편집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중요하지만 알기 어려운 주요 개념어를 각주나 미주로 자세히 해설할 수 있었을 텐데. 프레이리가 쓴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전혀 뜻이 와 닿지 않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그냥 ‘이러이러한 책을 참고할 것’이라고만 되어 있다. “코드화”, “탈코드화”는 무슨 말일까? “페다고지”를 다시 읽어보면 알 수 있을까?


“규율”이라는 개념도 여러 번 나오는데 해설하는 미주를 책 끄트머리에서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대충대충 이해하며 넘어갈 수 있는 단어이기는 하다. 하지만 미주를 읽어보니 프레이리는 그 단어를 일상적 의미와 다르게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읽을 만한 책이다. 교사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교사가 되고서 처음의 마음을 잃은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되어줄 책이다. 첫 페이지부터 잘 읽히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새 등에 땀이 흥건한 채 빠져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자로서 우리는 정치가입니다. 우리는 교육할 때 정치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꿈꾼다면, 학습자에게 말을 걸 수 있고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우리에게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밤낮으로 싸웁시다.” p173.


한국 학교는 여전히 관료적이다. 교무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실은 더 하다. 이 피라미드 쌓기 게임은 언제쯤 끝날까. 지금도 어디선가 헛된 피라미드를 허물고 민주주의를 새로 쌓아올리기 위해 밤낮으로 싸우고 있을, 교실과 교무실을 바꿔가고 있을 선생님들을 존경한다. 때때로 교문 밖으로 나서서 거리를 밝히는 등불이 되어 행진하는 선생님들도 존경한다. 나도 그 옆에서 하염없이 걷고 싶다. 그런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아직 꿈은 끝나지 않았다.


책 한 줄 한 줄이 무척 좋아 정신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 구절은 스스로 응원하기에 참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일상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관료화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방법을 꼭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시도를 그만두는 것이 차라리 물질적으로 이득이 될지라도, 이 도전을 계속 해야만 합니다.”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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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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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이었다. 본가에서 오래된 책 더미를 정리하다 반가운 책을 만났다. 2004년 생일날 대학 친구가 선물한 책이 나왔다. 안표지에는 손수 쓴 편지가 한 글자 한 글자 새겨져있다. 


“이 책은 ‘공부’하기 위한 책은 아니다만, 삶과 이념에 대해서는 고민하게 해줄 것 같다.”

“살고 있는지, 살아지고 있는지, 반성하자. 그리고 공부하자.”


왠지 그리운 기분이 들어 자취방으로 들고 왔다. 책을 펼쳐들고 한 장 한 장 넘긴다. 잔디밭에서 마시던 막걸리 냄새가 책장 사이에서 나는 것 같다. 학업 때문에 미국에 건너간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3쪽)


대학생 때 좌파가 되고 싶었다. 나도 해방, 너도 해방, 우리 모두 해방. 무엇보다 자기 해방. 해방이라는 말이 그렇게 좋았다. 그리고 저 구절이 참 멋스러웠다. 하지만 저게 마냥 멋지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낸다고? 그저 내 양심 하나 건사하는 일도 쉽지 않은 게 어른의 삶이었다.


좌파를 선망했지만 책을 게을리 읽었던. 좌파를 닮기에는 품성이 덜 자랐던. 건전하기에는 자기 성찰이 부족했던. 친구가 선물해준 이 책도 그 때는 그냥 띄엄띄엄 읽었다. 그러다 졸업하고, 군대 가고, 취직하다보니 정신없이 뭔가에 휩쓸려왔다. 띄엄띄엄 살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진보적으로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었다.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반성이 없는, 공부가 없는. 이제와 다시 이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참 아깝다. 그 때 이 책을 공들여 읽었다면 조금은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방향이라도 잘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B급 좌파”는 김규항이 98년부터 2001년 사이에 쓴 칼럼을 모은 책이다. 시대가 좀 지났지만 지금도 읽을 만한 책이다.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글쓴이는 시대를 앞서 사회를 분석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대학 울타리를 살짝만 벗어나도 “빨갱이”라는 말을 누구나 의심하지 않고 즐겨 썼다. 전체주의, 집단주의가 일상을 여전히 강력히 지배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은 여전히 힘이 있다.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 들쥐의 습성은 한 마리가 맨 앞에서 뛰면 덮어놓고 뒤따라가는 것이다.’ 위컴은 ‘망언’을 사과했지만 ‘들쥐들’은 18년 동안 덮어놓고 맨 앞에서 뛰는 놈만 따라다녀 왔다. 파시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다.” (40쪽)


지금은 누구나 다 이렇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여전히 들쥐 같은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지금도 썰렁해진 광장에서 중국산 태극기를 흔들며 과거의 망령을 애처롭게 붙잡고 있다.



“어쭙잖은 말이지만 지식인이란 ‘내가 지향하는바’와 ‘실제의 나’ 사이에 숙명적인 거리를 갖고 사는 ‘삶의 코미디언’이다.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삶이란 그 숙명적인 거리를 어떻게든 줄이려 발악하는 것일 뿐.” (11쪽)


내가 지식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식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보니 어영부영 한심하게 보내는 삶을 경계하는 위기감은 항상 갖고 있다. 배움을 줄만한 사람이 아니면서 누군가를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다.


잘 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렇게 작고, 좁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잔뜩 겁만 많아져서 일단 나부터 먼저 ‘채우기’ 바쁘다. 나 하나 건사하기에도 숨 가쁜 인간이 되었다. 글쓴이는 스스로 ‘B급 좌파’라고 부른다. 나는 좌파마저도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양심을 잘 건사하는 건전한 우파가 되는 데 성공한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어중간하게 둥둥 떠다닐 뿐.



“세상의 절반이나 되는 여성들이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감수해야 하는 갖은 불공정함을 놓아둔 채 어떤 진보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성적 차별은 ‘사나이’로부터 나온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사내다운 사나이가 존재’하기 위해선 언제나 ‘여자다운 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나이’라는 말은 온갖 범죄, 온갖 악행, 온갖 불평등, 온갖 권위주의, 온갖 파시즘의 면죄부이기도 했다.” (83쪽)


대학생 때 자칭 ‘진보’라면서 우스꽝스러운 짓은 다 하고 다녔다. 사내다움을 내세우고, 사내다워지고 싶어 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듯 포장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목소리만 크고 허세 가득했던.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민망한 짓인 줄 알면서도 남자 아이들 가득한 교실을 휘어잡으려고 스스로 사내다운 교사로 포장한다.


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은 갖고 있다. 하지만 아직 인식은 정밀하지 않다. 나는 여전히 “여성혐오”라는 단어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의 성차별 인식 시계는 아마도 10년 전 대학생 시절 그 언저리에 멈춰있는 것 같다. 제대로 찾아 공부한다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무엇보다 실천이 안 된다. 스스로 좌파, 진보로 살아갈 자신을 잃어버린 결정적인 이유는 페미니즘을 보는 내 태도다.


학생 때 페미니즘을 접하긴 했지만 무척 불편해했다. 지금도 역시 불편하다. 아니, 차라리 겁내고 있다고 해야 정직할 것 같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페미니즘 글들을 보면 종종 지나치게 적대심을 강조하고 과격한 주장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곤 한다. ‘아니, 차라리 남자로 태어난 게 그냥 범죄라고 하지?’ 사실 이건 참 웃긴 태도다. 노동 문제, 현대사 문제로 토론할 때 ‘네 주장은 너무 과격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고 얼마나 답답해했던가!


페미니즘은 내게 숙제다. 여기서 그냥 뒤돌아선다면 나는 그냥저냥 반성 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을 테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적어도 대충 살지는 않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도 있겠지. 김규항 같은 이들은 이미 20년 전에 한국 평균 남성을 훌쩍 뛰어 넘어 시대를 앞서갔다. 좌파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싸움은 절대선인 사람들과 절대악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자기 성찰이 가능한 사람들과 자기 성찰이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160쪽)


문제는 자기 성찰이다. 어떤 인연이 닿아 지금이라도 이 책을 다시 들여다봐서 참 다행이다. 지식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고민하게 한다. 콧잔등에 옛날 잔디 냄새가 잠시 스친다. 그 때의 나를 다시 불러낼 수 있을까?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지금 와서 그런 거창한 꿈을 바로 가질 수는 없으니, 일단 나부터 좀 더 좋은 사람으로 바꾸는 일부터 시작하자. 이 책은 참 날카롭다. 20대의 나는 그 칼날에서 자유로웠다. 그러나 30대의 나는 이리저리 찔려서 많이 아프다. 날카로운 만큼 나와, 우리와, 이 사회를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요즘 쓴 글을 따로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이 시절 김규항은 글을 참 잘 썼다.


“사람들은 이제 오월 광주를 서서히 지워간다. 자상, 열상, 타박상, 골절, 총상, 그리고 자책감, 그리움 같은 광주의 ‘구체적 실감’이 사라진 사람들의 가슴 속엔 민주, 열사, 항쟁, 성지, 기념식 같은 ‘역사적 추상’만 남았다. … 이제 자상, 열상, 타박상, 골절, 총상, 그리고 자책감, 그리움 같은 오월의 ‘구체적 실감’은 휴일 오후의 종합병원 응급실에서나 어렴풋이 떠올려질 뿐이다. 이제 오월의 정신은 여전히 그 도살의 기억을 떨치지 못하는, 여전히 세상을 응급실로 파악하는 몇몇 어리석은 사람들의 썩어진 가슴 속에만 살아있다. 더러운 조선의 역사는 오늘도 장강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풍선 하나씩 손에 든 채 놀이동산과 패스트푸드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아기자기한 목소리로 어린이날과 스승의 날을 읊조리며 그들의 오월을 사뿐히 통과한다.” (112쪽)


기억난다. 이 구절을 읽으며 눈시울이, 그리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마 그 다음 해였던가. 망월동 묘지 갔다가 왠지 너무 슬퍼져서 눈물 콧물 흩뿌리며 흐느꼈다. 기억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나는 현대사 수업시간에 지금까지 5.18을 얼마나 ‘알량하게’ 다뤄왔던가. 80년 5월 광주는 눈물 없이, 심장을 짜내는 고통 없이 그냥 흘려 넘겨서는 안 된다. 내가 학생 때 이 구절을 보고 배운 것. 그것을 앞으로 나의 학생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학생들을 망월동에 모두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니, 어떻게 해야 그 날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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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20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과 세상에 대한 공부를 안 하면 삼성동에 모여 죽치고 서있는 사람들처럼 됩니다.

돌아온탕아 2017-03-22 13:32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나이 먹는다고 공부를 멈추면 나이를 거꾸로 먹게되지요.
 
1만권 독서법 - 인생은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나미 아쓰시, 장은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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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독서가 참 힘들었다. ‘무겁게’ 읽는 습관이 들어서 그런가. 시간을 오래 들여 꼼꼼히 보고 노트에 요약하고.


예전에 책을 덮고 나서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뭐라도 남기려면 내용을 기억하려고 애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묵직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정독하고는 기억하기 위해 요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잃었다. 책읽기가 즐겁지 않다. 가벼운 책을 펴도 마음이 가볍지 않다. 언제부턴가 책을 집어 들기 전에 덜컥 부담부터 느낀다.


글쓴이는 책을 즐기듯, 가볍게 읽으라고 한다. 책 내용을 100% 기억하려 애쓰지 말고 가장 중요한 1%라도 남기는 독서를 하라고 한다. 책에 나오는 문자들을 소유하려는 집착을 버리고 음악을 듣듯 자연스럽게 즐기며 흘려보내라 한다. 책 한 권에서 많은 것을 얻으려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보다는 많은 책을 읽고 조금씩 얻은 바를 모아 큰 그림을 그리라 한다. 정독보다 다독이 좋다. 책 한 권을 너무 오래 붙잡고 공들여 읽어봤자 남는 게 없다. 그래서는 책의 전체상을 알 수 없다. 차라리 빠르게 한 권을 하루 만에 읽어내는 편이 낫다. 흘려버린 것들을 아쉬워말고 그럼에도 내게 남은 내용이 가장 소중한 요소임을 깨달으라고 한다.


책을 읽으며 인상 깊은 구절을 한두 줄씩 손으로 노트에 쓴다. 책 내용을 암기하려 하지 말고 그렇게 ‘인용’ 목록을 쌓아둔다. 목록 가운데 가장 핵심이라 생각하는, ‘최고의 문장’을 하나 골라 따로 다른 노트에 적는다. 그 밑에 30~40자 정도로 책 내용을 리뷰 한다. 이렇게 책 한 권을 압축한다. 책을 떠올릴 수 있는 열쇠가 된다.


빨리 읽을 수 있는 책과 그럴 필요 없는 책을 구분한다.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서 같은 ‘설명글’은 빨리 넘기며 볼 수 있지만 스토리가 있는 소설은 그러기 어렵다.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은 일주일에 6권정도 끝내는 것을 목표로 속도감 있게 읽는다. 머리글과 차례를 정독해 책의 전체 구조를 먼저 파악하고서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소제목 중심으로 이리저리 넘겨보며 거시적 내용을 그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한다. 핵심은 보통 맨 앞과 맨 뒤 5줄에 나온다. 그 부분만 자세히 읽고 나머지는 그냥 넘겨보는 것도 시간단축에 도움이 된다. 매번 단조로운 속도로 읽으면 갈수록 느리게 읽게 된다. 다양한 리듬감으로 즐기듯 읽는다.


나는 이런 쪽 책을 별로 안 좋아한다. 공부법, 독서법을 알려준다면서 자기 자랑만 가득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처음에 서점에서 제목만 보고 피했다. 쓸모없는 속독법 책인 줄 알았다. 막상 읽어보니 참 솔깃하다. 방법론을 다루었다기보다 독서 ‘관점’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글쓴이의 관점에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합리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공책이나 고전, 문학책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하지만 자기계발서 같이 ‘가벼운’ 책을 읽을 때는 괜찮은 방법일 것이라 생각한다. 책을 사자마자 2시간 만에 다 읽었다. 글쓴이가 말한 대로 바로 서평을 써본다.


앞으로 다양한 책을 많이 접해보고 싶다. 그럴 때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핵심을 흔적으로 남길 수 있는 독서를 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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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20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쓰는 것도 좋습니다. ^^

돌아온탕아 2017-03-22 13:3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너무 무겁게 접근하지 않으려고요^^ 책 읽기가 그나마 취미인데 그것마저 부담되면 안 될테니까요.
 
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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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폭발의 혼돈으로부터 이제 막 우리가 깨닫기 시작한 조화의 코스모스로 이어지기까지 우주가 밟아 온 진화의 과정은 물질과 에너지의 멋진 상호 변환이었다. … 우리 인류야말로 우주가 내놓은 가장 눈부신 변환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대폭발의 아득히 먼 후손이다. 우리는 코스모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코스모스를 알고자, 더불어 코스모스를 변화시키고자 태어난 존재이다.” (60-61쪽)


코스모스 제1장은 이렇게 끝난다. 700쪽이 넘는 커다란 책을 언제 다 읽을까 싶었다. 그런데 저 구절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 따위 남루한 구절을 읊조리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 삶의 의미를 짚어준다. 나 말고 누가 감히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칼 세이건이 말한 대로라면 나는 무척 위대한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나온 것이다.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임무라면 나도 하나 갖고 싶어진다.


과학을 다루는데 서정적이다. 객관적 사실을 말하지만 문학작품을 읽는 듯 마음이 일렁인다. 생전의 칼 세이건은 날카로우면서도 무척 낭만적인 사람이지 않았을까?


이 책은 ‘과학하기’가 무척 즐겁다고 알려준다. 과학으로 들여다보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가르쳐주는 여행 가이드북이기도 하다. 읽다보면 아래처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1. 재미있는 영화를 깊게 볼 수 있다.

“인터스텔라”를 재밌게 봤다. 하지만 보다가 너무 답답했다. 주인공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서 겪는 ‘4차원 장면’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화 보기 전에 이 책을 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3차원 공간을 4차원에서 보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무척 생생하고 친절하게 묘사해놓았는데 말이다.


얼마 전에 “닥터 스트레인지”를 보니 마법사들이 모든 방향으로 입체가 계속 생겨나며 이상하게 변형되는 공간에서 악당과 싸운다. 그냥 “인셉션에서 봤던 장면이네”라고 넘길 수도 있지만 이제는 “혹시 시간을 초월한 4차원을 묘사했나?”라고 짚어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허구일지언정 영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보는 영화가 무엇을 바탕으로 상상한 장면을 담았는지를 생각하면서 볼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즐거움이다.



2. 일상을 더 재미있게 느낄 수 있다.


“빵-!”하고 시끄럽게 경적 울리며 지나쳐가는 자동차는 무척 짜증스럽다. 하지만 도플러 효과를 알고 나면 ‘차가 내게 가까워질수록 소리가 날카로워지고 내게서 멀어질수록 소리가 길게 늘어지는군. 그런데 하늘의 별빛도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거구나’라고 신기해할 수 있다. 짜증이 설렘으로 바뀐다.


빛 편광분석으로 멀리 떨어진 천체의 구성 성분을 추정하는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다. 조명 설치할 때나 사진 찍을 때 맞춰보는 색온도 같은 개념을 우주 관측에서도 활용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전파 역시 빛이며, 라디오 방송 전파에서 사용하는 특정 주파수 대역에서는 지구가 태양보다도 강렬하게 빛난다는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다.


“망막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은 시야의 한가운데가 아니다. 그래서 눈길을 약간 비껴 주면, 희미한 별이나 물체가 더 잘 보이게 된다.” (180쪽)


이런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다. 군대에서 야간 사격할 때 해주는 말을 천문학자도 한다는 게 흥미롭다.



3. 재미있는 역사도 덤으로 알 수 있다.


미지의 영역이었던 고대 이집트 문명의 상형문자를 해석하는데 로제타석이 열쇠가 되었다. 그런데 “로제타석”은 잘못 붙여진 이름이다.


“로제타석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석판은 로제타가 아니라 ‘라시드의 돌’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이 석판이 발견된 곳이 나일 삼각주에 위치한 라시드라는 마을이고 ‘로제타’는 아랍 어에 무지했던 유럽인들이 라시드를 잘못 부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587쪽)


생명 진화는 수많은 사소한 우연들이 쌓인 결과다. 과거사건 중에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지구는 현재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인간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프랑스에서 라 페루스가 탐험대의 선원을 모집하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다. 그래서 똑똑하고 열성적인 젊은이들도 많이 탈락했다. 이 중에 코르시카 섬 출신의 젊은 포병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끼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한 분기점이 아닐 수 없다. 라 페루스가 나폴레옹을 선발했더라면, 로제타석은 발견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그렇다면 샹폴리옹의 상형 문자 해독은 불가능했을 게고, 근‧현대사는 여러 면에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것이다.” (607쪽)


“코스모스”는 우주 진화를 다룬다. 그러다보니 아주 미미한 지분만 차지할 뿐이지만, 인간이 이룩한 역사 또한 비중 있게 다루지 않을 수 없다. 과학자의 눈으로 본 역사는 역사가가 정리한 그것과는 색다르게 재미있다. 특히 고대 이오니아 자연철학이 이후의 고전 그리스 철학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학문이며, 그들을 소크라테스에 이르는 전 단계로 여길 것이 아니라 현대 과학과 같은 반열에 올려 생각해야 한다는 글쓴이 생각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4. 현대 학문을 쌓아올린 사람들을 잘 알게 된다. 갑자기 ‘열공’하고 싶어진다.


인류는 한 때 미신과 맹목적 신앙의 열정 속에 살았다. 지금 우리 눈으로 보면 그저 허무맹랑한 옛날이야기일지 몰라도 중세 사람들에게 천상에 사는 신과 천사들은 의심할 여지없는 현존하는 세계였다. 그런데 그 믿음에 의심을 품은 불순한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거침없이 손을 들고 나섰다. 그리고 비난과 억압을 온 몸으로 받아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해와 달이 불타는 바위라고 주장했다가 고대 아테네인들에게 ‘신성 모독’ 죄목으로 탄압 받았다. 코페르니쿠스가 쓴 책은 19세기 중반까지 로마 가톨릭이 금서로 지정했고, 케플러는 달 표면에서 지구가 자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내용으로 공상과학 소설을 썼다가 어머니를 마녀 사냥으로 잃을 뻔했다. 갈릴레오, 크리스티앙 하위헌스, 다윈 같은 사람들은 그저 유명한 학자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 손가락질에 분연히 맞설 줄 알았던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자기가 그렇다고 굳게 알고 있었던, 또는 그렇게 믿고 싶었던 세계 모습이 실제로는 잘못된 묘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미련 없이 오류를 버리고 진리와 진실을 마주했다. 끊임없이 검증하고 또 검증하는, 때때로 자기가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길고 험한 길을 외로움을 이기며 걸어갈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고민과 삶, 싸움은 인생을 걸고 진리를 찾는 과정이었다. 지금 배우는 모든 학문은 그냥 그런 문자 조합이 아니라 누군가 인생을 걸고 투쟁한 흔적이다. 먼지 냄새나는 두꺼운 책 더미에서 누구보다도 낭만적이었던 어떤 사람들의 향기가 느껴진다. 갑자기 이런저런 것들을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진다.



5. ‘나’의 존재를 다시 생각해본다.


“태양과 지구에 존재하는 원소들의 상당 부분이 별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성분의 관점에서 볼 때, 우주는 하나의 물질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수많은 별들에서 발견되는 가장 흔한 원소들이 다름이 아닌 행성 지구에서의 생명 현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수소, 나트륨, 마그네슘, 철 등이라니! 물질 공동체의 신비함에 우리는 그저 놀라기만 할 뿐이다.” (64쪽)


“우리의 DNA를 이루는 질소, 치아를 구성하는 칼슘, 혈액의 주요 성분인 철, 애플파이에 들어 있는 탄소 등의 원자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조리 별의 내부에서 합성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별의 자녀들이다.” (458쪽)


내가 별에서 왔다니. 나 같은 사람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정말 ‘별에서 온 그대’였다니. 내가 곧 우주고, 당신이 곧 세계였다. 그렇다고 지금 바로 별처럼 환하게 잘생겨지며 반짝반짝 빛날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그냥 티끌 같은 허무한 존재만은 아니었다는 점에 안심하게 된다. 나는 갑자기 세상에 뚝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별들이 오랜 세월 빚은 인과성의 산물이다.



6.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본다.


때때로 짜증나는 사람이 있다. 생각이 맞지 않거나, 생면부지 사이인데 옆에서 갑자기 방귀뀌고 트림하거나. 꼭 그런 사람들이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왜 저런 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지 깊이 슬퍼지는 경우도 있다.


“인간은 지구 이외의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 지구에만 있다. 인간은 지구라고 불리는 이 자그마한 행성에서만 사는 존재이다. 우리는 희귀종인 동시에 멸종 위기종이다. 우주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하나하나는 모두 귀중하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와 다른 생각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를 죽인다거나 미워해서야 되겠는가?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수천억 개나 되는 수많은 은하들 중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674-675쪽)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에는 국경선이 없다. 우주에서 본 지구는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다. 지구는 극단적 형태의 민족 우월주의, 우스꽝스러운 종교적 광신, 맹목적이고 유치한 국가주의 등이 발붙일 곳이 결코 아니다. 별들의 요새와 보루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작디작은 푸른 반점일 뿐이다. … 우주에는 생명이 전혀 서식한 적이 없는 세상이 있다. 우주적 재앙의 표적이 되어 새까맣게 타버린 불모의 세상들이 우주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우리는 행운아이다.” (632-633쪽)


이런 구절을 읽고 나니 시끄럽고 무례했던 어느 아저씨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괴롭히던, 또는 내가 혐오하는 누군가도, 넓은 우주에 딱 한 명씩 밖에 없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누군가를 함부로 미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조심스레 다짐해본다. 한 명 한 명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 인생은 한 번이고, 그렇게 지나가는 삶 속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덧없이 흘려보내기에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사람이 사람을 혐오하고,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탐욕스러운 자들을 그냥 방관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함부로 전쟁을 이야기하고, 함부로 평화를 위협하려는 움직임을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7. 겸손해진다.


“별들의 일생에 비한다면 사람의 일생은 하루살이에 불과하다. 단 하루의 무상한 삶을 영위하는 하루살이들의 눈에는, 우리 인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지겹게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한심한 존재로 보일 것이다. 한편 별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삶은 어떤 것일까? 아주 이상할 정도로 차갑고 지극히 단단한 규산염과 철로 만들어진 작은 공 모양의 땅덩어리에서 10억 분의 1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만 반짝하고 사라지는 매우 하찮은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429쪽)


거대한 우주 이야기를 읽다 보니 내가 안달복달해왔던 것들이 왠지 덧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걱정하는 일들이 작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 인생이지만, 내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은 나에게만 중요할 뿐이고, 내가 안간힘을 쓰며 이룬 것들은 거대한 세상에서 점 하나로 표현하지도 못할 미미한 흔적을 남길 뿐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콧대가 조금은 꺾인 것 같다.



8. 위로받는다.


끝이 있는 삶이 슬펐다. 소중한 물건도, 풍경도, 인연도, 삶도 언젠가는 끝난다. 세상은 영원히 이어질 텐데 나만 문득 나타났다가 덧없이 사라진다는 숙명이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구는 50-60억년 뒤에 태양이 적색거성으로 부풀어 오를 때 뜨겁게 타오르며 삼켜질 것이다. 태양도 죽는다. 우주에 있는 모든 별들은 언젠가 생을 마친다. 우주 자체도 끝이 있다. 우주가 끝없이 팽창하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든, 마지막은 반드시 온다. 모든 것에 끝이 있다. 그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운명이다. 끝이 있기에 우주도, 별도, 별 중에 하나인 태양도, 지구도, 그리고 나도 지금을 오롯이 느끼며 살 수 있다. 이 순간이 무척 소중하다.


“우주 공간을 눈여겨보면 하나의 거푸집에서 찍어 낸 것처럼 모양이 아주 비슷한 은하들이 우주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은하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중력의 법칙과 각운동량 보존 법칙이 우주 어디에서든지 그대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중력 법칙과 각운동량 보존 법칙은 지상에서는 물체의 낙하 운동과 피겨스케이트 선수의 회전 묘기도 지배한다.” (486쪽)


상식이 통하지 않고 가치가 혼미해지는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믿고 살아야할지 몰라 막막해진다. 그런데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적 법칙이 있다고 한다. 그 법칙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 그래도 내가 원칙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다.



9. 책 읽고 싶어진다. 글 쓰고 싶어진다. 마법을 부리고 싶어진다.


책을 읽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잠을 잘 수도 있고 놀러 다닐 수도 있는데 책을 왜 다들 읽는 것일까?


“생물학에는 반복설이라는 것이 있다. 이 가설은 모든 상황에 100퍼센트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생물의 발생 과정에 관해서는 비교적 잘 들어맞는다. 반복설의 핵심 내용은 개체 하나의 발생 과정이 해당 종이 겪어 온 진화의 전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나는 개개인의 지적 성숙 과정에서도 반복설이 성립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조상들이 해 온 사고의 과정들을 되풀이하면서 하나의 개인으로 성장해 간다.” (331쪽)


나는 책을 읽으며 압축적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내 앞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밝혀낸 것들을 책장을 넘기며 내 존재로 만드는 중이다. 사람은 진화해왔다. 도서관의 수많은 책들이 그 증거다. 나도 진화하는 중이다. 독서는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시간이다.


“글쓰기야말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글쓰기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놓았고, 먼 과거에 살던 시민과 오늘을 사는 우리를 하나가 되게 했다. 책은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러므로 글쓰기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마법사가 된 것이다.” (558쪽)


책상 앞에서 키보드 두들기는 지금, 나는 마법을 부리고 있다.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의기양양해진다. 어릴 때 어깨에 망토를 두른 기분이 이와 비슷할까?



10. 굉장히 멀리 여행 다녀온 기분을 느낄 수 있다.


700쪽 책 한 권에 우주가 탄생하고 인간이 땅 위에 설 때 까지 과정이 오롯이 담겼다. 빛스펙트럼을 꼼꼼히 헤집어보며 금성의 구성성분이 무엇인지 살핀다. 전파로 쏘아올린, 인류가 보낸 편지 내용도 읽어본다. 바이킹 탐사선과 함께 화성에 날아가 생명을 찾는다. 보이저 우주선을 따라 목성과 토성을 지나 태양계 밖으로 날아간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으로 돌아온다. 삶의 의미를 묻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고민해본다.


몇 번을 거듭 읽고 책을 덮었다. 굉장히 멀리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여운이 남는다. 걱정하며 서문을 읽기 시작했다가 감동하며 뒤표지를 닫았다. 과학책인데 두꺼운 철학책 한 권을 읽은 것 같기도 하다. 좋아하는 드라마가 끝나면 마치 친한 친구와 헤어지는 것 같다. 이번에는 책을 덮으며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물론 다소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최신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칼 세이건은 인간 두뇌의 신경망 조합이 담은 정보량이 지구에서 가장 큰 도서관의 장서량과 맞먹을 정도라고 표현했는데, 다른 책에서 다룬 뇌 과학 내용을 보니 두뇌가 품은 세계가 은하계보다 더 클 것이라고 나와 있다. 아마 1980년대 이후로 뇌의 비밀이 많이 밝혀진 모양이다. 그래도 옮긴이 역시 천문학자이다 보니, 천문학 부분은 최신 내용을 각주로 꼼꼼하게 달아놓았다.


최신 과학을 교과서 보듯이 충실하게 습득하고 싶다면 다른 책을 읽어보는 게 좋다. 사실 정상적으로 고등학교를 나왔다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정도의 내용이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자마자 까맣게 잊어버린, 그런데 다시 한 번 들어보고 싶은 과학 이야기에 관심 있다면 이 책이 잘 어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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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경제, 우리들의 경제학 - 마르크스 『자본』의 재구성
강신준 지음 / 길(도서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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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어둡다. 샤머니즘 수준으로 후퇴한 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경제도 최악이다. 검은 파도 몰아치는 폭풍 속을 작은 돛단배 하나에 기대 헤매는 기분이랄까. 들리는 이야기는 많고 불안한 마음은 커진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꼼짝없이 난파하지 싶다. 그런데 내 손에 괜찮은 나침반 하나 없다.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나가야 할까?


원래 마르크스 “자본론”을 보기 전에 이 책을 입문서로 읽었다. 다른 책 읽으려고 거쳐 가는 책이어서 그랬을까. 그때는 무척 대충 읽었다. 결국 “자본론” 자체도 1-1권만 읽고 끝냈다. ‘원전’의 분량과 난이도에 질렸던 까닭이다.


얼마 전 장하준의 경제학 책을 읽었다. 통계 수치 가득한 그 책을 덮고 나서 경제 위기 문제를 밑바닥부터 긁어주는 다른 책을 읽고 싶어졌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경제 공황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게 다시 “자본론”으로 돌아왔다. “자본론” 원전부터 다시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이 책을 다시 집었다.


이번에는 꼼꼼히 읽었다. 예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훌륭한 책이다. “자본론” 자체가 워낙 훌륭해서일까? 이 책을 ‘자본론 입문서’가 아니라 경제 위기를 진단한 책으로 읽어도 좋다. 그만큼 알기 쉽게, 그러면서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왜 살기 힘든가?’라는 아픈 질문의 답을 명쾌하게 찾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이 가장 훌륭하다. 글쓴이, 강신준 교수는 입담이 좋다. 여러 질문을 연달아 던져가며 차근차근 친숙하게 이야기로 풀어낸다.



애덤 스미스가 밝혀냈듯, 모든 부유함, 즉 가치는 곧 노동시간이다. 인간이 일정 시간 수행한 노동이 가치를 만들어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생산 설비, 재료)을 구매하여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한다. 그런데 구매할 때의 가치와 판매할 때의 가치가 동일하면 자본가의 활동은 의미가 없다. 생산과정에서 가치가 늘어나야, 즉 구매할 때보다 더 비싸게 판매할 수 있어야 자본가가 이윤을 얻는다.


자본가는 어떻게 가치를 늘릴까? 답은 ‘노동력’에 있었다. 실제로 노동하여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죽어있는 생산수단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노동력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매할 때 4(노동)시간에 해당하는 가치를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불했다. 그런데 노동자가 실제로는 8시간 일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처음에는 없었던 4시간만큼 가치가 생산과정에서 새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늘어난 가치를 ‘잉여가치’라 한다. 이 4시간짜리 잉여가치는 노동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자본가가 가진다. 이것이 자본가가 생산을 수행하여 얻는 ‘이윤’의 실체다. ‘이윤’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서 빼앗은 잉여가치다. 자본주의 생산의 본질은 ‘착취’인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일단 ‘잉여가치’라는 말을 지우고 ‘이윤’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자본가가 부당한 이익을 얻는다는 느낌을 지운다. 임금의 명칭도 그럴듯하게 지어낸다. 실제 한달 만큼의 노동시간(가치)이 들어있다고 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을 임금으로 주면서 “월급”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주급, 시급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마치 실제 일한 시간에 대해, 실제 생산한 가치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모두 임금으로 지불하는 것처럼 눈속임하는 것이다.


임금은 그럼 어떻게 정해진 것인가? 마치 노동자가 실제 생산에 기여한 만큼, 실제 생산한 가치만큼 임금을 받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 임금은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와 아무 상관없이 정해진다. 임금은 사실 생산이 수행되기도 전에 자본가가 미리 정해놓는 것이다. 우리는 일 하기도 전에 자기 임금이 얼마인지 이미 알고 있다. 회사에 처음 입사한 사원이 자기가 월급을 얼마나 받을지도 모른 채 출근하지 않는 것처럼.


현실에서 임금은 어떤 기준으로 정해지는가? 세상의 모든 가격은 구매자와 판매자 간 흥정으로 정해진다. 따라서 이상적으로는 노동자 임금도 사회적 최저 생계비를 하한선, 자본가 이윤이 0이 되는 지점을 상한선으로 ‘노동력 구매자(자본가)와 노동력 판매자(노동자) 사이의 협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 현실은 그렇지 않다.


노동자 수익인 임금이 늘어날수록 자본가 수익인 이윤은 줄어든다. 자본가는 이윤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서 임금을 어떻게든 낮출 수밖에 없다. 또한 노동자가 임금을 많이 받아 자체 ‘잉여’를 충분히 쌓게 되면 굳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려들지 않을 것이고, 자본가는 노동시장에서 노동력 상품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계속해서 노동력을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자본가는 노동자 임금을 ‘최저 생계비 수준’에 머물도록 강제하려 한다.


노동시장은 항상 공급과잉 상태이다. 노동력 수요자인 자본가에 비해 노동력 공급자인 노동자가 훨씬 많다. 때문에 임금은 자본가에게 유리한 방식과 수준으로 정해지기 쉽다. 이에 맞서기 위해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같은 노동자 조직을 만들어 단결하고 노동자 정당을 만들어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 한다. 국가가 정한 ‘최저 임금’과 노동조합과 사용자 간 협상으로 정한 ‘단체 협약 임금’ 같은 보호 장치는 이러한 투쟁 과정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자본가는 자기의 유리한 입장을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끊임없이 파괴하려 한다.


한편으로 자본가는 조금이라도 잉여가치를 더 많이 얻기 위해 다른 자본가와 경쟁한다. 같은 종류의 상품 가격은 시장 경쟁 속에서 평균에 맞춰지기 때문에,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보다 생산비용을 절감하여 그만큼의 초과 수익을 얻으려 한다. 특별한 잉여가치, 즉 ‘특별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 생산비용 절감은 생산력 발전으로 이룬다. 노동자의 생산 능력을 효율화하여 한 명이 생산할 수 있는 상품의 개수를 늘린다. 그럼 예전보다 더 적은 노동자를 고용하고도 예전만큼의 상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생산력 발전이다. 생산비용 절감은 쉽게 말해 인건비 절약인 것이다.

이렇게 잠시 개별 자본가가 사회 평균 수준에 비해 높은 이윤을 얻지만, 경쟁 속에 생산력 역시 평균 수준으로 균등해지기 때문에 특별잉여가치는 곧 사라진다. 특별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자본가들이 벌이는 경쟁으로 사회 전체 평균 생산력이 발전하고 세상이 살기 좋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본주의 생산은 두 가지 치명적 한계에 부딪친다.


생산력 발전(곧 생산비용 절감)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노동자 한 명이 생산하는 상품 개수가 늘어나는 것으로,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생산과정 속 노동시간 비중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노동시간은 잉여가치를 만들어낸다.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잉여가치를 만들 가능성을 스스로 깎아먹는 것이다. 자본가가 이윤을 추구할수록 이윤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스스로 줄이게 된다(생산 내적 한계).


또한 노동시간 비중이 줄어든다는 것은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자 수를 줄인다는 말과 같다. 결국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고용이 줄어든다. 노동력이 남아돌게 되고 노동시장은 노동자보다 자본가에게 더 유리하게 기울어진다. 비정규노동이 일반화된다. 고용 불안과 임금 감소가 이어진다. 이렇듯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노동자의 처우는 갈수록 열악해진다. 기업이 수익을 많이 내도 노동자들은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런데 노동자는 상품의 소비자이기도 하다. 상품이 가치를 실현하려면 판매되어야 한다. 그러나 갈수록 가난해지는 노동자는 상품을 소비할 능력을 잃어간다. 상품이 판매되지 않는다. 이렇듯 가치 생산과 가치 실현이 서로를 제약한다. 이러한 모순과 한계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 발전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생산-실현 모순).


이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대부 자본(금융기관)이 나선다. 대부 자본은 화폐를 긁어모아 산업 자본에 빌려주고 대가로 이자를 받는다. 자금을 빠르게 회전시킴으로써 상품 생산에 필요한 자본을 효율적으로 조달하는 것이다. 대부 자본이 모을 수 있는 화폐는 실제 사회적으로 생산된 가치 총합을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지만, ‘신용’이라는 마법으로 그 한계마저 없앤다. 어음, 수표, 주식 같이 실제로 화폐가 없어도 화폐를 대신할 수 있는 상징물을 만들어서 유통하는 것이다. 화폐를 대신한 신용은 곧이어 신용을 대신하는 다른 신용을 낳는다. 이렇게 부풀어 오르는 신용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가치 생산과 무관하게 신용 거래만으로 차익을 얻으려하는 투기가 시작된다. 투기와 결합한 신용은 걷잡을 수 없이 거듭 팽창하지만 이는 대부분 실제 생산한 가치와 상관없는 가짜 돈, 허깨비일 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두 가지 문제, 생산 내적 한계와 생산-실현 모순 때문에, 투입된 자본이 많아도 가치 생산은 정체된다. 가치 생산 증가 속도가 신용 팽창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이는 발행한 신용을 실제로 존재하는 가치(의 표현인 화폐)로 결재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어느 순간 환상이 깨지면 신용에 비해 화폐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손에 들고 있는 신용을 당장 현금(화폐)로 바꾸려 한다. 이렇게 신용 정지-지불 요구-지불 불능-경제 활동 붕괴라는 순서를 밟으며 위기가 닥쳐온다. 경제위기, 공황은 이렇게 탄생한다.


주류 경제학, 글쓴이 표현으로는 ‘그들의 경제학’은 공황을 우발적 현상으로 바라본다. 갑자기 위기가 닥치면 화폐 발행을 늘려서 진정시킨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뉴스에서 많이 봤던 ‘양적완화’ 정책이다. 하지만 진정만 시켰지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감기약 먹는다고 감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1929년 대공황이 2008년 공황으로 다시 나타났듯, 이대로라면 공황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공황은 근본적으로 가치 생산 영역의 한계, 자본주의적 생산의 한계 때문에 발생한다. 그 한계를 신용팽창으로 덮어보려다 교통사고 나는 것이 공황이다. 가치 생산의 한계, 통제 불능의 신용팽창 모두 ‘자본주의적 본성’이다.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우리의 경제학’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두 가지 문제를 극복해야한다. 생산 내적 한계를 넘기 위해 자본의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바꾼다.

생산력은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개별 자본들이 무분별하게 특별잉여가치 획득을 위해 경쟁하는 방식은 안 된다. 이를 위해 노동력 절감 없이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생산을 사회적으로 통제해야 한다. ‘무정부주의적 생산’을 사회가 통제하는 것이다.

또한 생산-실현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임금 소득 감소를 억제하고 소득분배구조를 바꿔야 한다. 글쓴이는 이를 ‘사회주의’로 명명한다.


소득분배구조를 임금 소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꿔간다. 인간 욕망의 기본적 부분(생존, 안전, 의료, 교육 …)을 사회적으로 충분히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임금 소득을 높여간다. 또한 임금을 자본가가 개별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결정하도록 만든다. 임금을 사회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개별 자본가가 지급할 임금을 사회적으로 지급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생산의 사회화이다. 생산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이는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힘을 키워야 한다.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이라는 노동자 조직으로 단결하여 사회를 변화시킬 역량을 모은다. 한편 생산의 사회화는 사회 전체가 생산을 공동 통제하는 것인데, 이것이 잘 이뤄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확대가 필수이다. 민주적 원칙이 잘 지켜지는 사회에서 생산 사회화가 성공할 수 있다. 민주주의 없는 사회화는 실패한다. 소련 같은 현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것과 같이.


우리, 노동하는 사람들이 부자 되는 방법은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부자 되는 방법과 다르다. 재테크는 그래서 허무하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꿈꿔야 한다.


사회주의를 설파한 마르크스 “자본론”을 해설한 책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주의’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글쓴이는 소련식 볼셰비키 혁명을 부정한다. 노동자 독재, 공산당 독재 같은 현실 사회주의권의 모든 독재를 비판한다. 대신 민주주의 확대를 이야기한다. 강신준이 제시한 ‘미래 사회주의’를 현실에서 가장 가깝게 찾는다면 북유럽 사민주의 체제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글쓴이의 대안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글쓴이는 거대 혁명을 논하는 대신 소박한 이야기로 결론을 짓는다. 부자 되려고 재테크에 목매지 말라고 거듭 충고한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민주주의 확대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외친다. 그것이 가장 먼저 시도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대목이 무척 좋았다. 어쩌면 지금 시점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해결책이 아닐까?


민주주의 형식이 갖춰졌지만 경제 정책은 비민주적으로 정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치인들이 이야기하는 경제 정책을 대다수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고 관심도 갖지 않는다. “경제 민주화”, 얼마나 허울 좋은 이름인가. 지난 선거 때 우리는 저 구호에 열광했다. 하지만 구체적 정책이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살펴본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나도 역시 살펴보지 못했다. 많이들 속았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경제, 그리고 시장은 결국 정치 영역이다. 정치권력 대행자를 결정하는 1표를 행사할 때 앞으로는 경제 정책‧공약을 ‘우리 관점’에서 모두 함께 제대로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제대로 한 번 뽑아보고, 잘 하는지 두 눈 퍼렇게 뜨고 감시해보는 것이 어떨까? 일을 잘 못하는 것 같으면 혼내주기도 하고. 그게 민주주의 확대 아닐까?

이 때 마르크스 경제학이 좋은 나침반이 되어줄 것 같다. 적어도 “기업이 성장해야 일자리 늘어” 같은 달콤한 거짓말에 속지 않을 수 있는 튼튼한 내공을 갖게 된다. ‘원전’은 어렵고 양이 많으니 부담 없이 200페이지 약간 넘는 이 책 같은 입문서가 괜찮을 듯하다. 2010년에 나왔지만 2017년에 보기에도 어색하지 않은 책이다.




※ 강신준이 내놓은 대안을 두고 진보 지식인 사이에 논쟁이 일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논쟁 관련 기사들도 읽어보고 싶다. 다른 입문서도 읽어보고 싶다. 다른 책에서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어떻게 다뤘을까? 한편 노동가치론과 한계효용론 사이의 논쟁을 다룬 책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 부동산 이야기도 나온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땅 주인, 즉 지주의 권리는 두 가지다. 토지 소유 자체에서 오는 ‘절대지대’와 토지의 쓸모 정도에서 오는 ‘차액지대’가 그것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지대 수익은 절대지대와 차액지대의 합이다.


토지는 저마다 쓸모, 즉 생산성이 다르다. 생산성 가장 높은 토지가 가장 먼저 공급되며, 생산성 낮은 토지일수록 나중에 공급된다. 단위 면적당 생산성 높은 토지일수록 더 적은 비용으로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즉, 생산비를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성 가장 높은 토지부터 투자가 이뤄진다.


시장 수요가 기존 공급을 넘어서면 원래 생산이 이루어지던 토지에서 모든 수요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보다 생산성 낮은 토지가 공급되기 시작한다. 시장이 확대되는 한 계속 된다. 시장 수요가 확대될수록 1등급 토지의 뒤를 이어 2등급, 3등급 토지들이 공급되는 것이다. 강남에 이어 분당, 그 다음 일산과 판교가 개발되는 것처럼.


그런데 생산비가 올라갈수록 시장 평균 가격 역시 올라가게 된다. 이윤이 0이나 마이너스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장 평균 가격이 올라가면 토지 소유자에게 돌아가는 평균 지대 역시 상승한다. 등급 낮은 토지가 공급되면 등급 높은 토지 소유자는 그만큼의 초과 이익을 얻는다. 이 초과 이익이 ‘차액지대’다.


등급 낮은 토지로 투자가 확대될수록 등급이 상대적으로 높은 토지들의 초과 이익은 계속 늘어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부동산 가격, “강남불패”로 표현되는 부동산 신화가 그 사례다. 하지만 지대 수익 역시 대부자본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이루어지는 가치 생산 영역의 한계에 종속된다. 가치 생산의 한계가 존재하는 한 지대 역시 무한정으로 확대될 수 없다. 생산이 이뤄지는 만큼 토지 투자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지대 수익 역시 번거로운 생산 과정 없이 시세 차익만으로 이익을 얻으려 하는 투기의 대상이 된다. 지대와 신용이 결합하는 것이다. 실제 생산 영역과 지대 수익이 서로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진다. 경제가 침체되고 투자가 멈추고 땅이 남아도는데 강남 부동산 가격은 계속 치솟는다. 그러다 신용 투기와 마찬가지로 파국, ‘공황’을 맞게 된다.


사실 최악의 공황은 부동산과 신용이 결합했을 때 일어났다고 한다. 플로리다 휴가주택 투기 때문에 시작된 1929년 대공황,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문에 나타난 2008년 경제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2017년 현재, 무척 와 닿는 부분인 것 같다. 현재 한국은 경제 위기 폭발 직전 상태다. 생산은 줄어들고 금융권은 불안정하다. 부동산이라고 안전할까? 이미 서울 강남 아파트 매매 시세가 불안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게다가 다들 빚내서 땅 사고 집 사왔던 그간의 관행이 쌓이고 쌓였다. 어디에서 많이 본 패턴이다. 역사에서 비극은 비슷한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머지않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무척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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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05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어떤 대선 후보가 신조어 비슷한 공약 단어를 내세울까요? 저는 기대라기보다는 그때 그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합니다. 저번 대선 때 분위기처럼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돌아온탕아 2017-01-05 14:17   좋아요 0 | URL
정치권에서 사람들을 여전히 만만히 보고 눈에 확 들어오지만 알맹이는 없는 공약을 남발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달라져야 할텐데요. 이번에도 그랬다가는 유권자들에게 호되게 혼날 것 같습니다^^ 사람들도 보는 눈이 생긴 만큼 이번 선거는 꽤 볼만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