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이리의 교사론 -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자신이 가르치기만 하는 전문가 교사-이런 교사는 사실 없습니다-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사이기에 정치적인 투사들입니다. 우리의 일은 수학이나 지리, 구문, 역사를 가르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과를 진지하고 유능하게 가르치는 일도, 사회의 불공평함에 뛰어들어서 헌신하는 일도 우리의 직무입니다.” p152-153.




파울로 프레이리는 교육학자, 교육사상가다. 인간해방을 위한 교육을 외치며 평생 열심히 싸운 사람. 박해, 투옥, 추방이 이어졌지만 굽히지 않고 우직하게 신념을 지켰다. 그에게 교육은 삶이자, 희망이자, 투쟁이었다. 실천이 곧 이론이었던 사람. 이론이 곧 실천이었던 사람. 뜨겁게 투쟁한 사람. 누구보다도 뜨겁게 사람을 사랑한 사람.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부제가 붙었다. 교사는 어때야 하는가. 교육자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그런 이야기가 한 장 한 장 묵직하게 담겼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좋은 선생은 그저 잘 가르치고 일 잘 하는 교사가 아니다. 함부로 가르치지 않는 사람. 학생 앞에 서서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옆에 서서 함께 비판적으로 교실을 읽고, 세상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 사람. 잘 가르치면서도 잘 싸우는 사람. 옳게 생각하면서 기꺼이 옳게 행동하는 사람. 민주적 사회를 위해 싸우며 민주적 학교와 교실을 쟁취하려 기꺼이 몸을 던지는 사람. 말과 실천이 따로 놀지 않는 사람. 무엇보다도, 학습자를, 그리고 가르치는 과정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선생하기 참 만만치 않다. 나는 어떤 선생으로 살아왔나. 오래 전 선물 받은 이 책을 뒤늦게 펴들고 생각에 빠진다. 뭔가 중요한 걸 잊었던 건 아닐까? 잘 살고 있나? 잘 가르치고 있나? 원래 이렇게 하려던 게 맞나? 질문이 많아진다.




“교육자들은 아이들이 활동하는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꿈꾸는 세계에 대해, 그들 세계의 공격성으로부터 자신을 기술적으로 방어하는 아이들의 언어에 대해 알아야 하며, 학교에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p183.


나는 어디를 보고 있었나? 아이들 얼굴보다 모니터와 서류더미를 더 많이 쳐다보지는 않았던가? 당연한 이야기인데 당연하게 지키지는 못하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교무실에 앉아있었나 싶다. 분명히 내가 원해서 이러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간절히 원했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책임이다.




“현명하고 유능한 교사라면 누구나 직시해야 하는 기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교육자와 학습자의 관계야말로 교육자가 장단기적으로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 점에서, 우리 교육자들은 학습자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p151.


“학교에서 학습자들에게 그리고 학습자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학습자들의 나이에 관계없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민주적 교사들은 학습자들이 교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도록 만듭니다. … 민주적 교사는 학습자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학습자들이 교사에게도 귀 기울이도록 가르칩니다.” p167.


역사 가르치며 목에 핏대 가득 세우고 민주주의를 말한다. 그런데 내 수업은? 매년 첫 수업시간에 분위기 잡는다면서 “너희가 나에게 예의를 지켜준다면 나도 예의를 지키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용서치 않을 거야”라며 엄포를 놓지 않았던가? 실제로 수업을 아예 거부하거나 겉도는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말과 행동을 보였던가? 좋게 타일러지지 않는 학생을 어떻게 다루었던가? 그들과 대화라는 걸 하긴 했던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하기 보다는 잘 다듬어진 기술적 방법으로 윽박질렀다가 풀어줬다가 하면서 행동을 내 뜻대로 조종하려고 하지는 않았나?


질문을 하다 보니 참 우습다.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권위주의를 스스로 허용했던가. 찝찝해하면서도 금방 흘려버린 것들이 무척 많았다.


교실에서 모든 것을 허락할 수는 없다. 자유와 무절제는 다르니까. 프레이리가 말하는 ‘자유와 규율 사이 긴장’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경력은 쌓였는데 이토록 중요한 질문에 아직 답을 명쾌하게 내놓지 못하겠다. 다만 아래 글귀를 마음에 새긴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내가 들어가는 교실을 조금씩이라도 바꿔보자고 마음 먹어본다.


“가르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교육 실천은 하나의 재앙입니다. 행정당국이 자신의 가르치는 자유를 제한하면 저항하면서, 스스로는 불명예스럽게도 배우는 사람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그 교사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p145-146.


“우리가 민주주의를 헛된 꿈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는 발달 중인 아이들과 학생들의 상태 그대로를 존중해줘야 합니다.” p115.


“나는 교사들이 완벽한 성자가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장점도 있고 실수도 하는 인간이기에, 교사들은 절제를 위한 투쟁, 자유를 위한 투쟁,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규율을 세우기 위한 투쟁을 증언해야(스스로 증명해보여야) 합니다.” p155.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사랑이 없다면 교사들의 활동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학생들을 향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과정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p125.




이 책은 읽기 어렵다. 원래 어려운 책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런데 말투가 어색하거나 딱딱하다. 번역서의 한계다. 하지만 내용이 너무 좋다. 감수할만하다.


다만, 좀 더 친절하게 편집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중요하지만 알기 어려운 주요 개념어를 각주나 미주로 자세히 해설할 수 있었을 텐데. 프레이리가 쓴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전혀 뜻이 와 닿지 않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그냥 ‘이러이러한 책을 참고할 것’이라고만 되어 있다. “코드화”, “탈코드화”는 무슨 말일까? “페다고지”를 다시 읽어보면 알 수 있을까?


“규율”이라는 개념도 여러 번 나오는데 해설하는 미주를 책 끄트머리에서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대충대충 이해하며 넘어갈 수 있는 단어이기는 하다. 하지만 미주를 읽어보니 프레이리는 그 단어를 일상적 의미와 다르게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읽을 만한 책이다. 교사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교사가 되고서 처음의 마음을 잃은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되어줄 책이다. 첫 페이지부터 잘 읽히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새 등에 땀이 흥건한 채 빠져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자로서 우리는 정치가입니다. 우리는 교육할 때 정치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꿈꾼다면, 학습자에게 말을 걸 수 있고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우리에게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밤낮으로 싸웁시다.” p173.


한국 학교는 여전히 관료적이다. 교무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실은 더 하다. 이 피라미드 쌓기 게임은 언제쯤 끝날까. 지금도 어디선가 헛된 피라미드를 허물고 민주주의를 새로 쌓아올리기 위해 밤낮으로 싸우고 있을, 교실과 교무실을 바꿔가고 있을 선생님들을 존경한다. 때때로 교문 밖으로 나서서 거리를 밝히는 등불이 되어 행진하는 선생님들도 존경한다. 나도 그 옆에서 하염없이 걷고 싶다. 그런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아직 꿈은 끝나지 않았다.


책 한 줄 한 줄이 무척 좋아 정신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 구절은 스스로 응원하기에 참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일상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관료화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방법을 꼭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시도를 그만두는 것이 차라리 물질적으로 이득이 될지라도, 이 도전을 계속 해야만 합니다.”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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