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화의 진실 - 조선 경제를 뒤흔든 화폐의 타락사
박준수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 

경제학에서는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으로 잘 알려진 이 말은 그 돈이 표시하는 액면가치가 같으면서 물건으로서의 가치가 다른 두 화폐가 있을 때 실질 가치가 높은 쪽(양화)은 별로 유통되지 않고 실질 가치가 낮은 쪽(악화)이 널리 유통 된다는 뜻이다. 그레샴이 살았던 16세기 영국에서는 재정 부담을 줄이고 주전이익(鑄錢利益)을 늘리기 위해 순도가 떨어지는 동전이나 은화를 생산해 냈는데 이 때 사람들이 순도가 높은 은화는 저장해 두고 순도가 낮은 은화만을 널리 사용하면서 이런 법칙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날 화폐 제조 기술이 발전하고 지폐를 사용하게 되면서 역사적인 의미만 가지게 되었지만 선택 오류나 정보 부족으로 경제정책이나 상품들에서 나쁜 것들이 좋은 것들을 오히려 압도하는 현상을 설명할 때 이용되는데, 경제정책에서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정책 대신 단기적인 성과위주의 정책을 선택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조선 말기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피폐해진 재정 상황을 메꾸기 위해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했지만 오히려 그동안 조선의 대표화폐로 자리잡고 있던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유통질서를 해치고 경제 시스템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박준수의 “악화의 진실”(밀리언하우스, 2010년 7월)은 바로 그레샴의 법칙의 현대적인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경제역사 팩션소설이다.  

1866년(고종 3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했던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던 해 어느 여름날, 수상한 무리들이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인 마천골에 몰래 산막을 지어놓고 사주전(私鑄錢:사사로이 동전을 주조하는 것)을 몰래 하고 있다는 발고가 보민평시소(保民平市)에 접수된다. 보민평시소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정랑 박일원을 대신하여 좌포청 종사관 이채보가 휘하의 포도군사들을 이끌고 서둘러 현장으로 떠나지만 이미 일당들은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현장 주변에서 위조된 동전과 숨어있는 여지발을 찾아내 압송한다. 그러나 여지발은 호송 중에 그만 독살을 당하고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다. 한편 육의전 내어물전 대행수 나징하는 계속 세력을 키워가는 송파장 상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대리인을 내세워막대한 자금을 저리(低利)로 빌려주고 그들에게서 받은 어음을 일시에 돌리는 계략을 실행하고, 그의 계략대로 송파상인들은 빚을 내어 사들인 물품들을 헐값에 내놓게 되는 큰 손실을 입게 된다. 그러나 이미 좌의정 김병학을 통해서 당백전이 발행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송파상인 홍중오는 당백전이 발행되기만을 기다리며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소금과 미곡(米穀)을 팔아 빚을 갚으면서 어려움을 견뎌낸다. 대원군의 여러 가지 무리한 개혁 중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경복궁 중건으로 인해 파산직전이 되어버린 국가 재정을 메꾸기 위해 조선 정부는 1866년 10월 김병학의 제의에 따라 실질가치는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명목가치는 실질가치의 20배에 달하는, 주전 이윤율을 360%까지 극대화한 당백전을 발행하게 된다. 그러나 재정적자를 고액화폐를 발행하여 주전 이익으로 보전하려는 정부의 정책은 경제 시스템에 일대 혼란을 가져와 물가가 연일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미곡 값이 3 배나 치솟아 서민들은 곡식을 구하지 못하게 되고, 화폐가치는 폭락하고 물품의 가치는 상승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송파상인들을 돈으로 엮으려던 나징하의 계략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홍중오는 오히려 큰 이익을 보게 된다. 당백전의 사주전 단속과 함께 여지발의 죽음을 계속 조사하던 박일원은 정선방 금위영 내에 있는 당백전 주전소에서 깨어진 동전을 발견하면서 마천골 산막에서 발견했던 동전과 똑같은 것임을 알게 되고 단지 상평통보의 위조가 아니라 당백전의 시주전(試鑄錢)과 관련된 엄청난 일임을 깨닫게 된다. 조선의 경제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온 대표적인 악화(惡貨)였던 당백전은 각종 폐단으로 인해 결국 발행 6개월만인 1867년(고종 4년) 5월에 주조를 중단하게 된다. 

어느 날 우연히 당백전 한 닢을 보게 되면서 기쁨보다는 슬픔이, 슬픔보다는 분노가, 분노보다는 절망이 앞섰을, 그때의 백성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만나러 140여 년 전의 역사 속으로 긴 여행을 시작했다는 저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말기 어느 정도 자릴ㄹ 잡아가던 화폐기반의 경제구조가 당백전으로 인해 어떻게 한순간 붕괴되었는지, 당백전이 어떻게 성실하게 땀 흘리며 살아오던 백성들을 하루 아침에 바보로 만들었는지, 정부의 무리한 탐욕이 어떻게 백성들에게 고통으로 전가되었는지를 그 당시의 경제상황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여지발의 죽음과 사주전 세력들을 추적하는 장면이나 육의전과 송파 상인들간의 경제 전쟁들을 묘사하는 장면들은 마치 추리소설이나 경제소설을 읽는 듯할 정도로 흥미진진해서 자칫 딱딱하고 지루한 경제 역사서에 그칠 뻔한 이 책의 소설적 재미를 한껏 살려주고 있다. 오늘날처럼 과학적이고 치밀한 조사기법을 동원한 화폐 공급량 조절 정책에서도 정책 입안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치명적인 인플레이션이나 오히려 경기 침체를 가져올 수 있는데, 하물며 취약한 경제 시스템과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조선시대 권력자들의 근시안적 정책들이 어떠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조목조목 사례를 나열하고 비판한 점들은 오늘날에도 반면교사(反面敎師)로써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할 만하다. 특히 경복궁 중건공사를 비난하는 괴서(怪書)에 등장한 문구인 

“妄興土木 靡費無度 民不堪苦 終止於亡(망흥토목 미비무도 민불감고 종지어망)”

  ‘헛되이 토목공사를 일으켜 그 비용을 한없이 낭비하니. 백성들이 고통을 감내하기 어렵고 결국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뜻인 이 말은 오늘날 아직도 경기 부양을 위해서 막무가내식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있는, 결국은 환경재앙으로 우리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그런 일을 벌이고 있는 그 누군가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그런 말이라 할 수 있겠다. 반성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반복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그들이 꼭 깨달아주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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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삼국지를 말하다 - 삼국지 인간형으로 보는 성격의 심리학
김태형 지음, 신대성 그림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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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의 “일리어드 오디세이”나 “플루타루크 영웅전”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오히려 그 작품들보다 더한 재미와 감동을 주는 동양의 영원한 고전 “삼국지”가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인물들이 엮어가는 각각의 개성들과 이야기들이 읽을 때마다 때로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이해되어지는 입체성의 묘미일 것이다. 몰락해가는 한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했고 유교적 인의(仁義)와 덕(德)의 상징이었던 유비의 모습이 사실은 고도의 계산된 정치적 술수로도 해석되기도 하고, 관우의 죽음은 정치적 라이벌인 제갈량의 계책에서 비롯된 것일 수 도 있으며, 간웅이자 삼국지 악의 축의 대명사이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강력한 카리스마와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진 현대적인 지도자로 부각되고 있는 조조의 모습 등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나 사회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되면서 삼국지의 재미와 교훈은 우리들에게 날로 더 커져만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삼국지의 영웅들을 현대적 심리학 기법으로 해석해보면 과연 어떨까? 심리학자로서, 심리학 관련 유명 저술가로서 널리 알려진 김태형의 “심리학, 삼국지를 말하다”(추수밭, 2010년 7월)은 미국의 심리학자인 브릭스와 마이어스 모녀에 의해 개발된 성격분류방법이자 기업체에서 인력과 조직 분석 방법으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는 "MBTI(The Myers-Briggs Type Indicator)기법"을 이용하여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의 성격 분석을 통해서 그들이 행했던 행동이나 사건의 이유를 조명해보는 재밌는 책이다.

  들어가는 말에서 삼국지가 오랫동안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가 “살아있는 사람”,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단한 현실성을 가지고 있는 점을 꼽는다. 즉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이 우리 눈앞에 튀어나와 살아 움직일 것처럼 사실적이고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고, 특히 인물묘사의 핵인 심리묘사에서 수천년 전의 문학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발군이며 이것이 삼국지의 가장 중요한 장수비결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삼국지가 이렇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면, 그들의 심리와 인생을 심리학으로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다고 이야기하면서 등장인물들의 인생이 그래야만 했던 심리적 원인을 밝혀보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으며, 이러한 심리학적 해석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상당한 허구를 포함하고 있는 소설 삼국지에 대한 해석이지만 각각의 인물을 상당히 일관성 있고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어 충분히 심리 분석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유용한 현재적 가치를 가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모든 이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개선해나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또한 도덕성, 전략전술과 승패, 인생살이에 대한 문제에 우리가 올바른 답을 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자신의 바람이자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심리분석도구로 사용한 “MBTI기법”은 사람의 심리를 네가지 심리적 유형 쌍인 내향-외향, 감각-직관, 감정-사고, 실천-인식으로 나누고, 네가지 유형은 각각 다른 유형과 결합하면서 독특한 심리적 특성을 만들어내고, 네가지 유형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경우의 수인 총 16가지의 성격의 유형을 만들어낸다는 분석방법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소개한 유비는 내향(I)-직관(N)-감정(F)-인식(P)의 심리적 유형을 가지고 있고, 이 유형들은 직관감정(NF)-내향감정(IF)-내향인식(IP)으로 결합되고 그의 성격은 INFP(몽상가)로 분류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책에서는 이렇게 딱딱한 심리분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삼국지 소설 속 각종 사건과 이야기들을 들어 쉽고 재밌게 설명하고 있다. 작가는 유비를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대인관계에서 당당하지 못하고, 착하디 착한 얼굴로 무거운 짐이 되어 타인의 등에 업혀 다니는 이가 적지 않는 일종의 “애정결핌환자”로 분석하고 있다. 유비가 보여준 과도한 겸손과 겸양은 모두에게 사랑받고 환영받고 싶다는, 역으로 말해 누구에게도 욕먹기 싫고 누구의 사랑도 잃기 싫다는 심리의 표현이며, 또한 커다란 야심에 비해 그것을 실현할 능력이나 의지가 턱없이 부족해서 틈난 나면 한심한 자신을 돌아보며 신세를 한탄했지만 적극적으로 능력을 계발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그가 적극적으로 인재를 발굴하거나 끌어들이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사랑을 받기에 급급했던’ 그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의 무의식 속에는 대업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주는 측근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기를 더 원했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어쩌면 유비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바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들과 오순도순 사는 것, 어떠한 부귀영화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애정결핍환자 그대로를 보여준다고 해석하고 있다. 또 다른 애정결핍환자로 유비의 의제(義弟)인 장비를 꼽고 있다. 단순 솔직의 대명사인 장비는 소설 속에서 형제인 유비나 관우까지 의심하는 심각한 대인불신감을 보여주는 데 그 이유가 명문의 후예였지만 어렸을 적 집안이 풍비박산나고, 늙은 가복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해 탁현의 저잣거리에서 숨어 살았던 그의 어린시절에서 비롯되었으며 사랑을 받기는 커녕 세상을 두려워하면서 숨어 살았기에 어쩌면 의심과 불신이야말로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애정결핍은 시기심과 경쟁심, 공명심으로 나타나고 또한 자신의 분노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과에 이르렀고, 그의 엄청난 괴력과 무예가 그의 경솔한 행동과 독선적인 경향을 한층 강화했고, 또한 그런 능력이 지적 능력이나 자기 통제력을 계발하는 데는 커다란 장애요인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조조가 관우에게 보냈던 무한한 사랑(?)은 탐욕도 의존도 집착도 아닌 건강한 사랑이었으며, 잠깐 동안 타다 꺼지는 순간의 불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뜨겁게 타오른 열렬한 사랑이었으며, 살아 생전에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이었다고, 어찌 보면 동성애로 오해할 만한 그런 색다르고 재밌는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 관우의 죽음이 제갈량의 계책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에 관해서도 관우의 위험을 모른 체 한 맹달과 제갈량의 관계 분석을 통해 설명하는 데 제갈량이 관우가 죽은 후에 맹달에 대한 처벌을 암암리에 계속 방해하여 그를 살려주었으며, 맹달이 위나라에 투항한 후에도 맹달을 잡아오는 데 도움이 된다며 연이어 내놓은 계략이 맹달의 살 길만 열어주는 결과를 가져온 점, 유비가 죽고 한 참 후 맹달이 촉에 다시 투항의사를 밝혔을 때 그 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점 들을 들어 맹달이 관우의 죽음을 나 몰라라 했던 것은 제갈량의 사전지시에 따른 일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제갈량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믿고 저지른 일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으며, 이처럼 맹달에 대한 제갈량의 태도를 통해 제갈량이 관우에게 애정이 조금도 없었다는 씁쓸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꼽는 삼국지 최고의 리더는 누구일까? 작가는 삼국지를 대표하는 리더인 조조, 유비, 손권에 대하여 “애민”,“목표제시”,“인재활용”, “심리적 건강성” 4가지 항목으로 리더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분석하고 있다. 표면적이었든 실제 마음에서든 세 명 모두 다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 그들을 평안하게 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인 “애민”면에서는 그다지 차별성은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고, 리더로서 객관적인 정세와 자신과 상대의 역량 관계에 기초해 올바른 목표한 정책을 끊임없이 제시하는 “목표제시”면과 참모들의 재능을 적극 활용하고 본인 스스로가 강력한 지도력과 일사불란한 지휘 통제 능력을 보여주는 “인재활용”에서 조조가 단연 우위에 있다는 점은 누구나 다 인정할 수 만 한데, 잔인한 폭군으로 알려져 있는 조조가 무의식적인 건강한 소망과 확고한 대인신뢰감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그리고 애정결핍증을 극복 여부의 지표인 “심리적 건강성”에서도 다른 두 사람을 앞서는 점은 다소 의외이기도 하다. 그러나 셋 다 모두 심리적으로 건강한 축에 속한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유비는 중년기 이전까지 방황, 중년기 우후 제갈량에 대한 의존, 관우가 죽은 뒤부터는 심리적 폭주까지 이르렀고, 손권은 중장년기를 넘어서면서부터 그동안 애써 억압해왔던 심리적 문제들이 터져 나와 오나라 멸망의 첫단추를 끼웠던 것에 반해 조조는 죽는 순간까지 기복이 심하지 않은 건강한 심리 상태를 유지하면서, 나름대로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았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리더로 평가할 수 있다는 작가의 해석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작가는 이런 조조, 유비, 손권의 리더십 분석과 평가를 통해 현대의 정치인들에게도 
 

한국의 어떤 정치인은 ‘머리는 남에게 빌릴 수 있지만 몸은 빌릴 수 없다“면서 열심히 체력 훈련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더는 단지 몸만 단련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반드시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한다. 왜냐하면 좀 극단적으로 말해 남에게 머리만이 아니라 몸까지도 빌릴 수 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건강한 마음만은 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리학적으로 볼때, 승리한 리더 혹은 성공한 리더는 무엇보다도 건강한 마음을 가진 지도자라고 규정할 수 있다.

라고 마음과 몸이 건강한 데다 탁월한 정치적 안목에 뛰어난 지적 능력까지 겸비한 사람이야말로 세상이 크게 환영해야 할 진정한 리더라고 충고한다.

“삼국지”라면 소설 뿐만 아니라 해설서,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등 삼국지라는 이름만 붙어 있으면 눈과 손이 저절로 가게 되는 삼국지 매니아라 자부하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읽는 내내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책이었다. 관우와 조조를 좋게 평가하고 상대적으로 유비, 장비, 제갈량을 나쁘게 평가한다는 점에서 개인들의 호불호(好不好)에 따라 이 책을 불편하게 생각하거나 또는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후자처럼 읽으면서 작가의 독특하고 신선한 해석에 재미와 묘한 공감까지 가지게 되었다. 삼국지를 아직 읽지 않아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일화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이해가 안되는 어려운 책일 수 도 있겠지만, 삼국지를 많이 읽어서 이제는 색다른 읽기를 원했던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일 이 책은 나의 삼국지 독서 이력(履歷)에서도 손 꼽을 만한 책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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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맨이 나타났다 - 제1회 대한민국 문학&영화 콘텐츠 대전 수상작
김민서 지음, 김주리 그림 / 살림Friends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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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뉘역뉘역 지고 전봇대 가로등 불 빛 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으슥한 골목길, 아리따운 아가씨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그런데 생긴 모습 그 자체가 나 불량배요라고 이마에 써 붙인 것 같은 남자 세 명이 한쪽 구석에서 툭 튀어나오더니 아가씨를 둘러싸고는 역시 불량배스러운 말투로 협박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아가씨를 가로등 불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간다. 절대 절명의 순간, 그들 앞에 역시나 나 영웅이요 하고 이마에 써 붙인 것 같은 멋진 남자가 짠 하고 나타나 불량배들을 한방에 때려 눕혀 버리고는 아가씨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는 유유히 사라진다. 그러나 그 남자를 결코 잊지 못하던 아가씨는 수소문 끝에 결국 그를 만나게 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사춘기 시절 남자들이라면 한번쯤 꿈꿔봤던 그런 이야기일테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는가? 껄렁껄렁한 동네 불량배 형들의 위협에, 이소룡의 멋진 액션을 보며 그렇게 따라 연습했건만, 태권도장에서 그렇게 열심히 발길질을 연습했건만, 두 손과 두 발은 마치 족쇄라도 채워놓은 것처럼 도대체 움직일 줄을 모르고 얼굴 한번 제대로 못 쳐다보고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어 바치고는 “그거 참고서 살 돈인데....”라고 쥐죽은 듯한 목소리로 울먹이던 것이 바로 현실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어디선가 멋진 영웅이 나타나 저 못된 무리들을 한 방에 날려버려 주기를, 아니면 좀 더 현실적인 생각으로 지나가던 선생님이나 동네 아저씨라도 와서 구해주길 바라지만 언제나 꿈은 현실을 무참히 배반하는 법, 영웅은 TV나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뿐 절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만 다시 한번 깨닫고 아픈 결말로 끝을 맺는다. 제1회 대한민국 문학&영화 콘텐츠 대전 청소년 소설 부문 수상작인 김민서의 “철수맨이 나타났다”(살림Friends, 2010년 6월)은 이처럼 누구나 어린 시절 꿈꿔본 멋진 영웅과 그의 정체를 밝히려는 청소년들의 유쾌하고 즐거운 모험담을 재밌게 그린 소설이다.  

   수도권의 인근 개발 신도시에는 그 도시 사람들만 아는 슈퍼히어로가 있다. 누군가가 위험에 빠지면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나 그들을 구해주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영웅, “철수맨”이 바로 그다. 평범한 옷차림에 귀여운 남자아이 가면을 쓰고 나타나 악당을 물리치는 그는 딱히 그 영웅을 지칭할 고유명사가 없자 대한민국의 대표적 남성 이름인 ‘철수’에 히어로들만의 특권 명사인 ‘맨’을 갖다 붙여 ‘철수맨’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영웅은 공권력도 해결하지 못한 연쇄살인범을 붙잡아 경찰에 넘기는 대활약을 펼치고는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그로부터 십 여년의 세월이 흘러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을 무렵, 철수맨이 다시 나타난다. 철수맨을 눈 앞에서 목격한 영서중학교 3학년인 희주는 그의 가방에서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영어참고서를 발견하고는 그가 바로 같은 학교 같은 학년 학생임을 알게 되고,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지은과 유채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는다. 철수맨의 정체를 직접 밝혀내기로 결심한 그녀들은 철수맨으로 의심되는 세 명의 동급생으로 현우, 민혁, 윤주를 지목하고는 그들을 미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현우, 민혁이 숨기고 있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고, 다섯 명은 비밀을 같이 공유하게 되면서 친구가 되고 마을 인근 계곡으로 야유회를 가게 된다. 거기에서 그들은 희대의 탈옥범을 만나게 되고 마지막 남은 철수맨 후보인 윤주가 탈옥범과 싸우는 친구들을 발견하고 합류하여 일대 결투를 벌이지만 결국 탈옥범에게 붙잡혀 버리고 만다. 윤주는 탈옥범에게 자신들을 풀어달라고 어설픈 설득을 해보지만 오히려 탈옥범은 그런 윤주에게 권총을 겨누고 마침내 방아쇠를 당긴다. 
 

  신비의 영웅 등장과 멋진 활약, 감추고 싶었던 비밀을 서로 공유하면서 싹트는 중학교 3학년 청소년들의 우정과 풋풋한 사랑, 그리고 아이들 힘으로는 넘어서기 힘든 절대 강자이자 악인인 탈옥범과 대결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발한 요소들을 두루 두루 갖춘 이 책은 영웅에 대한 동경을 꿈꾸는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앞에서 언급했던 공상들을 수없이 해봤던 어른인 내가 읽어도 도대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까 궁금해서 손에서 잡은 책을 놓지 못하고 내처 읽게 만드는 발군의 재미를 보여주고 있다. 책에 삽입되어 있는 순정만화 풍의 만화가 김주리 만화 그림들은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이 책이 만화,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원소스 멀티유저”로서의 가능성을 훌륭히 보여준다. 

 결국 철수맨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 영웅은 그 정체가 낱낱이 공개되는 것보다는 감춰져 있을 때 더 신비롭고 매력적이다 -, 나를 지켜줄 영웅이 내 학교 친구 중에, 내 손이 닿는 바로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 재밌는 상상은 어쩌면 이 책에 등장하는 6명의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의지하고 기댈만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그들만의 영웅을 꿈꿔보는 것이 얼마나 재밌고 신나는 상상인지를, 때로는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큰 희망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유치할 수 도 있는 이런 영웅담이 따분하기만 하고 심각한 순수 문학보다도 더한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해준 재밌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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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연인
정길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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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이국 땅에서의 낯선 여인과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애틋한 느낌이 든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만 허락되는, 그 끝이 이별이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기에 그 사랑은 더 열정적일 수 밖에 없고 그만큼 더 슬프고 아프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가 보다. 정길연의 “백야의 연인”(랜덤하우스 코리아, 2010년 7월)을 읽는 내내 두 연인 “박수완”과 “스베틀라나”의 사랑이 마냥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글픔마저 느꼈던 것도 결국은 그들의 끝이 이별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수완은 시사 월간지에 게재된 러시아 망명객 “장도수”의 이야기를 읽고 그와 인터뷰 약속을 하고는 러시아로 날아간다. 러시아에 도착한 수완은 장도수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하지만 장도수의 오래 전 연인이자 특별한 이웃인 “나탈리야 이바노브나”에게서 그가 장기 여행중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집에 있으면서도 수완과의 만남을 피하던 장도수는 이바노브나의 딸이자 자신이 친 딸처럼 여기는 스베틀라나를 수완에게 보내 만남에 대한 거절의 뜻을 밝힌다. 수완과 스베틀라나는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반해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제는 장도수와의 인터뷰보다 스베틀라나와의 사랑 때문에 귀국일자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그녀와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한편 수완의 약혼녀인 다현은 귀국 일자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수완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하지만 수완의 답신을 받지 못하자 그를 만나러 러시아로 떠나게 되고, 공항으로 마중 나오리라 기대했지만 결국 나타나지 않은 수완에 대한 배신감과 허탈감에 비행기에서 만난 한국 남자와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만다. 스베틀라나의 고향친구이자 그녀를 사랑하는 아르투르가 그녀에게 허세를 부리기 위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보스 차를 훔쳤다가 발각되어 스베틀라나까지 위험에 빠지자 수완은 그녀를 데리고 상페테르부르그로 피신하게 되고 그 곳에서 둘은 마치 신혼여행 같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한편으로는 이별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수완의 여동생인 수명이 출산 중에 위급한 상황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수완은 스베틀라나에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떠날 땐 그렇게 말해요. 돌아온다고. 기다리라고. 그렇지만 그들 대부분은 돌아올 수 없거나 돌아오지 않죠. 납득할 수 없는 기별과 함께, 대개는 기별조차도 없이. 외롭고 쓸쓸한 하루하루가 모닝 레터처럼 배달될 뿐이죠.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해요?" -P.278 

라며 그녀는 사실상 이별임을 선언한다. 그 순간 그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소중한 무엇인가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물러나는 파도에 휩쓸리듯 휩쓸려 가버렸음을 깨닫는다. 장도수에게 한 장의 편지를 남기고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수명은 결국 죽게 된다. 괴로워하는 수완을 지켜보는 다현은 자신이 더 이상 수완에게 의지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와의 사랑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수완은 마지막에 모든 놀라움, 증오, 그리움은 시간 속에서 소멸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스스로라도 잊어버리겠다고,그리곤 어쩌면 가슴에 화인(火印)처럼 남은 상처들이 모두 지나가고 사라질 때까지 그 가슴 시린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며 살아남겠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놀라움도, 뼛속 깊이 아로새긴 증오도, 내려놓지 못할 것 같던 그리움도 지나가리라.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 속에서 소멸하리라. 그러나 나 역시 지나갈 뿐이라고. 스쳐 지나갈 뿐이라고. 시간 속에 부서지고, 흩어지고 지워지리라고. 
두려움이. 미움이, 간절함이 지나가지 않으면, 내가 지나가리라고. 결코 뒤돌아 보는 법 없이 나아가고, 나아가고, 나아가서 끝끝내 땅에 가슴을 대고 고꾸라지리라고. 물론 그는 그날이 올 때까지 살아남을 작정이었다. 어느 한 시절, 눈물처럼 귀하게 빛나던,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이름들을 대신해서라도. - P.298

  처음 책을 읽으면서는 대한민국 공군 장교였던 장도수가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 사연이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으로 짐작했었지만, 수완과 스베틀라나의 사랑이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었다. 그러나 수완이 러시아를 떠나면서 장도수에게 남긴 편지에서 그가 그토록 장도수를 만나려고 했던 이유를, 만나겠다고 허락해놓고도 수완과의 만남을 계속 피했던 이유를 알게 되고 부터는 이야기의 전체 얼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쉽게 마지막 페이지를 덮지 못하고 앞 페이지를 들춰보게 만들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어쩌면 영원히 치유되지 않고 마치 낙인처럼 그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을 그들의 아픔에 나도 또한 가슴이 저려오는 것 같은 느낌때문이었다. 북한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사랑하던 여인을 버리기까지 하고  소련으로 망명했지만 결국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당하고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장 도수, 부모님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고 친남매 이상의 우애를 보였던 의붓 남매인 수완과 수명, 밖에서 낳아온 아이로 어릴 적 친어머니의 품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들어와 홀로 그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던 다현, 장도수를 사랑했지만 그의 외면에 결국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남편을 잃은 후 이루지 못했던 장도수의 곁에서 머무르고 있는 나탈리야, 그런 어머니 밑에서 어머니의 연인이었던 장도수를 친아버지처럼 따르는 스베톨라나, 그리고 자신의 곁을 떠나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그 남자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아들의 이름에 그 남자의 흔적을 남긴 수완의 어머니 등 모두가 가슴에 심한 생채기를 간직하고 있는 그들, 그들의 사랑과 인연은 결국 어쩌면 가족에 대한 상실감을 상대방에게서 채우려는 불완전한 사랑일 수 밖에 없었고 - 특히 수완과 다현의 사랑은 서로의 외로움을 서로에게 의지하여 달래려는 그런 사랑으로 느껴졌다 - 결국 수완과 스베틀라나, 수완과 다현, 어머니를 대신하여 그를 만나고자 했던 수완과 외면한 장도수 등 다시 한번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기곤 끝을 맺게 되었다. 자신의 아들임을 직감하면서 도 과거의 인연을 굳이 되살리지 않으려한 장도수의 선택도 결국은 결코 치유되지 않은,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혀지고 봉합된 상처를 다시 헤집어 놓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에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러나 영원히  닿지 않았을 것 같던 장도수와 수완의 인연도 수십년이 흘러 다시 이어지게 되는 것을 보면 마지막 수완의 독백처럼 시간이 흐른다고 소멸될 그런 사랑은 아닐 것이다.  다시금 그 인연을 마주할 때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그저 이미 시간 속에 부서지고 흩어지고 지워져버린 그런 것이라고 애써 외면할지, 아니면 눈물처럼 귀하게 빛나던,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이름으로  그 소중한 인연이었음을 떠올리지만 결국은 다시 한번 상처를 받게 되어 더 큰 가슴앓이를 하게 될까. 가슴 먹먹해지는 그들의 아픈 사랑에 괜히 나까지 가슴 시린 그런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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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비밀의 방 - 월화수목금토일 서울 카페 다이어리
이영지 지음 / 나무수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서울 생활을 15년을 넘게 했는데도 변변한 카페 하나 제대로 아는 곳이 없다. 그래도 굳이 꼽아보자면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학교 주변의 몇몇 카페들과 단골 약속장소였던 대학로의 “장미빛 인생” 정도이다. 카페보다는 술집에 더 익숙한 우리 시절 남성들처럼 나에게는 카페는 남녀들의 데이트를 위한 장소로 남자들끼리 가기에는, 특히 혼자 가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책 하나 펼쳐놓고 시간을 보내기에는 괜한 눈치가 보여 어색하고 불편한 곳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카페가 그저 커피나 마시고 수다 떠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 쉼과 여유의 공간이자 책, 음악, 영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문화적 공간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고, 길거리를 거닐다가 우연찮게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이쁜 카페를 만나게 되면 마치 보석을 줍는 것 같은 그런 기쁨을 느낀다는 글들을 보면 카페가 도시인에게는 이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푸른 숲과 공원을 대신하는 쉼터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인구 천만의 거대 도시, 서울 골목 골목에는 어떤 카페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을까? 이영지의 “서울 비밀의 방; 월화수목금토일 서울 카페 다이어리”(나무수, 2010년 7월)는 서울 골목 골목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카페들의 비밀을 우리에게 소곤소곤 들려주고 있다.  

 작가는 머리말 격인 에필로그에서 서울에 숨겨진 비밀의 방에 앉아서, 날씨가 바뀌고 계절이 변하는 것을 여러번 지켜보면서 지구에 사계절이 있고,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 시간동안 노크했던 비밀의 방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렇게 300 페이지의 분량의 책으로 탄생하게 되었고 자신의 비밀이 이 책을 읽은 우리에게도 에게도 비밀이 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책에서는 작가의 이러한 비밀의 방인 카페를 누구와가 아닌 혼자서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사람을 위한 “소규모 카페(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보면 좋을 “북 카페(화)”, 연인과의 와인을 나누며 로맨틱한 분위기에 빠져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와인 카페(수)”, 맛있는 음식과 달콤한 간식이 일품인 “디저트 카페(목)”와 “딜리셔스 카페(금)”,동경 뒷골목을 온 듯한 이색적인 분위기의 “일본카페(토)”, 그리고 아침, 점심 보다는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브런치 카페(일)” 등 요일별로 테마를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카페마다 이쁜 일러스트와 색감이 선명한 화보를 실어 카페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달해주고, 카페 메뉴들을 간단히 소개하고 있어 나처럼 낯선 카페에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힘든 사람에게도 마치 그 카페를 다녀온 듯한 익숙함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7개의 테마 중 아무래도 책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화요일 북 카페가 가장 눈길이 갔다. 작가는 북 카페 소개글에서 대부분의 카페는 사람을 만나고, 커피를 마시고, 와플을 먹기 위한 공간이지만 소수의 누군가에게는 소설과 만화책, 사진집과 요리 책이 잔뜩 있는 도서관 같은 카페가 필요하며, 북 카페에 대해 생각하면 과자 선물 세트를 선물 받았을 때의 기분이 떠오른다고 이야기한다. 어릴적 과자 선물을 받고나서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서 종일 어떤 과자를 먼저 먹을까 고민에 빠졌던 것처럼 북 카페에서도 선물상자를 연 것처럼 언제나 우왕좌왕하며, 소설을 고르면 만화책이 눈에 들어오고 요리책을 고르면 화보집이 눈에 들어오는 것과 같은 즐겁기만 한 곳이 바로 북 카페라고 소개하고 있다. 비록 푸르름이 가득한 공원 나무 그늘에서의 쉼은 아니지만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책을 읽는 여유로움, 바로 도심 속에서나 느낄 수 있는 그런 낭만이 아닐까 생각되어 진다.  

카페 위치를 표기한 약도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 책에 소개된 카페를 찾아가려면 가뜩이나 길 눈 어두운 나에게는 아무래도 꽤나 애를 먹을 것 같다. 카페 위치를 지도에 하나하나 찾아서 작가가 소개해 준 대로 요일별로 테마별로 카페 투어를 해보는 것도 즐겁겠지만 어느 한가로운 주말 오후 길을 거닐다가 골목 한 켠에서 아름다운 카페를 만나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카페에 불쑥 들어섰을 때, 처음 온 곳인데도 왠지 익숙한 기분이 들어 집으로 돌아와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보니 목요일 테마로 소개되었던 달콤한 디저트가 일품이었던 그 카페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고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회색 건물 사이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비밀이 있어 서울이 조금은 덜 삭막하고 조금은 더 행복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그런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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