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연인
정길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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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이국 땅에서의 낯선 여인과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애틋한 느낌이 든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만 허락되는, 그 끝이 이별이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기에 그 사랑은 더 열정적일 수 밖에 없고 그만큼 더 슬프고 아프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가 보다. 정길연의 “백야의 연인”(랜덤하우스 코리아, 2010년 7월)을 읽는 내내 두 연인 “박수완”과 “스베틀라나”의 사랑이 마냥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글픔마저 느꼈던 것도 결국은 그들의 끝이 이별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수완은 시사 월간지에 게재된 러시아 망명객 “장도수”의 이야기를 읽고 그와 인터뷰 약속을 하고는 러시아로 날아간다. 러시아에 도착한 수완은 장도수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하지만 장도수의 오래 전 연인이자 특별한 이웃인 “나탈리야 이바노브나”에게서 그가 장기 여행중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집에 있으면서도 수완과의 만남을 피하던 장도수는 이바노브나의 딸이자 자신이 친 딸처럼 여기는 스베틀라나를 수완에게 보내 만남에 대한 거절의 뜻을 밝힌다. 수완과 스베틀라나는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반해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제는 장도수와의 인터뷰보다 스베틀라나와의 사랑 때문에 귀국일자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그녀와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한편 수완의 약혼녀인 다현은 귀국 일자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수완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하지만 수완의 답신을 받지 못하자 그를 만나러 러시아로 떠나게 되고, 공항으로 마중 나오리라 기대했지만 결국 나타나지 않은 수완에 대한 배신감과 허탈감에 비행기에서 만난 한국 남자와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만다. 스베틀라나의 고향친구이자 그녀를 사랑하는 아르투르가 그녀에게 허세를 부리기 위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보스 차를 훔쳤다가 발각되어 스베틀라나까지 위험에 빠지자 수완은 그녀를 데리고 상페테르부르그로 피신하게 되고 그 곳에서 둘은 마치 신혼여행 같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한편으로는 이별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수완의 여동생인 수명이 출산 중에 위급한 상황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수완은 스베틀라나에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떠날 땐 그렇게 말해요. 돌아온다고. 기다리라고. 그렇지만 그들 대부분은 돌아올 수 없거나 돌아오지 않죠. 납득할 수 없는 기별과 함께, 대개는 기별조차도 없이. 외롭고 쓸쓸한 하루하루가 모닝 레터처럼 배달될 뿐이죠.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해요?" -P.278 

라며 그녀는 사실상 이별임을 선언한다. 그 순간 그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소중한 무엇인가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물러나는 파도에 휩쓸리듯 휩쓸려 가버렸음을 깨닫는다. 장도수에게 한 장의 편지를 남기고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수명은 결국 죽게 된다. 괴로워하는 수완을 지켜보는 다현은 자신이 더 이상 수완에게 의지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와의 사랑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수완은 마지막에 모든 놀라움, 증오, 그리움은 시간 속에서 소멸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스스로라도 잊어버리겠다고,그리곤 어쩌면 가슴에 화인(火印)처럼 남은 상처들이 모두 지나가고 사라질 때까지 그 가슴 시린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며 살아남겠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놀라움도, 뼛속 깊이 아로새긴 증오도, 내려놓지 못할 것 같던 그리움도 지나가리라.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 속에서 소멸하리라. 그러나 나 역시 지나갈 뿐이라고. 스쳐 지나갈 뿐이라고. 시간 속에 부서지고, 흩어지고 지워지리라고. 
두려움이. 미움이, 간절함이 지나가지 않으면, 내가 지나가리라고. 결코 뒤돌아 보는 법 없이 나아가고, 나아가고, 나아가서 끝끝내 땅에 가슴을 대고 고꾸라지리라고. 물론 그는 그날이 올 때까지 살아남을 작정이었다. 어느 한 시절, 눈물처럼 귀하게 빛나던,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이름들을 대신해서라도. - P.298

  처음 책을 읽으면서는 대한민국 공군 장교였던 장도수가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 사연이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으로 짐작했었지만, 수완과 스베틀라나의 사랑이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었다. 그러나 수완이 러시아를 떠나면서 장도수에게 남긴 편지에서 그가 그토록 장도수를 만나려고 했던 이유를, 만나겠다고 허락해놓고도 수완과의 만남을 계속 피했던 이유를 알게 되고 부터는 이야기의 전체 얼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쉽게 마지막 페이지를 덮지 못하고 앞 페이지를 들춰보게 만들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어쩌면 영원히 치유되지 않고 마치 낙인처럼 그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을 그들의 아픔에 나도 또한 가슴이 저려오는 것 같은 느낌때문이었다. 북한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사랑하던 여인을 버리기까지 하고  소련으로 망명했지만 결국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당하고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장 도수, 부모님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고 친남매 이상의 우애를 보였던 의붓 남매인 수완과 수명, 밖에서 낳아온 아이로 어릴 적 친어머니의 품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들어와 홀로 그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던 다현, 장도수를 사랑했지만 그의 외면에 결국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남편을 잃은 후 이루지 못했던 장도수의 곁에서 머무르고 있는 나탈리야, 그런 어머니 밑에서 어머니의 연인이었던 장도수를 친아버지처럼 따르는 스베톨라나, 그리고 자신의 곁을 떠나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그 남자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아들의 이름에 그 남자의 흔적을 남긴 수완의 어머니 등 모두가 가슴에 심한 생채기를 간직하고 있는 그들, 그들의 사랑과 인연은 결국 어쩌면 가족에 대한 상실감을 상대방에게서 채우려는 불완전한 사랑일 수 밖에 없었고 - 특히 수완과 다현의 사랑은 서로의 외로움을 서로에게 의지하여 달래려는 그런 사랑으로 느껴졌다 - 결국 수완과 스베틀라나, 수완과 다현, 어머니를 대신하여 그를 만나고자 했던 수완과 외면한 장도수 등 다시 한번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기곤 끝을 맺게 되었다. 자신의 아들임을 직감하면서 도 과거의 인연을 굳이 되살리지 않으려한 장도수의 선택도 결국은 결코 치유되지 않은,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혀지고 봉합된 상처를 다시 헤집어 놓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에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러나 영원히  닿지 않았을 것 같던 장도수와 수완의 인연도 수십년이 흘러 다시 이어지게 되는 것을 보면 마지막 수완의 독백처럼 시간이 흐른다고 소멸될 그런 사랑은 아닐 것이다.  다시금 그 인연을 마주할 때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그저 이미 시간 속에 부서지고 흩어지고 지워져버린 그런 것이라고 애써 외면할지, 아니면 눈물처럼 귀하게 빛나던,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이름으로  그 소중한 인연이었음을 떠올리지만 결국은 다시 한번 상처를 받게 되어 더 큰 가슴앓이를 하게 될까. 가슴 먹먹해지는 그들의 아픈 사랑에 괜히 나까지 가슴 시린 그런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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