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화의 진실 - 조선 경제를 뒤흔든 화폐의 타락사
박준수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 

경제학에서는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으로 잘 알려진 이 말은 그 돈이 표시하는 액면가치가 같으면서 물건으로서의 가치가 다른 두 화폐가 있을 때 실질 가치가 높은 쪽(양화)은 별로 유통되지 않고 실질 가치가 낮은 쪽(악화)이 널리 유통 된다는 뜻이다. 그레샴이 살았던 16세기 영국에서는 재정 부담을 줄이고 주전이익(鑄錢利益)을 늘리기 위해 순도가 떨어지는 동전이나 은화를 생산해 냈는데 이 때 사람들이 순도가 높은 은화는 저장해 두고 순도가 낮은 은화만을 널리 사용하면서 이런 법칙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날 화폐 제조 기술이 발전하고 지폐를 사용하게 되면서 역사적인 의미만 가지게 되었지만 선택 오류나 정보 부족으로 경제정책이나 상품들에서 나쁜 것들이 좋은 것들을 오히려 압도하는 현상을 설명할 때 이용되는데, 경제정책에서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정책 대신 단기적인 성과위주의 정책을 선택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조선 말기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피폐해진 재정 상황을 메꾸기 위해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했지만 오히려 그동안 조선의 대표화폐로 자리잡고 있던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유통질서를 해치고 경제 시스템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박준수의 “악화의 진실”(밀리언하우스, 2010년 7월)은 바로 그레샴의 법칙의 현대적인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경제역사 팩션소설이다.  

1866년(고종 3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했던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던 해 어느 여름날, 수상한 무리들이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인 마천골에 몰래 산막을 지어놓고 사주전(私鑄錢:사사로이 동전을 주조하는 것)을 몰래 하고 있다는 발고가 보민평시소(保民平市)에 접수된다. 보민평시소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정랑 박일원을 대신하여 좌포청 종사관 이채보가 휘하의 포도군사들을 이끌고 서둘러 현장으로 떠나지만 이미 일당들은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현장 주변에서 위조된 동전과 숨어있는 여지발을 찾아내 압송한다. 그러나 여지발은 호송 중에 그만 독살을 당하고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다. 한편 육의전 내어물전 대행수 나징하는 계속 세력을 키워가는 송파장 상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대리인을 내세워막대한 자금을 저리(低利)로 빌려주고 그들에게서 받은 어음을 일시에 돌리는 계략을 실행하고, 그의 계략대로 송파상인들은 빚을 내어 사들인 물품들을 헐값에 내놓게 되는 큰 손실을 입게 된다. 그러나 이미 좌의정 김병학을 통해서 당백전이 발행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송파상인 홍중오는 당백전이 발행되기만을 기다리며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소금과 미곡(米穀)을 팔아 빚을 갚으면서 어려움을 견뎌낸다. 대원군의 여러 가지 무리한 개혁 중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경복궁 중건으로 인해 파산직전이 되어버린 국가 재정을 메꾸기 위해 조선 정부는 1866년 10월 김병학의 제의에 따라 실질가치는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명목가치는 실질가치의 20배에 달하는, 주전 이윤율을 360%까지 극대화한 당백전을 발행하게 된다. 그러나 재정적자를 고액화폐를 발행하여 주전 이익으로 보전하려는 정부의 정책은 경제 시스템에 일대 혼란을 가져와 물가가 연일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미곡 값이 3 배나 치솟아 서민들은 곡식을 구하지 못하게 되고, 화폐가치는 폭락하고 물품의 가치는 상승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송파상인들을 돈으로 엮으려던 나징하의 계략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홍중오는 오히려 큰 이익을 보게 된다. 당백전의 사주전 단속과 함께 여지발의 죽음을 계속 조사하던 박일원은 정선방 금위영 내에 있는 당백전 주전소에서 깨어진 동전을 발견하면서 마천골 산막에서 발견했던 동전과 똑같은 것임을 알게 되고 단지 상평통보의 위조가 아니라 당백전의 시주전(試鑄錢)과 관련된 엄청난 일임을 깨닫게 된다. 조선의 경제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온 대표적인 악화(惡貨)였던 당백전은 각종 폐단으로 인해 결국 발행 6개월만인 1867년(고종 4년) 5월에 주조를 중단하게 된다. 

어느 날 우연히 당백전 한 닢을 보게 되면서 기쁨보다는 슬픔이, 슬픔보다는 분노가, 분노보다는 절망이 앞섰을, 그때의 백성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만나러 140여 년 전의 역사 속으로 긴 여행을 시작했다는 저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말기 어느 정도 자릴ㄹ 잡아가던 화폐기반의 경제구조가 당백전으로 인해 어떻게 한순간 붕괴되었는지, 당백전이 어떻게 성실하게 땀 흘리며 살아오던 백성들을 하루 아침에 바보로 만들었는지, 정부의 무리한 탐욕이 어떻게 백성들에게 고통으로 전가되었는지를 그 당시의 경제상황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여지발의 죽음과 사주전 세력들을 추적하는 장면이나 육의전과 송파 상인들간의 경제 전쟁들을 묘사하는 장면들은 마치 추리소설이나 경제소설을 읽는 듯할 정도로 흥미진진해서 자칫 딱딱하고 지루한 경제 역사서에 그칠 뻔한 이 책의 소설적 재미를 한껏 살려주고 있다. 오늘날처럼 과학적이고 치밀한 조사기법을 동원한 화폐 공급량 조절 정책에서도 정책 입안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치명적인 인플레이션이나 오히려 경기 침체를 가져올 수 있는데, 하물며 취약한 경제 시스템과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조선시대 권력자들의 근시안적 정책들이 어떠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조목조목 사례를 나열하고 비판한 점들은 오늘날에도 반면교사(反面敎師)로써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할 만하다. 특히 경복궁 중건공사를 비난하는 괴서(怪書)에 등장한 문구인 

“妄興土木 靡費無度 民不堪苦 終止於亡(망흥토목 미비무도 민불감고 종지어망)”

  ‘헛되이 토목공사를 일으켜 그 비용을 한없이 낭비하니. 백성들이 고통을 감내하기 어렵고 결국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뜻인 이 말은 오늘날 아직도 경기 부양을 위해서 막무가내식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있는, 결국은 환경재앙으로 우리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그런 일을 벌이고 있는 그 누군가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그런 말이라 할 수 있겠다. 반성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반복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그들이 꼭 깨달아주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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