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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만과 열 세 남자, 집 나가면 생고생 그래도 나간다 - 웃자고 한 일에 죽자고 덤빈 우리 바닷길 3000km 일주 ㅣ 탐나는 캠핑 3
허영만.송철웅 지음 / 가디언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이가 점점 들면서 여행도 편안한 것만 찾게 된다. 대학시절, 직장 생활 초년 시절에는 친구들과 텐트, 배낭 짊어 메고 산이며 들이며 며칠씩 놀러가도 힘든지를 몰랐었는데, 혼자서 전국일주를 해보겠다고 10 여일을 강원도 통일전망대에서 전남 땅끝 마을까지 동가식서가숙하면서 돌아다녀도 즐겁기만 했는데 이제는 휴가 때 여행 간다고 하면 제일 먼저 콘도나 팬션 빈 방 있는지를 확인해보고 주변 유명 식당을 검색해본다. 여름 휴가때 가족들과 바캉스를 떠나볼까 생각하다가도 고속도로를 가득 메우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차량들이 길게 늘어선 장면이나 물 반 사람 반인 유명 해수욕장 상황을 뉴스로 보고 나면 “역시 집 나서면 고생이지” 하고 저 생고생할 거라면 집에서 편히 쉬는 게 낫겠다 생각하고는 다시 방바닥을 침대 삼아 편하게 누워버리곤 한다. 그런데 최근 이런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책 두 권을 만났다. 한 권은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근 한 달여간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한 문학평론가의 자전거 여행기였고, 오늘 소개할 다른 한권은 “식객”으로 유명한 만화가이자 환갑을 넘긴 허영만 화백과 열 세 명의 남자들이 요트로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독도까지 바닷길을 따라 여행한 기록인 “허영만과 열 세 남자 집 나가면 생고생 그래도 나간다(허영만, 송철웅 공저/가디언/2010년 7월)”이다. 두 권 다 벌써부터 귀찮고 번거로운 것이 싫어 구들장만 짊어지고 있는, 나이에 비해 너무 일찍 늙어버린 나를 질책하는 듯한, 그래서 가슴 뜨끔한 그런 책이었다.
작품에서 등산에 대한 각별한 애정 - 식객에서 몇 번째 권인지는 모르겠지만 히말라야 트래킹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후기를 보니 실제 허 화백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내용이라고 한다 - 을 보여온 허영만 화백은 인사동 술집에서 그의 일당(?)들과의 술잔을 기울이던 중 술기운에 돛단배(요트)를 타고 바다의 백두대간인 서해에서 남해를 돌아 국토의 막내, 독도까지 여행해보자 하는 말을 호기롭게 내뱉고 히말라야 사나이 박영석 대장이 허 화백을 맞장구를 치게 되면서 허영만 화백과 열 세 명의 중년 남자들은 팔자에도 없던 제목 그대로 “집 나가면 생고생”의 바다 여행을 계획한다. 작당모의는 그럴싸했지만 요트는 이미 수령이 15년이자 지난 낡은 요트였고, 항해를 위한 면허도 없는 등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그래도 더욱더 결의를 다진 그들은 6개월에 걸쳐 자신들이 손수 수리를 한 후, 배에 자신들의 모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름인 “집단 가출호”라고 이름 붙이고 - 장난스러운 통신을 해서는 안 되는 해양경찰과의 통신에서 경찰들이 배 이름을 듣고는 여기저기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리는, 본의 아닌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요트 면허도 가까스로 출항 전에 따내고는 드디어 2009년 6월 6일 경기도 전곡항을 출발하여 제주도, 마라도, 울릉도를 거쳐 동해 끝 독도까지 1년 간, 총 항해거리 3,075 킬로미터에 이르는 해안선 일주 대장정에 오른다. 요트로 바다일주라니, 언뜻 듣기에는 “눈부신 햇살 아래 미녀와 와인 잔을 기울이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즐기는 여유”라는 돈 많은 부자들이나 가능한 초호화 유람인 것 같다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책을 살펴보면 그저 “웃자고 시작한 이 일에 죽자고 덤비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술회하듯이 이런 생고생이 없을 정도로 처절하기까지 하다. 한 여름 시작한 여행이라 모기들의 공습에 시달려 한 대원은 어찌나 심하게 물렸던지 얼굴을 못 알아 볼 정도였고, 유명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은 약과일 정도로 추운 겨울에 시멘트 바닥에 침낭 하나에 의지해 비박하기 일쑤였고, 신나게 수영을 즐겼더니만 그곳이 식인상어가 출몰했던 그 지역이어서 가슴을 쓸어내리질 않나, 바람에 의존하는 요트인지라 바람이 없으면 하염없이 천천히 가는 속도에 가슴 답답해하고, 폭풍우가 치는 날에는 비바람과 파도와 사투를 벌이고 심지어 배가 좌초해 구명보트로 탈출하는 아찔한 순간까지 온갖 생고생을 하게 된다. 이런 고난과 역경 속에서 마침내 12번째 항해 만에 우리 영토의 최동쪽인 독도에 이르면서 만 일 년이 넘는 긴 항해를 마치게 된다. 비록 멋진 낭만과 안락함은 없었지만 집단 가출호 선원들은 우리나라 바다와 섬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이 부신지를 책 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사진들에, 허영만 화백의 익살스러운 그림에, 그리고 항해일지처럼 여행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한 이 기행문에, 그리고 그 추억과 감동을 영원히 잊지 않고 간직하게 될 각자의 가슴 속에 담아온 것이다.
허영만 화백은 책 속에서 그들이 이 여행을 나선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요트는 호화판(?) 이거 아니다. 배가 심하게 흔들릴 때면 굶기 예사고 노숙은 기본이다. 그러나 선원 모두 불평은 없다. 재미있으니까 분위기 좋으니까. 고생 각오하고 집 나온거니까”
온갖 미사여구나 광고용 소개 글보다도 재미있고 분위기 좋아서, 고생할 거 알면서도 그들은 그래서 불평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이 여행을 시작했다는, 단순하면서도 진실한 이 말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책을 읽고 나니 벌써부터 귀차니즘에 빠져 집안에서 헤매고 있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단순히 여행 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의 열정도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은 아닌지, 집단가출호 선원들보다도 젊은 나이인데도 어느새 마음만큼은 벌써 늙어버린 것은 아닌지 괜한 자괴감마저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여행을 담은 이 책은 나에게도 자극이 되어 그들처럼 거창한 여행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가출”을 한번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벌써부터 “가출”에 대한 상상에 절로 즐거워지고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