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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징조들 ㅣ 그리폰 북스 2
테리 프래쳇.닐 게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적에는 소년잡지에 단골로 등장했던, 세계적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1999년”에 예언한 대로 진짜로 종말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본작가 “고도우 벤”의 <지구 최후의 날(고려원/1981년)>은 그 당시 아이들에게는 지구 종말의 비밀을 알려주는 일종의 복음서(福音書)처럼 돌려 읽었었고,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에 나오는 주인공과 친구들처럼 “지구 방위대”를 조직해서 종말을 막아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에 휴거(携擧) 열풍을 몰고 온 어네스트 W 앵글리의 <휴거; 지상최대의 사건(청목/1981)>을 읽고서는 드디어 지구 종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즉 구원의 길을 발견한 우리 일당들은 모두가 자발적으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불순한 동기로 다닌 교회를 하나 둘 씩 떠나게 되었고, 1992년 모 종교 단체의 휴거 이벤트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고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1999년도 아무 탈 없이 - 심지어 좀 더 현실적인 대환란이었던 “Y2K"도 별 일 없이 넘어가버렸다 - 지나가면서 종말론을 더 이상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어떤 소설이나 영화보다도 드라마틱한 지구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나에게는 언제나 흥미롭고 재밌는 꺼리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영국 최고의 판타지 작가라는 테리 프래쳇과 그래픽 노블 <샌드맨>의 저자 닐 게이먼이 함께 쓴 <멋진 징조들(원제 Good Omens/시공사/2003년 9월)>은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었고, 인터넷서점에서 할인 행사를 하길래 바로 구입했었던 그런 책이었다. 최근 독서에 여유가 생겨 오랫동안 책장에서 잠들었던 이 책을 꺼내 읽게 되었다. 미리부터 소감을 이야기하자면 기대처럼 재미도 있었지만 그만큼 실망감도 큰 그런 책이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에덴동산의 수문장 천사이자 불쌍한 아담에게 화염검을 줘 버린 "아지라파엘"과 이브를 꾀었던 뱀이자 악마 "크롤리"는 담소를 나눈다. 천사와 악마라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이 조합은 서로를 이해하고 다독거리는 묘한 관계로 수 천 년이 지난 현재에까지 그 우정을 나누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세상의 종말을 불러일으킬 적그리스도가 태어나고, 영화 "오멘"에서처럼 미국 외교관 아들과 뒤바뀌게 된다. 그러나 음악도 못 듣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없는, 도대체 재미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세상이 오는 것이 싫은, 이미 인간세상의 재미에 푹 빠져버린 요상한 크롤리와 아지라파엘은 따분하기만 할 것 같은 종말을 막기 위해 적그리스도를 각자 방식대로 교육시키기로 합의하고는 계속 그 아이 주변에 머물면서 그를 교육시키고 관찰한다. 그로부터 11년 후 예언의 그때가 돌아오는데, 웬걸 그들이 교육시킨 아이는 적그리스도로서 각성을 하지 못하고야 만다. 당황한 둘은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는데, 출산 당시 멍청한 사탄의 종 수녀의 실수로 미국 외교관의 집이 아닌 영국 시골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종말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두 천사와 악마와 어설픈 마녀사냥꾼, 계시록의 네기사, 대천사장 메타트론과 바알세불, 그리고 적그리스도 소년 "아담"과 그의 친구들인 "그놈들", 그리고 아담의 상상에 의해 등장하는 아틀란티스 대륙과 UFO 등등 온갖 괴이하고 엉뚱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마침내 이미 태초부터 예정되어 있던 인류의 마지막 날인 "토요일"의 해가 밝아온다. 과연 엉뚱한 곳에서 교육받은 적그리스도 “아담”의 최종 선택은 무엇인지, 너무나도 정확하게 예견한 희대의 예언서 “아그네스 너티의 근사하고 정확한 예언집”의 예언은 어김없이 맞을는지, 인류의 종말은 과연 오긴 오는걸까?
'천국 가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묵시록' 이라는 카피가 제격인 이 책은 묵시록으로 대변되는 기독교 종말론과 한때 1999년이었다고 알려졌다가 그 해가 지나고 나니 다시 2012년이라고 정정해서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그리고 역시 기독교 종말을 다룬 흥행영화 오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말론을 이리저리 뒤섞어 만든 일종의 풍자소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 에리히 폰 데니켄의 "신들의 전차"라는 책에서 인류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즉 아직도 에덴동산에 머물고 있었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재미없는 삶을 살았을까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의 주인공인 아지라파엘과 크롤리는 딱 그런 이유로 인류종말을 막기 위해 나선다. 그러면서부터 시작되는 좌충우돌의 상황들과 마치 3류 만화에서나 볼 법한 코메디같은 장면들이 읽는 내내 실소를 자아내게 하고, 마지막까지 과연 인류 종말이 일어나긴 하나 하는 궁금증에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 열광하고 찬사를 보내는 이유가 종말론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영국식 유머로 잘 버무려냈기 때문일텐데, SF소설계의 괴작(怪作)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계보를 잇는 작품으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그 유머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미리 밝혔던 소감처럼 기대했던 것 만큼 재미도 있었지만 실망도 컸었던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아예 대놓고 풍자하고 패러디하고 조롱하는 책이니 진지함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니 책의 경중은 차치하고, 바로 이 책의 코드인 "유머"가 실컫 웃어주자 작정을 하고 읽었건만 당최 가슴에 와닿지가 않는다. 가끔 영국의 TV 코메디 프로그램을 볼 때도 그렇고 - 단 로완 앳킨슨의 "미스터 빈"만큼은 예외다. 볼때마다 배꼽을 잡고 웃는다 -, 위에서 언급한 <은하수를 ~>도 그렇고 영국식 특유의 유머, 마치 한 때 인기 끌었던 "허무개그"를 능가하는 그 유머에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웃어야 하는지 그 웃음코드를 잡아내기가 영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 정서와는 맞지 않는 웃음코드에 읽는 내내 허무하고 유치하기까지 한 개그 - 어디까지나 주관적 판단이다. 이런 유머에 공감하는 분들이라면 그 여느 책보다도 즐겁고 재밌을 책이다 - 에 그냥 헛웃음만 짓게 되다 보니 그만큼 실망감이 같이 드는 것 같았다. 그래도 불경스럽기까지 한 이런 책에 많은 독자들이, 특히 기독교적 문화관이 주류를 이루는 서양에서도 찬사와 경탄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나의 이해부족을 탓하는 게 맞을 듯 싶기도 하다.^^ 책 말미 작가의 말처럼 그저 '장난삼아' 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이 책은 심각하지 않게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독특하고 기발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할 수 있겠다.
오늘도 일촉즉발로 다가오는 종말의 상황에서 인류를 지키기 위해 - 물론 단지 천국이 심심하고 지루해서인 이유가 더 크지만 - 어디에선가 고군분투하고 있을 아지라파엘과 크롤리를 상상을 해본다면 두려운 삶이 느긋해지고 재밌어지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그들의 노력이 앞으로도 결코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