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부의 전쟁 in Asia
최윤식.배동철 지음 / 지식노마드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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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1998년 국가부도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었던 우리 국민들에게 “IMF"라는 단어는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종의 “트라우마(Trauma)"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뒤흔들었을 때 우리들에게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가 바로 "IMF"였고 여기저기서 제2의 IMF 사태에 닥치는 것 아냐 하는 걱정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연일 뉴스를 주목해야 했었다. 다행히 10년 전과 같은 위기는 우리에게 닥치지 않았고 세계 경제 위기도 어느 정도 진정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지만 - 물론 종결이 아닌 더 큰 위기로의 진행형으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 아직도 국민들의 놀란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고 불안감은 여전한 것 같다. 특히 다시는 겪지 않을 줄 알았던 경제 위기가 비록 원인과 양상은 다르지만 10년 만에 다시 재현되는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위기는 결코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면서 10년, 20년 후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그 여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과연 지난 98년과 같은 외환위기는 다시 일어나게 될까? 전문 미래학자 최윤식과 현직 경영인 배동철이 7년여의 준비와 1년간의 집중적 연구를 거쳐 집필했다는 <2020 부의 전쟁 in ASIA(지식노마드/2010년 10월)>은 최악의 경우 앞으로 10년 이내에 제2의 외환위기를 겪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놀라지 마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전 세계의 경제위기는 아직 전초전에 불과하다”

  책 첫 페이지 첫 문장을 마치 닥터 둠(Doom) 루비니(Nouriel Roubini, 뉴욕대) 교수의 발언처럼 들리는 가슴 떨리는 강력한 경고로 시작하는 이 책은 제일 먼저 2020년 '한국판 잃어버린 10년'이 찾아올 수 도 있다고 경고한다. 그 이유로 우리나라 산업이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는 기술과 품질 경쟁에서 밀리고 중국, 동남아 등 후발 개도국에는 가격경쟁에서 밀리는 현상을 일컫는 말인 “넛 크래커(Nut-Cracker; 호두를 양쪽으로 눌러 까는 기구)”상황에 빠져 있으며 그 증거로 이미 중국에 추월당한 조선업과 핸드폰을 예로 들고 있다. 두번째로 이미 그 심각해진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이미 문제해결을 위한 타이밍을 놓쳐 버려 앞으로 더욱 심각해져서 2018년부터는 인구가 줄게 되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어 사회 활력이 떨어지고 내수 시장이 침체하는 "저출산의 저주"가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엄청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세 번째로 최근 모라 토리움을 선언한 성남시처럼 지방자치단체들의 재정적자에 따른 파산이 줄을 잇게 되고, 경기부양을 위한 과도한 정부지출과 급증하는 복지예산으로 인해 국가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면, 또한 일본처럼 부동산 거품(Bubble)이 일시에 꺼져버리는 그런 상황이 온다면 우리는 10년 안에 지난 98년의 IMF사태는 비교도 되지 않을 최악의 외환위기가 재발할 것이며, “잃어버린 10년”에 빠질 가능성이 70~80%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주변 환경 또한 결코 녹록치가 않아서 일대 변혁이라 표현할 수 있을 앞으로 10년 동안 예상되는 국제 경제 변화를 2장에서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우리의 운명도 그 변화의 정도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물 부족, 대 전염병, 환경오염 등 갈수록 악화되는 환경재앙과 맞물려 아시아는 세계 부의 전쟁의 무대가 될 것이며, 2008년 상처를 입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대반격을 시작하고, 최근 미국과 무역분쟁, 환율분쟁을 서슴없이 치루고 있는 중국의 맞대응이 점점 격해지면서 계속 확산일로에 접어들게 될 이 전쟁은 이미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일본은 다시 한번 반복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 최근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정확히 예측했던 펀드매니저 카일 바스가 일본의 디폴트(국가부도)를 예언했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고 나니 이 우려가 결코 기우(杞憂)가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가슴이 철렁해졌다 -, 취약한 경제 기반의 동남아와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를 거쳐 중국에까지 시스템적 위기가 불어 닥치는 최악의 경우 아시아 전역의 대공황에까지 이를 수 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세계의 패권을 두고 일대 격전장이 될 아시아가 전쟁의 주 무대가 된다는 것이 꼭 위협만은 아닌 우리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준비한다고 결코 늦은 것은 아니라면서 다가올 미래의 위협을 극복할 해법으로 6가지를 제안한다. 먼저 곧 몰아닥칠 금융위기를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취약한 금융시스템을 정비하여 금융능력을 대대적으로 향상시키고, 둘째 불확실성을 확실히 통제해야 하며, 셋째, 한류 열풍과 드라마 대장금 성공 예처럼 새로운 부가가치인 “스토리”의 창출, 즉 Story Korea를 만들어가고, 넷째, 지금은 전혀 불가능할 것만 같은, 그리고 치명적일 수 도 있는 통일한국(United Korea)의 가능성을 철저히 대비해야 하며, 다섯째 미래형 스마트 인재를 집중 육성하고, 마지막으로 정부 또한 위기 대응을 위해 좀 더 현명(Smart)해지라고 충고한다. 즉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에게는 아직 준비할 수 있는 10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고, 일본이라는 선행적 벤치마킹 상대가 있으니 지금부터 준비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결론 맺는다. 

 사실 부동산 거품 붕괴, 저출산 고령화 문제, 재정적자, 중미(中美) 경제전쟁, 일본 경기 침체 장기화 가능성 등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미래 예측들은 최근 비주류 경제연구소들 전망이나 세계 경제 석학들의 예측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접해본 내용들이라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시하는, 수학의 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변수(문제)들을 고도의 방정식(미래예측기법)에 대입(Input)하여 구해낸 해(解)인 10년 후의 전망(Output)은 머릿 속에 절로 그려질 정도로 그 어떤 예측보다도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식의 예언이나 허구의 SF소설과는 달리 과학적인 분석기법에 의한 미래 예측은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만, 유수의 경제연구소들의 경제 전망이 이맘 때쯤이면 매년 틀린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1년도 아닌 향후 10년이라는 기간에 대한 이 책의 전망이 그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未知數)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개인적인 바람은 이 책의 암울한 전망이 결코 이뤄지지 않기를 바란다. -, 그리고 작가가 제시하는 해법들 또한 과연 그런 정도의 준비로 그렇게 강조하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조금은 미흡하고 분명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위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말처럼 이 책에서 우려하고 있는 사항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그 대처법을 누군가는,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권력자들이나 미래를 준비하는 기업 최고 경영자들이라면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하나 제대로 들어맞지 않은 이 책의 예견에 코웃음을 날리는 것은 10년 후에 하기로 하고, 이 책에서 언급한 우려들에 대해 실현가능한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미리 대비하는 것이 우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단기간의 경기부양이나 성과에 집착하는 근시안적 정책들을 남발하는 경제당국에게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 다시 한번 IMF와 같은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그때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종말적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과 경각심을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깨닫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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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부르는 수학 공식 - 소설로 읽는 20세기 수학 이야기 에듀 픽션 시리즈 7
테프크로스 미카엘리데스 지음, 전행선 옮김 / 살림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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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數學)을 손에서 놓은 지가 벌써 십 수 년이 넘었다. 전공이 경제학과인지라 다른 인문계 학과보다 수학을 대학 졸업 때까지 공부했었으니 그래도 꽤나 길게(?) 잡고 있었던 셈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수학은 이제 학창시절에나 공부했던 추억의 학문이 되어 버렸지만 책읽기를 하면서 수학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교양서들은 그래도 간간히 접해오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책들을 꼽아보면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레)>, 이선영의 <천년의 침묵(김영사)>, 감태연의 <이것이다(시간여행)>, 리스 하스아우트의 <범죄수학(지브레인)> 등을 들 수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수학자들이나 수학 상식들은 영 낯설기만 하지만 독특하고 색다른 수학이라는 소재 덕분에 재밌게 읽었던 책들이며 수학을 다시 한번 공부해볼까 하는 의욕을 복돋우는 흥미로운 책들이었다. 최근에 또 하나의 수학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저술가인 테프크로스 미카엘리데스의 <살인을 부르는 수학공식(살림Friends, 2010년 8월)>이 바로 그 책으로 역시나 이제는 생경하기까지한 난해한 수학이야기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미스테리 형식으로 풀어간 수학 이야기라는 색다른 소재가 매력적인 재밌는 책이었다.  

 1929년 아테네, 중학교 수학교사인 스테파노스 칸다르트지스가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그의 마지막 목격자인 친구인 “나”(미카엘 이게리노스)에게 경찰이 찾아온다. 경찰과 스테파노스의 동행하면서 나는 그를 처음 만났던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회상한다. 나는 제2회 국제 수학자 대회에서 그리스 동포이자 수학자인 스테파노스를 만나서 의기투합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와 함께 젊은 파리의 예술인들과도 술자리를 같이 하고, 수학에 대해 깊은 토론을 나누는 등 진한 우정을 나누고 독일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가업을 잇게 된 나는 독일에서의 유학생활을 접고 그리스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사업을 맡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리스에서 나는 스테파노스와 감격스러운 해후를 하게 되고 수학 토론을 하는 목요모임을 갖고 체스를 두는 등 그와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진다. 전처(前妻)의 남자친구로, 그리고 내가 거금을 들여 구해낸 정인(情人)의 애인으로 묘한 삼각관계에 빠지기도 하지만 사업을 시작하면서 접어야 했던 수학에 대한 열정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인 스테파노스는 누가 뭐래도 가장 소중한 친구로 물심양면으로 그를 돕는다. 그런 그가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경찰은 가장 마지막 목격자인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나에게 불리한 증거들과 증인이 계속 나오면서 결국 나는 감옥에 갖히고 만다. 1심에서는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은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밀렸던 최신호 수학 잡지를 보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  

  2,500년전 최초의 수학 살인 - 김선영의 <천년의 침묵>이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을 모티브로 하여 19세기 말 20세기 초 수학 역사를 소재로 한 이 책은 미스터리 형식을 띠고 있지만 수학 교육을 위한 일종의 교양서로 보는 것이 맞을 듯 싶다. 20세기 초에 실재했던 수학자들과 공식들 사이에 허구의 인물인 “나”와 “스테파노스”를 교묘히 끼워넣어 전혀 이질감없이 그 시대의 수학사(數學史) 흐름을 풀어내는 이 책은 1900년 국제 수학자 대회에서 힐베르트가 20세기에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발표했던 수학 문제 - 사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그가 낸 총 23개의 문제 중에서 6개의 문제는 아직도 미해결로 남아있다고 한다 - 를 발표하던 당시를 마치 다큐멘터리나 TV로 중계하듯 생생하게 그려냈고, 그 당시 국제 회의장에 모여 있던 위대한 수학자들과 훗날 거장으로 성장하던 파리의 젊은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는 색다른 즐거움을 우리에게 준다. 사실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건너기’라는 어떤 다리도 한번이상 건너지 않고 모든 다리를 건너는 놀이에 대한 이야기 등은 어린 시절 탐구생활이나 수학 상식 책 등에서 익히 들어본 지라 알고 있었지만 책에서 소개되는 수학자들이나 각종 수학 공식들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접해본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결국 스테파노스의 죽음을 불러온 힐베르트의 두 번째 문제인 “새로 제안된 공리계가 무모순이며 완전한 것을 입증할 방법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어떻게 창조적 수학의 종말을 가져오게 되는가에 대한 설명은 아예 이해하기를 포기할 정도로 난해한 그런 이야기였다. 다만 2,500년 전 무리수의 발견이 히파소스를 죽음으로 이끈 것처럼 절대 가치로 신봉해왔던 진실이 무너져 내릴 때 자신의 삶과 가치마저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그 절박함이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할 수 도 있다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팩션 소설들이 바로 과학이나 종교에 대한 그릇된 맹신을 소재로 하고 있는 것처럼 그릇된 신념과 가치가 결국 비극을 불러온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의 재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책 속에 담겨 있는 풍성한 수학적 상식들과 수학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아쉬웠지만 생생하게 재현해낸 20세기 초의 풍경과 수학이라는 색다른 소재를 만날 수 있었던 즐거운 책읽기였다.  

 다 읽고 나서 학문으로서 수학을 공부하기에는 너무 늦었을 테고 또한 가진 능력도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상식(常識)으로서 수학을 공부해보는 것도 꽤나 재밌고 즐거운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지 난감하겠지만 말이다. 이 책도 수학 공부에 대한 의욕을 상기시켜주는 그런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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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지식 클럽 - 지식 비평가 이재현의 인문학 사용법
이재현 지음 / 씨네21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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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비평가 이재현의 인문학 사용법"이란 부제가 붙은 <두더지 지식클럽(이재현 저/씨네21(주)/2010년 9월)>을 받아들고서 "지식비평가"라는 단어에 생소함을 느껴 책 표지 지은이 소개 글부터 펼쳐보았다. 문화, 만화, 문학평론가로 진보 시사 잡지의 편집위원과 편집국장을 지냈고, 이미 몇 권의 문화평론집을 펴낸 중견 작가로 좌파가 외면해온 보편적 가치들, 곧 "사랑, 성, 쾌락, 이별, 죽음처럼 우파적인 것들과 결합된 문제들과 맞서 싸우고 포섭하는 일"이 "지식비평가"로서 자신이 할 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작가의 말이라 할 수 있는 "프롤로그"에서는 자신이 좌파이념을 믿어온 "좌빠”- 세계의 칼에 베여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 좌파보다 좋은 점이라고 한다- 이고 신자유주의자와 싸우는 걸 중요한 임무로 삼는"자빠"이기도 한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세계가 자신을 변질시키기 전에 자신이 먼저 세상의 변화를 읽고 쓰는 새로운 길을 찾는 과정에 있으며 나이 먹은 좌빠로서 새로 공부하는 것은 어려움도 크지만 뇌에서 마약이 마구 분비되는 것 같은 즐거움도 많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육칠십대와 일이십대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사회적, 언어적 계곡 사이에서 두 세대를 이어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지식인임을 자처하고 있다. 여전히 작가가 말하는 지식비평가의 정체가 알듯 모를 듯 손에 잘 잡히지 않음을 느끼면서 책을 펼쳐 들었다. 

 책은 출판사 소개글이나 책 말미 고종석 작가의 소개글처럼 일종의 인터뷰 글이라 할 수 있다. "연결하기", "확장하기", "비교하기","돌아보기", "상상하기"라는 다섯 개 대 주제로 구분하여 총 39가지 소주제의 인터뷰와 단상(斷想) - 몇 몇 글은 인터뷰가 아니라 작가의 생각을 담은 일종의 에세이 글들이 실려 있다 - 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먼저 인터뷰 대상 인물(사물)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하고 작가와의 가상인터뷰를 싣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뷰 대상들이 참 독특하고 다양한데 현재 생존해 있는 인물들 - 래리킹, 영화감독 이안 -도 있고, 고인이 된 유명 인사들과 역사적 위인들 - 클라우 제비츠, 박현채, 토마스 제퍼슨, 애덤 스미스 - , 신화, 전설, 문학, 예술, 만화 속의 비현실적인 인물들 - 마리안, 시마 과장, 선재동자, 수보리, 리어왕 등 - , 심지어 의인화된 사물이나 관념 - 축구공, 여론조사 등 - 등 다양한 방면의 인터뷰 대상들이 등장하여 작가와 현 시대의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창립자 “밴 플리트”에게 1952년 미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미국이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고 인정했던 경위와 2006년 모 재벌기업 총수가 밴 플리트 상을 받으면서 결과적으로 검찰 수사를 피하게 된 일을 물어보지만 노 코멘트를 일관하는 그에게 “진실 앞에 입을 다무는 당신한테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화를 내기도 하고, 미국의 전설적인 갱이자 라스베가스를 설립하였던,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한국에서 조폭하고 싶다는 “벅시”와는 한국의 도박 산업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여론조사(Opinion Poll)"와는 여론조사의 허와 실을 말하면서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론조사를 제대로 해서 발표했다면 과연 서울시장에 한명숙씨가 당선됐을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와는 민감할 수 있는 환각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현대판 검투사인 "효도르"와 "크로캅"의 경기를 소개하면서 피가 낭자한 어떠한 이종격투기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부시가 아프가니스탄고 이라크에서 벌였던 전쟁, 그리고 뉴올리언스에서 있었던 인재(人災)보다는 훨씬 덜 잔인하고 훨씬 더 인간적이고 말한다. 일본 테러단체인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부대원이었던 "에키다 유키코"와는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한 단체의 조직원으로 활동했다면서 도시빈민, 노도자, 농민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주의 사상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운 게 없이 수구 정당으로 투신한 모 의원을 힐난하고,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마스 제퍼슨"에게서는 대통령이란 상품은 환불, 반품, 교환이 안되는 거니까 처음에 정치 시장에서 고를때 아주 신중해야 한다는 당부를 듣기도 한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와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짓밟히고 있는 상황을 꼬집기도 하고, 이 책의 제목에 쓰이기도 하며 근대적인 동시에 탈근대적인 저항과 전복의 존재로 할 수 있는 벤사이드의 두더지와의 인터뷰에서는 한미 FTA와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용산참사, 4대강 개발, 비정규 문제 등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시사문제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현재 시사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국제, 예술, 종교,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가상 인터뷰 대상을 빌어 이야기하는 이 책은 세대 간의 사회적, 언어적 계곡 사이에서 두 세대를 이어준다는 자부심를 가지고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쉽고 평이하게 씌여 있어서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는 인문 교양서라 할 수 있다. 다만 너무 많은 주제를 담으려다 보니 한 주제 당 10 페이지 남짓의 한정된 지면만을 할애할 수 밖에 없어서 인지 전반적으로 깊이 있는 접근보다는 맛보기 형식의 백과사전식 주제 나열에 그친 것이 아쉽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을 "좌파"가 아닌 "좌빠"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면 자신을 이데올로기에 한정된 지식인으로서가 아니라 비록 사상적 경향은 좌에 쏠려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파도 기웃 기웃거리면서 그네들과 격의없이 이야기 나누고 - 물론 그렇다고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은 아니다 -, 성적 소수자, 된장녀, 환각제 등 양쪽에게서 배척받는 소수자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고의 유연성과 개방성을 나타내기 위한 말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의 행보가 실제 좌우파 진영에서는 어떻게 평가받는지는 모르겠지만 세대 간의 가교 역할을 자임하고 세상의 변화에 스스로 먼저 읽고 쓰고 새로운 길을 찾는 그의 열정만큼은 관심 있게 지켜볼만하다고 평가하고 싶다. 어디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의외성과 돌발성의 두더지 같은 지식 탐구욕이 거꾸로 퇴보하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그가 말한 "지식비평가"란 말의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결국 "지식비평가"란 자신이 속한 이데올로기나 가치에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가치로의 외연을 넓힐줄 알며 세대간의 간격 또한 아우를 줄 아는 사람이라고 네멋대로 정의를 내리고 이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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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붓다
한승원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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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검증이 안된 신인작가 작품이기에 약간은 저어하는 마음에 별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작품에서 기대 이상의  감동을 맛보게 되는 그런 의외성과 놀라움도 좋지만 이미 전작을 통해서 재미와 감동을 검증받은 중견작가의 신작을 만나는 즐거움도 꽤나 쏠쏠하다. 그만의 독특한 문체와 필력을 다시 맛볼 수 있고, 전작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어떻게 들려줄까 하는 그런 기대감을 절로 가지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연인은 신선함과 설레임을 주지만 오래전 연인은 다시 만난다는 반가움과 함께 저절로 떠오르는 아련한 추억에 대한 그리움과 같다고 할까? 그래서 오래전 읽은 <아제아제 바라아제>와 <추사> 이후 오랜만에 다시 만난 한승원 작가의 신작인 <피플 붓다(랜덤하우스 코리아, 2010년 10월)>는 그런 반가움과 아련함과 함께 그가 들려주는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에 묘한 흥분마저 느끼게 되었다. 다 읽고 나니 젓갈이 잘 숙성되면 짠 맛은 덜해지고 특유의 감칠 맛이 지극한 미각의 행복을 준다고 하더니, 제대로 곰삭은 작가의 노련한 필치를 맛보는 즐거움과 이제는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삶에 대한 더욱 따뜻해지고 깊어진, 그리고 한결 여유로워진 작가의 시선을 느껴볼 수 있는 감동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게 하는 행복한 책읽기였다. 

  전라남도 장흥 억불산(億佛山) 자락 마을에서 살고 있는 18세 소년 상호는 사연 많은 아이다. 상호의 어머니는 라이 따이한(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으로 베트남에 장사하러 온 상호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해 한국으로 와 상호를 낳았다. 상호의 아버지는 이것저것 사업을 한다고 집안 돈을 거덜내더니만 결국 실패를 하고 달아나버렸고, 상호 어머니도 그런 아버지를 따라 집을 나가버려 상호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나게 된다. 상호는 불편한 다리와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할아버지가 시신을 염하는 “염장이”라는 것 때문에 급우들에게 놀림을 당한다. 그러나 상호는 심지가 단단한 아이다. 수능시험과 명문대 진학이라는 제도권 교육을 거부하고 자신의 글을 쓰기 위해 예술 대학으로의 진학을 맘먹고 친구들이 수능시험 보던 날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억불바위를 직접 오른다. 또한 자신들을 괴롭혀온 친구들을 혼내주기 위해 몸을 단련하는가 하면, 무전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동네 여자 후배와 풋풋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상호를 옆에서 지켜보는 할아버지 안인호는 그런 상호가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해한다. 전직 장학사이자 교장이었지만 정년 퇴임 후 염장이로 생계를 잇고 있는 안교장은 주변의 만류에도 우주를 청소하는 쇠똥구리라는 마음으로 염장이 일을 계속하고 한편으로는 몰래 동네 외로운 노인들이나 불우한 이웃들을 침과 뜸으로 치료하고 먹을 거리를 도우면서 살아간다. 그는 삶의 희망을 놓으려는 한 많은 여인 송미녀를 사랑으로 치유하려 하고, 예전 같이 근무하던 동료 여교사였지만 심한 정신적 충격에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자신에게 매달리는 오 교사를 주변의 만류와 시선에도 불구하고 거두어 보살핀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안교장에게서 만인의 부처(People Buddha)인 억불바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른다. 졸업식 날 상호는 할아버지 가르침대로 “제대로”된 졸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3년간 자신을 괴롭혀온 급우를 불러 세운다.

  자신의 고향에 빚을 감는 심사로 이번 글을 완성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은 전라남도 장흥 억불산 억불바위 아래 마을을 배경으로 한, 고향에 바치는 헌사(獻辭)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등단한지 42년이라는 이력이 말해주듯이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경지에 이르렀을 작가의 단단한 내공으로 자신의 고향을 배경으로 삶에 대한 사랑과 감성을 과장되지 않고 담백한 필치로 풀어낸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따뜻한 시선에 동화되어 마음 한 켠이 뭉클해지는 그런 감동이 느껴져 다 읽고서도 금새 책장을 덮지 못하게 만드는 여운이 오래 느껴졌다. 남다른 출생배경으로 평범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상호가 좌절하지 않고 점점 단단해지는 성장 모습과 정형화된 사각형의 삶이 아니라 오각형의 자유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읽으면서는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게 된다. 그리고 미륵부처의 형상인 억불바위를 점점 닮아가는 상호의 할아버지 안교장의 삶은 일종의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로 감동이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젊었을 때 장흥의 뭇 권력자들과 사내들을 쥐고 흔들었던 여인 송미녀 할머니가 팔순의 나이가 되어 인생에 대한 회한에 삶의 희망을 놓아버리자 그녀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식은 지 오래되었던 사랑의 불꽃을 다시 피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보듬고 안아주는 안교장의 모습은 세속의 애욕을 넘어선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가장 감동적인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읽은 어느 책에서 읽은 "사랑은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의 대답 - 책 첫머리 작가의 말 제목도 "사랑 그리고 구원, 그 영원한 우리들의 화두"이다 - 을 바로 억불산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상호와 안교장, 그리고 그 주변사람들의 삶이 바로 그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삶이라는 것이 단지 눈에 보여지는 형상이나 또는 자신의 머릿속 아집에 집착하여 그릇된 시선으로 행복과 불행을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뜻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그 뜻을 실천해 옮길 때 비로소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삶의 이면에 감춰진 진정한 뜻이 바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는 안교장의 삶이야말로 인간 세상에 현신하여 민중을 구원한다는 구세주 억불바위 미륵불 모습 그 자체가 아닐까?   전남 장흥에 가면 낡은 자전거에 꽹과리가 들어있는 가방을 뒤에 싣고 좁은 논길을 달리는 안교장을 ,그리고 집 툇마루에 앉아 억불바위를 바라보고 있을, 더 단단한 모습으로 바르게 성장한 상호를 실제로 만나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들이 있어 더욱 따뜻하고 아름다운 작가의 장흥 고향 마을 억불바위는 이 책을 읽은 모든 이들에게는 이제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을 넘어서는 더욱 큰 의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 덕분에 이제 전남 장흥에 있다는 억불바위는 장흥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닮고 싶어하는, 그리고 닮아가야 하는 그런 상징이 되어 버릴 것 같다. 

 년초에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금강스님/불광출판사)를 읽고는 가고자 맘 먹은지 오래전이지만 아직도 떠나지 못한 남도 여행길에 볼거리가 하나 늘었다고 좋아했었는데 이제 그 여행길에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상호와 안교장이 살고 있는 억불산 아래 마을과 그곳을 내려다보고 있는 억불바위를 말이다. 갈수록 풍성해지는 남도 여행길, 꿈꿔보는 것만으로 벌써부터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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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전혜린 - 그리고 다시 찾아온 광기와 열정의 이름, 개정판
정도상 지음 / 두리미디어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누구라도 시인이 된다는 계절 가을, 유독 생각나는 사람이 두 사람 있다.

먼저
지금도 어디에선가 노래 부르고 있을 것 만 같은, 아직도 그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가객(歌客) 김광석이 바로 그다. 물론 한 세상 다 살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이 어찌 그 하나 뿐 일까만은 나와 같은 시간대에 함께 살면서 같은 호흡을 나누었던, 아직도 대학로 학전소극장에 가면 그를 만나볼 것 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그여서 요즈음 우연히 튼 라디오에서 그들의 노래가 나올라치면 괜한 감상에 빠져 차를 도로 한 켠에 주차하고 가만히 다 듣고는 노래가 끝난 후에야 다시 길을 나서게 된다. 

그리고 다른 또 한 사람, 미치도록 열광했었지만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한 사람이 있다.
아직 김광석을 만나기 전 아직 내가 치기어린 감상을 벗지 못했던 내 젊은 시절, 서른까지 과연 살 수 있을까 하는 유치한 생각을 괜히 멋있다고 생각하던 그 시절,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65년 자살을 한 번역가이자 수필가 "전혜린"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한참 감상에 젖어 살 무렵, 친구가 읽어보라고 준 책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고서, 이 책을 쓴 작가가 한국 최초의 여자 독일 유학생이자 어린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의 번역가이자 1세기 한번 나올까 말까라는 천재적인 문인, 불꽃같은 삶을 살았지만 스스로 그 삶을 마무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몇날 며칠을 감상에 젖어 그녀를 위해 책을 권했던 친구와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오지만 누군가가 "우리들의 젊은 날 전혜린에게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라고 한 말처럼 전혜린은 우리에게 "특별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삶의 무게에 낭만과 감상은 사치스러움이 되어 버린 지금 책장이 나긋나긋해질 정도로 수없이 읽었던 그녀의 책이 이제 종적을 알 수 없어진 것처럼 그녀의 이름과 글은 어느새 희미해져 가고만 있었다. 그런데 20 여년 만에 정도상의 소설 “그여자, 전혜린(두리미디어, 2010년 9월)”을 통해 그녀를 다시 만났다. 오래전 내 마음 속에서 영원히 놓아 버린 줄 만 알았던 그녀가 다시 내게로 돌아와 내게 이야기를 건네는 듯한 그런 책을 말이다. 

 책에서는 소설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삶에 대한 우수(憂愁)로 괴로워하는 전혜린과 그녀의 소설 속 인물이자 그녀의 불꽃같은 설명하는 매개채인 주영채 이야기로 액자식으로 전개된다. 독일 유학을 다녀온 후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녀는 겉으로는 법대 교수인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라는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이룰 수 없는 다른 남자와의 사랑을 갈망하는 아픔과 번역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그저 악보를 보고 그대로 연주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에 자신만의 글인 “소설”을 쓰고자 하지만 풀리지 않는 글에 괴로워한다. 오랜 고민 끝에 그녀는 자신의 분신인 “주영채”라는 인물을 창조하고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바램대로 서울 법대에 입학했지만 법보다는 철학과 문학에 더욱 관심을 가졌던 영채는 문리대에서 "백창우"를 만나 그를 사랑하지만 결국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못하고 자신또한 상처를 입고야 만다. 결국 아버지의 바램을 저 버린채 독일로 유학을 떠난 영채는 그곳에서 알제리 유학생인 잔느와 알게 되고, 그녀의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게 된다. 또한 누구보다도 외로웠던 유학 생활에서 자신이 만난 유일한 한국인인 "강문철"과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되고, 그를 사랑한 그녀는 비엔나 여행을 함께 떠나지만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 그녀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맺어준 남자인 약혼자 오은수가 찾아온다.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혼인신고로 법적 부부가 된 영채와 은수, 그리고 영혼의 교감을 나눈 문철과 잔느 네 사람의 사랑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엇갈리고야 만다. 영채는 사랑하지 않은 남편 은수와의 결혼 생활에 갈수록 힘들어하고 문철에게 더욱더 빠져들지만 문철은 그런 영채를 외면하고 그녀를 애써 멀리하고 자신만의 사명이라 여기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항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그런 문철을 잊지 못해 번역에 매달리던 영채는 어느날 영ㅎ비비안리 주연의 영화를 보고 난후 영화 속 여주인공의 공포와 고독이 뒤섞인 절규에 자신의 발목이 자꾸 낚아채는 그런 절망감을 느끼고는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서울로 돌아오기로 결심한다. 뮌헨에서 치러낸 생의 홍역때문에 울었던 영채는 서울에서 대학 교수가 되어 강의를 나서던 어느날 문리대 마로니에를 걸어가다가 문철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에게서 잔느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그녀는 문철에게 "사랑이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하고 묻지만 문철은  대답을 회피한다.  군사정권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구테타를 일으키던 그해 문철은 혁명정부의 지명수배를 피해 종적을 감추고 영채는 산부인과에서 남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진단을 확인하고 돌아오던중 문철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고는 그가 죽었다는 곰소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직 자신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문철의 답을 떠올리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실컷 살지 못했어. 생을 사랑해." 

혜린의 첫 소설은 이렇게 끝났지만 자신이 꿈꿔왔던 "생의 한가운데"의 니나와는 전혀 다른 영채의 삶과 이렇게 참혹하게 죽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않은 문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는 소설 원고를 덮고는 일기장에 낙서하듯이 몇 자를 끄적거리고는 약을 먹는다. 

"나는 흰 새벽 속으로, 내 마음을 사랑과 고뇌로부터 순화할 영원한 기쁜 죽음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더 나을 것이다. 영원히 나는 모든 정다운 것을, 무거운 짐들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치 쇠줄을 버리듯 나는 어깨를 추키며 지나간 것들을 내던져야 한다. 그리고 생앞에 - 죽음 앞에 - 놓여 있는 하얀 신작로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주영채, 백창우, 강문철 소설 속의 이름들이 낯설지 않다는 일종의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져 오래전 독서 목록을 뒤져보니  이 작품이 첫 출간되었던 1993년 다음 해는 1994년 어느때 쯤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한때 전혜린에 푹 빠져서 그녀의 수필 뿐만 아니라 번역서, 단문들도 죄 찾아 읽었던 터라 그녀의 생을 소설로 그린 작품이 나왔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에 읽고는 독서 노트 한 귀퉁이에 "나에게 있어 구원은 무엇인가? 그녀처럼 사랑이 나에게도 구원이 될 것인가"라고 치기어린 감상글을 남긴 기억이 난다. 16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으면서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읽게 된 것은 그렇게 사랑했던 전혜린을 나도 어느새 점점 잊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첫사랑을 다시 만나면 반가움과 함께 자신의 변한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까 하고 부끄러움이 든다더니  그녀를 오랫만에 다시 만난다는 기쁨과 함께 아직도 내 삶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채 삶의 무게에 순응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모습을 그녀에게 들어내기가 마냥 부끄러웠다.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그녀는 서른 한 살 짧은 생에 대한 안타까움에 과잉 포장된, 마치 신격화된 그런 인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시대의 아픔과 절망을 그러안지 못하고 자신의 감상에 매몰 되어버린 나약한 지식인이었다는 비판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한 그런 사람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이 반세기가 지나버린 지금 이 시점에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 책에서 분신인 영채를 통해서 그렇게 절실히 찾고자 했던 구원의 길인 "사랑"에 대한 그녀의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은 하루하루 관습과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체념하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반문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자신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했지만 당신들만은 더 늦기 전에 자신을 구원하라고 종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전혜린"이 나에게 묻는다. 십육년만에 다시 만난 너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느냐고. 너의 삶을 구원해줄 그 무엇을 찾았냐고. 오랫만에 전혜린이 내게 던지는 물음을 "화두(話頭)" 삼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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