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전혜린 - 그리고 다시 찾아온 광기와 열정의 이름, 개정판
정도상 지음 / 두리미디어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누구라도 시인이 된다는 계절 가을, 유독 생각나는 사람이 두 사람 있다.

먼저
지금도 어디에선가 노래 부르고 있을 것 만 같은, 아직도 그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가객(歌客) 김광석이 바로 그다. 물론 한 세상 다 살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이 어찌 그 하나 뿐 일까만은 나와 같은 시간대에 함께 살면서 같은 호흡을 나누었던, 아직도 대학로 학전소극장에 가면 그를 만나볼 것 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그여서 요즈음 우연히 튼 라디오에서 그들의 노래가 나올라치면 괜한 감상에 빠져 차를 도로 한 켠에 주차하고 가만히 다 듣고는 노래가 끝난 후에야 다시 길을 나서게 된다. 

그리고 다른 또 한 사람, 미치도록 열광했었지만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한 사람이 있다.
아직 김광석을 만나기 전 아직 내가 치기어린 감상을 벗지 못했던 내 젊은 시절, 서른까지 과연 살 수 있을까 하는 유치한 생각을 괜히 멋있다고 생각하던 그 시절,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65년 자살을 한 번역가이자 수필가 "전혜린"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한참 감상에 젖어 살 무렵, 친구가 읽어보라고 준 책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고서, 이 책을 쓴 작가가 한국 최초의 여자 독일 유학생이자 어린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의 번역가이자 1세기 한번 나올까 말까라는 천재적인 문인, 불꽃같은 삶을 살았지만 스스로 그 삶을 마무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몇날 며칠을 감상에 젖어 그녀를 위해 책을 권했던 친구와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오지만 누군가가 "우리들의 젊은 날 전혜린에게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라고 한 말처럼 전혜린은 우리에게 "특별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삶의 무게에 낭만과 감상은 사치스러움이 되어 버린 지금 책장이 나긋나긋해질 정도로 수없이 읽었던 그녀의 책이 이제 종적을 알 수 없어진 것처럼 그녀의 이름과 글은 어느새 희미해져 가고만 있었다. 그런데 20 여년 만에 정도상의 소설 “그여자, 전혜린(두리미디어, 2010년 9월)”을 통해 그녀를 다시 만났다. 오래전 내 마음 속에서 영원히 놓아 버린 줄 만 알았던 그녀가 다시 내게로 돌아와 내게 이야기를 건네는 듯한 그런 책을 말이다. 

 책에서는 소설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삶에 대한 우수(憂愁)로 괴로워하는 전혜린과 그녀의 소설 속 인물이자 그녀의 불꽃같은 설명하는 매개채인 주영채 이야기로 액자식으로 전개된다. 독일 유학을 다녀온 후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녀는 겉으로는 법대 교수인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라는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이룰 수 없는 다른 남자와의 사랑을 갈망하는 아픔과 번역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그저 악보를 보고 그대로 연주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에 자신만의 글인 “소설”을 쓰고자 하지만 풀리지 않는 글에 괴로워한다. 오랜 고민 끝에 그녀는 자신의 분신인 “주영채”라는 인물을 창조하고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바램대로 서울 법대에 입학했지만 법보다는 철학과 문학에 더욱 관심을 가졌던 영채는 문리대에서 "백창우"를 만나 그를 사랑하지만 결국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못하고 자신또한 상처를 입고야 만다. 결국 아버지의 바램을 저 버린채 독일로 유학을 떠난 영채는 그곳에서 알제리 유학생인 잔느와 알게 되고, 그녀의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게 된다. 또한 누구보다도 외로웠던 유학 생활에서 자신이 만난 유일한 한국인인 "강문철"과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되고, 그를 사랑한 그녀는 비엔나 여행을 함께 떠나지만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 그녀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맺어준 남자인 약혼자 오은수가 찾아온다.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혼인신고로 법적 부부가 된 영채와 은수, 그리고 영혼의 교감을 나눈 문철과 잔느 네 사람의 사랑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엇갈리고야 만다. 영채는 사랑하지 않은 남편 은수와의 결혼 생활에 갈수록 힘들어하고 문철에게 더욱더 빠져들지만 문철은 그런 영채를 외면하고 그녀를 애써 멀리하고 자신만의 사명이라 여기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항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그런 문철을 잊지 못해 번역에 매달리던 영채는 어느날 영ㅎ비비안리 주연의 영화를 보고 난후 영화 속 여주인공의 공포와 고독이 뒤섞인 절규에 자신의 발목이 자꾸 낚아채는 그런 절망감을 느끼고는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서울로 돌아오기로 결심한다. 뮌헨에서 치러낸 생의 홍역때문에 울었던 영채는 서울에서 대학 교수가 되어 강의를 나서던 어느날 문리대 마로니에를 걸어가다가 문철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에게서 잔느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그녀는 문철에게 "사랑이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하고 묻지만 문철은  대답을 회피한다.  군사정권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구테타를 일으키던 그해 문철은 혁명정부의 지명수배를 피해 종적을 감추고 영채는 산부인과에서 남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진단을 확인하고 돌아오던중 문철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고는 그가 죽었다는 곰소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직 자신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문철의 답을 떠올리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실컷 살지 못했어. 생을 사랑해." 

혜린의 첫 소설은 이렇게 끝났지만 자신이 꿈꿔왔던 "생의 한가운데"의 니나와는 전혀 다른 영채의 삶과 이렇게 참혹하게 죽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않은 문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는 소설 원고를 덮고는 일기장에 낙서하듯이 몇 자를 끄적거리고는 약을 먹는다. 

"나는 흰 새벽 속으로, 내 마음을 사랑과 고뇌로부터 순화할 영원한 기쁜 죽음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더 나을 것이다. 영원히 나는 모든 정다운 것을, 무거운 짐들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치 쇠줄을 버리듯 나는 어깨를 추키며 지나간 것들을 내던져야 한다. 그리고 생앞에 - 죽음 앞에 - 놓여 있는 하얀 신작로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주영채, 백창우, 강문철 소설 속의 이름들이 낯설지 않다는 일종의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져 오래전 독서 목록을 뒤져보니  이 작품이 첫 출간되었던 1993년 다음 해는 1994년 어느때 쯤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한때 전혜린에 푹 빠져서 그녀의 수필 뿐만 아니라 번역서, 단문들도 죄 찾아 읽었던 터라 그녀의 생을 소설로 그린 작품이 나왔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에 읽고는 독서 노트 한 귀퉁이에 "나에게 있어 구원은 무엇인가? 그녀처럼 사랑이 나에게도 구원이 될 것인가"라고 치기어린 감상글을 남긴 기억이 난다. 16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으면서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읽게 된 것은 그렇게 사랑했던 전혜린을 나도 어느새 점점 잊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첫사랑을 다시 만나면 반가움과 함께 자신의 변한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까 하고 부끄러움이 든다더니  그녀를 오랫만에 다시 만난다는 기쁨과 함께 아직도 내 삶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채 삶의 무게에 순응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모습을 그녀에게 들어내기가 마냥 부끄러웠다.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그녀는 서른 한 살 짧은 생에 대한 안타까움에 과잉 포장된, 마치 신격화된 그런 인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시대의 아픔과 절망을 그러안지 못하고 자신의 감상에 매몰 되어버린 나약한 지식인이었다는 비판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한 그런 사람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이 반세기가 지나버린 지금 이 시점에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 책에서 분신인 영채를 통해서 그렇게 절실히 찾고자 했던 구원의 길인 "사랑"에 대한 그녀의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은 하루하루 관습과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체념하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반문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자신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했지만 당신들만은 더 늦기 전에 자신을 구원하라고 종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전혜린"이 나에게 묻는다. 십육년만에 다시 만난 너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느냐고. 너의 삶을 구원해줄 그 무엇을 찾았냐고. 오랫만에 전혜린이 내게 던지는 물음을 "화두(話頭)" 삼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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