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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로얄 ㅣ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
이언 플레밍 지음, 홍성영 옮김 / 뿔(웅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007 제임스 본드”
냉전 시대의 산물인 “스파이” - 지난 2010년 7월 러시아 미녀 스파이 “안나 채프먼”이 아직도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스파이가 꼭 냉전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 의 대명사이자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런 인물일 것이다. 1962년 007 시리즈 제 1 탄 <살인번호>를 시작으로 2011년 11월 개봉 예정이라는 제 23 탄 <Bond 23(제목 미정)>에 이르는 등 영화사상 최장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으며, 주인공 제임스 본드 역 만 해도 총 6 명 - 그 중 “숀 코네리”와 “로져 무어”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 에 이르고, 이 영화를 거쳐 간 감독 또한 10 명에 달하는, 모든 것이 화제꺼리인 그런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나도 007 시리즈를 꽤나 많이 본 편인데, 쫓고 쫓기는 추격신과 화려한 액션, 늘 화제가 되는 007만의 특수 무기, 그리고 속칭 “본드걸”이라 칭하는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로맨스 - 솔직히 청소년 시절에는 본드걸 때문에 이 영화를 챙겨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등 볼거리가 풍성해 어느 편을 봐도 평균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는 그런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들에 “이언 플레밍(Ian L. Fleming)”이라는 작가가 쓴 원작(原作) 소설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알긴 알았지만 영화가 주는 재미가 워낙 강렬했던 탓인지 원작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 “찰턴 헤스턴” 주연의 명작 영화 <벤허(Benhur)(1959)>를 “루 웰리스(Lew Wallace)"의 원작 소설(1880)로 읽어본 사람들은 드문 것처럼 말이다 -. 그런데 이번에 007의 원작소설을 읽을 기회를 만났다. 바로 007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007 카지노 로얄(원제 Casino Royale / 뿔 / 2011년 6월)>이 바로 그 책이다.
영국 국방성 부속 비밀 정보부 MI6은 프랑스 저항 세력의 요주의 인물이자, 알자스 지방 중공업 및 운송업의 좌익계 노동조합 비밀 재무관인 “르쉬프르” 제거 - 직접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르쉬프르와 카지노 게임을 벌여 그의 돈을 모두 따서 소련 스파이인 “스메르시”가 그를 처단케 하는 일종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전략을 쓴다 - 를 위해 유럽에서 가장 큰 판돈이 걸린 도박판이 벌어질 예정인 프랑스 로얄의 카지노에 비밀 첩보원 007를 자메이카 굴지의 무역 회사 차페리의 부유한 사업가로 위장하여 파견한다. 영국, 프랑스, 미국 , 소비에트 등 동서 진영의 첩보 기관들의 주목 하에 작전은 수행되고, 007은 폭탄 테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미녀 파트너 “베스퍼 그린”과 함께 르쉬프르의 돈을 모두 따는 데 성공하지만 르쉬프르 일당은 베스퍼와 함께 본드를 납치해 고문을 가한다. 일촉 즉발의 위기 속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조력자(助力者)인 “스메르시”가 나타나 르쉬프르 일당을 제거하고, 본드와 베스퍼는 목숨을 구하게 된다. 임무를 완수하고 밀월여행(蜜月旅行)을 떠난 본드와 베스퍼, 그런데 전혀 의외의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007 카지노 로얄>은 “데이비드 니븐” 주연으로 1967년에 영화화 - 정식 시리즈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한다 - 되었고, 2006년 제6대 제임스 본드인 “대니얼 크레이그” 주연으로 만들어진, 즉 두 번 영화화된 이야기라고 한다. 두 영화 모두 보지 못했던 터라 이번 책이 처음 본 셈인데, 그동안 영화를 통해서 알고 있던 007과는 다른 모습에 당황스럽기까지 한 그런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 속 제임스 본드는 모든 여자들이 한눈에 반할 멋진 외모에 온갖 특수 무기를 장착하고, 멋진 추격신과 함께 악당들을 한 번에 제압하는 그런 호쾌한 액션을 펼치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 책에서 제임스 본드는 갑작스런 폭탄 테러에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나, 카지노 도박 대결 - 책에서는 도박 장면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카지노 게임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영 이해가 안되는 그런 장면들이었다 - 에서도 판돈을 날리고는 망연자실해 있다가 미국 첩보국의 자금 지원(?)으로 간신히 만회하고, 르쉬프르 일당에게 납치되는 베스퍼를 구하기 위해 007 대표 장면인 자동차 추격신을 벌이다가 적의 공격으로 차량이 전복되어 사로 잡혀 버리질 않나, 적들로부터도 자신의 힘으로 멋지게 탈출하는 게 아니라 소련 스파이 스메르시 때문에 구사일생(九死一生)하게 되는 어딘지 모르게 허약한 모습마저 연출하고 있다. 다만 이데올로기에 따라 영웅과 악당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논리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천하의 바람둥이일 것 같은 그가 미녀 파트너가 업무에 방해가 될 것 같아 경계하는 모습 - 물론 결말에 이르러서는 베스퍼와 사랑에 빠지는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긴 한다 - 들은 색다른 재미를 느껴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왠지 아쉬움이 더 앞서는 그런 책이었다. 아직 007이라는 인물이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첫 작품 - 유명 작가들도 첫 작품부터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는 예가 드물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 이다 보니, 본격적인 스릴과 재미는 권수를 거듭하면서 점차 완성되는 그런 작품일 수 도 있었는데, 너무 영화의 이미지를 이 책에 대입하여 보려고 하니 아무래도 무리한 면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영화 이상의 재미를 느껴볼 수 없었지만 007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으로서는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소설이었다. 이 작품 외에도 원작 소설들이 여럿 출간되었는데, 다른 작품들에서는 007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지, 영화와는 다른 007을 만나보는 색다른 재미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