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미모자를 그렸나 - 손미나의 로드 무비 fiction
손미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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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이곳저곳 화제의 소식을 전하던 방송 프로그램인 “세계는 지금” 방송 진행자였던 아나운서 "손미나"씨. 방송을 잠시 쉬고 남미와 스페인의 여행 기록을 담은 “에세이”를 펴내 작가로도 잘 알려진 그녀의 작품을 검색해보니 서어서문학과 전공을 살린 번역 작품과 직접 쓰거나 참여한 책 포함해 총 일곱 권이나 자신의 이름을 단 작품이 검색된다(YES24 기준).아나운서로서 언변(言辯) 뿐만 아니라 글솜씨 또한 그에 못지않은 다재다능한 분으로 짐작이 되는데, 아쉽게도 그녀의 작품을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이번에 그녀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웅진지식하우스/2011년 7월)>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파리에선 누구나 사랑을 하고, 프로방스에선 누구나 꽃을 밟는다”라는 문구와 함께 제목에 등장한 “미모자”로 짐작되는 노란 꽃으로 장식된 표지가 인상적인 이 책, 우선 "미모자"라는 꽃은 처음 들어보는 꽃 이름이라 다시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아마도 1월 26일 탄생화(誕生花)인 “미모사(Humble Plant)”를 칭하는 말인 것 같은데, 작품이 프랑스 배경이니 "미모자"는 "미모사"의 프랑스어식 발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방송을 그만 둔 이유가 출판사로부터 1년에 한 권씩 꼭 책을 출간해보자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 “이 여잔 소설가가 될 수 밖에 없는 영혼이다”라는 김탁환 작가의 평처럼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기까지 하면서 의욕적으로 집필한 첫 장편 소설이자 우리나라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로드 무비 픽션(Road Movie Fiction)인 이번 작품, 여러모로 기대가 되는 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프랑스 항구도시 마르세유에서 아버지를 도우며 살아가는 스무살 청년 “테오”, 언젠가는 더 넓은 세상에 뛰어들어 진짜 삶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른 채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원망스러워하는 그를 눈여겨 본 파리에서 온 영화제작자 “피에르”가 그에게 파리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해온다. 그와 함께 마르세유를 떠나 파리에 온 테오는 어느 대학 크로키 수업의 누드 모델 일을 시작하고, 2년 반 후 처음 그 일을 소개한 여교수로부터 새로 부임한 초빙 교수의 전속 모델일을 제안해오고, 승낙한 테오는 학교에 방문했다가 한국에서 온 여인 “레아 최(최정희)”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자신을 그린다는 초빙 교수가 바로 “레아 최”임을 알게 되었지만 누드모델이라고 밝히지 못하고 헤어져 온 테오는 그녀와의 첫만남을 못내 잊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배회하고 다니다가 우연찮게 마르세유 억양의 배우를 구한다는 연극 오디션 공고를 보고 응모하게 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갑자기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된 배우를 대신한 대역 배우였지만 테오의 연극은 흥행에 성공하고, 피날레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대기실에 돌아온 테오에게 스태프가 쪽지를 전해온다. 바로 그의 공연을 관람한 레아 최의 메모였던 것이다. 그녀를 찾아 급히 극장 밖으로 나섰지만 그녀를 놓치고 난 테오에게 쪽지를 가져다 준 스태프가 레아의 사진이 들어 있는 프랑스 유명 연극 동호회 “아리스토텔레스”의 회원을 가져오고 테오는 극단의 캐스팅 및 연출 총책임자인 파트리크에게 부탁해 “아리스토텔레스” 모임에 참석해 꿈에 그리던 레아 최와 조우하게 된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음에도 쉽게 고백하지 못했던 테오는 콩코르드 광장의 관람차에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 또한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면서 마침내 둘의 열정적인 사랑은 시작된다. 행복한 시절을 보내던 중 한국에 잠시 다녀오겠다던 레아가 그만 공항에서 경찰에게 체포되는 일이 발생한다. 한국 대기업 회장인 레아의 아버지가 레아도 모르게 레아의 짐 속에 감추어 프랑스 명화를 밀반입하려다가 그만 발각되어 잡힌 것. 레아의 아버지는 테오에게 자신의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하지만 테오는 단호히 거부하고 레아를 구해낼 방법을 강구한다. 잠시 보석으로 풀려난 레아는 스페인 화가 “달리”가 살았던 카다케스라는 도시에서 실종되고 사건은 교통사고 사망 사건으로 서둘러 종결되고야 만다. 

그로부터 1년 후 여성 대필(代筆) 작가인 “장미”에게 K그룹 최성렬 회장 딸이면서 그림을 그리던 여자인 “최정희(레아 최)”의 유고(遺稿)를 완성해달라는 제안이 들어오고, 장미는 이번 한번만이라고 마음 먹고 자료 조사를 위해 파리로 날아온다. 그런데 그만 리옹 기차역 식당 입구 짐 보관소에서 최정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가방과 똑같은 형태인 프랑스 남자 의사 “로베르 브누아”의 가방과 바뀌는 사고를 당하고, 그에 집까지 쳐들어와 가방을 내놓으라고 하지만 이미 장미의 가방은 로베르의 친구에게 보내져 2주 후에나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그만 상심하고 만다. 로베르의 집 거실에 걸려 있는, 흐드러지게 핀 노란 꽃나무로 뒤덮인 마을의 모습을 그린 유화 두 점을 본 장미는 문득 자신이 찾고 있는 테오의 편지 글 귀를 떠올리고 로베르에게서 그 그림이 “봄레미모자”라는 마을에서 산 그림이라는 것과 그림의 이니셜이 바로 레아 최의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고 로베르와 함께 그리로 향하게 된다. 테오와 레아 최를 향한 로베르와 장미의 여정은 봄레미모자와 코트다쥐르 해안의 포르크로 섬, 파리, 런던으로 계속 이어지고 우연찮게 만난 로베르와 장미 둘 사이에서 사랑이 싹트게 된다. 마침내 다시 봄레미모자로 온 둘은 테오일 것으로 짐작되는 한남자인 “뱅상 토랑트”를 만나게 된다.

이야기는 이처럼 테오와 레아의 사랑, 그리고 그 둘을 찾아나서는 로베르와 장미의 여정, 이렇게 두 쌍의 연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려낸 이 책은 서로 다른 시간대인 “장미”와 “테오”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소개되는 형식으로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지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원래 이렇게 교차되는 형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지라 - 한 이야기에 집중하려 하면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어 이야기 흐름에 혼란스러워서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 아예 앞선 시간대인 ‘테오“ 이야기를 먼저 찾아 읽고 그리고 ”장미“ 이야기를 따로 찾아 읽었다. 사실 남녀간의 사랑을 그린 ”로맨스“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지라 이 소설이 첫 작품이란 것을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체로 두 쌍의 연인들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려냈지만 아쉽게도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녀의 작품이 감동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감성이 무뎌진 내 자신을 탓해야 할 것 같다. 다만 프랑스 이곳저곳과 런던에까지 이어지는 이국적인 풍경이 머릿 속에 시각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점 만큼은 참 인상적이어서 이 책이 드라마나 영화로 영상화가 된다면 이국적인 풍경과 매력적인 등장인물 - 프랑스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로맨틱한 프랑스 남성 특유의 매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테오와 로베르에 푹 빠져들 여성 독자들이 제법 많을 듯 하다 - 로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지만 글 자체로만 보면 충분히 “성공적인” 첫 데뷔작을 써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소설가” 손미나 작가, “이번만큼 글쓰는 일이 고통스러운 적도, 신난 적도 없었다”는 그녀의 고백처럼 앞으로도 더 멋진 소설을 우리에게 선보여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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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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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추리작가협회상, 캐나다추리작가협회상, 영미서점협회 딜리스상, 앤서니상, 배리상 등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다는 “루이즈 페니”의 데뷔작 <스틸 라이프(원제 Still Life/피니스아프리카에/2011년 6월)>의 출판사 소개글 중 “영국 정통 후더닛 미스터리의 거장 애거서 크리스티의 계보를 이었다”는 문구에서 추리소설 매니아를 자처하는 나로서도 “후더닛”이라는 단어가 영 낯설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후더닛(whodunit)”란 “내용과 줄거리가 범죄와 그 해결에 주력하는 유형의 미스터리 영화나 프로그램, 소설 등에 대한 속칭. ‘Who has done it?’에서 나옴(네이버에서 발췌)”라는 뜻이라고 한다. 탐정이나 형사가 범인을 추리해내는 것이 고전 추리소설의 원형(原形) - 범인을 먼저 독자에게 밝히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콜롬보 형사>나 작품 내에 또 다른 작품을 교차 배치하거나 시간 순서를 바꾸거나 해서 오인시키는 방법인 “서술 트릭”은 일종의 변형(變形), 심지어 추리 소설의 규칙을 위반한 반칙(反則)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 이라고 할 수 있으니 고전 스타일의 추리소설이라는 설명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데에만 급급해서 진상의 추적 과정이나 심지어 범인의 동기마저도 납득이 가지 않으면서 반전만을 추구하는 추리소설”이 아닌 정통 고전파 추리소설을 지향한다는 이 책, 오랜만에 애거서 크리스티류의 추리소설을 읽어보겠구나 하는 기대감에 책장을 펼쳐 들었다. 

큰 도로는 물론 작은 도로에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캐나다 어떤 관광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마을 “스리 파인스”는 지난 25년 동안 단 한 번도 범죄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는, 현관문을 잠근다면 기껏해야 수확 철에 이웃 사람들이 주키니(오이 비슷한 서양 호박)를 몰래 가져다 놓지 못하게 하려는 것 정도로 범죄가 없는 그런 한적한 마을이다. 그런데 추수 감사절 하루 전인 일요일 이른 아침 마을 단풍나무 숲에서 네 활개를 펴고 누워 있는 76세의 노부인 “제인 닐”의 변사체가 발견된다. 사인은 사냥용 화살의 관통에 의한 죽음으로 밝혀지는데 수사를 맡게 된 퀘벡 경찰청의 아르망 가마슈 경감은 무성한 숲인지라 사슴으로 오인한 실수인지 아니면 계획 살인인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수사에 나선다. 그러던 중 사건 발생 며칠 전 오리똥 거름을 뿌려대는 세 사내아이들을 제인이 혼을 냈다는 사실을 듣고 한 아이 집을 방문하여 조사를 하던 중 화살과 피 묻은 옷을 불태우려는 아이 부모들의 수상쩍은 행동과 아버지가 제인을 죽였다는 아이의 증언을 듣고 아이의 아버지를 체포한다. 그러나 제인을 죽인 화살이 숲에서 발견되면서 아이의 아버지는 풀려나게 되고, 사건은 단순 오인사가 아닌 계획적인 살인사건으로 전환되어 수사를 계속한다. 사건 발생일로부터 일주일 후 미술 전시회에 제인 닐의 그림인 <박람회의 날>이 전시되는데, 사전에 그 그림을 심사했던 심사위원이자 제인 닐의 절친한 이웃인 "클라라“와 남편 ”피터“는 그림이 어딘가 달라졌음을 감지하게 된다. 그날 밤 범인의 정체를 짐작한 클라라는 범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위험에 처하게 되고, 일촉즉발의 순간 가마슈 경감 일행이 범인의 집에 들이닥치게 된다. 

내가 그동안 너무 자극적인 추리소설에 입맛이 길들여진 탓일까? 홍보문구 말대로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을 읽는 듯한 고전 추리소설 재미를 맛볼 수 는 있지만 그 맛이 너무 밋밋하게 느껴졌다. 이 책에서의 살인사건은 책 첫 페이지부터 등장하는 제인 닐 살인사건이 전부 - 물론 마지막에서 범인이 제인 닐을 살해하기 이전에 다른 살인사건을 저지른 것이 밝혀지지만 읽는 동안 두 살인사건의 연관성을 전혀 느낄 수 가 없었다 - 이다. 그렇다고 살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절묘한 트릭을 통한 독자들과의 두뇌싸움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이 책에서 탐정격인 가마슈 경감 또한 천재적인 두뇌 솜씨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탐문과 증거 수집을 통해서 범인을 밝혀내는 “형사물”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 수사 과정이 못내 지루해서 읽는 데 꽤나 곤혹스러웠다. 몇 몇 설정에서는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은데, 처음에는 제인 닐을 죽게 한 화살을 범인이 의도적으로 감춘 것으로 오인했다가 나중에야 사건 현장 근처에서 발견하여 사건이 급반전하는 점이나 살인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던 제인 닐의 그림인 <박람회의 날>도 그림 속의 등장인물이 마을 실제 인물들을 그렸다는 단서를 미리 제공하지 않고 나중에 이르러서야 그게 결정적인 단서로 등장하는 점- 그렇다 보니 독자들이 범인을 미리 예측해볼 여지가 전혀 없다 - , 또한 자신의 얼굴을 바꿔 그린다는 설정 - 이미 클라라나 피터, 다른 심사위원들이 그림을 먼저 봤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림을 없애거나 불태우는 것이 좀더 상식적인 대응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렇게 한다면 범인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시키는 위험이 있었지만 어차피 그림을 변경해서 정체가 노출되는 것과 무슨 차이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었다.

밋밋하게까지 느껴지는 정적인 추리소설에는 그다지 감흥을 못 느끼는 것은 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워낙 극한 재미와 반전을 선보이는 “자극적인” 추리소설에 길들여져 섬세한 미각을 잃어버린 내 입맛, 즉 독서 취향을 탓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오랜만에 고전 추리소설의 풍취를 맘껏 맛볼 수 있었던 점만큼은 좋았다고 평가하고 싶다. 가마슈 경감 시리즈가 7권까지 나왔다니 이 시리즈에 대한 평가는 다른 책들에서의 활약을 좀 더 지켜본 후로 미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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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홀 - 도시를 삼키는 거대한 구멍
이재익 지음 / 황소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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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31일 과테말라의 수도 과테말라시티 중심가에 땅이 둥그런 형태로 꺼지는 일명 “싱크홀(Sink Hole)" 현상이 일어나 세계 토픽에 오른 적이 있었다. 지름 30 m, 깊이 60 m의 비교적 작은 규모였고, 건물 밀집 지역이 아닌 외곽 주택가에서 발생해 사망자는 1명에 그쳤다고 한다. 이러한 싱크홀 현상이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나라 전남 무안에서 지난 13년 동안 19차례의 싱크홀이 발생했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고층 빌딩이 즐비한 강남 한복판에, 그것도 직경이 수백 미터에 달하고 깊이 또한 수백 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싱크홀 현상이 일어난다면? 수십 채의 건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강남 대로를 달리는 수십 수백 대의 자동차 또한 사라지는, 종말론적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이재익 작가의 신작 <싱크홀; 도시를 삼키는 거대한 구멍(황소북스/2011년 7월)>는 바로 이런 끔찍한 상상을 소설로 구현해낸 “재난” 소설이다.

 



히말라야 14좌 중 11개의 산을 정복한 등산가인 “김혁”, 12번째 도전한 “낭가파르바트” 등반에서 그만 자신의 처남 “영준”을 사고로 잃고 실의에 빠져 연일 술에 절어 살고, 아내와도 별거하기에 이른다. 대한민국 사채 시장에서 제일 큰 대부업체 대표이자 코스닥 시장 기업 사냥의 귀재로 불리우는 “양미자” 회장의 아들로 정형외과 의사 “동호”는 자신의 어린 환자를 위해 꽃을 사러 꽃집 <Belle> - 김혁의 아내가 운영하는 꽃집이다 - 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일하는 아가씨 “민주”를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지만 민주의 오해로 쉽게 다가서지 못하다가, 핸드폰이 바뀌는 해프닝 끝에 오해가 풀리면서 서로 사귀기로 결심한다. 양회장의 강권에 문화재단을 맡기로 결심한 동호는 양 회장이 건설 중인 123층의 초고층 빌딩인 “시저스 타워” 자신의 사무실에서 민주와 하룻밤 사랑을 나눈다. 드디어 시저스 타워 개장식날, 김혁의 아내는 타워 지하 상가에 <Belle>를 이전 오픈하게 되고, 동호는 개장식 테이프 커팅에 참석하게 된다. 화려한 개장식이 펼쳐진 그날 자정, 123층 거대 빌딩이 한순간에 땅속으로 꺼져 버리는 전대미문의 재난, 즉 직경 180미터, 깊이 700~1000 미터에 이르는 “싱크홀”이 일어난다. 추가 붕괴 우려로 구조 활동이 지지부진해지자 김혁이 땅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신의 아내와 딸을 구조하기 위해 나서고, 여기 저기 자원 봉사자들이 합세하여 마침내 “민간 구조대”가 결성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추가 사고로 민간 구조대마저 파견 불가로 결정되자 김혁은 낭가파르바트 등반 동료이자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 등반가 “소희”와 함께 비밀리에 구조에 나서고, 여기에 같이 매몰된 연인 “민주”를 구하기 위해 동호 또한 합류한다. 폭우가 쏟아져 추가 붕괴가 우려되는 일촉즉발의 상황, 김혁, 소희, 동호는 지옥의 입구처럼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싱크홀의 구멍 속으로 내려간다.



 

우리 문학계에서는 보기 드문 소재인 “싱크홀”이라는 대재난을 소재로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대재난에 귀결시킨 이 소설은 전작들 - 지난 일년 동안 만난 이재익 작가 작품이 <카시오페아 공주>, <압구정소년들>, <서울대 야구부의 영광>, <심야버스 괴담>, 그리고 이 작품까지 다섯 권에 이른다 - 에서 보여준 이재익 작가 특유의 군더더기 없이 숨가쁘게 몰아치는 빠른 전개와 구성으로 책을 한번 손에 잡으면 도저히 놓을 수 없는 몰입감과 재미뿐만 아니라,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가슴 찡하게 울리는 감동까지 선사하는, “이재익 작품은 재미있다”라는 것을 기대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 “재난 소설”로써는 몇가지 아쉬움이 든다. 재난 소설이나 영화의 공식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도 없는 재난에 대한 공포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재난을 극복하고 수습하는 과정,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인간애, 즉 감동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123층의 거대 빌딩을 한순간에 삼켜 버리는 “싱크홀”은 재난의 규모나 공포 면에서 책 표지 문구에서처럼 가히 “블록버스터” 급이라 할 수 있겠고, 마지막 장면 또한 감동적으로 그려 공식에서 두 가지 는 충족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재난이 발생하면 정부 관계 부처가 소집되어 구조 또는 수습계획들이 발표되고, 본격적인 구조 활동이 진행되면서 여러 가지 안타까운 상황이나 기적적인 상황들이 전개되며, 이런 과정이 진행되면서 스릴과 긴장감이 고조되고 심각한 재난 상황에 대한 가상 체험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바로 재난 소설의 재미일 텐 데, 이런 대재앙을 등장인물에 한정시켜 진행하다 보니 그런 재난 상황의 단계적 전개 과정이 주는 재미와 긴장감을 제대로 느낄 수 가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든다. 하나 더 아쉬운 점을 들자면 사고 현장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성폭행하는 “연쇄살인범”의 존재다. 물론 소설적인 재미와 스릴을 위한 장치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실패 - 김혁의 아내나 민주를 위협하는 존재이지만 그다지 활약(?)을 펼치지 못한다 - 한 뜬금없는 존재로만 느껴졌다. 차라리 연쇄살인범을 처음부터 등장시켜 갈등의 축으로 부각시켰었으면, 또한 특수 부대원을 만나 바로 꼬리를 내려버리고 결국 뒤에서 암습하는 정도의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고립된 공간에서의 악마성과 잔혹성, 공포감 등을 좀 더 강조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물론 이 책이 스릴러 소설은 아니지만 말이다.



 

몇 가지 아쉬움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이 책, 서울 한복판에 일어난 대재난 “싱크홀”이라는 독특한 소재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감동적인 사랑이 잘 어우러진 재미있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이재익 작가가 초대하는 대재난의 현장을 들여 보다 보면 어느새 한여름의 무더위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단 그 구멍을 너무 가까이 들여다 보지 말기를. 어떤 존재가 당신을 그 구멍으로 확 끌어들이지 모르니 말이다.  상상만으로도 으스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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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전 - 모두 나를 칼이라 했다
박애진 지음 / 페이퍼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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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간적인 도술(道術)에 능한 주인공의 도술적인 행각을 통하여 줄거리를 전개시키는 소설(小說)”인 “도술소설(道術小說)(네이버 발췌)” 이라 일컫는 고전(古傳) 소설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홍길동전(洪吉童傳)>, <전우치전(田禹治傳)>, <박씨전(朴氏傳)>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웃 중국과 일본에도 <봉신연의(封神演義)>나 <서유기(西遊記)>, “환주루주(還珠樓主)”의 <촉산검협전(蜀山劍俠傳)>, <음양사(陰陽師)>, <백귀야행(百鬼夜行)>등 많은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 서양(西洋)에는 “마법(魔法,Magic)"이 있다면 동양(東洋) -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은 “한중일(韓中日)”, 즉 동아시아만 해당되겠지만 - 에는 “도술(道術)”이 있다고나 할까? 최근 장르 문학계에서 판타지 소설과 더불어 양대 장르라 할 수 있는 “무협소설(武俠小說)”에도 이런 “도술소설”들의 전통이 이어져 왔겠지만 무협소설계를 은퇴(?)한지 오래라 기억에 남는 작품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데, 최근에 멋진 도술 소설 한 편을 만났다. 바로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편집장으로 이미 범상치 않은 비평과 글솜씨를 선보였던 작가 “박애진”의 첫 장편소설인 <지우전;모두 나를 칼이라 했다(地雨傳/페이퍼하우스/2011년 6월)>이 바로 그 책이다. 

시대를 알 수 없는 과거 - 조선시대 쯤으로 짐작되지만 - 어느 왕조시절, “베라”는 명령 한마디면 모든 존재의 숨을 가르는, “칼” 그 자체로 키워진 소년 “명”이 있었다. 반란군이었던 허영두의 사병들이 숨어있던 보봉산 산채를 토벌하라는 어명으로 출동했던 병사 백오십여명이 어이없게도 “명”에 의해 모두 베어지자, 임금은 명과 함께 명을 보호하던 “정태우”를 자신의 휘하로 거둔다. 오대산 산채에 숨어 있는 허영두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명과 정태우, 그리고 강준찬 장군을 파견하지만, 명은 산채에 몸담고 있던 자신의 친형을 만나고 산채에 투항한다. 자신을 “칼”로써가 아니라 혈육으로 대하는 형에게서 난생 처음 따뜻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형 또한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는 것을 알게 된 명은 일대 혼란을 겪게 되면서 자신을 막아서는 수많은 병사들 뿐만 아니라 당대 제일의 도사(道師) 손까지 베어버리고는 혼란 속에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3류 도사를 만나 인성(人性)을 회복하고는 땅(地)을 피(血)가 아닌 비(雨)로 적시라는 뜻으로 “지우(地雨)”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명은 그의 제자가 되어 도술을 닦게 된다. 그로부터 몇 십 년 후 임금이 애지중지하는 공주가 도사 “지우”에게 겁간을 당해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궁궐이 발칵 뒤집히고, 세자(世子)의 호위 무사인 “춘검(春劍)의 수장 “연아”는 명을 받아 도사들과 함께 “지우”를 잡아 나서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지우”를 압송해 궁궐로 데려오지만 지우의 소행이 아님이 밝혀지면서 지우는 풀려나게 된다. 세자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지만, 신분의 차이로 그저 호위무사로 세자의 곁에 머물 수밖에 없는 서글픈 사랑에 괴로워하던 연아는 자유로운 지우에게 서서히 끌리게 된다. 그러던 중 하늘 사슴을 잡아오라는 임금의 명에 다시 한번 도사들과 나선 연아는 지우를 다시 만나게 되고, 하늘 사슴과 그를 지키는 괴수의 딱한 사정을 알고는 도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늘 사슴을 풀어주고는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지우와 연아의 처사에 격분한 도사들은 자신의 스승에게 지우를 고자질하고, 지우가 몇 십 년 전 자신의 손을 베었던 그 소년이었음 - 이 때문에 몇 십 년 동안 스승은 은거할 수 밖에 없었고, 손에는 환술(幻術)로도 감출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 을 알게 된 스승은 도사들을 이끌고 해묵은 복수를 시도하고, 지우를 구해달라며 매달리는 지우 스승을 만난 연아는 지우를 구하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대 격전을 벌인다. 
 

책에는 서두에서 언급했던 도술 소설 특유의 장치(Contents)들이 잔뜩 등장한다. 이름을 불러 대답하면 갇히게 되는, <서유기>에도 등장했던 동해용왕의 신물(神物)인 호리병, 말 그대로 땅을 접어 거리를 줄여 공간을 이동하는 술법인 “축지법(縮地法)”, 온갖 사물로 변신하는 “둔갑술(遁甲術)”, 역시 <서유기>의 “근두운(觔斗雲)”을 연상시키는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술법 - 그저 하늘을 나는 수준이 아니라 대기권 밖까지 나가서 지구를 바라다 보는 그런 수준까지 묘사된다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편에 나오는 거대한 새 “붕(鵬)”과 “용(龍)”, 그리고 일종의 “진법(陣法)”으로 나무, 돌 등 자연 사물을 이용해 공간과 시간을 왜곡하는 “막(幕)”을 설치하는 술법, 또한 최근 영화 <전우치전>에서도 등장하는, 도술계에서는 신선(神仙) 쯤으로 여겨지고 있는 “화담(花潭)” - 작품에서는 호(號)만 등장할 뿐 “서경덕 (徐敬德)”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 등등 온갖 기이한 도술들과 인물들을 선보인다. 여기에 수십 수백명을 단숨에 베어버리는 검술과 도사들도 파훼하지 못하는 지우의 막을 한 번에 베어내는 연아의 검기(劍氣), 풀잎을 밟고 뛰어가는 “초상비(草上飛)” 등 무협 소설적 장치 또한 사용하고 있어 무술과 도술이 어우러진 “기환무협(奇幻武俠)”의 장르적 특징을 충실히 구현해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협과 도술을 장치로 하여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감정이 배제된 채 남을 죽이는 “칼”로만 살아온 “명”이 자신의 혈육인 형을 만나 잠시나마 인성(人性)을 회복하지만 이내 인간들의 욕심에 다시 피바람을 몰고 오는 장면이나 인간의 욕심에 그 누구보다도 초탈해야 할 도사들이 세상의 명리(名利)를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 등을 통해서 작가는 어쩌면 인간이라는 허울 아래 온갖 잔혹한 일을 저지르는 인간의 추악함과 함께 결국 바람처럼 흩어져 버리고 마는 인생의 “덧없음(虛無)”을 이야기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러면서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지만 결국 인성의 회복뿐만 아니라 마침내 “도(道)”를 깨우쳐 죄업과 인간의 굴레마저 벗어버린 “지우”와 세자와의 이뤄질 수 없는 애달픈 사랑에 얽매이다가 마침내 그 사랑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진 “연아”를 통해서는 세속의 명리와 가치관을 초월한 “내려놓음”의 경지를 말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삶의 기쁨을 알수록 고통도 커가는” 이라는 마지막 결전장에 등장한 화담의 일갈(一喝)이 어쩌면 삶은 기쁨과 고통이 함께 하는 “고해(苦海)”일 수 밖에 없으며, 삶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때야 비로소 그런 기쁨과 고통을 훌훌 벗어버리는 일종의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로 들려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도술이 등장하는 소설에서 불교식 가르침을 떠올리다니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 해석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간만에 고전 소설의 흥취와 품격에 흠뻑 취할 수 있었던 멋진 소설을 만났다. 이 작품을 무협식으로 표현하자면 이제 검(劍)에 검기(劍氣)를 두르는 정도라고 할까? 그 정도임에도 수년간 벼르고 벼른 작가의 시퍼런 검기를 두른 칼에 가슴을 단번에 베어낸 듯한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으니, 앞으로 “이기어검(以氣御劍)”이나 “신검합일(身劍合一)”의 초절정 수준에 오른다면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의 재미와 감동을 선보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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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로얄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
이언 플레밍 지음, 홍성영 옮김 / 뿔(웅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007 제임스 본드”

냉전 시대의 산물인 “스파이” - 지난 2010년 7월 러시아 미녀 스파이 “안나 채프먼”이 아직도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스파이가 꼭 냉전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 의 대명사이자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런 인물일 것이다. 1962년 007 시리즈 제 1 탄 <살인번호>를 시작으로 2011년 11월 개봉 예정이라는 제 23 탄 <Bond 23(제목 미정)>에 이르는 등 영화사상 최장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으며, 주인공 제임스 본드 역 만 해도 총 6 명 - 그 중 “숀 코네리”와 “로져 무어”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 에 이르고, 이 영화를 거쳐 간 감독 또한 10 명에 달하는, 모든 것이 화제꺼리인 그런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나도 007 시리즈를 꽤나 많이 본 편인데, 쫓고 쫓기는 추격신과 화려한 액션, 늘 화제가 되는 007만의 특수 무기, 그리고 속칭 “본드걸”이라 칭하는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로맨스 - 솔직히 청소년 시절에는 본드걸 때문에 이 영화를 챙겨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등 볼거리가 풍성해 어느 편을 봐도 평균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는 그런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들에 “이언 플레밍(Ian L. Fleming)”이라는 작가가 쓴 원작(原作) 소설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알긴 알았지만 영화가 주는 재미가 워낙 강렬했던 탓인지 원작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 “찰턴 헤스턴” 주연의 명작 영화 <벤허(Benhur)(1959)>를 “루 웰리스(Lew Wallace)"의 원작 소설(1880)로 읽어본 사람들은 드문 것처럼 말이다 -. 그런데 이번에 007의 원작소설을 읽을 기회를 만났다. 바로 007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007 카지노 로얄(원제 Casino Royale / 뿔 / 2011년 6월)>이 바로 그 책이다.

영국 국방성 부속 비밀 정보부 MI6은 프랑스 저항 세력의 요주의 인물이자, 알자스 지방 중공업 및 운송업의 좌익계 노동조합 비밀 재무관인 “르쉬프르” 제거 - 직접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르쉬프르와 카지노 게임을 벌여 그의 돈을 모두 따서 소련 스파이인 “스메르시”가 그를 처단케 하는 일종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전략을 쓴다 - 를 위해 유럽에서 가장 큰 판돈이 걸린 도박판이 벌어질 예정인 프랑스 로얄의 카지노에 비밀 첩보원 007를 자메이카 굴지의 무역 회사 차페리의 부유한 사업가로 위장하여 파견한다. 영국, 프랑스, 미국 , 소비에트 등 동서 진영의 첩보 기관들의 주목 하에 작전은 수행되고, 007은 폭탄 테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미녀 파트너 “베스퍼 그린”과 함께 르쉬프르의 돈을 모두 따는 데 성공하지만 르쉬프르 일당은 베스퍼와 함께 본드를 납치해 고문을 가한다. 일촉 즉발의 위기 속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조력자(助力者)인 “스메르시”가 나타나 르쉬프르 일당을 제거하고, 본드와 베스퍼는 목숨을 구하게 된다. 임무를 완수하고 밀월여행(蜜月旅行)을 떠난 본드와 베스퍼, 그런데 전혀 의외의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007 카지노 로얄>은 “데이비드 니븐” 주연으로 1967년에 영화화 - 정식 시리즈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한다 - 되었고, 2006년 제6대 제임스 본드인 “대니얼 크레이그” 주연으로 만들어진, 즉 두 번 영화화된 이야기라고 한다. 두 영화 모두 보지 못했던 터라 이번 책이 처음 본 셈인데, 그동안 영화를 통해서 알고 있던 007과는 다른 모습에 당황스럽기까지 한 그런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 속 제임스 본드는 모든 여자들이 한눈에 반할 멋진 외모에 온갖 특수 무기를 장착하고, 멋진 추격신과 함께 악당들을 한 번에 제압하는 그런 호쾌한 액션을 펼치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 책에서 제임스 본드는 갑작스런 폭탄 테러에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나, 카지노 도박 대결 - 책에서는 도박 장면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카지노 게임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영 이해가 안되는 그런 장면들이었다 - 에서도 판돈을 날리고는 망연자실해 있다가 미국 첩보국의 자금 지원(?)으로 간신히 만회하고, 르쉬프르 일당에게 납치되는 베스퍼를 구하기 위해 007 대표 장면인 자동차 추격신을 벌이다가 적의 공격으로 차량이 전복되어 사로 잡혀 버리질 않나, 적들로부터도 자신의 힘으로 멋지게 탈출하는 게 아니라 소련 스파이 스메르시 때문에 구사일생(九死一生)하게 되는 어딘지 모르게 허약한 모습마저 연출하고 있다. 다만 이데올로기에 따라 영웅과 악당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논리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천하의 바람둥이일 것 같은 그가 미녀 파트너가 업무에 방해가 될 것 같아 경계하는 모습 - 물론 결말에 이르러서는 베스퍼와 사랑에 빠지는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긴 한다 - 들은 색다른 재미를 느껴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왠지 아쉬움이 더 앞서는 그런 책이었다. 아직 007이라는 인물이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첫 작품 - 유명 작가들도 첫 작품부터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는 예가 드물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 이다 보니, 본격적인 스릴과 재미는 권수를 거듭하면서 점차 완성되는 그런 작품일 수 도 있었는데, 너무 영화의 이미지를 이 책에 대입하여 보려고 하니 아무래도 무리한 면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영화 이상의 재미를 느껴볼 수 없었지만 007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으로서는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소설이었다. 이 작품 외에도 원작 소설들이 여럿 출간되었는데, 다른 작품들에서는 007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지, 영화와는 다른 007을 만나보는 색다른 재미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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