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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처럼 비웃는 것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5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子不語 怪力亂神(論語 述而篇)
공자(孔子)께서는 괴이함(怪)이나 무력(力), 난동(亂), 귀신(神)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논어 제 6편 술이)
라는 말씀이나 ‘인간도 제대로 못 섬기는 데,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으며 삶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느냐’는 말씀처럼 “괴이(怪異)”는 일상의 삶과는 전혀 거리가 먼,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그저 공상꺼리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설이나 영화에서 “괴이” 만큼 흥미롭고 자극적인 소재 꺼리가 또 있을까? 여기에 추리 소설적인 밀실 트릭과 연쇄살인, 기막힌 반전까지 곁들인 “호러 미스터리”라면 공포와 추리소설 장르를 좋아하는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마치 “종합선물세트”를 만난 것 같은 기대를 절로 하게 만들 것이다. 본격 미스터리와 일본 민속학적 호러를 결합한 “미쓰다 신조(三津田 信三)”의 <산마처럼 불길한 것(원제 山魔の如き嗤うもの/비채/2011년 8월)>이 바로 종합선물세트 같은 그런 작품이라 하겠다. 그것도 포장만 요란하지 막상 먹을 꺼리가 없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그런 싸구려 세트가 아니라 어찌 내 입맛을 알았는지 입에 쩍쩍 달라붙는 그런 맛있는 것만 고르고 골라 담아낸 최고급 선물 세트 같은 거 말이다.
책은 자신의 고향 마을인 하도에 있는 삼산(三山)에 올라 예로부터 촌락에 전해지는 ‘성인 참배’를 하게 된 “고키 노부요시”의 원고에서 시작한다. 산림 지주 집안인 “고키” 가의 넷째 아들이었던 노부요시는 미뤄뒀던 성인 참배 의식을 치루기 위해 고향 마을로 돌아온다. 하룻동안 집 뒤편의 삼산(三山)에 있는 사당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이 의식이 그만 길을 잃는 바람에 인근의 금산(禁山) 부름산으로 들어가면서 하루를 묶는 일정으로 바뀌어 버린다. 길을 헤매다가 산 속에서 발견한 외딴 집을 발견한 노부요시는 하루 묵어가기를 청하는데, 그 집에는 인근 마을인 구마도의 “가스미”가 첫째 아들인 다쓰이치 가족이 살고 있었다. 어딘가 수상쩍은 가족들과 함께 하룻밤을 묵은 노부요시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다쓰이치 가족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침 식사를 하다 만듯 음식들만 놓여져 있고 문고리가 잠겨 있는 밀실 상태에서의 깜쪽같이 사람들만 사라져 버린 이 괴이한 현상에 놀라 뛰쳐나온 노부요시는 구마도의 또 다른 집안인 “리키리하”의 가주 “가지토리 리키히라”를 만나 설명하지만 아무도 이들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는 말에 다시 한번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이런 노부요시의 괴이한 경험을 담은 원고가 월간 추리 잡지 <서재의 시체>를 발간하는 출판사 “괴상사”로 보내져 오고 편집자 “소후에 시노”는 괴기소설 및 변격 탐정소설 작가이자 일본 각지를 여행하며 괴이담을 수집하고, 가는 곳마다 불가사의한 현상, 기묘한 일, 믿기지 않는 괴이와 마주쳐서는 해결까지 하는 독특한 탐정 “도조 겐야”에게 이 원고를 건넨다. 그런데 이 도조 겐야, 꽤나 특이하다. 괴이담을 수집하면서도 이야기로서 즐길 뿐 결코 해석하려 들지 않는, 그러면서 막상 사건을 맡게 되면 지벌이나 저주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 추리, 검증하는, 이런 검증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때야 비로소 괴이로 인정하는 그런 탐정이다. 이런 그의 성향 때문에 “괴이 수집가”, “반(反)탐정”으로까지 불리지만 최종적으로는 사건을 멋지게 해결해서 종종 탐정 의뢰까지 받는 그런 인물이다. 부름산에 존재한다는 “산마”라는 마물과 노부요시의 원고가 흥미롭긴 하지만 겐야는 자신처럼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있는 노부요시의 처지에 더 공감하게 된 도조는 이 괴이한 사건을 수사해보기로 결심하고 구마도의 리키히라를 찾아간다. 겐야는 리키히라와 마을 사람들을 통해 원래 명칭이 “금산(金山)”으로 실제 금이 발견되기도 했다는 “금이 나오는 산”. 부름산의 유래와 마물 “산마” 이야기, 그리고 구마도와 하도 가문들 이야기들을 수집하면서 수사를 이어나간다. 그러던 중 노부요시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던 산 속 외딴집에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출입문이 단단히 잠겨있는 밀실 상태에서 얼굴에 불(火)이 붙어 있는 상태인 시체는 그 지역 동요(童謠) 속 “백색지장님 오른다” 구절처럼 어딘가에 올라가는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시체는 가스미 가의 둘째 아들인 “다쓰이”로 밝혀지고, 겐야는 밀실 트릭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가 중요하다는 자신의 지론대로 밀실을 만든 이유에 집중해서 수사를 해나간다. 그런데 살인사건은 한 건으로 그치지 않고 가스미 가 아들들이 줄줄이 살해당하고, 겐야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던 리키히라까지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것도 엽기적이고 끔찍한 방법으로.
처음에는 책 읽는 진도(進度)가 꽤나 더뎠다. 20 여 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영 헷갈려서 첫 부분의 “주요 등장 인물”을 꽤나 자주 열어봐야 했고, 같은 동양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우리와는 정서적으로 다른 일본 특유의 토속 전설에 약간 거부감이 있었던 터라 낯설게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100 여 페이지에 달하는 고키 노부요시의 원고도 분위기는 공포스럽게 몰아가고 있지만 그다지 무섭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지루함마저 느껴졌다. 읽는 속도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 것은 괴짜 탐정 “도조 겐야”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불가사의한 현상, 즉 괴이(怪異)를 이성적으로 해결해낸다는, 그렇다고 모든 괴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지를 벗어나는 일은 괴이로 인정할 줄 안다는 설정이 꽤나 독특하고 색다른 재미와 함께 과연 노부요시의 원고에 등장하는 괴이한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지 절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인간의 이지만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그렇다고 안이하게 불가해한 현상을 불가해한 현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으로서 너무나도 한심하다.'
또한 공포도 겐야가 마을 사람들을 번갈아 만나 부름산에 얽힌 각종 괴담을 수집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우리의 “고려장(高麗葬)”을 연상케 하는 “기로전설(棄老傳說)”, 즉 부름산에서 산마(山魔)를 만나지만 그 산마가 바로 자신이 버린 어머니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내이야기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는 어머니 말씀대로 산을 내려오지만 결국 뒤돌아보는 사내의 눈에 산마가 된 수많은 여인들이 다닥다닥 붙어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는 대목에서는 일본 영화 <주온>의 한 장면이 연상되어 목덜미가 다 서늘해질 정도로 무서웠다. 또한 가스미 가 아들들이 구마도 지방 전래동요에 맞춰 하나씩 살해당하는 대목에서는 오래전 읽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의 공포스러움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읽는 내내 등골이 오싹해지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다. 도저히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미궁 속으로 빠져 버리는 사건들, 중간에 겐야가 정리하여 제시한 사건에 대한 의문점도 40여 가지가 넘을 정도로 의문투성이의 사건이 과연 어떻게 해결될까 싶어 자꾸만 뒷 페이지를 열게 만들 정도로 궁금해서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몰입하게 된다. 보통 추리소설을 읽게 되면 누가 범인일까 미리 예측해보기도 하는데, 이 책은 살인 사건이 거듭될 수 록 더 혼란스럽고 기괴해져 도저히 범인을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그래서 더 결말이 궁금해지는 그런 미스터리라 할 수 있겠다. 도대체 저 많은 의문거리를 어떻게 풀어낼까 혹 배가 산으로 가는 것처럼 엉뚱한 결말로 끝내는 것일까 하는 의심도 잠시 마지막에 모든 의문 하나하나에 해답을 제시하는 겐야의 추리 솜씨에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명쾌하게 결론 맺는다. 읽고 나서도 왠지 동의하기 어려운 그런 결말이 아닌 다른 생각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깔끔한 결말이 마치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던 어려운 수학 문제를 깔끔하게 풀어냈을 때의 그런 통쾌함이 느껴졌다고 할까? 이처럼 밀실살인과 연쇄 살인, 짐작하기 힘든 기막힌 플롯과 반전, 명쾌한 결말 등 완벽한 추리소설적 구성을 기본 얼개로 하면서도 상상하면 할 수 록 점점 더 무서워지는 - 늦은 밤에 읽어 결국 꿈에 산마가 나타나는 악몽을 꾸었다. 특히 수십 수백 명의 산마가 얼굴을 맞대고 나를 노려보는 끔찍한 악몽 말이다 - 공포를 절묘하게 결합한 이 책, 호러와 미스터리의 재미를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앞서 말한대로 최고급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었다.
다른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해서 서평들을 읽어 보니 대부분 호평인 것 보면 이 책에 대한 재미가 나만의 과장된 느낌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을 “요코미조 세이시”의 <킨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다는 분도 있는데, <킨타이치 코스케> 시리즈는 <삼수탑> 한 권 밖에 읽어보지 않아 나로서는 뭐라 판단할 수 가 없을 것 같다. 또한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기괴한 괴담들도 이면을 들여다 보면 인간의 이기심과 공포심이 만들어낸 한낱 거짓에 불과하다는, 어쩌면 이 책의 주제와 닮아 있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항설백물어>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나또한 최근 <속항설백물어(비채/2011년 7월)>을 읽었던 터라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 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두 작품을 비교하자면 비슷한 주제와 이야기 구조이지만 단편 모음인 <항설백물어>는 좀 더 다양한 사건들을 만나보는 재미가 있고, 이 책은 한 가지 사건 뿐이어서 다채로움은 없지만 좀 더 심도 있고 구체적인 사건 전개의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고 할까? 두 권 다 독특하고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어 우열을 가린다는 것이 의미 없지만 공포스러움과 추리 소설로서의 플롯과 반전의 구성은 <산마처럼 비웃는 것>에 점수를 더 주고 싶다.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