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는 누가 죽였나 황금펜 클럽 Goldpen Club Novel
이상우 지음 / 청어람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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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방영한 드라마 <공주의 남자(KBS, 2011)>에서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인 “세조(世祖)”의 딸(공주)과 “김종서(金宗瑞)” 장군의 아들의 서로 사랑한다는, 마치 조선시대 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키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꽤나 화제를 모았었다. 아무래도 <금계필담(錦溪筆談)>이라는 야담(野談)을 소재로 한 것이니 허구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아마도 드라마 속 이야기를 실재(實在) 사건이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정도의 허구야 역사인식과 해석에 있어 큰 무리가 없는 “재미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지만 몇몇 역사 드라마들은 역사 왜곡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니 앞으로는 모 개그 프로그램처럼 역사 드라마들도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오해하지 맙시다” 라는 경고 문구를 달아 놓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내가 이 드라마의 주요 배경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도 어린 시절 방영했던 드라마 <고운 님 여의옵고(MBC, 1980)>을 통해서였다. 당시 이 드라마 애청자이셨던 할머니께서 계유정난이 벌어지던 날 밤 좌의정 “김종서”가 수양대군 패거리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시면서 “저 놈 참 잘 죽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물론 주인공(세조)의 적은 무조건 나쁘다는 할머니의 편견일 수 도 있겠지만, 당시 김종서를 혁명의 걸림돌이자 부패 세력으로 설정했던 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 또한 당시에는 어린 소견으로 김종서 장군을 나쁜 사람으로, 심지어 세조에게 반기를 들었던 “사육신(死六臣)”들은 “매우” 나쁜 사람들로 여겼었다. 그 후로 학창 시절 국사 수업을 통해서, 또한 계유정난을 소재로 한 여러 편의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계유정난의 주인공인 세조를 어떤 시각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김종서 장군도 때로는 부패 수구 세력으로, 때로는 충절(忠節)의 화신(化身)으로 다르게 그려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에 김종서 장군을 “소설(小說)”로 다시 만났다. 바로 우리나라 추리소설 대표 중견 작가인 이상우 작가의 역사 소설 <김종서는 누가 죽였나(청어람/2012년 1월)>이 그 작품이다.

 

이 소설은 조선 전기 대표적 문신(文臣)이자 육진(六鎭) 개척의 장군으로도 유명했던 김종서 장군의 일대기라는 “역사적 사실(Fact)”에 장군과 가상의 인물인 여산적 “홍득희”와의 사랑이라는 허구(Fiction)를 가미한 “팩션(Faction)"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은 여진족과 조선인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던 함경도 국경 인근 사다노 마을에서 김종서와 홍득희의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문자 창제를 진행하고 있던 세종(世宗)의 명으로 국경 지방에서 여진족 문자 자료를 수집하던 김종서는 부모가 조선 병사들에 의해 참혹한 죽임을 당하는 현장에서 어린 두 남매를 구해내고 누나에게는 “홍득희”를. 남동생에게는 “홍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황해도에 출몰하는 산적을 토벌하기 위해 나선 김종서는 그 곳에서 홍득희 남매와 재회하게 된다. 산적 두목의 정체가 바로 홍득희였던 것. 이때부터 득희는 장군을 곁에서 보호하면서 여진족 토벌과 육진 개척을 돕게 되고 하룻밤 사랑을 나누어 아들까지 낳게 된다. 김종서를 아끼던 세종과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왕위에 오르지만 바로 어린 단종의 숙부들이자 조선은 임금의 장자(長子)인 “정룡(正龍)”이 아닌 지손(支孫)인 “방룡(傍龍)”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풍수지리설을 내세운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를 노린 암투가 더욱 치열해진다. 김종서는 선왕의 유훈을 받들어 단종을 힘써 보필하지만 두 대군들에게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눈에 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계유정난이 벌어지던 날, 득희 일행은 수양대군을 막아서서 치열한 접전 끝에 대군의 상투를 잘라내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지만, 이미 장군은 수양대군의 다른 무리들에 의해 큰 부상을 입게 된다. 다행히 목숨을 건져 집에서 피신한 김종서는 자신의 북방 세력을 동원하여 단종을 구해내려 하지만 그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그를 추격해온 수양대군 무리에게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김종서의 든든한 우군(友軍)이자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 여인이었던 득희는 김종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함께 다시 북방으로 향한다.

 

이 책, 홍득희가 가상의 인물이라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전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김종서라는 실제 인물과 홍득희라는 허구의 인물을 절묘하게 녹여낸 점을 가장 큰 장점이라고 꼽을 수 있겠다. 또한 세종의 명으로 잠잘 때를 빼놓고는 절대 활을 벗어놓지 않는 김종서의 고집스러움과 함께 오판으로 전투를 그르치는 실수, 여진족 족장과 호랑이 사냥 내기로 전쟁의 승부를 결정하는 무모함, 어린 임금을 지켜내려는 절절한 충심(忠心), 은인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득희와의 로맨스 등 김종서의 다양한 모습들을 통해 인물의 입체성을 적절히 살려낸 점도 탁월했으며, 여러 작품들에서 보여준 작가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명료하고 깔끔한 문체 또한 몰입도를 높여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몇 몇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우선 몇 몇 독자들도 지적했던 것처럼 역사 소설에 뜬금없이 “프리섹스”라는 현대 단어가 소제목으로 등장한 점은 큰 티가 될 수 있겠다. 물론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지나친 엽색(獵色)행각을 설명하는 단어로는 제격이겠지만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 것이다. 마치 사극에 핸드폰이 등장하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할까? 또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계유정난”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갈등 관계가 좀 더 극적이고 치밀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뻔히 예상할 수 있는 결말로 마무리된 점 또한 아쉬움이 든다. 기왕에 ‘팩션’ 추리 역사소설을 표방한 이상 역사적 사실에 얽매이지 않고 김종서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좀 더 촘촘하게 설계해서 의외의 반전(反轉)을 끌어냈으면 훨씬 재미있지 않았을까? 결국 이 책의 제목인 “김종서는 누가 죽였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수양대군이라는 뻔한 답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실제 그를 죽인 사람은 “양정(楊汀)”이라는 수양대군 휘하의 장수로 오래전 홍득희 부모를 죽인 악연(惡緣)을 끊지 못해서 결국 화를 불러왔다는 설정이 다소 의외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반전이라고 보기에는 약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이 책, 나에게는 지루하지 않고 단숨에 읽히는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특히 지난날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우리 추리소설계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보여준 작가의 이름과 작품을 기억하고 있는 올드 팬들에게는 그의 건재함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가운 그런 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멋진 소설들로 계속 만나뵐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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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래스팅 - 완결 이모탈 시리즈 6
앨리슨 노엘 지음, 김은경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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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시리즈의 마지막 권을 대할 때는 과연 어떻게 결말을 맺을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책 속 등장인물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게 된다. “앨리슨 노엘”의 이모탈(Immortal)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에버래스팅(원제 Everlasting/북폴리오/2011년 12월)>을 받아 들었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다. 두 주인공인 “에버”와 “데이먼”의 사랑이 어떻게 결말을 맺을까 하는 궁금증에 빨리 책을 읽고 싶다가도 이제 이 책을 끝으로 그들을 만날 수 없겠구나 하는 아쉬움에 쉬이 책장을 열어 읽지 못하고 말았다. 책읽기를 미룬다고 그런 아쉬움이 없어지지 않는 법, 결국 책을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고, 그 어느 시리즈보다 더 몰입되는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눈 길 돌릴 새 없이 단숨에 읽고야 말았다.

 

지난 5권인 <나이트스타>에서 적으로 돌아선 헤이븐과의 갈등, 데이먼의 감춰진 비밀이 들어나면서 혼란스러움에 데이먼과 주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에버의 심리, 그리고 새롭게 등장하는 의문의 인물 등 전권 들 보다도 얇은 분량 임에도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는, 마치 결말을 위해 이야기들을 응축시켜 놓은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데, 역시나 이번 6권인 <에버래스팅>에서 응축된 5권의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펼쳐지면서 그동안의 모든 의문과 갈등이 풀리게 된다. 에버는 과거의 여행을 통하여 그동안 자신들과 관계한 모든 사람들, 즉 드리나. 주드, 로만, 헤이븐 등과의 인연이 아주 오래된 인연의 업(業)에서 비롯되었으며, 과거의 생(生)과 인연이 계속 반복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자신의 전생이었던 “아델리나”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졌던 “알릭”이 데이먼으로 태어나면서 불사의 약인 “엘릭서”를 만들면서 모든 인연이 다시 시작되고야 만 것이다. 에버는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불사자들은 육체는 불멸일지라 하더라도 대신 영혼이 죽어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불사자들의 감옥인 “새도우 랜드”로 가서 모든 불사자들을 풀어주고 데이먼에게 저주를 걸었던 “로만”에게서 해독제 제조법을 듣게 된다. 그러나 에버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얽히고 설킨 모든 인연을 원점으로 돌려 놓기 위한 여행에 나선다. 그녀는 영혼이 함께 하는 유한한 삶을 위해 “생명의 나무” 열매를 “엘릭서”와 바꾸기 위해 여행길에 나선다. 어쩌면 불멸을 포기할 수 도 있는 그런 위험한 여행 말이다. 이 여행은 오직 에버 만이 할 수 있다.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 잡고, 자신들의 빚을 갚기 위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한 여행이 그렇게 시작된다. 과연 에버의 마지막 여행은 어떻게 결말이 날까? 여러 생을 거듭한 불사자들의 여행이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이로서 지난 2011년 8월 시리즈 1권인 <에버 모어>로 만난 이래 - 이 책의 출간이 2009년 12월인데 너무 늦게 만난 셈이다 - 불사자들의 모험과 사랑은 5개월 만에 그 끝을 만나게 되었다. <에버 모어> 감상에서 밝힌 것처럼 로맨스 판타지, 즐겨 읽지 않는 장르임에도 이 책은 매권마다 새로운 인물들과 비밀들이 등장하고 적들과 대적하고 비밀들을 파헤쳐 가는 이야기 전개가 흥미와 재미를 배가시켜 다음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 지 궁금해서 다음권을 찾게 되는 참 재미있던 시리즈였다. 특히 기존 로맨스 판타지가 흡혈귀나 늑대인간처럼 서구 신화와 전설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반해, 2권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각종 설정들인 “오라(Aura)"와 “차크라(Chaktra)", 서양 낙원과 지옥과는 사못 다른 개념의 “서머랜드”와 “섀도우 랜드”, 그리고 결말에서 중요한 설정인 “업(業, Karma)"과 인연(因緣)등의 설정이 인도 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어서 다른 로맨스 판타지와는 차별화된 이색적인 신비로움과 함께 철학적인 깊이를 선보이고 있는 점을 가장 큰 장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그동안 주인공 에버가 불멸의 사랑인 데이먼이 곁에 있음에도 그 사랑을 의심하고 다른 상대에게 쉽게 흔들려 버리는 우유부단함을 보여 다소 짜증이 나기도 했는데, 마지막 6권을 다 읽고 나니 그런 장면들도 작가가 즉흥적으로 들려준 것이 아니라 전체 이야기 얼개와 결말을 치밀하게 설계해 놓고 한 권 한 권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인물들의 성격과 삶을 그려낸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한의 삶이 아닌 인간으로서 유한의 삶을 택한 에버와 데이먼의 선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생을 거듭하면서 갈수록 굵어져 가는 인연의 사슬에 얽매였던 둘은 모든 업과 인연의 질긴 고리를 끊어내 기 위해 모든 갈등과 분노를 놓아버리고 결국 “사랑”을 택하게 된다. 비록 그 때문에 불멸의 삶은 없어졌지만 오히려 더 홀가분해졌을, 어쩌면 둘은 “사랑”을 통해서 일종의 “해탈(解脫)”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라면 너무 과한 해석일까?

 

어쩌면 이렇게 철학적인 의미를 찾지 않아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서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소설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6권에 이르는 “이모탈” 시리즈를 다 읽고 나니 어느새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옅어진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앞으로 만나게 될 로맨스 판타지들은 “이모탈 시리즈”와 비교하게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시리즈, 드라마로도 제작된다고 하니 영상으로 만나게 될 에버와 데이먼은 어떤 모습일지, 또한 얽히고 설킨 이야기들을 영상으로는 어떻게 풀어냈을지 절로 궁금해진다. 소설로는 아쉽게도 이번 6권으로 끝나지만 드라마로 이어질 “이모탈”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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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 속삭인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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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나 사진 등 특정인의 소유물에 손을 대어, 소유자에 관한 정보를 읽어내는 심령적(心靈的)인 행위를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라고 하는데, 빵이 놓여 졌던 자리에 빵 냄새가 남듯이 인간, 동물 등의 사념(思念)은 그것이 지나온 자리에 남아 있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이를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굳이 초능력자(超能力者)가 아니더라도 일반 사람들 중에도 특별히 예민한 사람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을 종종 만나볼 수 있는데, 즉 어느 도로만 지나가게 되면 이유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는데 나중에 동료에게서 그 도로가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나는 곳이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고, 이상하게 어느 곳에만 가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리고 뒷목이 뻣뻣해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알아 봤더니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던 지역이었다는 그런 경험들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이야 괜한 기분 탓이겠거니 하겠지만 일부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고 고통스럽기까지 한다고 한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작가인 “타티아나 드 로즈네(Tatiana De Rosnay)”의 소설 <벽이 속삭인다(원제 La Memoire Des Urs / 비채/ 2011년 12월)>은 이처럼 어떤 장소에 대해 특별히 예민한 한 여성이 겪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자로 근무 중인 사십대 여성 나(“파스칼린”)는 최근 남편 “프레드릭”과 이혼하고 혼자 살 집을 알아보던 중 안성맞춤의 아파트를 발견한다. 월세가 좀 비쌌지만 볕이 잘 드는 조용한 석조 건물인데다가 동네가 활력이 넘치고 지하철역이 가까워 교통편이 좋았던 지라 처음 본 순간부터 맘에 들었던 나는 서둘러 계약을 한다. 이사하던 날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하고 넘겼는데, 그날 밤까지 계속 그런 느낌이 들어 뜬 눈으로 지새고는 둘째 셋째 날 밤도 계속 그런 기분이 이어진다. 이상하게도 회사에 나오면 멀쩡한 몸이 집에 도착하기만 하면 현기증이 도지지만 모든 게 이 집 때문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가 없어 그냥 참고 살기로 한다. 그로부터 며칠 후 3층 사는 이웃이 나에게 잠은 잘 자냐고 물어오며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일러준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일곱 명의 젊은 여성들이 희생된 “당브르가 연쇄살인사건” 중 첫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내 집이었던 것이다! 애써 무시하려고 하지만 울렁거림과 현기증, 구토 증상, 공포감이 갈수록 더 심해지자 결국 나는 그 집을 나와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런데 이사를 하고 나서도 그 집에서 겪은 불안감과 공포들이 쉽게 가시지 않아 완벽하기만 했던 회사 생활도 실수가 점점 잦아지게 된다. 결국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 곳들을 차례차례 둘러보며 희생자들을 떠올려 보던 나는 역시나 그 장소들에서도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미 사건이 발생한지 오래되었고 사람들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졌지만 나는 그 “곳”에서 살인의 참혹함과 희생자들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희생자들을 추억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연쇄살인범이 갇혀 있는 교도소까지 찾아가 담벼락을 돌아보고 희생자의 어머니를 만나는 등 나의 행동은 점점 더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이런 살인에 대한 집착은 결국 내 심신을 갈수록 황폐화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난 헤어진 남편이 새 여인에게서 아이를 갖게 되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우리들의 아기는 남편의 부주의로 그만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았는데 말이다. 결국 나는 가슴 속에 분노를 가득 채우고 행복한 남편과 새 여인의 보금자리로 향하게 된다.

 

이 책, 요약하자면 아이를 사고로 잃고 결국 남편과 이혼하게 된 한 중년 여성이 점점 이상 심리로 빠져 들더니 결국 비극적 결말 - 그 비극이 일어나기 전 책은 끝나고 마니 일종의 암시 -을 맺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런 이상 심리가 이혼 여성 특유의 깊은 상실감과 고독감 때문이었다면 심리 소설, 또는 페미니즘 소설 쯤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바로 앞에서 언급한 “사이코 메트리”처럼 특정 장소에 대한 주인공의 특별히 예민한 감각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꽤나 흥미롭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감각이 이혼녀라는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어릴 적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던, 어쩌면 그녀만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다만 이혼의 슬픔이 그런 능력을 더 예민하게 만들고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키는 장치로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예민한 여인의 감각이 어떤 특별한 장소에서 예민하게 반응하여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고 여기에 이혼녀로서의 아픔이 그런 감각을 더욱 증폭시켜 점점 이상 심리로 빠져 들게 하더니 결국 남편에 대한 분노로 변화하는 과정이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꽤나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어서 나 또한 주인공의 심리 변화 과정을 좇아가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까지 눈길을 떼지 못하고 단숨에 읽게 되는 몰입감이 꽤나 뛰어난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결말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 “열린 결말”로 끝을 맺지만 독자들에게 그 결말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혹할 지를 절로 머릿 속에 그려보게 만들어 다 읽고 나서도 그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게 만든다.

 

물론 이 책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본다면 그저 한 여인의 심리 파탄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갈수록 잔혹해져가는, 그런 잔혹함에 무뎌져 가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도 해석할 수 도 있겠다. 끔찍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지만 어느새 사람들은 그런 끔찍함은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채 그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결국 그런 사건들 - 이 책에서 등장하는 연쇄살인사건들이나 나치 치하의 유대인 학살 사건들까지도 - 은 입 싼 호사가들의 가십거리 쯤으로나 오르내리고 만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아픔을 결코 잊지 못하는 희생자들의 가족들은 세상을 향해 울부짖지만 어느새 공허한 외침이 되어 버려 모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야 마는 사회 현실을 비판하면서 그런 끔찍함을 기억하는 또 다른 사물들, 또는 객체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일깨워 주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사건들이 벌어진 장소의 건물들과 배경들, 특히 이 책의 제목처럼 “벽”들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우리들은 들을 수 없지만 주인공처럼 어떤 “특별한” 사람들은 분명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그런 사건들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했는지를 속삭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날 우리도 심신이 지독한 슬픔과 괴로움에 휩싸이게 될 때 그런 벽들의 속삭임을 듣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의 주인공처럼 우리들도 점점 황폐해져 비극으로 치닫게 될까? 아니면 그런 슬픔과 아픔의 공유를 통해 우리들 상처들을 치유해나가게 될까? 정답은 각자에게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런 앞으로는 유서 깊은 건물들이나 유물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할 것 같은, 그리고 어디선가 잘 들리지는 않지만 귓가를 간질이는 소곤소곤 목소리가 들리면 괜히 주변을 둘러보게 될 것만 같은 그런 예감이 든다.  이런 벽들의 속삭임, 상상만으로도 온 몸에 소름이 돋게 할 정도로 공포스러운 그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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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연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7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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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본격 추리소설의 대표작가라는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드디어” <주홍색 연구(원제 朱色の硏究/비채/2011년 12월)>로 만났다. “드디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작가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직 작품으로 만나보지 못했었고, 그의 작품인 <행각승 지장스님의 방랑(비채/2010년 3월)>은 소장하고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그대로 주홍색 표지가 인상적인 이 책,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나에게는 “검증”받지 못한 처음 만나는 작가라는 부담감을 함께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독살스러우리만치 붉은색, 그것이 눈 밑에 펼쳐진 거리에 벌이라도 내리듯 활활 타오르며 모든 것을 붉게 물들이던, 마치 세상의 종말 같은 일몰(日沒)의 강렬한 오렌지색이 인상적이었던 어느날 대학 법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범죄사회학”을 강의하고 때때로 경찰 수사에 가담해 눈부신 탐정의 재능을 발휘하는 “필드워크”를 해온 “히무라 히데오”에게 자신의 강의 수강생인 여학생 “기지마 아케미”가 찾아온다. 아케미는 히무라에게 열 다섯 살인 중학교 3학년 때 화재 사건을 목격한 후 오렌지색에 공포를 느끼는 색깔 공포증(Chromophobia)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2년 전 여름에 자신이 겪었던 살인사건의 수사를 의뢰한다. 히무라는 아케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 사건 관계자를 만나기 위해 오사카로 와서 마침 관계자가 살고 있는 맨션인 “유령맨션" 근처에 살고 있는 친우이자 필드 워크의 “조수”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집에 머물게 된다. 다음날 새벽, 6시도 못되는 시각에 아리스가와 집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아리스가와는 한소리 해주겠다는 생각으로 전화를 드는데,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나이는 물론이고 성별조차 분명치 않은 부자연스럽게 억누른 목소리로 히무라와 아리스가와에게 유령맨션의 806호로 가보라고 통보하고는 이내 전화를 끊어버린다. 둘의 이름을 지목한 통화 내용이라 무시할 수 없었던 둘은 새벽길에 전화에서 일러준 맨션의 806호로 가보는데, 그 곳에서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졸지에 살인 사건 최초 발견자가 되어 버린 히무라와 아리스가와는 경찰에 신고하게 되고, 다행히 필드 워크 중에 안면이 있던 경찰들을 만나게 되어 용의자의 누명을 금세 벗고는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수사를 진행한다. 그런데 이 살인 사건, 별개의 건이 아니다. 시체의 신원은 아케미의 외삼촌으로 밝혀졌고, 아케미가 의뢰해온 2년 전 살인사건이 바로 기지마 외삼촌의 여자친구가 살해당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심지어 기지마를 색깔 공포증에 빠뜨리게 한 오래전 화재사건까지 관련이 있음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이하 글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추리 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명탐정 셜록 홈스와 그의 조력자 왓슨 박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었던 <주홍색 연구>의 오마주이라는 이 작품에는 홈스와 왓슨 역할을 히무라와 아리스가와 - 작가 자신이 책 속 인물로 등장하는 설정은 “엘러리 퀸” 작품에서 따온 듯 한데 그래서 작가도 “일본의 엘러리 퀸”으로 불린다고 한다 - 콤비가 맡는데, 이 책이 두 콤비가 등장하는 작품으로는 여덟 번째라고 하니 급조된 콤비가 아니라 꽤나 연륜(?)이 있는 콤비인 셈이다. 이 책에서의 추리는 신본격 장르에 걸맞게 정교하고 치밀한 트릭과 플롯, 그 허점을 예리하게 꿰뚫는 탐정의 추리로 범인의 수법과 정체를 밝혀낸다는 전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특히 유령맨션의 살인사건의 트릭인 “장소 오인 트릭” - 실제 살인은 906호에서 벌어졌는데 목격자는 806호로 착각하게 만드는 트릭 - 은 밀실 트릭과 함께 많은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트릭이라 할 수 있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것만 같은데도 작가는 독자가 전혀 예측하기 힘든 새로운 방식의 트릭으로 재창조해내 선보인다. 그리고 이 장소오인트릭에는 또 하나의 트릭이 감춰져 있는데 워낙 강력한 스포일러니 여기서 소개는 생략해야겠다. 또한 2년 전 살인 사건에 사용된 “살인 시간 오인 트릭”이나 범인 숫자를 헷갈리게 하는 트릭 - 범인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 우연으로 발생한 것이다 - 들도 역시나 독자들이 트릭의 허점을 예측하기 힘든 정교한 트릭들이다. 그러나 현실이 아닌 추리소설의 세계인 이상 아무리 해결 불가능할 것 같은 최고 난이도의 트릭이라도 탐정에게 불가능이란 없는 법, 히무라는 명탐정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실낱같기만 한 트릭의 허점을 멋지게 파고들어 범인의 정체와 그 수법을 밝혀내고야 만다. 역시 트릭과 그 파해법(破解法)이라는 고전 추리소설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신본격 추리소설”에서 트릭의 중요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장치이자 재미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 평론가인 “쓰이데 이쿠테루”는 평론집 <탐정소설론>에서 “트릭은 탐정 소설 속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 재미의 중심축이란 수수께끼의 기발함과 논리 및 행동의 의외성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 책의 트릭은 기발함과 의외성을 모두 갖춘 “수준급” 트릭임에는 틀림없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평범한 사람이 이런 정교한 트릭을 구사한다는 점이나 또한 장소를 오인케 할만한 “쉬운” 트릭으로도 충분할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복잡한 트릭을 구사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들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또한 히무라의 추리도 사건의 정황은 분명하게 밝혀냈지만 범인에게 물적 증거까지는 제시하지 못해서 범인의 부인(否認)한다면 증거 불충분으로 법정 구속은 불가능한 그런 상황인데, 사랑했던 연인 앞에서 범인이 스스로 범죄 사실을 밝히는 상황으로 몰리자 결국 자수(自首)하고 마는 억지스러운 결론 또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홍색”은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을 해설한 “아스카베 가쓰노리”는 색채 미스터리의 가능성, 즉 '내용이 색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색이 내용을' 양성하는, 다시 말해 유전자가 다른 본격 추리소설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내가 과문한 탓인지 색채 미스터리라고 정의할 만한 점들은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추리소설하면 자연스레 선홍색 핏빛이나 범죄라는 단어에서 검은색이 주로 떠오르는데, 책 도입부 세상의 종말과 같은 강렬한 오렌지 색 노을에 대한 멋드러진 묘사 덕분에 다 읽고 나서 “주홍색” 이미지를 바로 떠올리게 하는 시각적 효과만큼은 뛰어났다고 할 수 있겠다.

 

뒷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은 강력한 인상은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절묘한 트릭과 복선이라는 추리소설 본연의 재미를 맛볼 수 있어서 처음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준, 또한 처음 만나는 작가에 대한 부담감을 완전히 없애준 멋진 작품이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역시 그의 명성이 허명은 아니었다. 그를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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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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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쪽 남짓의 길지 않은 분량, 8개의 짤막 짤막한 단편들과 한편의 에필로그형식의 단편, 그리고 문학평론가 작품 해설로 구성된 <퀴르발 남작의 성(최제훈/문학과지성사/2010년 9월)>을 읽으면서 "신인 작가의 글 맞아?" 하는 의문에 몇 번을 책 표지에 실려 있는 작가소개를 들춰 보았다. 분명 처음 읽을 때 본 작가의 약력은 제7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2007)을 수상했고, 이번 단편집이 첫 작품집이라고 씌여 있으니 신인작가가 틀림없는 데, 막 데뷔한 작가의 글솜씨가 어찌 이리 서툴거나 미흡한 기색 하나 없이 절묘하면서도 재미가 있는지 읽으면 읽을수록 결코 녹록치 않은 이야기 풀어내는 솜씨에 절로 감탄이 나왔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한번쯤은 접해봤을 이야기들을 출판사 소개글인 “그가 보여주는 믿거나 말거나, 새로운 세계”라는 말이 제격일 정도로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글솜씨로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바꿔놓은 이 작품은 우리나라 문학계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재밌고 기발한 작품이었다.

 

 책에는 이 책의 표제작이자 신인문학상 당선작이었던 <퀴르발 남작의 성> 등 총 8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퀴르발 남작의 성>은 지금의 흡혈귀 소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옛 동화를 소재로 하여 처음 소설로 만든 작가에게 동화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이야기와 작가와 편집장이 작품에 관해 이야기 나누던 시점, 처음 영화로 제작되던 시점, 그리고 일본에서 재 제작된 시점 등 여러 시간대와 미국, 프랑스, 일본과 한국 등 다양한 장소들, 관련 인물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단순한 연대기 순의 이야기 소개가 아니라 언론 인터뷰, 평론, 대학 강의, 보고서, 블로그글, 등장인물들의 대화 등 다양한 장르의 텍스트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마치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실제로 이런 동화와 영화들이 존재하는 것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이 실재(實在)하는 지 궁금해서 나처럼 인터넷을 검색해봤다고 한다. 결국 순전히 작가가 소설적 허구로 만들어낸 이야기란다 -. 첫 작품부터 멍한 충격을 느끼게 하더니 두 번째 작품인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은 더 가관이다. 모리어티 교수와의 최후의 싸움을 끝내고 시골에 내려와 쉬고 있던 명탐정 셜록 홈즈에게 지방 경찰이 살인사건 수사를 의뢰해온다. 피해자는 바로 의사이자 유명 추리 소설 작가인 “코넌 도일”이었다! 홈즈는 처음에는 코난 도일이 그에게 남긴 밀실 살인 수수께끼에 보란 듯이 넘어가서 엉뚱한 추리를 하지만 결국 사건의 전말을 알아낸다. 아서 코넌 도일의 추리 소설 작품에 등장하던 가공의 인물 셜록 홈즈가 소설 속에서 걸어 나와 자신을 창조해낸 작가의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런 기가 막힌 상상에 두 번째로 멍한 느낌이 들었다. 연이어 이어지는 작품들, 즉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만 잃어버리는 선택적 기억 상실증 환자 이야기인 <그녀의 매듭>, 다중인격, 즉 해리성 정체감 장애 다큐멘터리를 보고 흥미를 느낀 남자가 자기 스스로 인격체를 만들어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마는 <그림자 박제>, 마녀들의 기원과 마녀 사냥의 허구성을 밝히는 논문 형식의 <마녀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고찰>, 드라큘라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공포 캐릭터인 “프랑켄 슈타인”을 재해석한 <괴물을 위한 변명>, 그리고 어쩌면 가장 평범한 단편일 수 있지만 사랑에 대한 두 남녀의 심리 묘사가 인상적인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등 한편 한편이 놀랍고도 신기한,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다. 에필로그 형식으로 실린,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이 모여 정체모를 조각난 시체를 두고 사라진 등장인물은 없는지 일대 소동을 벌이는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는 마지막까지도 작가 특유의 유머와 상상력의 기발함과 재미에 절로 웃음이 나오는 그런 작품이었다.

 

“최제훈의 소설은 계보학적 상상력을 바탕에 깔고 이루어진 새로운 서사 형식의 발견, 바로 그것이다.”

  - "제7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선정의 말

 

 "삐딱하게 보기, 뒤집어 보기, 물구나무서서 보기와 같은 식으로 사태를 전복하면서 최제훈은 탄력적인 위트와 유머 감각으로 서사적 난장에 신명을 지피는 작가이다"

  -"난장의 문화 공학과 그 그림자" 우찬제(문학평론가)

 

그의 작품을 해설하는 위의 두 문장처럼 어쩌면 엄숙해야할 고전들과 이야기들을 작가 특유의 위트와 유머 감각으로 철저히 분해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재조립해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이야기로 만들어내 시치미 뚝 떼고 천연덕스럽게 우리에게 내어 놓는 작가 최제훈은 이 첫 작품만으로 결코 녹록치 않은 글솜씨와 기발한 상상력을 입증해 낸, 그동안 우리 문학계에서 쉽게 만날 수 없었던 그런 상상력과 재능을 지닌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유명 작가 누구와 비교된다는 그런 평을 작가는 싫어할 수 도 있겠지만 그동안 놀랍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비견될 만 하다고 평하고 싶다.

 

하드웨어에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지만 소프트웨어인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에서는 아직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그리고 최근 스토리텔링 경향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의 창작보다는 과거로부터 전승(傳承)되어 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화와 전설, 고전들을 재해석하고 새롭게 창작하는 경향이 주류 - 소설과 영화로 공전의 히트를 거둔 <반지의 제왕>도 사실 북구의 신화와 전설을 새롭게 창조해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로 부각되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능수능란하게 고전들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작가가 등장했다는 것은 분명 모두가 반길 그런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번 작품이 소설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확대 재생산 가능한 상품이 될 수 있을지는 전문가들이 평가해야겠지만, 재밌고 기발한 이야기를 즐겨하는 평범한 독자로서 그가 보여줄 다음 작품들이 얼마나 나를 놀라게 하고 즐거워하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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