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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평점 :
300쪽 남짓의 길지 않은 분량, 8개의 짤막 짤막한 단편들과 한편의 에필로그형식의 단편, 그리고 문학평론가 작품 해설로 구성된 <퀴르발 남작의 성(최제훈/문학과지성사/2010년 9월)>을 읽으면서 "신인 작가의 글 맞아?" 하는 의문에 몇 번을 책 표지에 실려 있는 작가소개를 들춰 보았다. 분명 처음 읽을 때 본 작가의 약력은 제7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2007)을 수상했고, 이번 단편집이 첫 작품집이라고 씌여 있으니 신인작가가 틀림없는 데, 막 데뷔한 작가의 글솜씨가 어찌 이리 서툴거나 미흡한 기색 하나 없이 절묘하면서도 재미가 있는지 읽으면 읽을수록 결코 녹록치 않은 이야기 풀어내는 솜씨에 절로 감탄이 나왔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한번쯤은 접해봤을 이야기들을 출판사 소개글인 “그가 보여주는 믿거나 말거나, 새로운 세계”라는 말이 제격일 정도로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글솜씨로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바꿔놓은 이 작품은 우리나라 문학계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재밌고 기발한 작품이었다.
책에는 이 책의 표제작이자 신인문학상 당선작이었던 <퀴르발 남작의 성> 등 총 8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퀴르발 남작의 성>은 지금의 흡혈귀 소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옛 동화를 소재로 하여 처음 소설로 만든 작가에게 동화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이야기와 작가와 편집장이 작품에 관해 이야기 나누던 시점, 처음 영화로 제작되던 시점, 그리고 일본에서 재 제작된 시점 등 여러 시간대와 미국, 프랑스, 일본과 한국 등 다양한 장소들, 관련 인물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단순한 연대기 순의 이야기 소개가 아니라 언론 인터뷰, 평론, 대학 강의, 보고서, 블로그글, 등장인물들의 대화 등 다양한 장르의 텍스트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마치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실제로 이런 동화와 영화들이 존재하는 것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이 실재(實在)하는 지 궁금해서 나처럼 인터넷을 검색해봤다고 한다. 결국 순전히 작가가 소설적 허구로 만들어낸 이야기란다 -. 첫 작품부터 멍한 충격을 느끼게 하더니 두 번째 작품인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은 더 가관이다. 모리어티 교수와의 최후의 싸움을 끝내고 시골에 내려와 쉬고 있던 명탐정 셜록 홈즈에게 지방 경찰이 살인사건 수사를 의뢰해온다. 피해자는 바로 의사이자 유명 추리 소설 작가인 “코넌 도일”이었다! 홈즈는 처음에는 코난 도일이 그에게 남긴 밀실 살인 수수께끼에 보란 듯이 넘어가서 엉뚱한 추리를 하지만 결국 사건의 전말을 알아낸다. 아서 코넌 도일의 추리 소설 작품에 등장하던 가공의 인물 셜록 홈즈가 소설 속에서 걸어 나와 자신을 창조해낸 작가의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런 기가 막힌 상상에 두 번째로 멍한 느낌이 들었다. 연이어 이어지는 작품들, 즉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만 잃어버리는 선택적 기억 상실증 환자 이야기인 <그녀의 매듭>, 다중인격, 즉 해리성 정체감 장애 다큐멘터리를 보고 흥미를 느낀 남자가 자기 스스로 인격체를 만들어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마는 <그림자 박제>, 마녀들의 기원과 마녀 사냥의 허구성을 밝히는 논문 형식의 <마녀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고찰>, 드라큘라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공포 캐릭터인 “프랑켄 슈타인”을 재해석한 <괴물을 위한 변명>, 그리고 어쩌면 가장 평범한 단편일 수 있지만 사랑에 대한 두 남녀의 심리 묘사가 인상적인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등 한편 한편이 놀랍고도 신기한,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다. 에필로그 형식으로 실린,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이 모여 정체모를 조각난 시체를 두고 사라진 등장인물은 없는지 일대 소동을 벌이는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는 마지막까지도 작가 특유의 유머와 상상력의 기발함과 재미에 절로 웃음이 나오는 그런 작품이었다.
“최제훈의 소설은 계보학적 상상력을 바탕에 깔고 이루어진 새로운 서사 형식의 발견, 바로 그것이다.”
- "제7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선정의 말
"삐딱하게 보기, 뒤집어 보기, 물구나무서서 보기와 같은 식으로 사태를 전복하면서 최제훈은 탄력적인 위트와 유머 감각으로 서사적 난장에 신명을 지피는 작가이다"
-"난장의 문화 공학과 그 그림자" 우찬제(문학평론가)
그의 작품을 해설하는 위의 두 문장처럼 어쩌면 엄숙해야할 고전들과 이야기들을 작가 특유의 위트와 유머 감각으로 철저히 분해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재조립해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이야기로 만들어내 시치미 뚝 떼고 천연덕스럽게 우리에게 내어 놓는 작가 최제훈은 이 첫 작품만으로 결코 녹록치 않은 글솜씨와 기발한 상상력을 입증해 낸, 그동안 우리 문학계에서 쉽게 만날 수 없었던 그런 상상력과 재능을 지닌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유명 작가 누구와 비교된다는 그런 평을 작가는 싫어할 수 도 있겠지만 그동안 놀랍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비견될 만 하다고 평하고 싶다.
하드웨어에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지만 소프트웨어인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에서는 아직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그리고 최근 스토리텔링 경향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의 창작보다는 과거로부터 전승(傳承)되어 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화와 전설, 고전들을 재해석하고 새롭게 창작하는 경향이 주류 - 소설과 영화로 공전의 히트를 거둔 <반지의 제왕>도 사실 북구의 신화와 전설을 새롭게 창조해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로 부각되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능수능란하게 고전들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작가가 등장했다는 것은 분명 모두가 반길 그런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번 작품이 소설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확대 재생산 가능한 상품이 될 수 있을지는 전문가들이 평가해야겠지만, 재밌고 기발한 이야기를 즐겨하는 평범한 독자로서 그가 보여줄 다음 작품들이 얼마나 나를 놀라게 하고 즐거워하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