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은 속삭인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시계나 사진 등 특정인의 소유물에 손을 대어, 소유자에 관한 정보를 읽어내는 심령적(心靈的)인 행위를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라고 하는데, 빵이 놓여 졌던 자리에 빵 냄새가 남듯이 인간, 동물 등의 사념(思念)은 그것이 지나온 자리에 남아 있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이를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굳이 초능력자(超能力者)가 아니더라도 일반 사람들 중에도 특별히 예민한 사람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을 종종 만나볼 수 있는데, 즉 어느 도로만 지나가게 되면 이유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는데 나중에 동료에게서 그 도로가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나는 곳이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고, 이상하게 어느 곳에만 가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리고 뒷목이 뻣뻣해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알아 봤더니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던 지역이었다는 그런 경험들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이야 괜한 기분 탓이겠거니 하겠지만 일부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고 고통스럽기까지 한다고 한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작가인 “타티아나 드 로즈네(Tatiana De Rosnay)”의 소설 <벽이 속삭인다(원제 La Memoire Des Urs / 비채/ 2011년 12월)>은 이처럼 어떤 장소에 대해 특별히 예민한 한 여성이 겪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자로 근무 중인 사십대 여성 나(“파스칼린”)는 최근 남편 “프레드릭”과 이혼하고 혼자 살 집을 알아보던 중 안성맞춤의 아파트를 발견한다. 월세가 좀 비쌌지만 볕이 잘 드는 조용한 석조 건물인데다가 동네가 활력이 넘치고 지하철역이 가까워 교통편이 좋았던 지라 처음 본 순간부터 맘에 들었던 나는 서둘러 계약을 한다. 이사하던 날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하고 넘겼는데, 그날 밤까지 계속 그런 느낌이 들어 뜬 눈으로 지새고는 둘째 셋째 날 밤도 계속 그런 기분이 이어진다. 이상하게도 회사에 나오면 멀쩡한 몸이 집에 도착하기만 하면 현기증이 도지지만 모든 게 이 집 때문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가 없어 그냥 참고 살기로 한다. 그로부터 며칠 후 3층 사는 이웃이 나에게 잠은 잘 자냐고 물어오며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일러준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일곱 명의 젊은 여성들이 희생된 “당브르가 연쇄살인사건” 중 첫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내 집이었던 것이다! 애써 무시하려고 하지만 울렁거림과 현기증, 구토 증상, 공포감이 갈수록 더 심해지자 결국 나는 그 집을 나와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런데 이사를 하고 나서도 그 집에서 겪은 불안감과 공포들이 쉽게 가시지 않아 완벽하기만 했던 회사 생활도 실수가 점점 잦아지게 된다. 결국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 곳들을 차례차례 둘러보며 희생자들을 떠올려 보던 나는 역시나 그 장소들에서도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미 사건이 발생한지 오래되었고 사람들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졌지만 나는 그 “곳”에서 살인의 참혹함과 희생자들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희생자들을 추억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연쇄살인범이 갇혀 있는 교도소까지 찾아가 담벼락을 돌아보고 희생자의 어머니를 만나는 등 나의 행동은 점점 더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이런 살인에 대한 집착은 결국 내 심신을 갈수록 황폐화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난 헤어진 남편이 새 여인에게서 아이를 갖게 되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우리들의 아기는 남편의 부주의로 그만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았는데 말이다. 결국 나는 가슴 속에 분노를 가득 채우고 행복한 남편과 새 여인의 보금자리로 향하게 된다.

 

이 책, 요약하자면 아이를 사고로 잃고 결국 남편과 이혼하게 된 한 중년 여성이 점점 이상 심리로 빠져 들더니 결국 비극적 결말 - 그 비극이 일어나기 전 책은 끝나고 마니 일종의 암시 -을 맺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런 이상 심리가 이혼 여성 특유의 깊은 상실감과 고독감 때문이었다면 심리 소설, 또는 페미니즘 소설 쯤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바로 앞에서 언급한 “사이코 메트리”처럼 특정 장소에 대한 주인공의 특별히 예민한 감각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꽤나 흥미롭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감각이 이혼녀라는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어릴 적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던, 어쩌면 그녀만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다만 이혼의 슬픔이 그런 능력을 더 예민하게 만들고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키는 장치로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예민한 여인의 감각이 어떤 특별한 장소에서 예민하게 반응하여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고 여기에 이혼녀로서의 아픔이 그런 감각을 더욱 증폭시켜 점점 이상 심리로 빠져 들게 하더니 결국 남편에 대한 분노로 변화하는 과정이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꽤나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어서 나 또한 주인공의 심리 변화 과정을 좇아가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까지 눈길을 떼지 못하고 단숨에 읽게 되는 몰입감이 꽤나 뛰어난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결말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 “열린 결말”로 끝을 맺지만 독자들에게 그 결말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혹할 지를 절로 머릿 속에 그려보게 만들어 다 읽고 나서도 그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게 만든다.

 

물론 이 책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본다면 그저 한 여인의 심리 파탄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갈수록 잔혹해져가는, 그런 잔혹함에 무뎌져 가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도 해석할 수 도 있겠다. 끔찍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지만 어느새 사람들은 그런 끔찍함은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채 그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결국 그런 사건들 - 이 책에서 등장하는 연쇄살인사건들이나 나치 치하의 유대인 학살 사건들까지도 - 은 입 싼 호사가들의 가십거리 쯤으로나 오르내리고 만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아픔을 결코 잊지 못하는 희생자들의 가족들은 세상을 향해 울부짖지만 어느새 공허한 외침이 되어 버려 모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야 마는 사회 현실을 비판하면서 그런 끔찍함을 기억하는 또 다른 사물들, 또는 객체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일깨워 주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사건들이 벌어진 장소의 건물들과 배경들, 특히 이 책의 제목처럼 “벽”들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우리들은 들을 수 없지만 주인공처럼 어떤 “특별한” 사람들은 분명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그런 사건들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했는지를 속삭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날 우리도 심신이 지독한 슬픔과 괴로움에 휩싸이게 될 때 그런 벽들의 속삭임을 듣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의 주인공처럼 우리들도 점점 황폐해져 비극으로 치닫게 될까? 아니면 그런 슬픔과 아픔의 공유를 통해 우리들 상처들을 치유해나가게 될까? 정답은 각자에게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런 앞으로는 유서 깊은 건물들이나 유물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할 것 같은, 그리고 어디선가 잘 들리지는 않지만 귓가를 간질이는 소곤소곤 목소리가 들리면 괜히 주변을 둘러보게 될 것만 같은 그런 예감이 든다.  이런 벽들의 속삭임, 상상만으로도 온 몸에 소름이 돋게 할 정도로 공포스러운 그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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