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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연구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7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일본 신본격 추리소설의 대표작가라는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드디어” <주홍색 연구(원제 朱色の硏究/비채/2011년 12월)>로 만났다. “드디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작가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직 작품으로 만나보지 못했었고, 그의 작품인 <행각승 지장스님의 방랑(비채/2010년 3월)>은 소장하고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그대로 주홍색 표지가 인상적인 이 책,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나에게는 “검증”받지 못한 처음 만나는 작가라는 부담감을 함께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독살스러우리만치 붉은색, 그것이 눈 밑에 펼쳐진 거리에 벌이라도 내리듯 활활 타오르며 모든 것을 붉게 물들이던, 마치 세상의 종말 같은 일몰(日沒)의 강렬한 오렌지색이 인상적이었던 어느날 대학 법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범죄사회학”을 강의하고 때때로 경찰 수사에 가담해 눈부신 탐정의 재능을 발휘하는 “필드워크”를 해온 “히무라 히데오”에게 자신의 강의 수강생인 여학생 “기지마 아케미”가 찾아온다. 아케미는 히무라에게 열 다섯 살인 중학교 3학년 때 화재 사건을 목격한 후 오렌지색에 공포를 느끼는 색깔 공포증(Chromophobia)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2년 전 여름에 자신이 겪었던 살인사건의 수사를 의뢰한다. 히무라는 아케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 사건 관계자를 만나기 위해 오사카로 와서 마침 관계자가 살고 있는 맨션인 “유령맨션" 근처에 살고 있는 친우이자 필드 워크의 “조수”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집에 머물게 된다. 다음날 새벽, 6시도 못되는 시각에 아리스가와 집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아리스가와는 한소리 해주겠다는 생각으로 전화를 드는데,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나이는 물론이고 성별조차 분명치 않은 부자연스럽게 억누른 목소리로 히무라와 아리스가와에게 유령맨션의 806호로 가보라고 통보하고는 이내 전화를 끊어버린다. 둘의 이름을 지목한 통화 내용이라 무시할 수 없었던 둘은 새벽길에 전화에서 일러준 맨션의 806호로 가보는데, 그 곳에서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졸지에 살인 사건 최초 발견자가 되어 버린 히무라와 아리스가와는 경찰에 신고하게 되고, 다행히 필드 워크 중에 안면이 있던 경찰들을 만나게 되어 용의자의 누명을 금세 벗고는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수사를 진행한다. 그런데 이 살인 사건, 별개의 건이 아니다. 시체의 신원은 아케미의 외삼촌으로 밝혀졌고, 아케미가 의뢰해온 2년 전 살인사건이 바로 기지마 외삼촌의 여자친구가 살해당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심지어 기지마를 색깔 공포증에 빠뜨리게 한 오래전 화재사건까지 관련이 있음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이하 글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추리 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명탐정 셜록 홈스와 그의 조력자 왓슨 박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었던 <주홍색 연구>의 오마주이라는 이 작품에는 홈스와 왓슨 역할을 히무라와 아리스가와 - 작가 자신이 책 속 인물로 등장하는 설정은 “엘러리 퀸” 작품에서 따온 듯 한데 그래서 작가도 “일본의 엘러리 퀸”으로 불린다고 한다 - 콤비가 맡는데, 이 책이 두 콤비가 등장하는 작품으로는 여덟 번째라고 하니 급조된 콤비가 아니라 꽤나 연륜(?)이 있는 콤비인 셈이다. 이 책에서의 추리는 신본격 장르에 걸맞게 정교하고 치밀한 트릭과 플롯, 그 허점을 예리하게 꿰뚫는 탐정의 추리로 범인의 수법과 정체를 밝혀낸다는 전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특히 유령맨션의 살인사건의 트릭인 “장소 오인 트릭” - 실제 살인은 906호에서 벌어졌는데 목격자는 806호로 착각하게 만드는 트릭 - 은 밀실 트릭과 함께 많은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트릭이라 할 수 있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것만 같은데도 작가는 독자가 전혀 예측하기 힘든 새로운 방식의 트릭으로 재창조해내 선보인다. 그리고 이 장소오인트릭에는 또 하나의 트릭이 감춰져 있는데 워낙 강력한 스포일러니 여기서 소개는 생략해야겠다. 또한 2년 전 살인 사건에 사용된 “살인 시간 오인 트릭”이나 범인 숫자를 헷갈리게 하는 트릭 - 범인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 우연으로 발생한 것이다 - 들도 역시나 독자들이 트릭의 허점을 예측하기 힘든 정교한 트릭들이다. 그러나 현실이 아닌 추리소설의 세계인 이상 아무리 해결 불가능할 것 같은 최고 난이도의 트릭이라도 탐정에게 불가능이란 없는 법, 히무라는 명탐정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실낱같기만 한 트릭의 허점을 멋지게 파고들어 범인의 정체와 그 수법을 밝혀내고야 만다. 역시 트릭과 그 파해법(破解法)이라는 고전 추리소설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신본격 추리소설”에서 트릭의 중요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장치이자 재미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 평론가인 “쓰이데 이쿠테루”는 평론집 <탐정소설론>에서 “트릭은 탐정 소설 속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 재미의 중심축이란 수수께끼의 기발함과 논리 및 행동의 의외성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 책의 트릭은 기발함과 의외성을 모두 갖춘 “수준급” 트릭임에는 틀림없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평범한 사람이 이런 정교한 트릭을 구사한다는 점이나 또한 장소를 오인케 할만한 “쉬운” 트릭으로도 충분할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복잡한 트릭을 구사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들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또한 히무라의 추리도 사건의 정황은 분명하게 밝혀냈지만 범인에게 물적 증거까지는 제시하지 못해서 범인의 부인(否認)한다면 증거 불충분으로 법정 구속은 불가능한 그런 상황인데, 사랑했던 연인 앞에서 범인이 스스로 범죄 사실을 밝히는 상황으로 몰리자 결국 자수(自首)하고 마는 억지스러운 결론 또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홍색”은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을 해설한 “아스카베 가쓰노리”는 색채 미스터리의 가능성, 즉 '내용이 색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색이 내용을' 양성하는, 다시 말해 유전자가 다른 본격 추리소설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내가 과문한 탓인지 색채 미스터리라고 정의할 만한 점들은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추리소설하면 자연스레 선홍색 핏빛이나 범죄라는 단어에서 검은색이 주로 떠오르는데, 책 도입부 세상의 종말과 같은 강렬한 오렌지 색 노을에 대한 멋드러진 묘사 덕분에 다 읽고 나서 “주홍색” 이미지를 바로 떠올리게 하는 시각적 효과만큼은 뛰어났다고 할 수 있겠다.
뒷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은 강력한 인상은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절묘한 트릭과 복선이라는 추리소설 본연의 재미를 맛볼 수 있어서 처음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준, 또한 처음 만나는 작가에 대한 부담감을 완전히 없애준 멋진 작품이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역시 그의 명성이 허명은 아니었다. 그를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