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서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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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머 징크스(Sophomore Jinx)"

성공적인 첫 작품·활동에 비해 그에 이은 작품·활동이 부진한 경우를 가리키는 용어로 영화에서는 히트한 영화들의 후속편이 전편만 못하다는 의미로, 가수의 경우에서도 첫 번째 앨범의 성공하지만 두 번째 앨범은 그 명성을 따르기 힘들다는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스포츠에서는 신인 때 뛰어난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 2년차를 맞아서 부진했을 때 이 표현을 쓰는데 흔히들 “2년차 징크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데뷔작인 <고백(2008)>으로 일본 제29회 소설 추리 신인상 수상, 2009년 오리콘 차트 상반기 소설부문 1위, 2009년 일본 서점대상 수상작 등 각종 유명 문학상을 수상하고, 100만 부 이상 팔려 밀리언셀러에 이름을 올렸던 일본 여류 추리소설 작가 “미나토 가나에”가 어쩌면 소설 부문에서 “소포머 징크스”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데뷔작 이후 그녀가 발표한 <소녀>,<속죄>,<야행관람차>들은 한 편 한 편 놓고 보면 참 훌륭하고 재미있는 작품들인데, 워낙 <고백>에서 보여준 충격과 재미가 엄청났던 탓에 이후 작품들은 데뷔작인 <고백>이라는 잣대에 의해 평가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많은 독자들이 그녀의 후속작들에 대한 평가가 인색할 수 밖 에 없었으며, 나또한 그런 독자들 중에 한 명이었다. 작가도 이런 독자들의 시선과 평가에 부담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느 인터뷰에서 "오 년 후에는 <고백>이 대표작이 아니길 바란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에 출간된 그녀의 신작 <왕복서간(원제 往復書簡/비채/2012년 5월)>은 과연 그녀의 차기 “대표작”이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출간년도로는 <고백> 이후 5년 만인 2012년이지만 현지 일본에서는 2010년에 출간되었으니 아직 그녀가 바랐던 데뷔 후 5년 이후 작품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니 아직 차기 대표작 운운하기에는 이르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악의”와 “복수”라는 키워드로 대변되는 그녀의 작품 경향에서 “화해”와 “용서”를 통한 “감동” 코드라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전환점(轉換點)”이 될 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편지”라는 독특한 형식 - 서간문학(書簡文學) - 의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단편인 <십년 뒤의 졸업문집>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후 십년 만에 학창시절 같은 방송반에서 활동했던 동창생끼리인 “고이치”와 “시즈카”의 결혼식에 참여하게 된 “다카쿠라 에쓰코”가 결혼식 때 찍은 사진과 함께 방송반 시절 각본을 담당했던 친구 “다니구치 아즈미”에게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편지에는 1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반가움과 함께 과거 학창시절을 떠올리는 추억들이 담겨있는데, 한가지 거슬리는 게 느껴진다. 바로 같은 방송반 친구이자 학창시절 고이치의 연인이었던 “지아키”의 소식이다. 대학 시절에도 고이치와 연인 관계를 지속했던 지아키는 오년 전 여름 사고를 당해 얼굴을 다쳤고, 그 일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져서 고이치와 헤어지고는 훌쩍 종적을 감췄다는 것이다. 에쓰코와 아즈미의 편지는 계속되면서 5년 전 사고의 진실은 서서히 베일을 벗게 되고, 에쓰고는 이번 결혼의 당사자이자 지아키 사고의 결정적인 키를 쥐고 있는 시즈카에게도 편지를 보내 사건의 진상을 캐게 된다. 결국 마지막 편지에서 의외의 진실이 밝혀지고,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 받던 “에쓰코” - 에쓰코를 가장한 다른 “누구”였지만 - 는 편지들과 사건의 진상들을 졸업 문집 형식으로 만들어 오해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배포하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이처럼 오고 가는 편지를 통해서 오래전에 벌어졌던 사건의 진실이 천천히 베일을 벗고 마침내 뜻밖의 결말을 맺게 되는 방식은 정년 퇴임을 앞둔 여 선생님이 자신의 제자를 통해 오래전 사건을 겪은 여섯 제자의 안녕을 확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십 년 뒤의 숙제>와 중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오래된 연인이 남자가 외국으로 봉사 활동을 떠나면서 주고 받게 되는 편지를 통해 15년 전 벌어졌던 끔찍한 사건의 진실을 고백하는 과정을 그린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세 편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사건들, 즉 자신이 짝사랑해온 남자를 독점하는 친구에 대해 악의를 품게 되는 친구, 물놀이 중 위험해 처한 제자와 남편 중 누구를 구해야 하냐는 선택의 기로에 선 여선생, 15년 전 아직 철들기 전인 중학생 시절 화재 사고 속에 숨겨진 살인과 그것을 감추기 위한 의도적인 거짓말 등 어쩌면 끔찍한 사건일 수 도 있을 것이다. 특히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와 답장들을 통해 한 꺼풀 씩 벗겨지는 진실의 실체들에 조금씩 접근해 가는 과정이 꽤나 긴장감 있고 스릴 있어 절로 책에 몰입하게 만든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미나토 가나에” 소설들과 비슷한 그런 구성 - <고백>에서도 여러 등장인물들의 일기나 고백들을 통해서 진실에 접근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 을 보여주고 있어 각 편 말미에는 뭔가 충격적인 반전과 복수로 결말을 맺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그런데 작가는 분명 그런 자극적인 결말 대신 “용서”와 “화해”, 그것도 위선적이고 부조리한 그런 “거짓”이 아니라 “진실”된 용서와 화해, 배려의 결말이라는 “의외성”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기에 각 단편을 읽고 나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어떤 “훈훈한” 감동마저 느껴지게 만들고, 다 읽고 나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이 책이 과연 내가 알고 있는 <고백>의 작가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인가 싶어 다시 한번 책 표지에 있는 작가의 이름을 다시금 확인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 내면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점에서는 “미나토 가나에” 글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간의 그녀 작품들과 전혀 다른 경향의 결말에 그만 그녀의 이름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 이름과 <고백>이라는 중압감과 그늘 - 작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도 작품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고백>과 비교하게 되는 것이 꽤나 부담이 된다 - 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었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운 그런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재미가 없고, 밋밋하고 싱거운 느낌까지 드는 결말에 실망스러운 분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존의 “미나토 가나에” 식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재미와 감동을 맛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어쩌면 이 책이 그녀가 앓고 있었을 “소포머 징크스”를 스스로 잘 이겨내고 있다고 우리들에게 털어 놓는 “고백”과도 같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야구(野球)로 비유하자면 한가운데 빠른 직구만을 구사하던 2년차 투수가 이제 느린 커브와 변화구를 구사할 줄 알게 되면서 완급을 조절하고 보다 다채로운 투구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면 너무 과장된 해석일까? 그렇기에 “미나토 가나에”는 이미 정점을 찍어 갈수록 뒷걸음치는 그런 작가가 아니라, 또 다른 “완성”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녀의 바람대로 <고백>이후 오년 후인 2013년에는 <고백>을 능가하는 멋진 대표작을 선보여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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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라 - 상
후지타니 오사무 지음, 이은주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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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시절 반(班)에 한 두 명 씩 있었던 “예체능(藝體能)”계열 아이들은 “우리” - 여기서 “우리”란 인문계, 자연계로 구분하여 수험 준비를 했던 일반 학생들을 말한다 - 와는 “다른” 아이들이었던 것 같다. 보충수업에, 자율학습에 밤낮 없이 공부에 시달리던 우리들과는 달리 며칠씩 수업에 나오지 않다가 등교(登校)해서도 수업 시간에는 엎드려 잠을 자기 일쑤이고, 실기 시험 준비한다며 점심시간 이후에는 금세 사라져 버렸던 그 아이들은 부러움(憧憬)과 질시(嫉視)의 대상이자 앞서 말한 대로 우리와는 “다른” 그런 학생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우리 같은 “일반” 학생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던, 때로는 같은 반 친구이면서도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 본 친구가 없었을 정도로 존재감(存在感)이 약했던 친구들로 기억된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만나는 동창생들 중에서 그 친구들의 근황을 묻거나 알고 있는 친구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후지타니 오사무”의 음악 청춘 소설 <배를 타라 上,下(원제 船に乘れ /북폴리오 / 2012년 4월)>을 읽으면서 고등학교 시절 60 여 명의 학생들로 북적였던 교실 한 켠에서 유달리 말이 없고 조용했던, 지금은 이름은 커녕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졸업 앨범을 꺼내 놓고 한 참을 들여 봐야 찾을 수 있었던,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그” 친구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친구가 우리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우리들 못지않게 고뇌와 방황, 그리고 외로움으로 젊은 날을 보냈다는 것을 아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부모님을 제외하곤 외할아버지 내외와 외삼촌, 이모 모두 음악가인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사토루”)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하지만 “피아니스트”가 되기에는 역부족인 실력 탓에 (외)할아버님은 내게 중학생이면서도 체격이 좋고 가족 중에 아직 첼로 연주자는 없으니까 첼로를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고, 나 또한 “명령”같기만 한 할아버님 말씀에 따라 첼로를 배우기 시작한다. 음악을 하려면 예대에 가는 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었고 그 외 학교는 모두 이류라는 생각이 집안의 불문율과 같았기 때문에 당연히 예고 입시를 준비하지만 다른 학과 성적이 너무 나빠 그만 낙방하고는 할아버님이 음악 대학 학장으로 계셨던 “신세이” 대학 계열의 음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예고와는 비교가 안 되는 “3류” 수준의 음악 학교인지라 나의 첼로 실력은 1학년 신입생임에도 불구하고 두각을 나타내고, 나는 학교 연례행사인 “오케스트라” 멤버로 참여하고 학교 축제 연주회에 참여하는 등 바쁜 학창 생활을 보낸다. 그러던 중 입학할 때부터 한 눈에 들어왔던,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동급 여학생 “미나미”와도 풋풋한 로맨스를 시작하게 된다. 어렵기만 했던 멘델스존 피아노 협주곡을 미나미와 함께 연주하고, 오페라를 함께 관람하며 둘 만의 데이트를 하게 된다. 특히 신세이 고등학교에서는 드물다고 할 수 있는 예대 진학을 한 선배에게 자극받아 나와 미나미는 예대 진학을 목표로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연습을 하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둘의 사랑은 갈수록 커져만 간다.

 

그런데 이렇게 행복할 줄 만 알았던 학창 시절은 2학년 여름방학 끝나고 나서부터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독일에서 거주하던 외삼촌과 숙모의 제의로 두 달 여 동안 독일에서 첼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나를 그 누구보다 반가워 해줄 줄 알았던 미나미가 나의 시선을 슬슬 피하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어도 답변을 하지 않는 미나미는 결국 학교를 그만둬 버리고, 사연을 알게 된 나는 깊은 절망감에 빠져 버린다. 그리고는 결국 나를 아껴줬던 선생님을 누명을 씌워 학교에서 내쫓게 만드는 일까지 저지르게 된다. 모든 것이 어그러진 상황, 3학년이 된 나는 결국 앞으로의 내 음악 인생에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음악마저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어쩌면 나의 마지막 연주가 될 지도 모르는 오케스트라와 3학년들 동급생들로 구성된 미니 오케스트라 연주에 열중한다.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미니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는 날, 학교를 그만뒀던 미나미가 바이올린 연주를 위해 교복을 다시 입고 공연장에 나타난다. 미나미 또한 자신의 삶에서 마지막 연주가 될 지도 모르는 이 공연에 참석하고 싶어 친구를 통해 연습 테이프를 들어가며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공연 후 다시 사라져 버린 미나미에게서 미안하고 고마웠다는 편지를 받은 나는 이제야 미나미와 완전한 이별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모함으로 학교를 그만 둔 선생님을 찾아가 사죄를 한다. 선생님은 용서는 할 수 없지만 이해는 하시겠다며 나에게 “배를 타라”로 시작되는 니체의 책 한 구절을 선물한다. 나의 청춘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이처럼 책은 주인공인 사토루가 음악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을 그린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음악 소설”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악기 연주와 협연 장면들이 꽤나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취재를 통해서 구성한 것 같진 않고 혹시 작가가 실제로 음악을 전공했던 사람이 아닐까 싶어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니 역시나 주인공처럼 실제로 센조쿠가쿠엔 고등학교 음악과를 전공했다고 한다. 또한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작가 스스로도 트라우마였기에 쉽게 들추어낼 수 없었다고 고백한, 자전적인 스토리를 담은 소설이라고 하니 어쩌면 작가의 경험을 고스란히 녹아냈기에 오케스트라 연주나 협주, 그리고 첼로, 기타 악기들의 연주 모습을 이렇게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구나 하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되었다. 또한 십대 후반 고등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그 시절의 방황과 고민, 불안한 심리 상태 등을 치밀하게 그려내는데, 이 또한 관찰자가 아닌 작가 스스로의 경험이었기에 그렇게까지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은 은밀한 즐거움과 함께 절로 감정이입이 되면서 주인공과 미나미의 풋풋한 사랑에 입가에 미소를 짓다가도 갑작스레 닥친 상황에 함께 가슴 아프고, 마지막 공연에 나타난 미나미의 모습에 주인공처럼 가슴 먹먹한 아픔을 느끼다 보니 어느새 800 여 페이지 가까운 만만치 않은 분량을 다 읽고야 말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는 귓가에 계속 맴도는 클래식 선율 - 물론 책 속에 나오는 클래식 음악들 중 제대로 아는 음악은 거의 없었지만 - 의 여운에 한동안 자리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신의 일기장과 같은 이 글을, 스스로 트라우마처럼 여겼던 상처를 왜 이렇게 소설로 드러내야 했을까? 어쩌면 꼭꼭 숨겨둔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이제는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작가는 “배를 타라”라는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배를 타면 흔들린다. 파도에 흔들리기 때문에 뱃멀미를 한다.

뱃멀미를 하는 건 괴롭다. 그래서 파도가 잦아들기 바라지만 파도는 잦아들지 않는다. 파도가 잦아들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바다가 평온해 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뱃멀미는 언제가 없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흔들림은 언제까지나 계속된다. 뱃멀미가 사라졌을 때 배가 더이상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른들의 거짓말이다. 어른은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한다. 그것도 자신보다 젊은 사람에게. 뱃멀미가 사라졌다고 해서 배가 계속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해도 잊어서는 안 된다. - 하권 P. 362~363

 

인생은 흔들리는 배를 타는 것과 같다고, 처음에 나를 괴롭히던 멀미야 어느 순간 사라지겠지만 배는 계속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라고, 청춘은 흔들리는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하지만 그런 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 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작가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흔들리는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 삶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고 책의 마지막 구절에서 말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시간의 흐름은 오로지 인생을 쇠퇴시킬 뿐이라며 한탄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인생은 지금부터라든가 살다보면 좋은 일도 있다는 경솔한 말을 입 밖에 낼 정도로 살아오지도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 시절과 비교해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됐다.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파도에 흔들리면서 항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하권 P.368

 

그런데 이 마지막 구절을 읽자 의문이 하나 들었다. 과연 이렇게 끊임없이 파도에 흔들리면서 계속되고 있는 항해의 최종 도착점은 어디일까? “트루먼”(짐 캐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쇼>)처럼 거짓된 세계에서 벗어나 진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마주하게 될까 아니면 인생에서의 모든 고통과 번민을 벗어나 편안한 안식을 얻게 되는 일종의 “깨달음”의 경지일까? 그 항해의 목적지를 찾는 것은 바로 우리들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러기에 작가도 “그것으로 됐다”로 마무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음악 소설이라는 색다른 소재가 주는 재미와 성장소설의 감동, 두 가지 모두를 맛볼 수 있었던, 그리고 다 읽고 나서도 귓가에 계속 맴도는 클래식 선율처럼 여운이 오래 남는 책이었다. 다음에는 책 속에 나오는 클래식 음악들을 맞춰 들으면서 읽어봐야겠다. 머릿 속으로 상상했던 음악과 실제 연주 음악은 어떻게 다른 지, 또한 어떤 감동을 줄 지 자못 기대가 된다.

 

끝으로 절친한 동창에게서 서두에서 언급했던 바이올린 전공했던 친구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연락처만 주고 받고 헤어진 터라 자세한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다는 데, 음악은 대학 때 포기하고 지금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고 한다. 간단한 근황이지만 그 근황 속에 그 친구도 만만치 않은 흔들림과 뱃멀미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다음 동창회 때 나오기로 약속했다니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셈이다. 학창 시절 변변히 이야기 한 번 못나눴던 내가 먼저 아는 척 하려니 머쓱하기도 하지만 흔들리는 배를 타고 인생을 항해하는 동지로서 그를 반갑게 맞이할 생각이다. 동창회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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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헤븐
장정욱 지음 / 책나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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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Time Machine)”을 소재로 한 SF 소설 감상글에서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시간으로 가보고 싶냐는 질문에 내가 읽은 책에서 작가는 우리 삶에서 가장 불행했던 순간이라고 답한다. 행복했던 추억보다는 회한(悔恨)이 더 인상 깊고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며 혹시라도 타임머신을 통해 그런 과거를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읽은 우리나라 SF 소설인 “장정욱”의 <프로젝트 헤븐(책나무/2012년 4월)>은 타임머신이 아닌 가상현실세계인 <프로젝트 헤븐>을 통해서 과거로 여행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책에서도 가상 체험하게 되는 과거는 여주인공이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는 가장 불행했던 순간으로 설정한다. 다만 가상세계와 현실세계가 중첩(重疊)되는 영화 <매트릭스>를 연상시키는 세계관과 남녀 주인공의 이룰 수 없는 로맨스가 주(主) 내용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인 2027년, 경찰을 그만 두고 졸지에 백수가 되어 버린 “유찬”에게 메일이 한 통 날아온다. 바로 정부에서 시험 운영 중인 “프로젝트 헤븐”이라는 가상 체험 세계 테스터에 선정되었다는 메일이었다. 신청한 적이 없던 터라 어리둥절했지만 꼭 당첨되길 기원했지만 떨어져 버린 친구 “현서”의 부러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또는 하릴없이 빈둥대야만 하는 백수 생활에서 도피라도 하듯 “헤븐”에 접속한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테스터들은 저마다의 과거로 여행을 떠나고, 유찬 또한 어디론가의 시간대로 들어가는 데 이런 웬걸 자신의 과거가 아닌 테스터 중 한 명의 과거로 들어가 버린 것이 아닌가. 그 테스터는 헤븐의 개발 책임자의 조카였던 “이연”의 과거였다. 어린 시절 사고로 다리를 다쳐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던 그녀였던 지라 삼촌이 그런 조카를 위해 가상 세계에서나마 두발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행복을 주기 위해 그녀를 테스터로 임명한 것이다. 찬과 연이 마주한 과거는 이연이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즉 어머니가 연을 버리고 떠났던 7살 시절의 과거였다. 아픈 과거를 공유하게 된 탓일까? 연과 찬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결국 가상현실이 아닌 실제 현실에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런데 설레는 마음에 약속장소에 나간 둘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서로를 기다렸음에도 만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수 시간이 지났음에도 만나지 못한 둘은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게 되지만 그리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연의 과거로의 여행을 계속하게 된다. 한편 찬의 친구 현서는 “헤븐”을 해킹하는 과정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지만 헤븐의 해킹을 감시하던 “당국”에 의해 그의 사무실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고, 현서 또한 사라져 버린다. 이상한 것은 현서의 실종을 친구에게 알리지만 친구는 현서 존재 자체를 모르는 듯 현서가 누구냐고 되묻는 것이다.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현서가 남긴 글이 인터넷에 확산되어 버리면서 비로소 엄청난 진실이 밝혀지고, 세상은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 과연 “프로젝트 헤븐”과 현서가 알아냈다는 또 하나의 가상현실 “노어(NOR)"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찬과 연의 로맨스는 어떻게 결말이 날까? 여기서 더 소개하자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만큼으로 줄이자.

 

책은 이처럼 가까운 미래에 가상현실 세계인 “프로젝트 헤븐“ 테스터에 참여하게 된 남자 주인공 “찬”이 뜻하지 않게 여주인공 “연”의 과거 여행에 참여하게 되고, 아픈 사연을 공유하면서 사랑이 싹트는 이야기로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단순히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쯤이겠거니 했던 이야기가 “프로젝트 헤븐”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면서 일대 급진전하여 가상과 현실이 “헤븐”이라는 세계에서 중첩하게 되는 이야기로 발전하고 남녀 주인공의 사랑도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애절한 로맨스로 막을 내린다. 이처럼 가상과 현실 세계라는 이중적인 세계의 접합은 앞서 말한 대로 영화 <매트릭스>와 여러 SF 소설의 단골 소재인지라 익숙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작가는 “에피메니데스 역설(Epimenides’ Paradox)” - “거짓말쟁이의 역설(Liar’s Paradox)” 이라고도 하며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을 말한다"는 명제로 참과 거짓이 무한 반복하게 되는 역설로 유명하다 - 을 연상시키는 ”A와 B, 모두 거짓일 때 비로소 참이 된다”는 역설로 가상세계와 현실세계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참 특이하고 참신하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여주인공 연의 사연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가 사실은 우리의 기억으로 창조해낸 거짓된 과거일 수 있다는 의미 전달도 꽤나 색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200 페이지 밖에 되지 않은 단편 소설에 불과한 짧은 분량에 거대한 세계관을 담다 보니 가상세계인 “프로젝트 헤븐”과 “노어”의 구축 목적이나 배경이나 한정된 등장인물 등 많은 이야기들이 생략될 수 밖에 없어 좀 더 긴 호흡으로 장편의 이야기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야기를 너무 축약해서 담아낸 것 같아 아쉬움은 남지만 참신하고 독특한 이야기임에는 분명한 재미있는 SF 소설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반전은 어쩌면 이 책 자체가 아니라 이제 고등학교 3학년(1994년 생)에 불과한 “작가” 그 자체 - 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했다고 한다 -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어린” 친구가 쓴 작품 - 작가는 기분 나쁠 수 도 있겠지만 그 나이에 이런 성취를 보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은 중년 남성의 부러움 쯤으로 받아들여주기 바란다 ^^ - 이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었는데, 다 읽고 나서 작가의 이력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후에 멍한 충격마저 느껴졌다. 몇 몇 청소년 작가들 작품 - 솔직히 감탄보다는 유치함을 더 많이 느꼈었다 - 읽어봤지만 그들 작품 중 가장 발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작가라고 평가하고 싶다. 사실 작품 자체로만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살짝 부족해서 별점을 박하게 줄까 하다가 작가의 이력을 알게 되고는 놀라움과 감탄에 만점을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별점 하나는 앞으로 펼쳐 보일 작가의 미래 작품들을 위해 아껴둬야 할 것 같다. 앞으로도 멋진 작품들을 선보여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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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대폭발 1 나남창작선
로재성 지음 / 나남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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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18일 “국립방재연구원”- 사실 이전까지는 이런 기관이 있었는지 존재조차 몰랐었다 - 에서 보도자료 한 건을 발표했고 인터넷 신문들이 이 자료로 도배하다시피 한 적이 있었다. 보도 자료 내용은 바로 “백두산 화산 폭발” 모의실험 결과였다.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과 국립해양대기청(NOAA)의 ‘유해물질 확산 대기모형(ALOHA)’에 따라 실시한 모의실험 결과에 따르면 겨울에 백두산이 폭발한다면 8시간 만에 화산재가 울릉도를 뒤덮고 12시간 뒤에는 일본에 도달해 동북아의 항공운항이 마비된다는 관측이 나왔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2012년 2월 20일 KBS 교양 프로그램 <과학 카페; 236회 사이언스 이슈 “백두산 화산 대폭발”>편에서 이 내용을 다시 한번 다루었는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백두산 폭발 규모를 2010년 4월에 있었던 아이슬란드 화산폭발의 수십 배 정도의 규모가 될 것이며, 특히 백두산 천지에 담긴 20억 톤의 물이 지하 마그마와 만나게 되면 수증기와 화산재를 뿜어내는 초대형 화산폭발로 이어질 가능성 또한 제기되고 있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백두산 폭발”이 그저 흥미 거리의 과학적 이슈였으면 좋겠지만 실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 예로 최근 몇 년 사이 백두산 주변에 지진이 급증하고 있는데, 특히 2002년을 기점으로 한해 수백 회 이상 발생빈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하며, 백두산 높이가 2002년 이후 마그마 웅덩이가 팽창해 약 10cm가 높아졌고, 2006년 10월 1일 러시아 인공위성은 백두산 표면 온도가 확연하게 높아졌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런 관측 결과를 토대로 남한 지질학자는 백두산이 2, 3년 이내에 폭발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양강도와 함경북도 주민들이 백두산 화산 폭발을 걱정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북한 당국이 빠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고 하니 남북한 모두 백두산 폭발 가능성에 대해서는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백두산이 폭발하면 동북아에 재앙 온다”, 한국일보. 2012.5.4. 발췌). 어쩌면 “백두산 폭발”은 근시일 이내에 우리들에게 일어날 가장 실현 가능한 “대재앙(大災殃)”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실제 일어난다면 우리에게는 “종말론(終末論)”적인 끔찍한 재앙이지만 소설이나 영화 속 상상이라면 이보다 더 경이롭고 스펙터클 - 차마 “재미있는” 이라고는 말을 못하겠다 - 한 사건이 또 어디 있을까? 이런 백두산 폭발을 소재로 한 소설을 최근에 만났다. 우리나라 작가인 “로재성”의 <백두산 대폭발 1,2(나남/2012년 4월)>이 바로 그 책이다.

 

2016년 2월 8일 백두산 기슭 북서쪽 방향에 새롭게 건설한 인구 20 만명 규모의 도시 “보하이(渤海)” 시에서 제 8회 동계 아시안게임 개막식이 화려하게 열린다. 사실 이번 아시안게임은 2년 뒤 열리는 한국의 평창 동계올림픽의 김을 빼고 백두산이 중국 것이라고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날짜까지 변경하면서 개최하는 대회이지만 가장 큰 이슈는 임박한 것으로 알려진 백두산 화산 폭발 소문을 무마하기 위한 대회이기도 했다. 대회가 열리는 동안 알 수 없는 이상 현상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백두산 인근 북한의 함경도와 량강도 일대에서수천 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의 동상들과 사진, 기념물들이 일제히 내륙으로 옮겨지는 하는 장면들이 미국 인공위성에 포착된 것이다. 또한 백두산 폭발시 쏟아지는 용암과 화산재를 피해 스노모빌과 설상차를 이용해 죽음의 경주(競走)를 하는 이른바 “데스 카니발”을 위해 익스트림 스포츠 선수들이 보하이 시에 속속들이 모여 들고, 백두산이 폭발하는 예수가 재림(再臨)한다는 사이비 종교의 8천 여 명에 이르는 신도들도 모여 든다. 이런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한국의 대표적인 화산 전문가이자 백두산 폭발이 임박했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온 “임영민” 교수가 변사체로 발견되고, 백두산 폭발을 주제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와 몇몇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된다. <한성일보> 열혈 여기자이자 한국 굴지의 대기업 백두개발 “황우반” 회장의 예비 약혼녀인 “오수지”는 기자생활 마지막 특종을 잡기 위해 임영민의 아들이자 대학 동창생이기도 한 “임준”과 함께 임영민의 죽음과 백두산 폭발의 진상을 캐기 시작한다. 또한 국정원 대북정보팀 또한 점점 가능성이 높아지는 백두산 폭발을 대비하기 위해 보하이 시에 모여든 한국인 대피 계획을 세우고 임영민의 죽음을 수사하면서 북한의 계속되는 이상 징후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남북한 공작원들과 이번 동계아시안게임과 백두산 폭발로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황우반 회장의 세력들, 백두산 일대에 대규모 투자를 한 중국 기업가 세력 등등 여러 세력들이 얽히고 설켜 물 밑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오수지와 임준도 수차례 납치되었다가 풀려나는 등 생사를 넘나드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여러 사건들 끝에 2016년 2월 15일 동계 아시안 게임은 7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폐막식이 열린다. 그런데 그 순간, 백두산이 대폭발을 일으킨다. 거대한 구름이 하늘로 치솟고, 지진과 산사태로 인근 도시들이 쑥대밭이 되고 용암과 화산 쇄설물들이 백두산 자락을 타고 흘러 내려와 인근을 덮치게 된다. 여기에 지진으로 영변의 핵시설이 붕괴되면서 엄청난 방사성 물질들이 화산재와 함께 편서풍을 타고 백두산 인근 일대와 일본까지 덮치게 되고, 수풍댐이 붕괴되면서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 마을 또한 물에 잠기며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발생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진으로 인해 내진 설계가 되어 있지 않은 수많은 건물들과 아파트, 주택들이 무너져 내리고 소양감 댐마저 붕괴되면서 수도권 일대는 물바다가 되어 버린다. 백두산 폭발 전 남침(南侵)을 계획했던 북한 지도부는 김정은이 머물던 삼지연 별장에 화산재와 용암이 들이 닥쳐 실종되면서 흐지부지되지만 일부 특수부대의 준동으로 서울 일대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난다. 여기에 북한 지도부가 의도적으로 조장한 수백만 명의 난민들이 휴전선을 밀고 내려오면서 경기북부와 인천, 강화도, 서해 5도 일대는 아수라장이 된다. 이런 대혼란 속에서도 데스 카니발 경기는 예정대로 개최되고, 수많은 선수들이 용암과 화산재, 지진에 의해 죽으면서도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유투브로 생중계되는 이 죽음의 질주에 전 세계 사람들은 열광하고, 도박 자금도 천문학적인 액수에 다다르게 된다. 한쪽에서는 수백만 명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재앙이겠지만 한쪽에서는 생사를 건 극한의 유희(遊戱)가 벌어지는 인세(人世)의 지옥(地獄)이 백두산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 작가가 책 첫머리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이 우리나라 최고의 화산학자인 “윤성효” 교수 - 앞서 말한 2,3년 내 백두산 폭발 가능성을 전망한 학자이기도 하다. 작가는 두 번 읽고 고쳐 주셨다고 밝히고 있다 - 의 감수(監修)로 백두산 폭발 후 남북한, 중국, 일본에 불어 닥칠 대재앙의 모습을 대단히 현실감 있고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줄거리 소개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가상 도시 “발해” - 천 년 전 발해 멸망이 바로 백두산 화산폭발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하니 중의(重義)적인 의미가 내포된 설정인 듯 하다 - 가 백두산 폭발로 인해 쏟아지는 암석들과 화산재, 용암, 지진으로 쑥대밭이 되고, 백두산 동쪽인 북한 지역도 초토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들을 마치 재난 영화 한편을 보는 것처럼 시각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북한의 영변 핵시설이 지진에 의해 붕괴되면서 방사능 물질이 쏟아져 나와 일대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 버리고, 일본까지 영향을 미치는 장면은 마치 지난해 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자로 대참사를 연상시켜 끔찍하게까지 느껴진다. 이처럼 한반도 일대를 종말론적 상황까지 처하게 만드는 백두산 대폭발이 얼마나 위험하고 공포스러운지를 작가는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여느 기사나 교양 프로그램보다도 더 생생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백두산 대폭발에 따른 대참사에 대한 묘사는 참 뛰어난 데 이야기(Story)는 많이 아쉽다. 작가는 과학적 팩트만을 늘어놓는 딱딱한 내용보다는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된 장편소설이 쓰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데, 너무 많은 이야기와 비현실적인 전개와 결말이 결국 “과잉”이 되어 버린 셈이 되었다. 주인공인 오수지와 임준은 툭하면 납치되었다가 풀려나고 대재난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생존한다. 여기에 임준의 아버지나 북한 화산학자 이수근은 이야기 전개에 따라 죽음과 생존을 반복해서 역시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연쇄살인을 저지른 “킬러”는 두 주인공을 노리지만 어이없게 붙잡혀 버려 긴장감이나 스릴은 커녕 실소까지 자아내게 만든다. 등장인물 뿐만 아니라 여러 상황들도 마찬가지이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나 영변 핵시설 장면들은 책에서 묘사한 것처럼 비참하고 끔찍한 상황이겠지만 그다지 그렇게 상세한 묘사나 설명이 필요 없는 역시나 “과잉”이고, 오수지의 약혼자이자 임준과 갈등관계를 형성하는 “황우반”의 음모나 임준과의 관계도 애매모호하게 이어지다가 막판에 이르러야 밝혀지는데 그다지 설득력이나 공감이 느껴지지 않으며, 이 책에서 가장 극적인 재미를 주는 설정이라 할 수 있는 “데스 카니발”은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현실에서는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설정 - 수백만 명이 죽어 나가는 대참사 현장에서 목숨을 건 익스트림 스포츠 대회를 연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될까? -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백두산 폭발을 둘러싼 남북한 공작원과 중국 첩보 조직의 암투, 백두산 폭발을 타개하기 위한 북한의 남침 계획이나 난민 작전, 대폭발 후 북한 권력층 내부 갈등과 특수부대에 의한 게릴라전, 중국과 남한, 미국의 군사적 대립 등등 백두산 폭발을 제외하고 이런 이야기들만으로도 책 한권 분량은 족히 나올 법한 참 흥미롭고 재미있을 이야기들인데, 이 많은 내용을 한꺼번에 담으려다 보니 설정 하나 하나의 스릴과 재미를 살리지 못하고 그만 어정쩡한 이야기들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곁가지의 이야기와 등장인물은 삭제하고 재난 소설 특유의 재미와 감동, 즉 대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공포와 절망감, 그런 가운데에서 피어나는 휴먼 드라마적인 감동을 살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장면 전환에 있어서도 분명한 구분이 되지 않는데, 시간대별, 장소대별로 표기 - 예를 들어 “2012년 2월 17일 PM 2:35, 함경북도 영변” 형식으로 말이다 - 를 했었으면 좀 더 현실감을 살리고, 시간과 장소 장면 전환에 있어서 명확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공들여 쓴 작품을 올곧이 즐기지 못하고 평가 절하하는 것 같아 작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에 불과한 글이고, 다른 곳도 아닌 민족의 성산(聖山)인 백두산이 대폭발을 일으킨다면 그 재난을 겪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남이 아닌 “우리”들이기에 좀 더 관심과 애정이 갈 수 밖에 없어서 쓴소리를 했겠거니 하고 너그러이 이해해주길 부탁드린다. 그리고 이야기 면에서 아쉽기는 하지만 백두산 대폭발로 야기되는 참상에 대한 묘사 만큼은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는 것처럼 생생하고 사실감 넘치니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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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어 1 줄리애나 배곳 디스토피아 3부작
줄리애나 배곳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2012년 1월 25일부터 29일까지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렸던 “세계경제포럼(WEF, 다포스 포럼)” 관련 기사를 읽다가 낯익은 단어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이 포럼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된 5개 키워드 중 하나였다는 “디스토피아(Dystophia)"란 단어였다. 현실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묘사하는 유토피아(Utopia)와는 반대로,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작품 및 사상(네이버 발췌)을 가리킨다는 이 단어가 세계 지도자들이 모이는 이 포럼의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 사회의 위험과 모순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즈음 들어 종말론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미래를 그리고 있는 SF 소설이나 영화들도 하나같이 어둡고 암울한 미래 일색인 것이. 이번에 읽은 ”줄리애나 배곳“의 판타지 소설 <퓨어 1,2(원제 Pure/민음사/2012년 4월)>도 이처럼 어둡고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고 있다.

 

시대를 알 수 없는 어느 미래, 원인을 알 수 없는 대폭발이 일어난다.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후 하늘은 겹겹이 싸인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고 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내려 검은 물웅덩이가 곳곳에 생겨났으며 공기는 재와 먼지로 탁해진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온전히 가지고 있지 않은 기형(奇形)이 되어 버린다. 강력한 열기와 방사능에 의해 가까이에 있었던 각종 사물들과 짐승들, 심지어 자신의 동생이나 자녀들과 신체체가 융합(融合)해 버렸기 때문이다. 비단 사람들 뿐만 아니라 동식물들도 오염된 물과 음식, 공기 때문에 유전자 변형을 일으키게 된다. 생존자들은 이런 끔찍한 환경을 견디며 절망 뿐인 삶을 이어간다. 한편 이런 환경과 완벽하게 차단된 “돔(Doom)"에서 온전한 신체를 가졌기에 ”퓨어(Pure)"라 불리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대폭발 후 절망하는 외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온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여러분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언젠가 우리는 ‘돔’에서 나와 여러분과 평화롭게 공존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멀리서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이런 메시지를 담은 쪽지는 외부 생존자들에게 처음에는 화폐처럼 귀한 대접을 받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후로 오랫동안 삶은 그렇게 흘러갔다.

 

돔의 “바깥”세상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아가던 소녀 “프레시아”는 16세 생일을 얼마 앞두고 혁명군의 강제 징집을 피해 자신의 집의 낡은 캐비닛에서 숨어 살고 있다. 프레시아는 대폭발 당시 들고 있던 인형의 머리가 손에 융합되면서 인형 손이 되어 버렸다. 그 인형 손이 싫어 칼로 잘라 내려다가 결국 손에 상처만을 입고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의 손을 조심스레 꿰매준다.

 

돔의 “안쪽” 세계에 살고 있는, 돔의 실력자의 아들인 18세 소년 “패트리지”는 일정 나이가 되면 시술받게 되는 “코딩”에 거부 반응이 생겨 아버지가 근무하는 의료센터에서 각종검사를 받다가 사무실 벽면에 걸려 있는 돔 설계도 원본을 보게 되고 설계도를 배경으로 아버지와 사진을 찍게 된다. 그는 세계사 현장 수업날 방문하게 된 “유물 보관소”에서 대폭발 후 돔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가신 걸로 알려진 어머니의 유품을 살펴 보다가 어머니가 자신에게 남긴 생일 카드에서 메시지를 발견하고는 어머니께서 “바깥” 세상에서 살아 계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아버지 사무실에서 찍은 설계도 사진을 꼼꼼히 살펴본 그는 결국 환풍기를 통해 돔을 탈출해 “바깥”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혁명군의 눈을 피해 숨어 살던 프레시아는 자신이 살던 옛집을 찾아 거리를 방황하던 패트리지를 만나게 되고 그를 돕기 위해 비밀 모임에서 만났던 소년인 “브레드웰에게 데려간다. 패트리지의 옛 집이 위치했던 거리를 찾아 나선 세 명은 그 곳에서 패트리지 어머니의 존재를 알고 있던 할머니를 만나게 되지만 알 수 없는 소리만 들은 채 인간 사냥꾼들의 추적을 피해 다른 건물 지하로 숨게 된다. 얼마 후 소란이 잠잠해지자 바깥 동정을 살피고 할머니를 다시 만나러 밖으로 나온 프레시아는 그만 근처를 수색하던 혁명군에 의해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가게 된다. 프레시아가 자신 때문에 잡혀갔다고 자책하는 패트리지와 프레시아 할아버지 부탁 때문에 그녀를 돕는다는 브래드웰, 이 두사람은 프레시아와 패트리지의 어머니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과연 인류를 멸종 위기까지 몰고 온 대폭발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패트리지에게 남긴 어머니의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는 어떤 의미일까?

 

1, 2권 700 여 페이지에 이르는 만만치 않은 분량의 이 책, 읽기가 꽤나 어려웠던 책이었음을 먼저 밝혀둬야겠다. 대폭발 이후 비참하고 끔찍한 상황들을 너무 사실적이고 세세하게 묘사해서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형, 새, 자동차 모터, 콘크리트, 인형, 총, 칼 등 각종 사물과 융합된 사람들, 자신의 동생과 몸이 융합된 형, 자신의 아이와 융합된 어머니, 괴물로 변해 버린 사람들 등 “바깥”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끔찍한 모습 일색으로 변형되어 버리고, 그들은 오염된 땅과 물, 공기를 마시며 하루하루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책이 "YA(Young-Adult)" 판타지 소설이라고 들었는데 청소년들이 보기에는 너무 어둡고 끔찍한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암울한 미래 분위기 때문인지 작가에게 <로드(The Road)>의 작가인 “코맥 매카시에 비견될 작가”라는 평가가 붙는다고 하는데, <로드>가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간접적인 배경 묘사로 자연스럽게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면 이 책은 너무 사실적이고 세세한 직접적인 묘사로 연출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물론 문학적인 성취는 논외로 하고 말이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꽤나 탄탄하고 스릴과 재미, 모두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는 끔찍한 묘사들이 거북스럽기까지 했지만 남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패트리지”가 돔을 탈출하여 “바깥”의 소녀 “프레시아”를 만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자 어느새 그런 거북스러움도 익숙해져 버리고, 이야기도 슬슬 재미있어지면서 읽는 속도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다. 특히 어떤 이유로 혁명군에 끌려갔던 프레시아가 패트리지 일행과 합류해서 계속되는 위험을 헤쳐 나가며 패트리지 어머니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고,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와 재회하고 마침내 모든 음모와 비밀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휘몰아치듯 긴급하게 전개되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책에서 눈을 쉽게 떼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이야기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돔을 향한 반란이라는 희망이라는 상반된 두가지 결말, 모두를 내포한 채 막을 내린다. 그래서 3부작 시리즈의 후속편들에서는 그런 희망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것이라는 기대를 절로 하게 만드는 그런 결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책장을 덮고 나서도 이 책의 어둡고 잔혹한 이미지가 쉽게 가시지가 않는다. 이처럼 이 책, “이야기” 자체보다도 이런 어둡고 끔찍한 이미지가 훨씬 여운이 남는 그런 소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올해 들어 읽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의 SF, 판타지 소설들 중에서 이야기의 호불호를 떠나서 이런 이미지만큼은 가장 강렬하고 인상 깊었던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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