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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서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평점 :
“소포머 징크스(Sophomore Jinx)"
성공적인 첫 작품·활동에 비해 그에 이은 작품·활동이 부진한 경우를 가리키는 용어로 영화에서는 히트한 영화들의 후속편이 전편만 못하다는 의미로, 가수의 경우에서도 첫 번째 앨범의 성공하지만 두 번째 앨범은 그 명성을 따르기 힘들다는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스포츠에서는 신인 때 뛰어난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 2년차를 맞아서 부진했을 때 이 표현을 쓰는데 흔히들 “2년차 징크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데뷔작인 <고백(2008)>으로 일본 제29회 소설 추리 신인상 수상, 2009년 오리콘 차트 상반기 소설부문 1위, 2009년 일본 서점대상 수상작 등 각종 유명 문학상을 수상하고, 100만 부 이상 팔려 밀리언셀러에 이름을 올렸던 일본 여류 추리소설 작가 “미나토 가나에”가 어쩌면 소설 부문에서 “소포머 징크스”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데뷔작 이후 그녀가 발표한 <소녀>,<속죄>,<야행관람차>들은 한 편 한 편 놓고 보면 참 훌륭하고 재미있는 작품들인데, 워낙 <고백>에서 보여준 충격과 재미가 엄청났던 탓에 이후 작품들은 데뷔작인 <고백>이라는 잣대에 의해 평가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많은 독자들이 그녀의 후속작들에 대한 평가가 인색할 수 밖 에 없었으며, 나또한 그런 독자들 중에 한 명이었다. 작가도 이런 독자들의 시선과 평가에 부담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느 인터뷰에서 "오 년 후에는 <고백>이 대표작이 아니길 바란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에 출간된 그녀의 신작 <왕복서간(원제 往復書簡/비채/2012년 5월)>은 과연 그녀의 차기 “대표작”이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출간년도로는 <고백> 이후 5년 만인 2012년이지만 현지 일본에서는 2010년에 출간되었으니 아직 그녀가 바랐던 데뷔 후 5년 이후 작품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니 아직 차기 대표작 운운하기에는 이르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악의”와 “복수”라는 키워드로 대변되는 그녀의 작품 경향에서 “화해”와 “용서”를 통한 “감동” 코드라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전환점(轉換點)”이 될 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편지”라는 독특한 형식 - 서간문학(書簡文學) - 의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단편인 <십년 뒤의 졸업문집>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후 십년 만에 학창시절 같은 방송반에서 활동했던 동창생끼리인 “고이치”와 “시즈카”의 결혼식에 참여하게 된 “다카쿠라 에쓰코”가 결혼식 때 찍은 사진과 함께 방송반 시절 각본을 담당했던 친구 “다니구치 아즈미”에게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편지에는 1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반가움과 함께 과거 학창시절을 떠올리는 추억들이 담겨있는데, 한가지 거슬리는 게 느껴진다. 바로 같은 방송반 친구이자 학창시절 고이치의 연인이었던 “지아키”의 소식이다. 대학 시절에도 고이치와 연인 관계를 지속했던 지아키는 오년 전 여름 사고를 당해 얼굴을 다쳤고, 그 일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져서 고이치와 헤어지고는 훌쩍 종적을 감췄다는 것이다. 에쓰코와 아즈미의 편지는 계속되면서 5년 전 사고의 진실은 서서히 베일을 벗게 되고, 에쓰고는 이번 결혼의 당사자이자 지아키 사고의 결정적인 키를 쥐고 있는 시즈카에게도 편지를 보내 사건의 진상을 캐게 된다. 결국 마지막 편지에서 의외의 진실이 밝혀지고,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 받던 “에쓰코” - 에쓰코를 가장한 다른 “누구”였지만 - 는 편지들과 사건의 진상들을 졸업 문집 형식으로 만들어 오해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배포하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이처럼 오고 가는 편지를 통해서 오래전에 벌어졌던 사건의 진실이 천천히 베일을 벗고 마침내 뜻밖의 결말을 맺게 되는 방식은 정년 퇴임을 앞둔 여 선생님이 자신의 제자를 통해 오래전 사건을 겪은 여섯 제자의 안녕을 확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십 년 뒤의 숙제>와 중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오래된 연인이 남자가 외국으로 봉사 활동을 떠나면서 주고 받게 되는 편지를 통해 15년 전 벌어졌던 끔찍한 사건의 진실을 고백하는 과정을 그린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세 편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사건들, 즉 자신이 짝사랑해온 남자를 독점하는 친구에 대해 악의를 품게 되는 친구, 물놀이 중 위험해 처한 제자와 남편 중 누구를 구해야 하냐는 선택의 기로에 선 여선생, 15년 전 아직 철들기 전인 중학생 시절 화재 사고 속에 숨겨진 살인과 그것을 감추기 위한 의도적인 거짓말 등 어쩌면 끔찍한 사건일 수 도 있을 것이다. 특히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와 답장들을 통해 한 꺼풀 씩 벗겨지는 진실의 실체들에 조금씩 접근해 가는 과정이 꽤나 긴장감 있고 스릴 있어 절로 책에 몰입하게 만든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미나토 가나에” 소설들과 비슷한 그런 구성 - <고백>에서도 여러 등장인물들의 일기나 고백들을 통해서 진실에 접근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 을 보여주고 있어 각 편 말미에는 뭔가 충격적인 반전과 복수로 결말을 맺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그런데 작가는 분명 그런 자극적인 결말 대신 “용서”와 “화해”, 그것도 위선적이고 부조리한 그런 “거짓”이 아니라 “진실”된 용서와 화해, 배려의 결말이라는 “의외성”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기에 각 단편을 읽고 나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어떤 “훈훈한” 감동마저 느껴지게 만들고, 다 읽고 나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이 책이 과연 내가 알고 있는 <고백>의 작가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인가 싶어 다시 한번 책 표지에 있는 작가의 이름을 다시금 확인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 내면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점에서는 “미나토 가나에” 글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간의 그녀 작품들과 전혀 다른 경향의 결말에 그만 그녀의 이름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 이름과 <고백>이라는 중압감과 그늘 - 작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도 작품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고백>과 비교하게 되는 것이 꽤나 부담이 된다 - 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었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운 그런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재미가 없고, 밋밋하고 싱거운 느낌까지 드는 결말에 실망스러운 분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존의 “미나토 가나에” 식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재미와 감동을 맛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어쩌면 이 책이 그녀가 앓고 있었을 “소포머 징크스”를 스스로 잘 이겨내고 있다고 우리들에게 털어 놓는 “고백”과도 같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야구(野球)로 비유하자면 한가운데 빠른 직구만을 구사하던 2년차 투수가 이제 느린 커브와 변화구를 구사할 줄 알게 되면서 완급을 조절하고 보다 다채로운 투구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면 너무 과장된 해석일까? 그렇기에 “미나토 가나에”는 이미 정점을 찍어 갈수록 뒷걸음치는 그런 작가가 아니라, 또 다른 “완성”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녀의 바람대로 <고백>이후 오년 후인 2013년에는 <고백>을 능가하는 멋진 대표작을 선보여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