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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헤븐
장정욱 지음 / 책나무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타임머신(Time Machine)”을 소재로 한 SF 소설 감상글에서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시간으로 가보고 싶냐는 질문에 내가 읽은 책에서 작가는 우리 삶에서 가장 불행했던 순간이라고 답한다. 행복했던 추억보다는 회한(悔恨)이 더 인상 깊고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며 혹시라도 타임머신을 통해 그런 과거를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읽은 우리나라 SF 소설인 “장정욱”의 <프로젝트 헤븐(책나무/2012년 4월)>은 타임머신이 아닌 가상현실세계인 <프로젝트 헤븐>을 통해서 과거로 여행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책에서도 가상 체험하게 되는 과거는 여주인공이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는 가장 불행했던 순간으로 설정한다. 다만 가상세계와 현실세계가 중첩(重疊)되는 영화 <매트릭스>를 연상시키는 세계관과 남녀 주인공의 이룰 수 없는 로맨스가 주(主) 내용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인 2027년, 경찰을 그만 두고 졸지에 백수가 되어 버린 “유찬”에게 메일이 한 통 날아온다. 바로 정부에서 시험 운영 중인 “프로젝트 헤븐”이라는 가상 체험 세계 테스터에 선정되었다는 메일이었다. 신청한 적이 없던 터라 어리둥절했지만 꼭 당첨되길 기원했지만 떨어져 버린 친구 “현서”의 부러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또는 하릴없이 빈둥대야만 하는 백수 생활에서 도피라도 하듯 “헤븐”에 접속한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테스터들은 저마다의 과거로 여행을 떠나고, 유찬 또한 어디론가의 시간대로 들어가는 데 이런 웬걸 자신의 과거가 아닌 테스터 중 한 명의 과거로 들어가 버린 것이 아닌가. 그 테스터는 헤븐의 개발 책임자의 조카였던 “이연”의 과거였다. 어린 시절 사고로 다리를 다쳐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던 그녀였던 지라 삼촌이 그런 조카를 위해 가상 세계에서나마 두발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행복을 주기 위해 그녀를 테스터로 임명한 것이다. 찬과 연이 마주한 과거는 이연이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즉 어머니가 연을 버리고 떠났던 7살 시절의 과거였다. 아픈 과거를 공유하게 된 탓일까? 연과 찬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결국 가상현실이 아닌 실제 현실에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런데 설레는 마음에 약속장소에 나간 둘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서로를 기다렸음에도 만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수 시간이 지났음에도 만나지 못한 둘은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게 되지만 그리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연의 과거로의 여행을 계속하게 된다. 한편 찬의 친구 현서는 “헤븐”을 해킹하는 과정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지만 헤븐의 해킹을 감시하던 “당국”에 의해 그의 사무실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고, 현서 또한 사라져 버린다. 이상한 것은 현서의 실종을 친구에게 알리지만 친구는 현서 존재 자체를 모르는 듯 현서가 누구냐고 되묻는 것이다.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현서가 남긴 글이 인터넷에 확산되어 버리면서 비로소 엄청난 진실이 밝혀지고, 세상은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 과연 “프로젝트 헤븐”과 현서가 알아냈다는 또 하나의 가상현실 “노어(NOR)"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찬과 연의 로맨스는 어떻게 결말이 날까? 여기서 더 소개하자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만큼으로 줄이자.
책은 이처럼 가까운 미래에 가상현실 세계인 “프로젝트 헤븐“ 테스터에 참여하게 된 남자 주인공 “찬”이 뜻하지 않게 여주인공 “연”의 과거 여행에 참여하게 되고, 아픈 사연을 공유하면서 사랑이 싹트는 이야기로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단순히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쯤이겠거니 했던 이야기가 “프로젝트 헤븐”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면서 일대 급진전하여 가상과 현실이 “헤븐”이라는 세계에서 중첩하게 되는 이야기로 발전하고 남녀 주인공의 사랑도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애절한 로맨스로 막을 내린다. 이처럼 가상과 현실 세계라는 이중적인 세계의 접합은 앞서 말한 대로 영화 <매트릭스>와 여러 SF 소설의 단골 소재인지라 익숙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작가는 “에피메니데스 역설(Epimenides’ Paradox)” - “거짓말쟁이의 역설(Liar’s Paradox)” 이라고도 하며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을 말한다"는 명제로 참과 거짓이 무한 반복하게 되는 역설로 유명하다 - 을 연상시키는 ”A와 B, 모두 거짓일 때 비로소 참이 된다”는 역설로 가상세계와 현실세계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참 특이하고 참신하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여주인공 연의 사연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가 사실은 우리의 기억으로 창조해낸 거짓된 과거일 수 있다는 의미 전달도 꽤나 색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200 페이지 밖에 되지 않은 단편 소설에 불과한 짧은 분량에 거대한 세계관을 담다 보니 가상세계인 “프로젝트 헤븐”과 “노어”의 구축 목적이나 배경이나 한정된 등장인물 등 많은 이야기들이 생략될 수 밖에 없어 좀 더 긴 호흡으로 장편의 이야기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야기를 너무 축약해서 담아낸 것 같아 아쉬움은 남지만 참신하고 독특한 이야기임에는 분명한 재미있는 SF 소설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반전은 어쩌면 이 책 자체가 아니라 이제 고등학교 3학년(1994년 생)에 불과한 “작가” 그 자체 - 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했다고 한다 -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어린” 친구가 쓴 작품 - 작가는 기분 나쁠 수 도 있겠지만 그 나이에 이런 성취를 보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은 중년 남성의 부러움 쯤으로 받아들여주기 바란다 ^^ - 이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었는데, 다 읽고 나서 작가의 이력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후에 멍한 충격마저 느껴졌다. 몇 몇 청소년 작가들 작품 - 솔직히 감탄보다는 유치함을 더 많이 느꼈었다 - 읽어봤지만 그들 작품 중 가장 발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작가라고 평가하고 싶다. 사실 작품 자체로만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살짝 부족해서 별점을 박하게 줄까 하다가 작가의 이력을 알게 되고는 놀라움과 감탄에 만점을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별점 하나는 앞으로 펼쳐 보일 작가의 미래 작품들을 위해 아껴둬야 할 것 같다. 앞으로도 멋진 작품들을 선보여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