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1 줄리애나 배곳 디스토피아 3부작
줄리애나 배곳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2012년 1월 25일부터 29일까지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렸던 “세계경제포럼(WEF, 다포스 포럼)” 관련 기사를 읽다가 낯익은 단어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이 포럼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된 5개 키워드 중 하나였다는 “디스토피아(Dystophia)"란 단어였다. 현실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묘사하는 유토피아(Utopia)와는 반대로,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작품 및 사상(네이버 발췌)을 가리킨다는 이 단어가 세계 지도자들이 모이는 이 포럼의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 사회의 위험과 모순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즈음 들어 종말론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미래를 그리고 있는 SF 소설이나 영화들도 하나같이 어둡고 암울한 미래 일색인 것이. 이번에 읽은 ”줄리애나 배곳“의 판타지 소설 <퓨어 1,2(원제 Pure/민음사/2012년 4월)>도 이처럼 어둡고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고 있다.

 

시대를 알 수 없는 어느 미래, 원인을 알 수 없는 대폭발이 일어난다.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후 하늘은 겹겹이 싸인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고 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내려 검은 물웅덩이가 곳곳에 생겨났으며 공기는 재와 먼지로 탁해진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온전히 가지고 있지 않은 기형(奇形)이 되어 버린다. 강력한 열기와 방사능에 의해 가까이에 있었던 각종 사물들과 짐승들, 심지어 자신의 동생이나 자녀들과 신체체가 융합(融合)해 버렸기 때문이다. 비단 사람들 뿐만 아니라 동식물들도 오염된 물과 음식, 공기 때문에 유전자 변형을 일으키게 된다. 생존자들은 이런 끔찍한 환경을 견디며 절망 뿐인 삶을 이어간다. 한편 이런 환경과 완벽하게 차단된 “돔(Doom)"에서 온전한 신체를 가졌기에 ”퓨어(Pure)"라 불리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대폭발 후 절망하는 외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온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여러분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언젠가 우리는 ‘돔’에서 나와 여러분과 평화롭게 공존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멀리서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이런 메시지를 담은 쪽지는 외부 생존자들에게 처음에는 화폐처럼 귀한 대접을 받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후로 오랫동안 삶은 그렇게 흘러갔다.

 

돔의 “바깥”세상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아가던 소녀 “프레시아”는 16세 생일을 얼마 앞두고 혁명군의 강제 징집을 피해 자신의 집의 낡은 캐비닛에서 숨어 살고 있다. 프레시아는 대폭발 당시 들고 있던 인형의 머리가 손에 융합되면서 인형 손이 되어 버렸다. 그 인형 손이 싫어 칼로 잘라 내려다가 결국 손에 상처만을 입고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의 손을 조심스레 꿰매준다.

 

돔의 “안쪽” 세계에 살고 있는, 돔의 실력자의 아들인 18세 소년 “패트리지”는 일정 나이가 되면 시술받게 되는 “코딩”에 거부 반응이 생겨 아버지가 근무하는 의료센터에서 각종검사를 받다가 사무실 벽면에 걸려 있는 돔 설계도 원본을 보게 되고 설계도를 배경으로 아버지와 사진을 찍게 된다. 그는 세계사 현장 수업날 방문하게 된 “유물 보관소”에서 대폭발 후 돔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가신 걸로 알려진 어머니의 유품을 살펴 보다가 어머니가 자신에게 남긴 생일 카드에서 메시지를 발견하고는 어머니께서 “바깥” 세상에서 살아 계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아버지 사무실에서 찍은 설계도 사진을 꼼꼼히 살펴본 그는 결국 환풍기를 통해 돔을 탈출해 “바깥”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혁명군의 눈을 피해 숨어 살던 프레시아는 자신이 살던 옛집을 찾아 거리를 방황하던 패트리지를 만나게 되고 그를 돕기 위해 비밀 모임에서 만났던 소년인 “브레드웰에게 데려간다. 패트리지의 옛 집이 위치했던 거리를 찾아 나선 세 명은 그 곳에서 패트리지 어머니의 존재를 알고 있던 할머니를 만나게 되지만 알 수 없는 소리만 들은 채 인간 사냥꾼들의 추적을 피해 다른 건물 지하로 숨게 된다. 얼마 후 소란이 잠잠해지자 바깥 동정을 살피고 할머니를 다시 만나러 밖으로 나온 프레시아는 그만 근처를 수색하던 혁명군에 의해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가게 된다. 프레시아가 자신 때문에 잡혀갔다고 자책하는 패트리지와 프레시아 할아버지 부탁 때문에 그녀를 돕는다는 브래드웰, 이 두사람은 프레시아와 패트리지의 어머니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과연 인류를 멸종 위기까지 몰고 온 대폭발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패트리지에게 남긴 어머니의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는 어떤 의미일까?

 

1, 2권 700 여 페이지에 이르는 만만치 않은 분량의 이 책, 읽기가 꽤나 어려웠던 책이었음을 먼저 밝혀둬야겠다. 대폭발 이후 비참하고 끔찍한 상황들을 너무 사실적이고 세세하게 묘사해서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형, 새, 자동차 모터, 콘크리트, 인형, 총, 칼 등 각종 사물과 융합된 사람들, 자신의 동생과 몸이 융합된 형, 자신의 아이와 융합된 어머니, 괴물로 변해 버린 사람들 등 “바깥”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끔찍한 모습 일색으로 변형되어 버리고, 그들은 오염된 땅과 물, 공기를 마시며 하루하루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책이 "YA(Young-Adult)" 판타지 소설이라고 들었는데 청소년들이 보기에는 너무 어둡고 끔찍한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암울한 미래 분위기 때문인지 작가에게 <로드(The Road)>의 작가인 “코맥 매카시에 비견될 작가”라는 평가가 붙는다고 하는데, <로드>가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간접적인 배경 묘사로 자연스럽게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면 이 책은 너무 사실적이고 세세한 직접적인 묘사로 연출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물론 문학적인 성취는 논외로 하고 말이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꽤나 탄탄하고 스릴과 재미, 모두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는 끔찍한 묘사들이 거북스럽기까지 했지만 남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패트리지”가 돔을 탈출하여 “바깥”의 소녀 “프레시아”를 만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자 어느새 그런 거북스러움도 익숙해져 버리고, 이야기도 슬슬 재미있어지면서 읽는 속도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다. 특히 어떤 이유로 혁명군에 끌려갔던 프레시아가 패트리지 일행과 합류해서 계속되는 위험을 헤쳐 나가며 패트리지 어머니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고,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와 재회하고 마침내 모든 음모와 비밀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휘몰아치듯 긴급하게 전개되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책에서 눈을 쉽게 떼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이야기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돔을 향한 반란이라는 희망이라는 상반된 두가지 결말, 모두를 내포한 채 막을 내린다. 그래서 3부작 시리즈의 후속편들에서는 그런 희망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것이라는 기대를 절로 하게 만드는 그런 결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책장을 덮고 나서도 이 책의 어둡고 잔혹한 이미지가 쉽게 가시지가 않는다. 이처럼 이 책, “이야기” 자체보다도 이런 어둡고 끔찍한 이미지가 훨씬 여운이 남는 그런 소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올해 들어 읽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의 SF, 판타지 소설들 중에서 이야기의 호불호를 떠나서 이런 이미지만큼은 가장 강렬하고 인상 깊었던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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