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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시대의 신인류 호모 나랜스
한혜원 지음 / 살림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부터 혼자만의 공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을 좋아했다.
액션 영화를 보고 나면 어느새 내가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악당을 쳐부수는 상상과 함께 주인공의 액션 장면을 흉내 내고, 어릴 적 사모하는 연예인과의 슬픈 사랑의 스토리를 머리 속에 그려보기도 하고, 음모론, 종말론에 푹 빠져 세상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들에 대하여 혼자 상상해 보고 마치 비밀인양 친구들에게 들려주기도 했었다. 내가 좀 유별났었는지 아침 통학 버스 안에서 엉뚱한 상상을 하다가 학교 앞 정류장을 지나쳐버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선생님 수업이 좀 지루하다 싶으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엉뚱한 상상에 혼나기도 여러 번이었고, 잠자리에 누워도 머리 속을 맴도는 수많은 이야기에 취해 잠자는 시간을 훌쩍 넘겨 늦잠을 잔 적도 참 많았었다.초기 인터넷 소설이었던 “퇴마록”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나도 써보겠다는 마음에 대학노트 3권 분량으로 소설을 위한 각종 자료와 설정집, 시놉시스, 습작들을 썼었지만 여러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모두 잃어버렸고, 바쁘고 힘든 일상에 점점 지쳐가면서 작가가 되겠다는 꿈과 용기도 이제는 흐지부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습성은 오직 나만의 특수한 경험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봤을 그런 경험이었을 것이다. 한혜원의 “디지털시대의 신인류 호모나랜스 (살림출판사, 2010년 3월)”는 모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야기 본능, 즉 라틴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나랜스(Homo Narrans)"적인 인류의 특성이 오늘날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얼마나 중요한 가치가 있는 지 그리고 각종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작가는 시작하는 글에서 인류 앞에 펼쳐진 새로운 천년의 장을 준비하기에는 지난 세기의 철학과 이론만으로는 부족하고 아쉽다고 전제하고 현재에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에너지를 제공하는 과거의 스토리(Story)와 미래의 텔링(Telling)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되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과제에 대한 해답이 미래의 오브제들의 구심점이자 원동력이 되어야 하며, 이것이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에 대해 논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1부 인간, 이야기하다”에서는 인류의 이야기하는 본능이 어떻게 진화되고 발전해 나가는 지를 소설, 게임, 만화, 영화, 광고 등 다양한 콘텐츠들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미국, 유럽, 일본 등 각 국에서 어떻게 스토리 텔링 기반을 발전시켜왔는지를 소개하고 있으며, “2부 미디어, 이야기에 날개를 달다”에서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디지털 신기기와 네트워크 서비스들, 즉 팬픽, 온라인게임(MMOPRPG), 하이퍼텍스트픽션, 멀티엔딩 사이버드라마, 대체현실게임(ARG) 등을 통해서 어떻게 이야기가 구현되고 소비되고 있는 지를 소개하고 있다. 각 페이지마다 한쪽 면을 할애해서 각종 사진들과 함께 “드라큘라”,“늑대인간” 등 과거의 신화와 전설이 어떻게 미디어에 장착되고 구현되는지 그리고 그 경제적 사회적 파급효과가 얼마나 큰 지를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는 “Story Tips", "Case Study"들은 이 부분만을 별도로 떼어 읽어도 좋을 만큼 재미있다. 이 책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대표적인 스토리인 "반지의 제왕"은 유럽의 고대 전승을 소재로 J.R.R. 톨킨이 구체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냈고, 이 소설이 판타지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화시켜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수많은 소설들을 탄생시키고, 영화, 게임 등 멀티플랫폼으로 이식되면서 엄청난 경제효과까지 파급해나가는 과정을 인상깊게 소개하고 있다. 또한 “반지의 제왕”과 “매트릭스”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영웅의 오딧세이(Hero's Odyssey)" 12단계는 비록 단계(순서)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만화나 소설들 속의 영웅이야기들의 범주를 아우를 수 있는 기막힌 예시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스토리텔링 붐에 있어 우리나라는 과연 어떤 위치에 있을까?
우리나라는 20세기 들어 일제 식민지, 민족상잔의 분쟁, 민주화 열망과 같은 치열하고 퍽퍽한 현실을 리얼리즘에 반영해야 하는 과제 의식 때문에 공포, SF, 추리, 판타지 등 모든 장르 분야에서 일본의 망가나 미국 코믹스에 비견할 만한 펄프 픽션이 없을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축적해온 우리의 구비문학 전통은 과정추론적, 참여적, 비선형적, 백과사전적인 디지털 기술과 궁합이 더 잘 맞으며, 구비문학은 디지털 콘텐츠와의 호환가능성이 용이하여 우리고 결코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한반도에 국한된 고증보다는 중국의 역사소설 “삼국지연의”를 게임으로 발전시킨 일본의 “KOEI"처럼 동아시아 전반을 아우르는 상상력을 발현하는 것이 중요하면, 다양한 동아시아의 설화들을 디지털 자산으로 개발하는 한편, 한반도내에 잠재되어 있는 다양하고 특수한 설화들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작가는 맺음말에서 누구나 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에 발맞추어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즐기면서 그 균형을 이룬다고 이야기하면서, 과학기술이 그릇에 해당한다면 그릇을 채우는 내용물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라고 이야기한다.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집단 무의식 속에 잠재된 온갖 욕망과 금기들에 허구라는 안전장치를 장착해 예술이라는 수면 위로 승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따라서 그 중요성은 더욱 커져나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예전 KBS1에서 방영했던 <스토리텔링클럽 이야기발전소>에서 그저 한낮 전설이나 공상으로 치부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새롭게 각색하여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생산하는 것을 보면서 이야기라는 것이 가지는 재미와 가치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는데, 이 책이 인류의 오랜 전승들이 어떻게 이야기로 꾸며지고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지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닌텐도가 세계적인 게임기가 되었던 것은 게임기의 성능이나 기술이 다른 경쟁제품에 비해 탁월한 것이 아니라 신화, 전설 등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퍼즐, 판타지, 액션 등의 다양한 장르로 확대 재생산되어 공급되는 다양한 게임 프로그램, 즉 콘텐츠가 우수하기 때문이며 그 콘텐츠를 만드는 힘이 바로 “이야기”에 있다는 점은 게임기만 잘 만들면 금새 게임 강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몰지각한 정책 입안자들이 꼭 명심해야 할 그런 사항일 것이다. 한 때 아시아권을 강타했던 한류 열풍이 헐리우드 식 볼거리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과 정서가 새롭게 잘 각색하고 포장된다면, 즉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다면 세계인의 정서에도 부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볼 때 “이야기”의 힘과 중요성을 백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 하다.